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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송악산>

강세황姜世晃,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중 <송도전경松都全景>

1757년경,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이 1757년 7월에 개성을 여행하면서 그린 16첩의 기행첩 가운데 제1면에 수록된 그림이다.

개성 시가와 송악을 그렸다. 주작로를 넓고 길게 그리고 그 북쪽의 궁궐은 운무 속에 감춤으로써

신비감과 허무감을 더하였다.

 

 

 

송악松嶽

 

개성시 개풍군과 개성시 경계에 있는 해발고도 489미터의 산으로 아호비령산맥의 말단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천마산 등이 있다. 소나무가 많아 송악산이라 부르는데,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남쪽 사면은 비교적

급경사이고, 서쪽 · 남쪽 · 북쪽 기슭에서는 죽배천 · 지파리천 · 마미천의 지류가 각각 발원한다.

신라시대 토성과 고려시대 성터가 남아 있으며 남쪽 기슭에 만월대 · 원흥사 등이 있다.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개성 송악산

 

 

 

 

 

이정구李廷龜, 「송악유람기遊松嶽記」

 

 

송도는 서울에서 100여 리 떨어져 있으므로, 말이 건장하다면 하루 만에 이를 수 있다.

나는 이 땅에 들른 것이 여러 번이다. 옛 도읍이라 고적이 많으니, 가까이는 만월대와 자하동에서부터

멀리는 천마산 · 지족암 · 박연 · 대흥동에 이르기까지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러나 송악의 경우는 한 번도 올라가 조망한 적이 없고, 멀리서 그 푸르른 빛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 6)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자 상감께서 우려 하시고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파견해서 산악과 강에 두루 제사 지내도록 하셨다. 나는 송악으로 파견되고, 진창군 강인경은 오관산으로

파견되었으므로,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갔다. 개성유수 홍원례가 맞이해 위로하고 환대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제사관을 인솔하여 송악에 올랐다. 만월대 서쪽으로부터 구불구불 가서 산기슭에 이르렀는데, 

계곡이 도는 데 따라 길도 굽었으며 골짝은 으슥하였다. 서너 리를 가자, 개성부 사람이 교자轎子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길이 험해서 말을 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여름이 한창이라 온갖 꽃이 다

졌는데, 산철쪽만이 만개하여 빽빽한 숲 사이로 어른어른 비친다. 큰 것은 한 장丈 남짓 하고, 짧은 것은

바위 틈새를 덮고 있다. 바람이 사방 산에서 내려오자 향기가 물씬 일어난다. 길 왼쪽과 오른쪽은 모두

절벽이다. 시냇물이 어두운 풀숲 속으로 흘러서 물은 보이지 않고 옥패처럼 잘랑잘랑 하는 소리만 들린다.

 

견여肩與에 매달려서 산에 올랐다. 바위에서 쉬기도 하면서, 가마꾼의 거친 숨이 좀 고르게 된 후에야

다시 위로 향하였다. 길은 모두 열여덟 구비이다. 정상에 다 이른 후 제사관들을 돌아보니 모두 웃통을

벗고 걸어오는데,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하지 못한다. 초가집 대여섯 채가 있다. 사당을 지키는 자가

사는 곳이라고 한다. 관리가 자리를 깔아 나를 앉히고, 시원한 과일과 차가운 술로 고단함을 풀어주었다.

저녁이 되자 산기운은 적막하고 이지러진 달은 빛을 흘렸으며, 삼나무와 회나무가 빼곡하게 서서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신단神檀을 바라보니 하도 엄숙해서 사람의 혼백을 요동치게 만든다.

 

사당은 모두 다섯 곳이다. 성황城隍 · 대왕大王 · 국사國師 · 고녀姑女 · 부녀府女로, 단은 쌓았으나

집은 만들지 않았다. 모두 산 정상의 북쪽에 나란히 있다. 그런데 집도 있고 단도 잇는 것이 곧 숭악의

신사이다. 대왕이니 국사니 고녀니 부녀니 하는 것들은 무슨 신인지 모르겠으나, 신에게 기도하여 복을

비는 자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있었다. 서울의 사대부 여성 가운데 기도를 드리려는 자는 반드시 이곳

에서 기도를 하였다. 심지어 어떤 궁인宮人은 세시歲時마다 향을 줄곧 내려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이 산이 신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려 때 귀신을 숭상하여 음사淫祠가

많아 그 풍속이 고쳐지지 않고 전해져서 그런 것일까? 

 

사경四更에 제사를 행하려 하니 천우天宇(하늘)는 엄숙하고도 맑고 북두성은 찬란하다.

사당의 경지가 삼엄해서 정신이 처연하고 뼛속까지 차갑다. 제사를 마치고 마을 집에 잠자리를 빌렸다.

맑은 아침에 걸어서 산의 제사단으로 올라가 보니, 새로 지은 사상이 보였다.

듣자니 경도(서울)의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내어서 성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산의 왼쪽 줄기는 남으로 내달리는데, 전부 통돌로 솟아나 있다. 산마루를 따라 성을 에두르고,

둘레에 치첩雉堞(성가퀴)을 쌓아, 그것이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진다.

서로 끌어 당기면서 올라가니 위태롭고 좁아서, 늘어앉을 수는 있어도 나란히 앉을 수는 없다.

바람이 불어와 마치 떨어뜨리려는 듯하다. 술을 따라 마시자 정신이 비로소 안정된다.

 

멀리 조망하여 보니, 산의 형세가 구불구불 서려 있다. 머리 숙이고 일어서는 듯도 하고,

놀라서 멈추어 선 듯도 하며, 용과 호랑이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그런데 기세의 웅장함으로 말하면.

동남쪽의먼 산들은 조종朝宗하듯 보위하고 있으며, 긴 강은 띠처럼 이어지고 큰 바다는 하늘에 이어 있다.

고려 500년의 울창한 기운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듯하니, 신령스런 숭악이라 일컫는 것이 정말 빈말이 아니다.

 

자리에서 율시 한 수를 지어서 제사관 김봉조와 경력經歷 윤영현에게 보여주었다.

이어서 그 대강의 전말을 기록하여 훗날 유람하는 사람들에게 남긴다.

 

 

이정구(1564~1635)가 지은 이 글은 조선시대 송악松岳 숭배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고금의 문인을 통틀어서 이분만큼 자기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 평해지는 인물이다.

 

 

송악은 숭악崧岳이라고도 하고, 숭산崧山, 신숭神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개성도호부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며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 곡령鵠嶺이라고도 하였다.

시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에 능하였는데, 부소군에 이르러 산의 형세가 좋은데도 나무가 없음을

보고, 강충康忠에게 "만일 군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일할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에 옮겨 살면서 소나무를

온 산에 심었다. 강충은 고려 태조 왕건의 4대조이다. 왕창근王昌瑾 거울의 경문鏡文에는 "사년巳年에 두 

용이 나타나되, 하나는 몸을 푸른나무靑木 가운데 감춘다" 라고 하였는데,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에서 왕건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따르면,

고려 때는 매년 봄 · 가을에 덕적산德積山 · 백악白岳 · 송악松岳 · 목멱산 · 의 산신에게

내시 및 무당과 여악女樂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기은祈恩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때에는 산과 강에 대한 많은 제사를 음사淫祠로 규정하여 배척하였으나 기우제나 강우제 등

민중의 삶과 밀착된 제사는 그대로 지내게 하였다. 곧 조선시대에는 지리산 · 삼각산 · 송악산 · 비백산鼻白山을

사악신四岳神으로 정하였다. 또 동은 치악산, 남은 계룡산 · 죽령 · 우불산 · 주흘산 · 금성산 · 한라산,

중은 목멱산, 북은 감악산 · 의관령 · 백두산 등에 각각의 신위를 두고 중춘과 중추에 제사를 지냈다.

 

 

이정구는 46년간 관직 생활을 통하여 육경六卿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아홉 차례나 예조판서를 지냈고, 두 번이나 문형을 잡았다. 1598년(선조 31) 정응태 무고 사건 때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조선과 명나라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1613)로 6월에 김제남이 사사되자, 대제전에 문안을 드린 일로 탄핵을 받아

예조판서에서 체직되고, 이어 대제학을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다만 동지중추부사의 직함은 그대로 지녔다.

1614년에 송악의 제사를 주관한 것은 동지중추부사 때였다.

 

이정구는 종묘호란 때,

후금 유해劉海와 맹약하게 되자 인조가 맹단에 오르는 것을 극력 반대하는 충절을 보였다.

또 인조의 소생 부모의 호칭을 정할 때는 정엽鄭曄 · 정경세鄭經世· 박지계朴知誡 등과 함께

정원군을 고考(돌아가신 아버지)라고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 계운궁이 돌아가자,김장생의 설을 지지해서 인조의 3년상에 반대하였다.

김장생은 존통尊統이 중하므로 "인후人後(양자)가 된 자는 참최의 상복을 두 번 입지 않는다" 는 설에 따라서

작고한 부친을 마땅히 백부라 칭하고 부장기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최명길은 3년 상을 주장하였다. 최명길은 "광해군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어 폐출되어 나갔으므로

우리 주상은 처음부터 양자가 된 것이 아니고 곧 조부의 뒤를 이은 것이며,

이미 조부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그 폐출된 광해를 빼놓으면 본고本考인 정원대원군이

자연히 고考의 지위에 있다" 고 주장하였다.

최명길은 부자일관父子一貫의 계통을 중시함으로써 인조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정구는 성품이 온후하였다.

숭악의 음사淫祠(음탕한 사당)에 대해 그것을 음사로 규정하지 않고,

"이것은 이 산이 신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려 때 귀신을 숭상하여 음사가 많아, 그 푸속이 고쳐지지 않고 전해져서 그런 것일까?"

라고 유보하는 표현을 내놓는 것을 보면 그의 온후한 성품이 잘 읽혀진다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