전傳 강희안姜希顔,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15세기 중엽, 22.2×2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리를 건널 적, 두려움에 떠는 동자를 선비가 이끌어가면서 안정시키는 모습이다.
다리는 진리로 향하는 외길로, 선비는 통유通儒를 상징하는 듯하다.
묘향산妙香山
평안북도 구장군球場郡 · 향산군香山郡과 자강도 희천시熙川市, 평안남도 영원군零遠郡 · 덕천군德川郡과의
경계에 있는 해발고도 1,909미터의 산으로, 묘향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한국 4대 명산의 하나로 꼽는다.
일명 태백산太白山, 太佰산 또는 향산이라고 한다. 향목 · 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 이전부터 묘향산으로 지칭되어 왔다.
조호익曺好益, 「묘향산 유람록遊妙香山錄」
우백천牛白遷,(소시리 벼랑) 골짝 어구로 들어서서
첫 번째 다리, 두 번째 다리를 건너자
비취빛 협곡이 활짝 열리고 푸른 물이 그 가운데서 흘러나온다.
길을 끼고 양옆에는 녹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리고 있어,
숲 사이에서 물소리가 찰랑찰랑 울리는 것이 들릴 뿐이다.
세 번째 다리, 네 번째 다리에 이르자, 골짝 안이 그윽하고 고요하다.
길이 막혔다가는 다시 트이고, 수목이 빽빽하였다가 다시 성글어지고는 한다.
곁에는 옥 병풍(벼랑)이 늘어서 있고 앞에는 옥 죽순(산봉우리)이 뽑혀 나있다.
벼랑에 부딪힌 계곡물이 돌아나가 바위에 닿아서는 구름이 일어난다.
가다가 쉬다가 하면서, 냇물에 임하여 멈추었다. 맑은 모래와 푸른 이끼가 깔렸고, 위수渭水처럼 깨끗해서
시커먼 색이 없다. 앞으로 더 가서 여섯 번째 다리를 건넜다. 서성이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날카로운 칼과
기다란 창이 삼엄하게 꽂혀 마주선 듯하고, 난鸞새의 참마驂馬와 학의 수레가 나는 걸음으로
내닫기도 하고 비실비실 걸음을 떼기도 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보호 하듯 형세를 이루어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붉은 노을과 푸른 덩굴은 휘황하게 이루어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붉은 노을과 푸른 덩굴은 휘황하게 서로 비치고, 울리는 시냇물과 내달리는 강물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쫓기듯 내려가서,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쫑긋해지도록 하여 정신과 모골이 삽상하다.
더 가서 한 절에 이르니, 곧 보현사다. 백족白足(승려)이 서넛 있는데, 외모가 맑고 수척하다.
미천彌天(하늘까지 닿음)의 승려와 사해四海(천하)의 인물이 만나듯, 읍례하면서 맞으며 웃는다.
법뇌각으로 인도하기에 그곳으로 가서 앉았더니, 넓고 우람하고 크고 상쾌하다.
앞에는 삐죽삐죽한 산들이 읍례하고 있는데, 세 봉우리가 특히 기이하고 빼어나다.
승려가 그 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저건 탐밀探密이고 저건 굉각宏覺이고 저건 탁기卓旗입니다.
옛날 서역의 두 승려가 천하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여기서 참된
구역을 얻어 깃발을 세워 표시했답니다. 그래서 이 세 이름이 있게 되었죠."
이 말은 증거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를 살펴보면 외국 행각승에게 준 시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다른 나라에서 와서 거처한 승려가 어찌 없었다고 하겠는가? 완전히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
정원에 안왕雁王(부처, 수족의 가락가락이 기러기처럼 교차하는 형상)을 세워두었는데,
금탁(동탁) 소리가 십 리나 멀리 퍼진다. 승려를 다그쳐 누가 경영한 것이냐고 물으니,
그 복서伏犀(이마가 튀어나온 상)의 상을 한 귀인이 누구였는지 가물가물하다고 한다.
관음전에 이르러 배회하면서 눈요기를 하였다. 서리 같은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 나와 늠름하게
하늘을 향하는 듯한 것이 검봉劍峰이라고 한다. 햇볕이 쬐자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구름이 물씬 일어나서
둥둥 떠 있는 듯한 것은 중봉이다. 이 산들은 모두 모양을 두고 이름을 붙였다.
잠깐 사이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작은 누헌이 조금 서늘하기에 한가로이 산보하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우뚝 선 기분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늘의 소리도 땅의 소리도 인간의 소리도
모두 적막하고, 다만 자규子規(두견새)의 꾹꾹 우는 소리만 들려, 그 소리가 맑고도 원망 섞인 듯하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 새는 보위寶位(군주의 지위)를 헌 신 벗듯 벗어던지고 봄 나무에 자취를 깃들이고는,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이 마음을 천 년 동안 하루같이 지녔으니,
맹자가 말한 이른바 명성을 좋아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여인李汝寅이 말하였다.
"무슨 그런 틀린 말씀을 하십니까?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무리는 탐욕이 한없어서
심지어 군주를 시해하고 자리를 도둑질한 자들이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서 자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말에 가탁해서, 나라를 버리게 된 참뜻을 보여준 것일 따름입니다."
그 말을 듣더니 송인숙宋仁叔이 탄식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부모 슬하를 멀리 떠나 관서 바깥을 낭유浪遊(목적 없이 노닒)하고 있소.
오늘 저 자규가 우는 것은 멀리 노니는 나그네가 된 우리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소?"
이 글은 선조 때 사림파 문인 조호익(1545~1609)의 「묘향산 유람록 遊妙香山錄」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그는 퇴계의 문인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지산芝算이다. 1575년(선조 8)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하고 한정閑丁 50명을 뽑아 액수를 채우라고 하자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그러자 최황은 토호라고 상주上奏하여 조호익은 그 이듬해 송양松壤, 즉 강동에 유배되었다.
귀양 살던 1585년(선조 18) 음력 4월 18일(기미)부터 5월 4일(갑술)까지 16일간 묘향산에 다녀왔다.
강동 사람 이여인과 그의 아우 여경汝敬을 안내자로 삼고 산승 혜림慧琳을 대동하였는데,
중간에 이종 형제로 영유현감의 반자半刺(보좌관)로 부임하는 송인숙이 합류하였다.
조호익은 묘향산의 뿌리가 수백 리에 걸쳐 있고, "멀리서 보면 하늘 한쪽에 검은 벽을 세운 듯하다"
라고 하였다. 묘향산에서도 희천 비로봉이 있는 곳을 구향산, 보현사가 있는 쪽을 신향산이라 부르는데, 각각
외향산과 내향산이라고도 한다. 신향산(내향산)의 풍치가 더 뛰어나다고 한다.
묘향산의 산세는 두류산(지리산) 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풍악(금강산)보다 빼어나지 못하다.
하지만 고승 서산대사 휴정은 이 산이 두류산의 웅장함과 금강산의 수려함을 함께 지녀 장대하면서도
수려하다고 평 하였다. 그런데 단군이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정기가 모여 있기
때문에 형승의 관점에서만 이 산을 다른 산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윗글에서, 탐밀探密 등 세 봉우리의 명명에 대한 것은 고증적 취미라 할 것이요,
자규새 울음소리에 대한 해석은 애상적 정서를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은 일제강점기 이왕가 장서각본 《와유록》에 실려 있되,
곁가지 이야기가 많다는 이유로 대강만 초록되었다.
또한 동행과의 대화 부분은 아예 없는데, 이는 해서는 안 될 '절록'을 한 것이다.
보현사 승려는 탐밀과 굉각을 서역 승려로 보았으나 실은 두 사람 모두 고려의 승려이다.
탐밀은 황주 용흥군 사람으로 25세에 출가하여 철저한 계행을 닦아 화엄교관을 전수하였고,
1028년(현종 19) 연주산延州山에서 절을 창건하고 주석하였다.
굉각은 굉확宏廓이다. 그는 탐밀의 조카이며 1038년(정종 4)에 탐밀의 제자가 되었다.
묘향산 보현사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지원을 받은 허응虛應대사 보우普雨는
보현사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는 총림이라고 하였다. 그 후로도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다가
서산대사가 주석하면서 우리나라 제일의 명찰이 되었다. 서산은 곧 묘향산을 가리킨다.
임란 때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중심으로 의승을 모아 평양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활약으로 '팔도선교도총섭' 승직을 제수 받았으나 제자인 유정에게 승직을 물려주고
묘향산에 돌아와 입적하였다.
사명당의 표충사
한편 조호익은 묘향산의 신령한 기운이 단군을 낳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 대臺에 오르니 세 면이 뚝 끊어졌고, 쇠 벽이 일만 길이나 된다.
봉우리들이 한 곳으로 모여 둘러서서 읍례하기를 마치 공경하는 마음을 품은 듯이 하고 있다.
산의 빼어난 기운이 실로 여기에 모여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나는 배회하고 부양하면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곳은 정말 이인異人을 낳을 만하구나!"
곁에 있는 사람이 말하였다.
"산이 기이하고 빼어나기는 하오만 어찌 스스로 사람을 낳을 리 있겠습니까?
니구尼丘는 추나라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성인(공자)을 태어나게 하였고, 아미峨眉는 소씨를 통해서
삼부자 (소순蘇洵 · 소식蘇軾 · 소철蘇轍)를 낳게 했소. 하지만 이 또한 신백申伯과 여백呂伯이
사악四嶽의 신령으로부터 탄강한 것처럼 정기가 사람에게 모여 태어난 것인데,
전하는 사람들이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견강부회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소?"
나는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만일 지금이라도 기린이 잉태하여 새끼를 낳을 수 있다면 기린이 있을 수 있고,
봉황이 지금이라도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를 수 있다면 봉황이 있을 수 있어요. 하물며 원초의 질박하고
순실한 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삼광三光(해 · 달 · 별)과 오악五嶽의 기가 온전해서, 그 굴곡진
형기와 아름다운 기운이 모여 저절로 기이한 품물을 낳기에 충분한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소?
그러니 산이 이분을 낳았다 해서 무어 괴이하단 말이오?"
16일 동안의 산행을 마치고 귀양지의 셋집으로 돌아왔을 때, 조호익은 마치 저 서역의 구차와
동해 바깥의 삼신산에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묘향산과 정신적으로 교유한 지 오래되어
마음으로 서로 융회하므로 산이 자신과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정신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작고 누추한 집으로 돌아와서 덩그마니 홀로 생각에 잠기매, 배갯머리 하나에서 구자龜玆(구차)의 나라와
삼신산과 십주에 가 있는 듯하였다. 무릇 위모魏牟(전국시대 위나라 공자, 중산에 봉해짐)는
몸이 강호에 있되 생각은 위나라 궁궐에 있었고,
강락康樂(동진의 이인 사영운)은 자취가 산림에 있으나 마음은 속세에 있었으므로,
물은 물에 부치고 산은 산에 부쳤으니, 산과 물이 자기 자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세상에는 진실로 유신庾信의 동산에 거처하여도 도성의 시끄러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며,
안자晏子의 동산에 거처하여도 자연의 그윽함을 누리는 자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에 있지, 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산에 대해서는 정신으로 교유한 지 오래되었다.
오늘 돌아와 가만히 서로 부합하고 마음으로 융회하니, 산이 나와 언제 잠시라도 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누우면 우람하게 나를 굽어보고, 서면 바로 준엄하게 곁에 있어서,
기거하고 생활하는 어느 한수간도 산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책상과 자리맡이 바로 천암만학千巖萬壑이기에,
내가 산에 있는 것인지 산이 내게 있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이번 유람의 기록은 특별히 노닐던 바를 기록하였으므로, 산은 달리 기록할 필요가 없다.
조호익은 비록 유배온 처지이지만 그러한 정신적 여유를 누리겠다고 하였는데,
그지향은 바로 묘향산을 등람한 후에 확고해졌다. 옛사람 말에 전벽錢癖이 있고 마벽馬癖이 있으며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 전벽은 돈 밝힘증이니 예나 지금이나 이런 증세에 걸린 사람이 많다.
마벽은 좋은 말을 밝히는 병이니 오늘날로 말하면 외제 차 밝힘증이다.
좌전벽은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하도 좋아해서 당시의 군주(진나라 무제)에게
자신에게는 좌전벽이 있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지나친 지식욕을 상징한다.
그런데 조호익은 묘향산에 다녀온 후 연하벽煙霞癖에 걸리고 말았다.
연하는 산수 자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노을을 혹애하는 증상을 말한다.
곧, 산수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다소 인간 혐오증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묘향산에서 돌아온 지 20여 일 후 조호익은 김숙후金淑厚란 사람에게서
향풍산香楓山이 명산이라는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곧바로 산에 오른 후 돌아와
「향풍산유람록遊香楓錄」을 지었다.
그 글에서 그는 "산수를 즐긴다는 것은 곧 환난에 대처하는 유력한 방법" 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가 연하벽을 앓게 된 것은
환난에 걸려 있어 울적한 마음을 털어버리려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조호익은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의 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금오랑에 특별 임명되자
행재소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으며 소모관으로서 군민을 규합해서 중화 · 상원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 · 절충장군에 승진하고, 1593년 평양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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