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종金夏鐘, 《해산도첩海山圖帖》 중 <설악경천벽雪嶽擎天壁>
1815년,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금강 · 외금강 · 설악 · 관동 해안을 소재로 25폭으로 제작한 《해산도첩》 가운데 설악의 경천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아래 왼쪽에 '설호산인' 이라는 호를 적었다. 설악을 신선의 산에 견주고,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훗날 고종은 김하종의 화원으로서의 노고를 치하하여 도화서의 별체아직을 영원히 붙이게 했다.
홍태유洪泰猷, 「설악 유람기遊雪嶽記」
인제현에서 동북쪽으로 30리를 들어가 삼차령에 이르렀다. 삼차령을 넘자 골짜기가 아주 깊어지고 양쪽으로 산이
벽처럼 우뚝 솟아 있으며 나무가 빽빽해져서 숲이 울창하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바치 비단 한 필
정도여서, 자오(정오)나 되어야 햇빛이 든다. 정말로 자오곡子午谷이라 할 만하다. 조금 더 내려가자 지세가 순탄
해지고, 시냇물이 점차 맑아지면서 곳곳에 푸르스름한 바위가 보인다. 거기서 서너 리를 가니 큰 시내와 마주쳤다.
이 시내는 서쪽으로 흘러서 또 다른 시내와 합류한다. 바로 곡백담의 하류이다. 기슭은 모두 자갈이라고 하며,
평지에는 수많은 소나무로, 푸른빛을 띨 정도로 늙은 것들이 울창하다. 소나무숲이 끝나는 곳에 밭이 있고,
밭가에 여덟, 아홉채의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바로 난계역亂溪驛이다.
거기서 10리 남짓 가서 시내를 건너니 갈역마을이 나온다. 마을은 아주 쓸쓸한 데다가 모두 너와집이다.
마을 앞으로 고갯길이 나 있어 장사치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지만 아직도 순박해서 큰길가 동네의 인심 같지가 않다.
이곳을 지나면 길은 대부분 험한 자갈길이다.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어서 비로소 신발을 챙겨서 걸어갔다.
마을 앞 시내를 따라 몇 걸음을 안 간 곳에 곡백담이 나온다. 홀연 홀로 선 봉우리가 바라보이는데, 천 길이나
되는 봉우리거 머차 것 돋은 죽순 같아서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 아래 맑은 못이 있고, 못가에는 흰 바위가
널려 있다. 물은 평평하게 깔려 흐르고, 물고기 수십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여기서부터 산을 한 번 휘어 돌 때마다 물도 한 번 굽어 흐르고, 바위 역시 기이한 형태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얕은 못이 되기도 하고 검푸른 못이 되기도 하며 수렴(폭포)이 되기도 하고 뿜어 나오는 폭포가
되기도 하며 누워 흐르는 폭포가 되기도 한다. 또 너럭바위가 되기도 하고 첩첩절벽이 되기도 한다.
앉아서 구경할 만한 바위만도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것들은 설악산 가운데서도 얕은 쪽의
경치에 불과한데도, 물과 바위의 장쾌함이 이렇게 사람의 가슴을 상쾌하게 해준다. 30리를 더 가니 온통
가파른 돌길이어서 부여잡고 올라가고 사람의 등에 업혀 가면서 발을 겹치듯 밟으며 조심조심 지나갔다.
그래서 잔도棧度의 이름도 '업고 돈다(부회負回)' 라든가 '안고 돈다(포회抱回)' 라고 한다.
돌길이 다하자 다시 높은 고개가 나타났고, 그 고개가 끝나는 곳에 비로소 산이 열려 골짝이 활짝 트였다.
서너 채 인가가 시내 건너에 자리잡고 있다. 처음 고갯마루에서 이곳을 바라보았을 때는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습이 선원仙源의 별천지처럼 여겨졌다. 시내를 따라 난 길로 5리를 가니 심원사深源寺가 나온다.
심원사에서 동쪽으로 서너 리를 가면 삼연 김창흡의 정사(삼연정사三淵精舍)가 나온다. 그곳에서 가장 기이한
것이 직서루이다. 봉우리가 옆으로 띠처럼 이어져 있는데, 열려 있는 모습이, 마치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도 하고, 새가 돌아보는 듯도 하고, 사람이 갓을 쓰고 가는 듯도 하여, 그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또 희고 깨끗한
색은 달 밝은 밤하늘 같기도 하고 싸락눈 내린 아침 같기도 하여, 티끌이 한 점도 없다. 이런 곳을 가려서 사는
사람들도 역시 고인高人(덕이 높은 사람)임을 알겠다.
김창흡이 은거하였던 삼연정사三淵精舍가 바로 오늘날의 '영시암'이다.
다시 시내를 따라 1리 남짓 올라가 유홍굴에 이르렀다. 유홍굴은 언급할 만한 특별할 경치는 없다.
다만 비스듬한 바위 하나가 반쯤 굽어보면서 감실의 형상을 이루어서, 그 안에 몇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옛날 송당松塘 유홍兪弘(1524~1594)이 설악산에 유람을 왔을 때 마침 묵을 절이 없어서 이 굴에서 자고 갔으므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유홍굴에서 오른쪽으로 가파른 돌길을 돌아가면 십이동폭으로 들어 간다.
이곳의 시내와 바위의 경치는 곡백담과 비슷하면서도 더욱 깨끗하고 밝으며, 좌우의 설봉雪峯들은 삼연정사와
비슷하면서도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다. 그 사이에 높은 절벽이 한데 모여서 첩첩이 솟아 있다.
나무는 모두 단풍나무와 향나무로, 때마침 제철을 만나 고운 붉은빛을 띠어 마치 그림 병풍을 단장하고 수놓은
병풍을 둘러친 듯 찬란하고 괴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도 하고 기뻐하게도 한다. 그래서 앉아서 쉴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차마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골짜기의 10여 리 남짓 되는 길을 가면서 예정 시각을
놓치고는 하였다. 저물녁에야 마침내 십이폭동에 이르렀다. 절벽 끝에 폭포가 걸렸고, 그 아래는 못이다. 물은
멋대로 쏟아져 기세 좋게 넘실대어, 형세는 격하고 소리는 웅장하다. 네 번째 폭포 다음의 세 폭포는 서로 연달아
있으면서 물이 떨어져 마치 비단을 마전하는 것 같다. 가운데는 좁아져서 구유통처럼 이루어져서 못으로 떨어진다.
못은 빛깔이 검푸르러서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제일 앞에 있는 폭포는 좌우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른다. 오른쪽 폭포는 거의 100자는 되고, 왼쪽 것은 그보다 3분의 1
정도 짧다. 또 수십 보 못되는 곳에 한쌍의 무지개가 걸려, 찬란한 태양빛에 운이 아찔할 정도이다. 다만 바위가 미끄
러워서 가까이 가볼 수 없기에 안타까웠다. 폭포 오른쪽에 약간 평평한 바위가 있어, 거기 올라앉아 구경할 수 있는데
폭포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폭포에서 날아오는 물이 줄줄 떨어지고 공중에 날려 안개와 노을을 이루어 웃옷과 아래
옷을 적실 정도이다. 그 기이함을 사랑하여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겠으나 너무 맑아서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왼쪽 폭포를 거쳐 남쪽으로 절벽을 타고 올라가 다시 상류를 따라가는데, 길이 끊겨 찾지 못하고 한참 동안 헤매었다.
그때 시냇가 바위 위에 돌무더기가 보이는데, 누군가가 일부러 쌓아 놓은 듯하였다. 일행 가운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선정에 들러 온 승려들이 왔다가 돌아 가면서 표시로 쌓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의 길에는 햇갈릴
만한 곳마다 모두 그런 돌이 있었으므로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길이 험하여 우거진 숲을 헤치고
벼랑의 바위에 붙어서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조심 올라가 가까스로 낙상의 화를 면하였다. 정말로 산수에
뜻이 있어서 경승을 탐색할 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비록 이르러 오려 하여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20리를 더 가도 여전히 산이 깊고 울창한 숲이 끝나지 않고 어두운 빛이 이미 어둑어둑 일어났으므로, 길을 못 찾을
까봐 걱정하는데, 마침 작은 암자 하나가 멀리 바위 사이로 보인다. 나도 모르게 마음과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마치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암자에 이르니, 암자는 비었는데, 부엌에 불기가 있고 불상 앞에 향불이
살라있다. 스님이 자리를 비운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암자의 이름은 봉정암으로,설악산의 10분의 9
정도 되는 높이에 위치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올려다보며 온 모든 산들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는 듯하다.
암자 뒤편의 봉우리가 그래도 높았었지만, 여기 올라와서 보니 몇길 바위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이곳이 얼마나
우뚝하게 높은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처음 이르렀을 때는 산속이 조용하더니, 밤중이 되자 바람이 일어나
온갖 구멍이 모두 소리를 내고 온 산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하늘이 밝고 높은 것을 보면, 산 아래 평지는
반드시 이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바닷바람이 몰아쳐 그런 것이리라.
봉정암
봉정암의 부처바위
봉정암 사리탑(탑대)
아침에 암자 왼쪽에 있는 탑대에 올랐다. 그곳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마치 부도처럼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있다.
물어보니, 스님의 말이 그곳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넣어둔 곳이라고 한다. 거기서 길을 바꿔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전망이 환하게 트여온다. 앞에는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거기서부터 절벽을 부여잡고 5, 6리쯤 가자 약간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이곳의 암벽과 천석泉石의 경승도 십이동폭
의 하류에 버금간다. 다시 20리 남짓 간 곳이 폐문암이다. 이 골짜기에서 제일 뛰어난 곳이다. 양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관문처럼 솟아서, 마치 인간 세상과 선계의 갈림길에 선 관문 같다. 이곳의 산봉우리들이 지닌 빼어남은
삼연정사에서 보던 것을 다 지니고도 또 그보다 훨씬 더 빼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비를 만났으므로 가볼 수 없었기에 한스러울 뿐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태유(1672~1715)는 인제현에서 30리를 들어가 삼차령을 넘어 봉정암을 둘러보고,
유홍굴의 오른쪽 길로 십이동폭과 폐문암閉門庵을 돌아보았다.
홍태유의 본관은 남양이고, 주부 벼슬을 한 치상緻祥의 아들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에 아버지가
화를 입자 벼슬할 뜻을 버렸다. 김창흡이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실로 설악산은 관동지방의 서쪽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북쪽은 양양과 접해 있고, 남쪽은 인제이다.
양양의 명승으로는 식당폭포와 계조굴을 꼽지만, 홍태유는 그쪽을 구경하지 못하였다. 인제의 명승으로는
곡백담 · 심원사 · 삼연정사 · 십이폭동 · 봉정암 · 폐문암을 꼽는데, 그곳을 두루 구경하였다.
그리고 인제의 명승지 가운데 산봉우리와 수석이 가장 빼어난 곳은 십이폭동이라고 하였다.
홍태유는 유홍굴이 유홍兪泓(1524~1594)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유홍은 율곡 이이가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으로서 그를 으뜸으로 뽑은 인물이다. 본관은 기계이다.
생원시와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57년에는 강원도 암행어사로 나간 일이 있다.
이조판서로 있던 1589년(선조 22)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어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이성계의 부친을 고려 역적 이인임으로 기록한
명나라 《영락대전》등의 기록을 정정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91년(선조 24) 우의정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 함경도로 세자를 시종하고 이어서 도체찰사를 겸하였다.
1594년에는 좌의정이 되어 해주에 머물던 왕비를 호종하던 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장서가 많았으며,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을 간행하였다. 장유張維가 그의 신도비를 지을 만큼 후대 인사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런 만큼 명산인 설악산에도 그의 전설이 서려 있었던 것이리라.
홍태유는 「유설악기」의 뒤에 설악에 대한 평가를 부기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명산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 금강산만이 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 수 있고,
다른 산은견줄 바가 못 된다.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치는 우리나라 사람조차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무니, 이 산은 산 가운데 은자隱者이다.
내가 세세히 설악의 경치를 적은 것은 고향에 돌아가 친우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요,
또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는 이들에게도 알려주려는 뜻에서다.
지금 우리가 설악의 아름다움, 봉정의 시린 물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은
홍태유와 같은 선인들의 기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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