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화악산>

 

조세걸曺世傑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중 제6곡 <농수정籠水亭>

1682년, 42.5×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곡운구곡은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용담리 일대의 아홉 경승을 말한다.

곡운에 별천지를 경영한 김수증金壽增이 화원 조세걸에게 9곡의 경승을 비단에 그리게 하였고,

여러 문인들에게 「곡운구곡도가」를 짓게 한 후, 조카 김챵협金昌協에게 발문을 적게 하였다.

농수정은 최치원의 「해인사」 시에서 뜻을 빌려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본문 참조).

 

 

 

 

 

김수증金壽增, 「화학산 유람기遊華嶽算記」

 

 

신미년(1691, 숙종 17) 8월 28일, 신랑申郞과 함께 반수암 승려 홍눌과 남특을 데리고 절정에 오르기로 하였다.

소를 타고는 반수암을 거쳐, 서쪽 언덕으로부터 올라가다가, 소에서 내려 남여籃輿를 타고 위로 나아갔다.

산세가 점점 높아졌으므로 다시 남여를 놓아두고 짧은 옷을 걸치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서 갔다.

나무숲과 풀덤불은 무성하게 우거지고 낙엽은 산길을 뒤덮었다.

 

중봉 곁에 이르자, 매 잡는 마을 사람이 마름풀집(능사菱舍)으로 지어둔 임시 숙소가 보였다.

곁에 가느다란 샘이 있었으므로, 잠시 앉아서 밥을 먹었다. 다 먹은 후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차츰 올라갈수록 점점 높아졌는데, 거처 지나가는 산등성이마다 곳곳에 매 집(응사鷹舍)이 있었다.

저녁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 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서 우람하게 대치하고 있다. 사자봉이라고 한다.

사방이 활짝 트여 아무 걸림이 없어, 원근의 여러 산들이 모두 미간 사이로 돌아온다. 풍악산과 한계산도

볼 수 있고 목멱산도 바라볼 수가 있다. 마침 구름과 노을에 가려서 삼각산은 어두운 기운 속에 희미하다.

춘천의 소양강과 철원의 보개산도 지척에 있는 듯하다. 양구의 저산과 평경의 고암산도 하나하나 눈높이

저 멀리로 살필 수 있다. 영평의 국망산은 아주 낮아서 어린 사람을 어루만지듯 할 수 있다.

이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산들이 하도 많아서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산의 서쪽 기슭은 이른바 도성협道星峽인데, 어깻죽지 아래에 있는 듯하다.

두 산이 마치 다발로 묶인 듯하여 넓고 평평한 땅이 한 조각도 없아. 산의 남쪽은 곧 가평과의 경계이다.

1리쯤 내려오자 벼람의 바위가 집 처마 같아서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 거기에 의지해서 작은 온돌을 만들고

땔나무를 덮어두었다. 이것도 역시 가평의 매잡이가 지은 것인데, 바야흐로 10여 명이 머물고 있다.

 

나는 노구솥을 돌로 받치고 저녁밥을 지었다. 이곳에서 한 밤을 지내자, 구름과 안개가 컴컴하고

바람과 이슬이 온몸에 가득하여 마음과 뼈가 모두 시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번 여름에 한계에서

밥 먹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특주 한 잔을 마시자, 승려 홍눌이 곁에서 게송偈頌을 외운다.

매잡이가 나의 종복들에게 가만히 말하였다.

"간밤 꿈에 사대부 서너 분이 여기 와서 노닐었는데, 지금 그 꿈이 들어맞았소. 정말 기이하오."

 

새벽에 일어나니 음울하 구름이 풀어져 흩어지고 해가 동쪽 봉우리에서 솟아난다.

백운산은 동남쪽에 평평하게 깔려 있고, 산야는 하늘에 끝없이 이어져서 1만 리 명발溟渤(북해)처럼

부글거린다. 산고개 서쪽에 위치한 경기와 전남의 경계 지역은 모두 흐릿한 시선 속으로 들어오고,

용문산만 하늘가에 반쯤 드러나 보인다. 원근 봉우리들의 뾰족한 모습이 점점이 출몰하여, 별이나 바둑알처럼

펼쳐진 섬과 같다. 전에 풍악(금강산)을 찾아 아침에 수재水○에 올랐을 때 비로봉의 1만 인仞을 흰 구름이

삼켰다가 토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것도 대단히 기이하기는 하였지만, 장대하고 활달한 형세는

이보다 하였다. 주회옹(주자)이 운곡에서 본 것도 과연 어떠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천하의 기이한

경관을 정말로 미리 제대로 파악해 잘 표현하였다고 할 만하다. 밥을 먹은 후 다시 봉우리 머리에 올라갔다.

서풍이 살랑 불어오고 기후는 청명한데 사변의 구름 기운은 아직 걷히지 않았으므로, 더 멀리까지

조망할 수는 없으나, 곡운정사의 소나무숲과 마을 집들은 또렷하게 식별할 수가 있다.

화음동이 앞 봉우리의 주름 접힌 곳 속에 은은하다.

 

마침내 어제 왔던 길을 버리고 곧바로 중봉을 따라 내려왔다. 

언덕길로 해서 벼랑 곁으로 오는데, 나무숲은 성글고 풀은 올망졸망하며, 철쭉이 온 산에 가득하고

간간히 두견새가 운다. 꽃이 피었을 때 그 꽃들이 주변을 비추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장관일지

상상이 된다. 높은 곳에서는 나무가 쭉쭉 뻗지 않고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다. 적목赤木 · 측백側柏 · 해송海松

들이다. 또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있는데, 승려들은 그것을 비목棐木(도지개나무)이라고 부른다. 가지와 잎은

삼나무와 같고 몸통은 창백하며, 겨울이 다 가도록 시들지 않는다. 이전에 풍악이 희령산에서 본 적이 있다.

대개 멋진 나무라고 하겠다.

 

반쯤 내려온 깊은 골짝에 마조장磨造匠 서너 명이 나무를 찍어서 일을 하고 있다.

거기서 조금 쉬면서 밥을 먹고 떠났다. 골짝은 어둡고 수풀은 컴컴하여 동서를 헷갈리고는 하였다.

언덕을 타고 넘어서 한참을 내려오다가 평평한 언덕 하나와 마주쳤다. 푸른 삼나무가 천 그루나 되어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크기는 백 아름이나 된다. 간혹 해송과 가수(개오동나무)가 섞여서는, 하늘에 둥실

떠서 해를 가리고 있어서 그 꼭대기를 볼 수 없다. 한낮인데도 음침하고 기상이 엄숙하다. 아마도 개벽 이래로

도끼와 자귀를 들여온 일이 없었던 듯하다. 산의 정상에서 여기까지, 전체 산의 3분의 2나 된다.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마주해 있고, 위에는 서리고 아래는 웅크리고 있어, 모두 서너 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목의 그늘이

햇빛을 가리고 우거져 있어서, 그 숲의 길이와 너비가 얼마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떨어진 잎이 썪어 쌓여서 흙

이 깊고 두터워서 인삼과 산나물이 여기에서 많이 난다. 산의 승려와 토착민들조차도 보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한다.

듣자니, 그 남쪽에는 상암사의 옛터가 있다고 하지만, 숲이 깊고 길이 끊어져서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곳은 화음동에서 불과 1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너와집을 하나 둔다면 회옹晦翁(주희朱熹)이

노봉蘆峯(노봉산)에서 그랬듯이 때때로 왕래하면서 세상의 분잡함과 완전히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이 높고 계곡이 끊어져 있으므로 큰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거처하기 어렵고, 품과 비용이

작아서는 거처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만 그 승경을 잠시 기록해 둘 따름이다. 또 계곡을

태초泰初라 이름 지었다. 봄날 화창하고 햇빛이 밝으면  부디 느긋하게 와서 노닐면서

세상 바깥의 무궁한 취미를 붙이고 싶다.

 

 

 

 

 

● 화학산華嶽山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468미터의 산으로

중봉은 1,450미터이고 화학산 정상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중봉에 올라서면 애기봉을 거쳐 수덕산까지

약 10킬로미터의 능선이 이어지는데, 양쪽으로 가평천과 화악천을 끼고 있다.

 

 

 

화악산은 조선시대 춘천도호부 북쪽 80리에 위치하고 있다. 금화현 북쪽의 대성산大聖山으로 부터 산세가

굽어 돌아 영평의 백운산이 되고, 백운산 동쪽으로 뻗어서 화악산이 된다. 그 화악산의 북쪽은 오늘날

강원도 화천군 사창면이다. 사창면의 삼일리와 영당리 일대는 조선 후기에 곡운谷雲 혹은 화음동華陰洞

이라는 지명으로 널리 알려진 별천지였다. 현재의 곡운서원 터는 본래 곡운영당谷雲影堂이 있었는데,

김수증(1624~1701)을 추모하는 영당이었다.

 

김수증은 조선 현종 · 숙종 때 서인계 명문 출신으로 김상헌(1570~1652)의 손자, 김창협(1651~1708)과

김창흡(1653~1722)의 백부이다. 그는 1668 (현종 9)에 춘천을 거쳐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저어촌

齟齬村을 지나면서 화악산 북쪽 기슭의 풍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현감을 그만둔 1670년(현종 15)

3월에 서울을 떠나 실운實雲으로 들어와 그해 가을 초가집을 지었다. 실운은 사탄史呑이라고도 한다. 1674년

(현종 11)부터 1687년(숙종 13)까지는 제2차 예송과 기사환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여 서인이 실

각해 있었던 시기였다. 김수증은 제2차 예송으로 정국이 불안하자 1676년(숙종 2) 성천부사의 직을 버리고 가족

과 함께 실운동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53세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 때 아우 김수항이 죽자, 김수증은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 정사를 지었으나 갑술옥사를 계기로 다시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하고 곡운에서 은둔하였다.

 

김수증의 집안은 '세속의 견해'로 볼 때 붕당을 짓는다는 비난을 며치 못하였다. 그 자신도 '당론' 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었다. 김수증과 그 일가는 최상층의 지위를 점유하였는데, 가문의 배경과 현달한 학식, 풍부한 문화적

소양으로 보아, 높은 지위를 영위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처사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49세부터 74세까지

「유희령산기遊戲靈山記」 이하  「청몽루기淸夢樓記」까지 19편의 산수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토로한 산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삶의 방식이 조카인 김창협과 김창흡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김수증은 66세 되던 1689년에 「곡운기谷雲記」를 적어 곡운의 위치와 형세 들어가는 길,

자신이 선정한 곡운 9곡의 승경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

 

평강平康 땅 분수령에서 100여 리를 달려온 산이 꺾여 김화金化의 대성산大聖산, 大成山이 되고, 20여 리를 달려

수리산守里山 한 줄기가 되며 남쪽으로 5리쯤 구불구불 가서 큰 계곡에 임하여 산을 이루어 멈추어 선다.

그 산의 속명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겨, 청람산靑嵐山(영당리 뒷산으로 해발 485미터)이라고 고쳤다.

또 대성산 한 가지가 서쪽으로 가서 복자산福子山을 이루고 굽어 돌아서 하현이 되며 남쪽으로 가서 묘봉이 된다.

또 굽어 돌아 대다라치大多羅峙가 되어 산기슭이 갑자기 끊긴다. 또 묘봉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소다라치小茶羅峙

가 되고 굽어 돌아 백운산이 된다. 이로부터 또 동남쪽으로 가면 화악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으니, 바로 곡운의

남쪽이다. 또 수리산으로부터 동으로 10리쯤 달려 나가면 첩첩 산봉우리들이 화악의 동쪽 지맥과 함께  곡운의 동쪽

을 겹겹이 뒤덮어 천 번 만 번 둘러나가서 오리곡에 이르러 그 바깥 어구가 된다. 곡운을 기준으로 보면, 큰 산이

바깥을 두르고 작은 산이 안에 뒤얽혀 사면이 둥글게 감싸서 별세계를 열었다.

 

김수증이 곡운에 은둔한 것은 '시비의 소리가 귀에 이르러 오는 것' 을 막기 위한 행위였다.

「칠월 그믐에 화음으로 돌아오다」 라는 시를 보면 그런 뜻이 잘 나타난다.

 

 

도성의 시끄러움과 먼지는 정정城情을 손상하기에

산으로 돌아오매 일신이 가벼움을 느끼겠구나.

문에 찾아오는 길손 없어 도리어 기쁘구나

시냇물 솔바람 그 소리가 귀에 가득하여라.

 

 

 

곡운과 화음동은 김수증 이후 노론계 지식인들에게 있어  귀거래의 이상향으로 상징되었다.

우암 송시열도 생전에 곡운과 화음동을 예찬한 글을 다수 지었다. 화음동은 송시열이 강학하던 청주 화양동에

견주어진다. 또 홍길주(1786~1841)는 1810년 8월에 배로 소양강을 건너 곡운에 노닐고서 「곡운유람기」를 지었다.

그는 영당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청옥협靑玉峽에 이르렀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 아홉 구비를 모두 구경하였다.

18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 마재에 정착한 정약용도 1823년 4월 22일에 곡운서원을 둘러보고 참관기를 남겼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