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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설악산 1편>

도판 / 조선팔도고금총람도朝鮮八道古今總覽圖

1673년, 127.5×88.4cm, 개인 소장.

 

 

 

 

정범조丁範祖, 「설악산 유람기雪嶽記」

 

 

무술년(1778, 정조2) 가을, 내가 양양의 임소(치소)로 가다가 북쪽으로 설악을 바라보니, 구름 가에 우뚝하여 

아주 장대하였으나, 관리의 일정이 촉박하여 가서 놀 수가 없었다. 다음 해 3월 상운祥雲의 승丞 장현경張顯慶

사응士膺, 고을의 선비 채재하蔡載夏 군과 약조하여 함께 출발하였다. 그리고 철질 신광도申匡道, 사위 유맹환

兪孟煥, 아들 약형若衡이 따랐다.

 

신축일(17일)에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절의 주위에 천후天吼 · 달마達摩 · 토왕土王의 여러 봉우리들이 둘러

서 있다. 설악의 바깥 산들이다. 임인일(18일)에 신흥사 승려 홍운에게 견여를 인도하게 해서 북쪽으로 비선동飛

仙洞을 거쳐 들어갔다. 봉우리 모습과 물소리가 이미 정신과 혼백을 맑게 해준다. 고개를 올려 바라보니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수백심尋의 길이다. 견여를 내려서 오르는데, 벽은 모두 돌계단이다. 한 계단마다 한 번씩 숨을 몰아

쉬면서 올랐다. 장사응을 돌아보니 아직 아래쪽 계단에 있다. 그는 따라갈 수 없다고 절레절레 한다.

 

마척령을 오를 때 홀연 큰 바람이 일어나고 안개와 비가 내려서, 사방이 다 막힌 듯 캄캄하였다. 홍운 승려는

"이것이 중설악입니다. 날이 개면 설악 전체가 보일 겁니다" 라고 하였다.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기이한 봉우

가 사방에서 옹위하고 있으면서 삼엄하여 사람을 치려는 듯하다. 중간에 토혈이 뚫려 있어, 고즈넉하게 암자를

하나 들여 넣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일찍이 은둔한 곳이다. 암자에는 두 개의 사진(초상화)이 있는데, 매월당

을 유학자로서 그려둔 형상과 불자로서 그려둔 형상이다. 나는 배회하며 추모하면서 서글픈 느낌에 사로잡혔다.

공은 스스로 오세동자라 하였으므로 이 암자의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계묘일(19일)에 왼쪽 기슭을 넘어 아래로 내려오다가, 길을 꺾어 오른쪽으로 향하여 큰 골짝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산봉우리의 형세가 마척령馬脊嶺(오늘날의 마등령)보다 험준하다. 밧줄로 끌고 앞장 서서 가면, 뒤에서 미는 사람

이 꼬옥 들러붙어 10리를 간 후에 사자봉의 절정에 올랐다. 이것이 상설악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은 모두

산이다. 고니가 나는 듯하고 칼이 서 있는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한 것은 모두 봉우리요, 오지그릇 같고 가마솥 같고

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은 모두가 골짝이다. 산은 모두 바위이고 흙이 없으며, 짙푸른 색은 마치 쇠를 쌓아놓은 듯

빚깔이다. 사자봉의 동쪽은 조금 굽어 흘러가는 형세이다. 암자가 있어서 봉정鳳頂이라 한다. 전하는 말에 고승

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사자봉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 벼랑을 타고 남쪽으로 갔는데, 벼랑이 좁아 가까스로

디딜 정도였다. 발을 내디디는 곳은 낙엽이 쌓이고 바위가 무너져 있고 나무가 가로누워 있어서 벌벌 떨려

건너갈 가 없다. 왼켠 오른켠 산들은 모두 기이한 봉우리들로, 수목의 숲 위로 불쑥불쑥 솟아나 있다.

 

물은 뒤쪽 산에서부터 나와 골짝을 두루 덮으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골짝은 모두 돌이어서, 맑고 밝기가 마치 눈과

같다. 그 위로 물이 덮어 흐른다. 바위가 엎드려 있다가 솟아나고 움푹 파였다가 볼록 튀어나고 좁았다가 넓어지고는

하는데, 그 형세는 모두 물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대개 폭포를 이룬 것이 열서너 개인데, 쌍폭이 특히 기이하다.

못淵을 이루고 보洑를 이루고 만류漫流(흥건한 물 흐름)를 이룬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수렴

水簾이라 일컫는 것이 가장 기이하다. 이런 것을 종일 보다가 영시암에 들어갔다. 이 암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

이 이름 지은 것으로, 그가 일찍이 이곳에 은둔하였다고 한다. 봉우리와 골짝이 그윽하고도 기이하며, 흙이 있

어서 작물을 심을 수가 있다. 아름다운 수풀과 무성한 나무들이 많고 밤새도록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갑진일(20일)에 물을 건너서 남쪽 골짝 속으로 갔다. 계곡의 시내는 나무와 바위가 뾰족뾰족 솟아서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다. 조금 올라가자 바위가 모두 흰색이더니, 홀연 보랏빛 붉은빛으로 변하여 수면에 너른하게 그 빛이

서린다. 왼쪽에는 석벽이 감벽紺碧의 색으로 서 있고, 물이 그 가운데로 갈라져 나오며 쏟아져서는 콸콸 소리를

냈다. 앞에 산봉우리가 있는데 아주 험준하다. 견여에 찰싹 엎드려서 올라갔다. 좌측 기슭을 따라서 아래로 백 걸

음을 내려가자, 앞에 석벽이 수십 심尋(1심은 8척)의 높이로 우뚝 서서 마주한다. 색은 깨끗한 푸른빛이다. 폭포가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나는 듯이 쏟아져 내려, 영롱하기가 흰 무지개와 같았다. 바람이 잠깐 잡아채자 가운데

가 끊어져서 아지랑이며 눈이 되어, 가볍게 훌훌 날려 허공에 가득하게 되고, 남은 물보라가 때때로 옷으로 날려

들어왔다. 종자에게 피리를 불게 하여 폭포 소리와 서로 응답하게 하니, 맑고 명랑한 소리가 온 골짝에 울렸다.

이것이 바로 한게寒溪폭포이다. 내가 홍운에게 "이런 것이 또 있는가?" 물었더니,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풍악(금강산)구룡九龍폭포보다도 훨씬 장관이다.

동남방은 숲과 골짝이 아주 아름답다. 동쪽은 오색령五色嶺인데, 영천靈泉(오늘날의 오색약수)이 있어서

체증에 좋다고 한다. 수석水石이 많아서, 바라보니 그윽하고 괴이하였으나, 날이 늦어 끝까지 가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어 돌아와 백담사百潭寺에 이르러 묵었다.

 

을사(21일)에 북쪽으로 가서 비선동飛仙洞 뒷산을 따라 내려갔다. 산이 허공에 매달린 듯 급하다.

바위가 온통 뒤얽히고 구멍이 많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곧바로 자빠져서 죽을 것만 같다.

남쪽으로 마척령 등 여러 봉우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바라보노라니, 하나하나 모두 구름 가에 있다.

어떻게 나를 그 꼭대기에 올려두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흥사에서 묵고 병오일(22일)에 돌아왔다.

 

 

 

 

 

 

 

 

 

 

오늘 날, 설악산 깨나 타 본 산꾼이라면 정범조의 「유람기」를 읽어내리면 그 코스가 눈에 훤 할 것이다.

또한 박 배낭을 짊어지고, 자신의 두 다리로 걷는 오늘날의 산행에 익숙한 이들은 격세지감을 실감하게 될 터인 즉,

조선조의 신분제도 아래, 산행에서의 숙식과 소위 양반네들의 풍류에 동원된 승려들과 하층민의 고달픔이

이 유산록을 읽는 이들의 가슴마다에 절절히 새겨지리라.

 

 

조선 후기의 남인계 인사 정범조(1723~1801)는 56세 되던 1778년(정조 2) 7월에 양양부사를 제수받아

8월에 부임하였다. 때는 대흉년으로 새로 경작한 밭의 세금과 어민의 봉납을 면제하였던 시절이다.

이듬해 1779년 3월, 설악산을 유람하고 유산록을 지었고, 4월에는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정범조는 그보다 앞서 설악으로 놀러가는 박사해를 전송하며 쓴 글에서 "넓게 퍼져 대지에 서려 있는 것은

산의 정靜에서 이루어지므로 그것을 보고 나의 체體를 기르고, 비등飛騰하여 봉우리를 이루고 뒤흔들어

폭포를 이루는 것은 산의 동動에서 이루어지므로 그것을 보고 나의 용用을 활성화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 자신도 바로 설악산 유람에서 사의 정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체를 양성하고 산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그 용을 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정범조는 본관이 나주로,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현손이자, 정약용(1762~1836)의 친척 아저씨이다.

37세 되던 1759년(영조 32)에 진사시, 1763년(영조 39)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풍기군수와 공조참의를

역임한 후 정조 연간에 병조참의와 양양부사를 지냈다.

 

정범조는 사자봉의 조망을  가장 높이 쳤고, 청봉(대청봉)은 시계視界가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보지 않았다. 그는 설악의 지세와 행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개괄하였다.

 

 

설악은 인제와 양양의 두 고을에 걸터타고 있는데 인제가 그 4분의 3을 지니고 있다.

사자봉의 동쪽은 청봉(대청봉)으로, 사자봉보다 조금 더 높다. 하지만 올라가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동해에 그치고,

서남북은 설악이므로 사자봉보다 더 얻을 것이 없어 결국 오르지 않았다. 사자봉의 남쪽은 쌍폭과 수렴이다. 서쪽은

오세암이고, 그 서쪽은 영시암이며, 그 서쪽은 백담사이다. 멀리 바다가 그 북쪽을 담그고 있고, 풍악이 푸르게 솟아나서

마치 나계螺髻(소라고동마냥 틀어 올린 여인의 머리)와 같으며, 한계폭포(오늘날의 대승폭포) 그 서남쪽에 있다.

 

 

신흥사에서부터 오세암까지 40리, 오세암에서부터 사자봉까지 40리, 사자봉에서 영시암까지 40리, 영시암에서

한계까지 30리. 한계에서 백담사까지 30리, 백담사에서 신흥사까지 40리이다. 설악을 전부 둘러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모두 220리이고, 견여로 갈 수 있는 거리가 40리였다고 한다.

 

정범조는 정조 연간 여러 내외직을 거치며 남인 정파를 이끌다, 1794년(정조 18)에 지돈녕부사로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기로소에 들어간 후에도 다시 형조판서로 승진하여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고, 정조 말년까지

예문관 · 홍문관 제학으로 있었다. 정조 승하 후, 실록청 편집당상으로 일하다 1801년에 죽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