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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묘향산 2편>

박제가朴齊家, <의암관수도倚岩觀水圖>, 26.7×33.8cm, 개인 소장.

 

 

 

 

박제가朴齊家 「묘향산 소기妙香山小記」

 

 

한나절쯤 금강굴을 넘었다.

금강굴은 바위가 위에서 덮어 움집처럼 "아" 하고 입을 벌린 형상이다.

잠시 들어가 있자니 아무것도 이지 않았는데도 머리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처는 짓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가운데 의연히 앉아 있다. 어떤 이는 지팡이를 거꾸로

잡고 움직이는지 어떤지 시험해 보기 위해 천장을 떠밀어 본다. 돌이 탄탄하다 믿을 수 있다 해도

나는 차마 두드려 보지 못하겠다. 높이는 서울 창의문彰義門 뒤에 있는 불암佛菴에

비길 만하되  좀 더 널찍해서 창을 튼 것 같다.

 

토령土嶺을 쳐다보니 5리는 되겠다. 잎이 진 단풍나무는 가시같고, 흘러내린 돌 자갈은 길에 널렸다.

뾰족한 돌이 낙엽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발을 디디자 삐져나와, 나는 그만 그 돌에 걸려 미끄러져

자빠질 뻔해서, 손으로 진흙땅을 짚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봐 일어날 적에

얼른 단풍잎 하나를 주워 들고는 천연스레 그들을 기다렸다.

 

만폭동에 앉자 석양이 사람을 비춘다.

거대한 바위가 고개의 모습을 이루고, 긴 폭포가 그 바위를 타고 넘어 흐른다.

물 흐름이 모두 세 번 꺾이고서야 비로소 바위 뿌리를 짓씹고는 움푹하게 들어갔다가 솟구쳐 일어나는데,

흡사 고사리 움이 떨기져 주먹을 쥐고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의 수염 같기도 하다.

혹은 범의 발톱 같기도 하여 무언가를 낚아챌 듯하다가 스러진다.

뿜어 나오는 소리가 한바탕 온 산을 기울일 듯한 후, 아래로 흘러내려 서서히 넘치다가는 웅크렸다

다시 또 새어나가니, 마치 숨을 헐떡거리는 것도 같다.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내 몸도 그것과 호흡을 하게 된다.

 

이윽고 잠잠하여 소리가 없어졌구나 하면, 조금 있다가는 더욱 거세져서 휙 홱 소리친다.

바지를 올려 정강마루까지 치키고 소매은 팔꿈치 위로 걷어붙이고는 두건과 버선을 벗어

고운 모래밭에 내던진 후, 둥근 돌로 엉덩이를 고이고 물 가운데 잔잔한 곳에 걸터앉았다.

작은 나뭇잎은 잠길락 뜰락 하는데, 잎의 배는 자줏빛이고 등은 노랗다.

엉킨 이끼가 돌을 싸고 있으면서 반짝거리는 것이 미역과도 같다.

발로 물을 베자 폭포가 발톱 사이에서 일어나고, 입으로 물을 물어 양치질하니

물줄기가 이빨 사이에서 쏟아진다.

두 손으로 물을 휘저어 보니 물빛만 번득일 뿐이고 내 그림자는 없어졌다.

눈의 흰자위를 씻고 얼굴의 술기운도 가시게 하였다.

때마침 가을 구름이 물에 비치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진다.

온갖 나무들이 계곡의 한 가닥 길을 끼고 늘어서 있다.

먼 하늘은 바로 폭포 위에 있어 목만 늘인다면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바위 형세가 펀펀하게 넓어졌으나, 어지러운 물줄기가 이리저리 흘러서 발을 붙이기 어렵다.

여러 사람들은 아래에 있으면서 내가 떨어지질까 걱정하여 말렸으나 내가 말을 듣지 않자

그저 나를 바라볼 뿐 더위잡고 올라오지는 못한다.

한 걸음 더 올라가 머리를 돌려보니 손짓하고 부르는 손과 입들은 역력히 셀 수 있을 듯하다.

다섯 걸음 더 가서 머리를 돌려 내려다보아도 나를 향해 쳐든 얼굴의 눈썹 언저리까지 보인다.

하지만 열 걸음 뒤에 머리 돌려 보니, 다만 갓머리와 쌍상투가

머리를 꼭꼭 싸맨 습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백 걸음 쯤 더 올라가서 뒤돌아보았더니 동구의 사람들이 폭포 밑에 와 앉은 듯이 보이고

폭포 밑의 사람들은 이미 나를 보지 않고 있다.

 

거친 수풀에 길이 끊어지고 저녁 해도 또한 낮아졌다.

숙연하게 오싹해져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바빠졌다. 저리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회초리가

얼굴을 때리고 깍지 낀 가지들이 아래옷의 단을 찢는다. 쌓인 낙엽 속에서는 물이 스며 나와 

무릎 밑은 진창이다. 물길이 끝나고 근원이 나타났는데, 잔잔하여 소리가 없고,

바위 뿌리로 이끌려 나아가고 있다.

 

북쪽으로는 큰 골짜기를 조망할 수 있는데, 휑하고도 그윽하며, 붉게 물든 나무들이 골짝에 가득

들어차 잇을 뿐이고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 건너로 향로상봉香爐上峰이 지척에서 금새라도 다가올 듯하다.

공중의 길로는 다리 하나면 통하련만 선경과 인간세계가 확연하게 갈린 양 아득하니,

묘연하여 이르러 갈 수가 없다. 결국 서글픈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개 바위의 형세는 배를 드러내놓고 볕을 쬐면서 앞가슴까지 헤쳐두고 있는 듯한데,

아래는 불룩하고 가운데는 잘록 들어가 있고, 두어 줄 주름이 배꼽에 가로질러 있다.

내가 올라간 곳은 소의 두 뿔 사이 이마 같은 곳이다. 알지 못하겠다! 돌이 생길 적에 그 속이 비어서

엎은 독같이 되었는가? 아니면 철저하게 통돌로 되었는가? 두들겨 보면 어찌 그리 굳으며

외쳐 보면 어찌 그리 울리는가! 샘의 근원은 크지 않아서, 처음 나올 때는 띠 폭만하거늘,

그것이 돌을 빌려 소리를 내고 끝에 가서는 제멋대로의 형세가 되니,

이는 대자연의 권능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처음 올라올 적에 스님 한 사람이 따라오다가 돌아갈 길을 일러주었다.

내려와 보니 일행은 모두 가버렸고, 오직 타고 갈 담여儋與만 동구에 남아 있다.

나는 걸어서 퇴락한 가섭암에 들러서, 바위틈을 더위잡가 서쪽으로 단군대檀君臺를 넘었다.

남보다 십리 길이나 더 걸은 셈이다.

 

남보다 더 걸은 십리 길은 남보다 더 발견한 등산의 즐거움이요, 인생의 가치이다.

그렇기에 나는 산세와 물 흐름을 맛스럽게 묘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산과 물은 객체로서 저만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물을 발로 차고 입에 머금어 본다.

폭포 위 바위로 올라가면서는 뒤돌아볼 때마다 멀리 인물들의 모습과 주변 광경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새삼 인식 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목도한 것을 원근법에 다라 세밀하게 모사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한문서사에서 이렇게 원근법에 따라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한 글이 또 있을까?

이렇게 원근법을 구사하여 풍광을 묘사랄 줄 알았던 사람은 《북학의北學議》의 저자 박제가(1750~1805)이다.

그는 순조 즉위년인 1800년 9우러, 50세로 묘향산을 유람하고 위와 같이 감각적인 유산록을 남겼다.

북한에서 간행된 책에 처음 소개가 되었다.

 

북한에서 간행된 책이나 항간의 해설서에 이 여행을 두고 20대의 일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박제가는 9월 13일(임진)에 길을 떠났다고 유산록에 적었는데, 9월 13일이 임진의 날이었던 해는

1800년이기 때문이다. 글이 너무 감각적이어서 모두 젊은 시절 지은 것이라고 오해한 듯하다.

실은 이 여행 뒤에 박제가는 한 사건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는데,

화태禍胎의 육박이 이토록 기이하리만치 섬세한 감각을 만들어 내었는지 모른다.

 

박제가는 승지 평坪의 서자라서 출신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18세기 서울의 토박이로서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였다. 그는 감각적인 필치로

자연과 인간 사회를 묘사하였고, 때로는 세상을 미워하는 고함을 글로 적었다.

진작 문학적 재능이 알려져 19세 때부터 박지원朴趾源(1737~1805) 등 북학파 지식인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의 시와 함께 그의 시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수록되어 청나라에까지 이름이 났다. 그 시집을 흔히 《사가시집四家詩集》이라고 한다.

그후 1778년에는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순조 즉위년(1800)에 박제가는 철옹(영변)에 객이 되어 있었다.

철옹은 실제로는 다른 곳을 가리키지만, 조선조에는 흔히 영변을 철옹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유득광과 이덕무는 모두 그에게 묘향산 유람을 부추겼다.

그래서 9월 13일(임진) 박제가는 초록 도포차림으로 자줏빛 나귀에 올라 허리에는 칼을 차고,

안장에는 책을 싣고 떠난 것이다. 실상 그는 키가 작고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수염을 기른 것도 왜소하 모습을 보상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박제가의 이 유람에는 매제 이한주李漢株가 동행하였다.

이한주는 자가 몽직夢直인데, 본관이 덕수德水로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이다.

묘향산 유람에서 돌아온 이듬해 1801년(순조 원년), 박제가는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종성에 유배되었다. 이후 1808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희천군지도熙川郡地圖>

 1872년, 84×53cm, 조선후기지방지도 평안도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인.

 

조선 후기 지방지도는 산과 강 등의 자연지리와 관아와 창倉 · 교橋 등의 인문지리 사항을 도시하고,

지도 곁에 고을의 연혁과 고적을 기록하여 두었다. 지도의 맨 남쪽에 묘향산이 표시되어 있다.

 

 

 

 

이광려李匡呂, 「뇌옹사리찬瀨翁舍利贊」

 

 

 

뇌옹瀨翁은 술을 즐기고 여색을 밝혀 평소 승려의 행실이 무언지도 모르던 사람이다.

나와 함께 묘향산에 들어갔는데, 산에 들어간 첫날 저녁 보현사 관음전에 모여서 밥을 먹게 되었으니

정해년(1767) 4월 스무이틀이었다. 뇌옹이 막 숟가락을 뜨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어금니 사이에서 절그럭 하면서 무엇이 나오는데, 뼈도 아니고 돌도 아닌 것이 희게 반짝거렸다.

중이 놀라며 "사리다!" 라고 말하였다. 옹은 피식 웃으면서 "내게서 어떻게 사리가 나와?

헐일 없는 생선 눈알 같은데? 절밥은 나물뿐이니, 이게 정말 눠지?" 라고 하였다. 중이 말하였다.

이게 바로 치사리입니다. 저는 여러 번 보았는데요. 그 모양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공께서 어떤 수행을 하셨기에 이런 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아마 전세前世의 인연인가 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른바 사리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만약 마음이 선善한 뒤여야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옹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오. 전세를 들먹일 것도 없소. 그러나 이승에서의 선善 역시 전세의 인연이

아닌 게 없소. 오이 아무리 주색을 밝히고 헛되게 반생을 보냈다고 하지마 그 마음은 참되고 그 뜻은 활달하다오.

본성상 정직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고,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그 장단과 득실이 한결같소. 만일 돌아가신 부처가

사람 가운데서 사람다운 사람을 가린다면 정녕 이런 사람을 고르리다. 필경 자질구레한 일에만 조심할 뿐이고

마음은 비뚫어진 사람을 고르지는 않을게요. 그렇기에 깊은 산속에서 수행을 쌓아도 꼭 사리가 나오라는 법이 없소.

오히려 천성대로 활달하게 사는 사람에게 더러 이런 기특한 일이 나타날 수 있으니,

형적을 가지고 구할 것은 아니라오.

 

옹은 평소 성심으로 허여許與(인정)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리 첫눈에라도

오랜 친구처럼여겨 끓는 물이나 타는 불에 들기도 꺼리지 않았다오.

가끔 주색에 빠져 재물을 축내고 남을 업신여기고 조롱해서 껄껄 웃고 하여 보기에 단정치 못한 사람 같지만,

진실로 두루 미치게 꼼꼼하며 엄정하고 중후해서 마음 씀씀이가 막힘이 없고 소원도 까다롭지 않아 만족시키기 쉽다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다잡지 않는 듯하지만 열 번 고꾸라지고 아홉 번 쓰러지더라도 끝내 사악한 마귀나

외도에 떨어지지 않을 사람이요. 그 사람됨이 정말 이러하므로, 평소 불교의 이치에는 어둡지만

그 마음씨와 겉모습이 가끔 우연히 부처와 닮은 면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네가 늘 하던 말이오.

아마도 전세에 근성이 있기에, 비록 불법을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로 그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니,

오늘 사리가 나온 것은 옹으로서는 놀라거나 야릇해 할 일도 아니오.

 

옹의 집안 어른 한 분은 눈에서 사리가 나왔는데, 그러고도 십수 년 후에야 돌아가셨소.

사리가 나온 눈자위 위에는 자국이 있어서 남들이 늘 보곤 했다오. 그러더니 오늘 또 규백楑白(호 뇌옹)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전씨 집안에는 어찌 이렇게 선남자가 많은지!

 

내 성미가 편벽되어, 늘 하는 말이, 몸가짐을 검속檢束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면

꼭 사람다운 이를 다 찾아낼 수는 없지만, 검속하지 않아서 몹시 범속하고 아주 천근한 사람 중에는 더러

탄이坦夷하고 무심無心하여 극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해왔소. 이런 사람은 또한 자기의 좋은 점을

스스로는 모르지만, 그 좋은 점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낫답니다.

더구나 범속하지 않고 아주 천근하지도 않은 사람인 경우에야 더 무엇을 말하겠소?"

 

그래서 뇌옹사리찬을 짓기로 하였다.

옹의 성은 전씨, 이름은 택량宅良이다. 규백은 그의 자子이다. 

내가 천리 길을 온 것은 규백을 보려고 한 것인데,

이런 일까지 보게 되니, 이번 걸음은 아마 헛걸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규백은 오직 마음을 지어먹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규백을 관찰한 사람은 반드시 이 뜻을 알아야 하지,

사리가 나왔다고 대견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웃지 않는 사람은 아마 목석일게다.

묘향산 구경을 떠나 보현사에 묵은 첫날 밤, 강화학파 문인 이광려李匡呂(1720~1783)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선천宣川 사람 전택량田宅良(1705~1771)에게서 치사리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독룡毒龍(불가에서 말하는 욕망)을 제압한다고 참선하여 몸가짐을 다잡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오로지 임성자재任性自在, 탄이무심坦夷無心할 것, 다시 말해 부작의不作意할 것,

이광려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는 행위라고 하였다.

 

1776년, 이광려는 큰형 광윤匡尹과 함께 묘향산 구경을 떠났다. 이때 전택량이 같이 간 것이다.

전택량은 자가 규백楑白이고, 호가 동뢰옹東瀨翁이다. 평생 아무 권력도 명예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주위의 인물들에게서 진정한 우정을 발견하고, 그들의 천진난만한 성품을 사랑하였다.

전택량은 1768년 진사시 회시에서 떨어진 후 서너 해 만에 죽었다.

그때 이광려는 그를 위해 「동뢰옹묘지명東瀨翁墓誌銘」을 지었다.

 

전택량이 이광려를 따라간 것이지만 이광려는 묘향산 유람이 전택량 때문이라고 하였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겠는가.

"내가 천리 길을 온 것은 규백을 보려고 한 것인데, 이런 일까지 보게 되니,

이번 걸음은 아마 헛걸음이 아닐 것이다."

이 한마디로 묘향산 유람의 의미는 묘파되었다.

즉 묘향산의 산놀이는 오로지 임성자재, 탄이무심하여 부작의한 행위였던 것이다.

'자질구레한 일에만 조심하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광려는 조선 후기에 학문 권력을 형성한 속류 유학에 넌더리치고 양명학을 참조하면서

우리나라의 주체적 학문을 형성하였던 강화학파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그는 내면 수양에서 무심과 무작위를 매우 중시하였다.

《노자》를 풀이하면서, 이름과 실체가 둘로 갈라진 상태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사례로

《논어》 「공야장」 편에 나오는 미생고微生高의 일을 거론하여

참된 올곧음이 아니면서 올곧다고 가장하는 것을 비판한 바 있다.

 

「뇌옹사리찬」의 주제의식은 조선 후기에 인간 이해가 깊어져서,

서사 대상이 평범한 인간이나 천대받는 하층으로 확대한 것과 관련이 있다.

또 명나라 원굉도袁宏道 등이 양명 좌파 사상을 기저로 결함 많은 인간을 대상으로

그 성격과 취향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을 참고로 한 측면도 있다.

 

산놀이하러 가서 놀이의 노정이나 견문을 적지 않고,

산의 어구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 묵으며겪었던 치사리 이야기를 적은 것 자체가

기이하다면 기이하고, 천진하다면 천진하다

.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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