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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천마산>

 

강세황姜世晃,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박연朴淵>, 17857년경,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표암이 45세 되던 1757년 7월에 개성을 여행하면서 그린 16첩의 기행첩 중 12면에 들어 있는 그림으로,

<영통동구> 그림이 제일 유명하지만 박연의 폭포를 그린 이 그림도 비동飛動하는 폭포를 그려두어

묘한 조화와 대비를 이루어 냈다.

 

 

 

천마산天摩山

 

개성시에 있는 해발고도 762미터의 산으로 최고봉은 만경대萬鏡臺이며 청량봉淸凉峰 · 성거산聖居山 등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의 모습에서 이름이 비로되었다. 도한 대흥산성大興山城이라는 고려 성이 있고,

북쪽 산기슭에서 30미터의 장폭으로 떨어지는 박연폭포는 송도삼정松都三絶의 하나이다. 그 밖에 구담龜潭

 용담龍潭 등의 호수와 관음사 · 개성사 · 대흥사 등의 고찰이 있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쪽 성곽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대흥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성 관음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 입구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관음사사적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의 관음굴과 굴 안에 보존돼 있는 관음보살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보봉산 기슭에 있는 화장사터에 남아 있는 나한전과 서역 승려 지공指空의 승탑

 

 

 

 

 

조찬한趙纘韓 「천마산 성거산 유람기遊天摩聖居山記

 

 

다음날 지족암의 동쪽을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험준한 곳을 지나 깊은 곳을 통과하여

어렵사리 길을 찾아 반나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였다. 숲이 성글다가는 다시 빽빽해져서

위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이 15리나되다가, 가까스로 현화사에 이르렀다.

절은 왜적들에게 불타 없어지고 남은 기반은 잡초에 묻혀 있다.

한 늙은 승려가 새로 불당을 하나 세우고 있는데, 다 끝내지 못해 아직도 공사를 하고 있다.

이전의 터에 다시 세우고 있으니, 그 노승은 정말 아무 계획이 없다고 하겠다.

밖에 돌 거북이 비를 짊어지고 엎드려 있다. 지난 고려 때 학사 주저周佇가 지은 글이다.

뜰에는 돌탑이 깨진 채로 있다. 본래 화주(化主, 시주인) 수견壽堅이 세운 것이다.

 

현화사를 거쳐 동쪽으로 5리를 가니 바위산이 한껏 솟구쳐 하늘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지고 달리는 짐승도 빠질 정도다. 아주 험준하다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흴 만큼

오싹하였으나, 무턱대고 앞쪽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개미나 자벌레처럼 붙어가노라니,

땀은 솟아나고 눈은 아찔하다. 열 걸음 가다가 아홉 번씩 자빠지고는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절정에 올랐다.

 

꼭대기에서 곧장 내려가자 화장사化藏寺로 통한다.

절은 서역 승려 지공指空이 세운 것이다. 병화를 겪고도 홀로 의연하게 남아 있으니 영험하고 장하다

할 것이다. 법전은 널찍하고 혁혁하며 우람하고 굉장한데다가, 붉은 빛깔의 칠이 곱고 아름답다.

그런데 엄숙하기가 상계(천상계)와 같고, 근엄하기가 귀계鬼界와 같아,

오싹해서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동쪽으로는 선왕(태조)의 화상을 모셔둔 전각이 있고, 전각의 동쪽에 또 나한전이 있다.

서쪽에는 승당이 있어, 너비가 100여 칸이다. 승당에는 지공법사의 상이 있고, 또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가 중첩하여 배열되어 있다. 범종을 매단 누각이 하나 높고 상쾌하게 우뚝 솟구쳐 있다.

올라가 사방을 멀리 바라보아, 시력이 미치는 데까지 구경하였다. 누각을 통해서 내려가니,

홰나무 정원이 드넓게 뻗어 있어서 눈으로 마음껏 구경할수록 더욱 드넓게 여겨진다.

 

미처 다 둘러보지 않은 참에, 한 승려가 무릎을 꿇고 함 나라를 바친다.

열어보니 패엽 불경과 품질좋은 전단향이다. 모두 서역에서 난 것인데, 지공이 손수 갖고 와서

여기에 둔 것이라고 한다. 정말로 기이하고도 현묘하다.

화장사에서 옛길을 따라서 다시 현화사로 와서 묵었다.

 

다음 말 현화사로부터 5리즘 되는 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길을 무릎쓰고 갔다.

미틀비틀 주춤주춤 가자니 숨이 막히고 눈이 아찔한 것이 화장사 석령石嶺보다 심하다.

반도 못 올라가서 벌벌 떨리고 근심스러워져서, 나아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몰라 오랫동안 난감해 하였다.

그러다가 용감하게 위로 매달려서, 돌의 이빨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손톱으로 움켜쥐고는, 바위 면을

무릎으로 기어갔다. 한 치 한 자씩 조금조금 나아가면서 북쪽으로 성거산聖居算 작은 암자를 바라보았다.

암자는 천봉千峯의 반쯤 꼭대기에 있다. 구름에 쌓인 창이 조촐하고, 안개에 감싸인 집이 조용하며,

붉게 칠한 기둥과 알록달록한 초석이 바위 구멍에서 은은하게 어른거린다. 목을 빼어 한 번 바라보매,

신선 사는 별장과 흡사하다. 온종일 힘써서 가까스로 바위 벽 하나를 올라갔다. 그 이름은 차일암

遮日巖이라 한다. 멀리 하늘이 터져 있고 아스라한 산이 구름 바깥에 의지하고 있다.

머리를 들고 손을 휘저으면 북두성이라도 잡을 수 있을 정도이다. 사방천지와 온 세상을

두루 임해서 조망하지 못할 것이 없다. 대개 성거산의 기세가 여기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바위 서쪽을 따라 불과 5리쯤 내려오자, 비탈진 절벽이 100여 걸음 길이로 펼쳐져 있고, 무뚝뚝한

바위와 사나운 돌이 이리저리 물길을 갈라 물결은 통하게 한다. 그 물이 벼랑 입구에 모이되, 얕아서

콸콸 흐르지 않아, 낙엽이 무수하게 가라않고 쌓여서 물길을 막아 끊고 있다. 그래서 여러 승려들과

더불어 손으로 물길을 트고 손가락으로 치워서, 그 여울을 통하게 하였다. 그러자 물이 급히 절벽으로

쏟아져서 거꾸러지는 것이 마치 지붕에서 물동이를 쏟은 기세다. 그리고 단풍잎들은 어지러이 뒤엉켜

물결을 따르고 포말을 쫓아 흘러가서, 구슬을 꿴 듯하고 물고가 엮인 듯이 하여서, 매달린

급한 여울을 따라 차례차례 아래로 떨어진다. 그래서 함께 웃으면서 즐겼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가운데 기이한 운치(기치奇致)라고 하겠다.

 

비탈진 절벽 가를 따라서 곧장 아래로 서너 리쯤 내려가니, 아주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앞은 네모나고 뒤는 날카로워서, 모양이 마치 일만곡 들이의 배가 골짝 어구에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엄연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서 귀신이 보호하고 신령이 옹위해서 영구한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바야흐로 조물주가 베풀어 마들어내는 것이 갈수록 기이하여, 무궁무진한 속에 지극히 교묘한 기교를

간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암舟巌을 거쳐 서너 리를 나아가자, 한 노승이 10여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옷을 여미고 두건을 고쳐 쓰고 서서는, 이쪽을 기웃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다.

실로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으니 함께 되돌아온 그 사람들은 실은 산에 오르는

첫날 묵었던 운거사의 승려들이었던 것이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인 조찬한(1572~1631)이 34세 되던 1605(선조 380 9월에

송도(개성)의 천마산과 성거산을 유람하고 지은 산문이다.

 

송도는 북쪽의 송악산(숭악)을 중심으로 오공산 · 부흥산 · 용수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그 송도의 동북쪽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뻗어 나와 모두 푸른 하늘에 꽂혀 있고, 세 개의 봉우리는

마치 세 명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그중의 한 봉우리가 더욱 높으니, 그것이 바로 천마산이다.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앉아 낮은 편이라고 한다.

 

조찬한의 본관은 한양漢陽으로 허균 · 권필 · 이안눌이 친구들이다.

조찬한 일행은 운거사에서 묵고, 다음 날 박연朴淵에서 노닐었으며 관음암과 관음굴 태종대와 마담 · 기담

 · 대흥암  · 적멸암을 거쳐 지족암에서 묵었다. 그 다음 날 현화사에 이르렀다.

조찬한은 산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취趣(취향)와 흥興에 있지, 외물인 경관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 산을 유람하는 자는 이 길을 거치지 않는 이가 없고, 이 산을 구경하는 자는 이 경치를 끝까지

탐색하지 않은 이가 없되 취趣에는 많고 적음이 있고 흥興에는 얕고 깊음이 있다.

이것은 즐기는 주체가 나에게 있지 저것(경치)에 있지 않으며, 마음에 달려 있지 눈에 달려 있지

않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즐김이 어떠한가를 보고서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를

징험하면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9월 7일에 조찬한은 유람기를 작성하였는데, 그 일부가 바로 위의 내용이다.

그의 친구 권필은 이 글을 "굳세고 세차며 쉴 새 없이 샘이 뿜어 나오듯 해서 고아한 기법을

깊이 체득하였다" 하고 평한 바 있다.

 

 

 

 

박연폭포 (자료사진-통일뉴스)


 

 

 

 

박연(朴淵)에서 내려다본 박연폭포.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저 유명한 박연폭포가 30미터 높이의 장관을 이루고 있다.

폭포의 근원은 암석이 골짝에 맞닥뜨려 있고,  비스듬히 막아서서 문의 계단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가 움푹 파여 하나의 물웅덩이를 이룬 모습이 마치 주전자나 술잔같았다.

그리고 물웅덩이 속에는 반타석盤陀石이 일어나 둥실 떠있는 듯하였고, 주전자에는

입이 있어서 물이 쏟아져 나와 폭포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훗날 근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남긴 유람기에 나와 있다.

 

 

이익은 64세 되던 1744년(영조 20, 갑자) 음력 2월에 천마산을 유람하고 글을 남겼다.

그의 행로를 보면, 금천 선영 아래에서 천마산으로 달려가 마유령과 영원령의 두 고개를 걸어서 넘고,

해가 기울 무렵 북문 아래 이르러 벼랑을 따라 내려가 범사정에 이르렀으며 박연가에서 소요하고

다시 성문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을 따라 선회하여 폭포의 근원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범사정에

가서 놀다가 벼랑길로 운흥사를 찾았고, 관음사를 통해서 대흥사에 이르러 쉬었다. 그리고 용천사를

거쳐서 대장대에 올라 산 동쪽으 여러 경치를 조망하였으며 대흥사를 통해 소서문을 거쳐 만경대에

올랐다가 저녁 무렵에 대흥사로 돌아와 묵었다. 그리고 서사정을 거쳐 서경덕의 위패를 모신 화담서원

에 배알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조선시대 선비들이 천마산을 유람하는 코스였던 것 같다.

 

 

조찬한은 「천마산 유람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서, 산을 유람한 뒤로 마음과 정신이

담박하고도 평온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산놀이가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극명하게 밝힌 것이다.

 

 

 

아, 처음 산에 오르기 전에 여기에 머물렀는데,

마지막에 산에 오르고 난 후에도 다시 여기에 머무는구나. 이는 이른바 시작과 끝의 문이요

처음과 나중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어 묵묵히 기도하고, 사려를 맑게 하고 경건한 자세를

취하자, 잠깐 잠들었다 깼다 하는 사이에 흡사 산신령과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로 접하는 듯한 곳이 이 사찰이다.

이미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므로, 마음과 눈으로 경영하고 뜻과 정신으로 계획하여, 넓디넓게 산령 및 지신과

세상  안에 떠돌아 노닐고 맑디맑게 신선 및 승려와 더불어 사물 바깥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이 사찰이다.

그렇기에 존중하고 사모하는 것은 하늘 천天과 성인 성聖 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이 산을 유람한

뒤로 영대靈臺(마음)가 환히 비치게 되어서 성인의 가슴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고, 담박하고도 평온하게

되어서 묵묵ㄷ히 천유天遊(자유롭게 노님)하게 되었으니, 내가 눈으로 접하여 마음에서 체득한 것이 이 두 산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산이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은 다른 산들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격려하고

질책해서 떳떳한 사람에게 거의 미칠 수 있게 하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이 길을 거쳐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적었으랴. 나같이 가슴속이 쇄락하고 맑고 드넓게 되어 산의 취향과 똑같은 맛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조찬한은 천마 · 성거산의 유람에 다녀온 다음 해 1606(선조 39)에 드디어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말년에는 서법에 정진하여 왕희지에 비견될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1631연 조찬한이 죽은 후, 명문장가이자 사상가인 장유張維는 그를 추모한 만시를 지었다.

 

 

일찍 문단을 독점한 금수의 간장肝腸

출처出處에 고달팠던 불우한 만년.

궁하게 되자 속인들은 흰 눈으로 치떠 보고

병든 뒤론 시 읊느라 수염이 반백 되었네.

성宣城 벼슬 그만두고 한가하던 사조謝眺

위나라 감옥에서 글을 지은 늙은 추양鄒陽.

뜬 인생의 등불이 저녁 바람에 꺼지다니

서쪽 들에서 상여 끌며 새벽 서리 아래 오열한다.

 

 

 

'금수의 간장'이란 뱃속에 시문이 가득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백李白이 일찍이 오장육부가 모두 금수로 되어 있다는 평을 받았으니, 장유는 조찬한을

이백에 비유한 것이다. 조찬한은 광해군 때 승지로 있다가 상주목사로 나간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정경세와 어울려 흥을 즐겼으나 인조반정 후 탄핵을 받았다. 장유는 앞의 일은 남제 때 문인 사조가

선성 태수를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낸 닐과 같다고 하였고, 뒤의 일은 한漢나라 때 추양이 양효왕을

섬기다가 참소에 걸려 하옥된 후 상서上書하였던 고사에 비겼다.

 

조찬한이 죽은 후 그의 문집을 두 아들이 《현주유고玄洲遺稿》로 엮었다.

이안눌의 조카로서 인조 때 명문장가 이식李植이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서문을 썼다.

"바야흐로 문단의 맹주가 되어 깃발을 내걸고 제제다사濟濟多士의 선두에 서고도 남겠다고

칭송들을 하였는데, 불행히도 잘못된 시대에 벼슬하는 바람에 수십 년 동안이나

지방의 고을을 떠도는 몸이 되고 말았다" 고 안타까워하되,

"하지만 공은 뜻을 얻든 잃든 상관하지 않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문장이 막힘없이 쏟아져 나와

갈수록 기발한 표현을 구사하였다" 고 칭송하였다.

 

 

조찬한의 두 수의 시조를 전한다. 일설에는 유자신柳自新이 지었다고도 한다.

그 두 수 가운데 한 수는 이러하다.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 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 보려고 권세 있는 집안을 찾아갔더니

턱없는 흥정을 한다. 저쪽에서 강산풍월이라면 사겠다고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되겠다고 하였다.

이 시조의 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풍월주인'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즐기겠다는 말이다. 조찬한의 정신이 꼭 이러했을 듯하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