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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2편>

김하종金夏鐘, 《해산도첩海山圖帖》, <유점사>, 1815년,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

 

 

 

 

이원李黿, 「금강산 유람록遊金剛錄」

 

 

 

날이 늦어 장령獐嶺(노루목)을 넘어 계곡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들어가니 유점사 골짜기 입구였다.

뭇 산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수많은 계곡은 흐름을 다툰다. 가파른 봉우리와 끊어진 바위벽이 시내를 끼고 둘러 서 있다.

뒤를 잠깐 보고 다시 앞을 보니, 들어온 길을 알지 못하겠다. 봉우리들과 바위 벽들은 훌륭한 사람과 열사烈士들이

옷깃을 여미고 서 있는 것처럼 단정한 모습이다.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고요하며, 점잖은 외형이나 묵묵한 언색이

거의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시를 지었다.

 

계곡 북쪽에는 고개 하나가 있는데, 환희령이라고 부른다. 걸어갈 수는 있어도 말을 타고 갈 수는 없다.

날이 저물어 유점사에 이르렀다. 유점사에 스무 걸음 정도 못 미쳐서 작은 누각이 있다. 돌을 깎아 섬돌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끊어 누각을 물 위에 가로질러 놓으며, 가운데는 비워 두어서 건너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하였다.

누각 위에서 우러러보면 천 개의 봉우리가 다투어 누각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고, 굽어보면 물고기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현판에는 산영루山映樓라고 적혀 있다. 이에 시를 지었다.

 

얼마 후 승려 축잠과 계열이 나를 맞아 절 문 안에 들였다. 중첩한 누각과 복도로 이어진 전각이 우람하게 높고

날아갈 듯하며, 조각한 난간과 굽은 난간은 구름과 노을에 접하여 빛난다. 주위는 이천여 걸음이나 되고, 사백여

칸의 방들이 연이어 있다. 한가운데 있는 전각이 가장 높은데, 사면에 여덟 개의 창문이 있다. 전각의 중앙에는

나무를 깎아 산을 만들고 나무를 뚫어 굴을 만들어서는 그 안에 금 · 은 · 옥구슬 · 비취를 넣고 53개의 불상을

안치하였다. 현판에다 적기를 '흥인지전興仁之殿' 이라고 하였다. 그 엄청난 규모와 사치스럽고 화려한 치장은

동방에서 최고 수준이다. 슬프도다! 무릇 재물을 내는 것도 한도가 있고 백성들의 힘도 한계가 있다.

한 번 돌을 굴리는 수고와 한 번 느릅나무를 옮기는 노동도 모두 백성들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귀신이

날라다 주는 것이 아니니, 영동 백성들이 가난하고 고단할 수밖에 없겠다. 이에 시를 지었다.

 

흥인전의 동쪽 회랑 밖에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하여 작은 누각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치장을 하지 않은

인물상이 하나 있다. 관을 쓰고 비단옷 예복을 입고 허리띠를 차고 홀笏을 띠에 찌른 모습이다. 봄 가을 초하루와

보름에, 향불이 끊이질 않는다는데, 그 신주에 '고성태수노춘'의 신위' 라고 적혀 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옛날에는 신하들 가운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으면 그 임지에 사당을 세워 그 공에 보답하였다.

지금 노춘은 무슨공덕이 있어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승려가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는데 바로 절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 대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주조한 불상 53개가 쇠종을 타고 서역에서 바다를 통해 들어와서는 고성포에 이르러 쇠종을 끌고 이 골짜기로

들어 왔다. 태수 노춘도 뒤따라갔지만 쫓아갈 수 없었는데, 문수평文殊坪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보았고, 견령犬嶺에

이르러 개를 보았으며, 니대尼臺에 이르러서는 여승을 보았고, 장령에 이르러서는 노루를 보아, 불상이 간 곳을 물어

보았더니, 모두 간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 때문에 만나본 것들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지었다. 갈증이 심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르자 찬 샘물이 솟아났으므로 손으로 떠서 마셨다. 유점사 앞의 고개에 이르러서는 종소리를 듣고 기뻐 뛰었다.

이 때문에 그 고개를 환희령이라고 한다. 유점사에 이르러 보니 부처가 느릅나무 가지에 쇠종을 걸어놓고 

나무 위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노춘은 느릅나무를 가져다가 절을 짓고 탑을 만들었으며 불상을 안치 하였다.

그래서 유점사라고 한다.

 

오호라! 쇠와 돌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짐승의 본성이 사람과 다름은 어리석은 부부라도 다 아는 바이니,

이는 속일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주조된 불상이 걸어다니며 개나 노루가 말을 하겠는가? 그 사적은 괴이하고

허망하여 믿을 수 없다. 책을 다 보고서 그 책 끝을 펴보니, 고려의 유학자 묵헌默軒 민지閔漬가 지은 것이었다.

슬프다! 민지는 공자를 공부한 사람이다. 불교를 배척하지 못할 바에는 그대로 있을 일이지,

승려의 말을 쫓아 들은 바를 옮기다니,

어찌 우리 유학의 죄인이 아니며 세상을 속이는 잡배에 불과하지 않으리요?

 

 

금강산에는 강이 한 줄기 흐르는데, 금강산의 한 물웅덩이에서 시작해서 유점사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흘러 비스듬히

남쪽으로 향하고 다시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백 번 꺾어져 동으로 바다에 닿는다. 금강산 골짝 입구에 흐르는 강의

서쪽 언덕에 절 하나가 있는데, 창고가 풍성하였다. 바로 유점사의 양식 창고로 세조가 세운 것이다.

양식을 봄 가을로 거두어 들이고 내어주어 아침저녁으로 예불 드리는 데 쓰도록 했다고 한다.

(중략)

 

유점사의 유래는 실은 고려 의종 말 자순資順이 향산에서 이곳으로 와 거처하기 시작한 데서 기원한다고 한다.

그 후 혜쌍惠雙이 다시 창건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마침 서도西都의 양梁 처사가 풍수지리를 잘하여 조정에 고하였더니

장인들을 모으라는 뜻을 얻었다. 충혜왕 갑신년(1344)에 행전行田이 신축하기 시작하여 11년이나 걸려 완성하였다.

다시 조선 태종 무자년(1408)에 효령대군의 주창으로 법당과 누각을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불에 타고 중건하기를

반복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사명대사 송운松雲이 중창하였는데, 그 후로도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다.

고종 임오년에 큰 불이 나자, 고령의 우은愚隱이 다시 짓기 시작해서 다음 해 오백간으로 완성하였다.

 

 

이원은 고려 문인 민지의 <유점사기>를 비판하였다. 그 내용은 남효온의 <유금강산록> 중 유점사를 찾은

기록에 나오는 비판과 비슷하다. 곧, 남효온은 유점사에서 축명이라는 주지가 보여준 민지의 <유점사기>를

읽고, 그 글에 일곱 가지 망설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 첫째, 쇠가 물에 뜰 리 없다. 

◈ 둘째, 쇠가 스스로 움직일 리 없다.

◈ 셋째, 불교는 신라의 중엽에 들어와 이차돈이 불법을 이루었거늘,

신라 제2대 남해왕 때 그런 일이 있어서 유점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망설이다.

◈ 넷째,  우리나라의 불교가 남해왕 때 시작되었다면 불교의 전래가 중국 보다 앞선 셈인데,

그 중요한 사실이 역사에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남해왕 때 불교 전래설은 망설이다.

◈ 다섯째, '노춘이 부처를 찾아감에 어떤 중이 길을 인도했다' 고 하니,

불법도 있기 전에 승려가 있었다고 한 것은 망설이다.

◈ 여섯째, 승려가 불상을 취하자 부처가 화를 풀고 다시는 날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 일곱째, 사위월지국에서 기록한 쇠종의 범어를 노춘이 해석하였다는 것은 기이하다.

 

 

이렇게 비판한 뒤, 남효온은 "민지의 글은 단 한마디도 명교名敎에 보탬이 되지 못하니, 기록을 빼버림이

가하다는 것을 알겠다" 고 단언하였다. 삼국시대 초 사람들은 정해진 성이 없고 이름은 사람의 이름 같지도 않으니

노춘이라는 이름도 후세서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하고, 신라 말기에 학식과 술법을 겸비한 원효 · 의상 등

율사의 무리가 이 산의 사적을 과장하고자 후에 기록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원은 금강산 유람 때 마하연의 승려가 "눈으로 만물을 보느냐, 만물이 눈으로 들어오느냐?" 묻자

"눈으로 만물을 보기도 하고, 만물이 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대답하고는 격물물격설格物物格說을 지었다고 한다.

인식주관과 인식 대상의 상호작용을 중시하였다고 생각된다. 훗날 그는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원은 김종직의 제자였으므로 연산군 때 무와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이극돈 등 훈구파의 비행과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을 이극돈에게

발견되어 발생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충동으로 김일손 등 사림파를 처단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 하였다.

이때 이원은 김굉필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각각 장杖 80에 모두 변방 고을로 쫓겨나 봉수대의 정료간(봉수지기)이 되었다.

이원은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 나주에 양이量移(죄를 경감해서 가까운 지방으로 옮김)되었다.

연산군 10년에는 임사홍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 사건을 밀고하여 엄 · 정 두 숙의의 소생인 안양군 · 봉안군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 김굉필 등을 처형하였으며 김종직은 선왕을 헐뜯었다는 죄로 부관참시당하였다.

이때 이원도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두 아우인 이타와 이별은 세상을 피하였다.

이원은 1506년(중종 원년)에 신원되어 도승지의 직을 추증받았다. 미수 허목이 「묘갈」 을 지었다.

 

 

 

 

 

 

정선, <정양사正陽寺>, 18세기, 22.7×6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양사

 

정양사는 조선 태조가 담무갈보살을 친견하였다는 곳에 세운 절이다.

정양사를 드러내고 다른 절들을 봉우리 뒤에 숨겨두어 현顯과 은隱을 조화시켰다.

도道의 본체란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는 의미의 세계를 실경 속에 담아낸 것이다.

 

 

 

 

 

 

한편 이원은 표훈사를 돌아보고 기록을 남겼다.

 

 

날이 늦어 표훈사에 이르렀다. 주지 의희義熙가 내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잠잘 방을 정리해 놓고 맞이하였다.

먼저 다과를 내어 여행의 고단함을 달래고, 이후 성명을 물어 다음에 만날 때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의희와 함께 정양사에 올랐다. 정양사 주지 조인祖인 역시 나와 서울에서 교분이 있었던 승려이다.

두 승려는 절의 남쪽 대에 내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이때 날이 맑아 산천이 모습을 다 드러내었고 바람과 해는

밝고 시원하였다. 초목은 더욱 빛나고 바위는 기이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돌아보니 천 개의 봉우리와 만 개의 골짜기가 역력하다. 웅장하고 깊으며 굳세고 우뚝하며, 우람하여서 가장 높은

것이 비로봉이다. 그다음은 관음봉이며 망고대가 그다음이다. 그리고 일월봉의 여러 봉우리와 지장봉 · 달마봉이

그 다음이다. 사방이 쇠를 깎은 듯하고 천 개의 봉우리가 옥을 세운 듯한 것이 대유령에 봄이 들어 매화 무리가

다투어 꽃 피운 듯하며, 한나라 고조가 의롭게 거사하여 여섯 군대가 흰 복색을 입고 한꺼번에 궐기한 것과 같다.

또한 여러 봉우리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데, 높은 것, 삐죽한 것, 날카로운 것, 짧은 것,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모양, 호랑이가 성낸 듯한 모양, 가축이 화내는 모양, 팔뚝을 치켜드는 모양에다, 항우項羽가 자결하고도

아직 분기가 풀리지 않은 듯, 번쾌樊噲가 방패를 끼고 화가 나 돼지 어깨를 씹어 먹는 듯, 마치 부견符堅과 사현斜玄

이 비수沘水를 사이에 두고진을 쳐 천 개의 창과 만개의 칼을 좌우에 묶어세우고 보병과 기병이 종횡무진 달리는

듯하니, 참으로 천하의 일대 장관이요, 조물주가 예지와 기교를 죄다 드러낸 것이었다.

 

 

날이 저물어 표훈사에 돌아와 묵었다. 한 동자승이 유점사에서 왔는데 미간이 청수淸秀하며 웃음소리가 맑다.

나이는 16세 정도로 글을 조금 해독할 수 있기에 더불어 담소를 나눌 만하며 또 용렬하고 미천한 사람이 아니다.

이름을 물어보니, 승명은 행담이요, 속명은 효종이라고 한다. (중략)

그의 총명함과 지혜를 가상히 여겨 같은 침상에 누워 그가 중이 된 연고를 물으니 고개를 숙이고 대답치 아니한다.

 

 

다음 날 장안사로 향하려고 하는데 의희가 내 행탁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 쌀 한 말을 주며 노자로 삼게 하였다.

행담이 나를 따라가 지팡이가 되어 며칠 함께 모시하겠다기에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백운동 입구에서

놀게 되었는데 산수는 맑고 기이하며 초목은 늙고 울창하였다. 골짝기는 깊고 물의 근원은 멀어 대략 만폭동과

같되 그윽하고 깊고 한가롭고 고요함은 만폭동보다 더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이 골짜기에서

60년을 살았는데,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의 경치가 아름다운 때에는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얼굴빛도 전과 그대로이고 살과 머리카락은 모두 까맣답니다" 라고 한다. 나는 그를 은자라고 여기고 있다.

어쩌면 신선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장편 시를 지어 절벽 사이에다 썼다.

 

 

이원은 <유금강록> 끄트머리에서 금강산 유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아! 옛말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중용>에서 말한 높은 곳에 올라 '멀리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이에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는 것은 반드시 낮은 데서

시작한다' 는 의미를 알게 되고, <논어>에서 말한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라는 취지를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중도에 쓰러지고마는 나약함에서 떨쳐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한 과정을 마친 뒤에 완성하게 된다는 학문을

분발하게 된다. 이것이 어찌 기이한 구경거리만 찾고 멋진 경승만 고르는 일에 그치겠는가?

인仁과 지智를 체득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한 가지 보탬이 될 것이다.

 

 

 

 

 

필자미상, <금강산십이곡병풍>, 19세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하단에 해금강, 중단에 물과 사찰, 상단에 봉우리를 배치한 구도이다.

봉우리는 곧 지고한 세계를 뜻하며 계곡 물과 사찰은 하행의 지향과 상승의 의지를 의미한다.

바다는 곧 해인海印의 세계이다. 평면 속에 정신 의지의 지향을 담아낸 것이 놀랍기만 하다.

 

 

 

 

 

 

홍인우, 「관동록關東錄

 

 

무술일 새벽, 승려 성정이 나가서 날씨를 보고는 "오늘은 쾌청하므로 비로봉에 오를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침밥을 서두르고는 여명에 고원적암 서쪽의 시내를 따라 나아갔다. 시내에는 물이 없었으므로, 시내와 골짝을 

걸터 넘어서 곧바로 북쪽으로 15리쯤 갔다.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나는 동쪽 시내를 따라서 7, 8리를 갔는데, 혹

은 끊어진 벼랑을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덩굴이 얽힌 잣나무를 부여잡고 가기도 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산허리에 이르자 바위 사이의 물 흐름이 우묵한 형상을 이루었는데, 맑고 차가워서 마실 만하였다.

바위틈에는 다른 풀이 없고 오로지 산개山芥가 이미 늙은 것과 당귀가 떨기로 자라나서 비대한 것을 볼 뿐이다.

백여 줄기를 뜯어서 점심의 로 삼도록 시켰다. 나는 소요逍遙 하면서 큰소리로 시를 읊었다.

밥을 먹은 후 다시 석각을 부여잡고, 5, 6리쯤 가서 비로소 영랑재에 올라, 천봉만학의 기괴한

형상을 굽어보았다. 그 경개를 조금 들어서 이름을 들어 말 하자면 이러하다.

 

마치 사람의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새의 모습을 한 것도 있으며 짐승의 모습을 한 것도 있다.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은 앉은 듯한 것도 있고 일어 선 듯한 것도 있으며 우러러 보는 듯한 것도 있고 굽어보는 듯한

것도 있다. 마치 장군이 군진을 정돈하여 백만 군졸이 창을 옆으로 비끼고 칼을 휘둘어 다투어 앞으로 내달려서

적으로 돌진하는 듯산 것도 있다. 혹은 늙은 승려가 공空의 이치를 담론하고 수천의 승려들이 가사를 어지러이

걸치고서 급히 정진精進에서 돌아오는 듯한 것도 있다. 새의 모습을 한 것은, 날개를 펼친 듯하거나 모이를 쪼는

듯하거나, 새끼를 부르거나 꼬리를 뒤채듯 하는 것도 있다. 혹은 기러기 무리가 날개를 나란히 하여 항렬을 이루어

가을 하늘에 점을 찍어 열 지은 것 같기도 하다. 혹은 한 마리 난鸞새가 외로운 그림자를 떨어뜨리면서 배회 하다가

거울 같은 물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짐승의 모습을 한 것은 웅크린 듯하거나 업드려 있는 듯하거나

달리는 듯하거나 누워 있는 듯하다. 양떼가 흩어져 풀을 뜯다가 해가 저물자 내려오는 듯하기도 하고,

사슴 떼가 험한 곳으로 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놀라 추락하는 듯하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망고대와 만폭동에서 보았던 것은 모두 아이의 장난과 같다.

 

영랑재에서 절정에 이르기까지 4. 50리를 에둘러 가고 비스듬히 비스듬히 가는 길에, 해송과 측백이 모두 바람을

싫어하여, 줄기가 늘어지고 서로 뒤덮어서 짙은 푸른빛과 농취籠翠의 빛을 띠어 높은 것은 서너장丈쯤 된다.

사람이 그 위를 걸어가기를 마치 풀 가교 위를 걷는 듯이 한다. 여강驪江 승려 지능志能이 발을 헛디디며 구르듯

가기를 4, 500 걸음을 가서 비로봉에 올랐다. 사방을 빙 둘러보니, 호호만만浩浩漫漫하여 그 끝까지 나아간 곳이

어디인 줄 알지 못할 정도이다. 표표飄飄하기가 마치 학을 타고 하늘 위로 오르는 듯하여 아무리 날아가는 새라고

하여도 나보다 위로 솟구치지는 못할 듯하다. 이 날 마침 천지가 개어 쾌청하여 사방에 미세한 구름조차 없다.

나는 승려 성정에게 말하였다. "물을 보려면 반드시 수원數源까지 보아야 하고 산에 오르려면 반드시 가장 높은

곳을 점유하여야 하는데, 요령이 없을 수 없소. 산천의 구역과 경계를 하나하나 지목할 수 있겠소?"

성정이 상당히 많은 산수를 지목해서 보여주었다.

 

백두산에부터 남쪽으로 내달리기를 거의 이천 리를 하여, 회양에 이르러 철관령이 되고, 동쪽에 일어나서 추지령이

되며, 웅장하게 뻗기를 일백여 리를 하여 고성에 이 금강산이 되고, 이 금강산에서도 이 비로봉은 우뚝 뽑혀나서

동쪽으로 서려 끝까지 다 뻗어 있다. 가지 쳐 나온 봉우리와 끄트머리의 골짝이 빼어남을 싸우고 내달림을 다투어

이루 다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북쪽으로 말하면, 두루 감아서고 길게 대치하며 곧바로 에워싸서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은 육진六鎭의 산이 아니겠는가. 우쑥하게 홀로 빼어나다만 뾰족한 정수리만을 드러낸 것은

묘향산의 봉우리 아닌가. 내가 일찍이 지도를 열람하고 함경도의 고을들은 곧바로 바다의 연안에 열 지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라보매, 두만강 이남의  여러 진鎭은 서쪽에서부터 꺾여서 동해로 들어갔다.

 

동쪽으로 말하면, 큰 바다가 질펀하게 가득 차서 하늘에 접하여 접선이 보이지 않으며, 영동의 여러 고을은 명사

明沙와 대호大湖의 사이에 빠져 위치가 보이지 않는다. 남쪽으로 말하면 청라靑螺가 점점이 들어서서 넓게 비껴

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어 시계가 희미하고 안개 기운이 허공에 가득해서 다시 변별할 수가 없다. 서쪽으로 말

하면 낙조가 망창莽蒼하고 하늘빛이 묘애杳靄하여, 그것이 산인지 바다인지를 알 수가 없다. 산 가운데 지목할

수 있는 것으로는 검산劍算(永興) · 오도五道 · 황룡黃龍 · 설악 · 오대 · 치악 · 두타 · 저산猪山 · 청평 · 용문 ·

백운 · 천보 · 천마 · 성거 · 보개 · 수양 · 구월  등으로 보이는 산들이 혹은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칼날

같기도 하다. 오직 저산과 치악은 조금 융기하여 솟아 있다. 치악의 남쪽으로는 어떤 산이 구름 하늘 사이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리산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이 봉우리에는 3개의 줄기가 있다. 그 하나는 동쪽으로 뻗어서 일출봉 · 월출봉 · 구정봉 등이 되었으니, 곧 구룡연의

서쪽이다. 월출봉으로 부터 남쪽으로 꺾어져서 안문봉 · 미륵봉 · 설응봉이 된다. 미륵봉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서

 시왕봉 · 망고봉 · 혈망봉 등이 되니, 곧 만폭동의 동쪽이다. 그 하나는 남쪽으로 달려서 원적봉이 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북쪽으로 서려서 영랑재가 되었다. 이 영랑재가 흩어져서 서남쪽 내산의 뭇 봉우리들이 되었으니, 곧 정양봉

의 동쪽이다. 종자에게 이런 내용을 기록하게 하고는 바위에 기대어 홀로 서서 한껏 길게 시를 읊고, 마침내 바위틈

찾아서 시를 적었다. 함께 오른 사람들이 그것을 다 본 뒤에, 예실을 따라서 내려가, 원적암에 돌아가 밥을 지었

다. 남쪽으로 3리를 가서 다시 안문천을 건넜다. 수목의 사이를 뚫고 가는데, 푸른 등덩굴과 비취빛 삼나무가 우거져

혹은 갈 길을 잃기도 하였다. 다시 10리를 가는데, 길이 극도로 위태로워, 정말로 "뒷사람이 앞사람의 신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본다" 는 말이 이것에 해당하였다. 나무떨기를 부여잡고 따라 나가서 비로소 안문봉에

올랐는데 발의 힘이 다하여 아주 피로해서 풀을 깔고 누워서 신음을 하니, 쓰리고 아픈 것을 감내할 수가 없었다.

봉우리로부터 내산과 외산이 구분되는데, 내산은 모두 바위이다. 이 봉우리를 넘자 비로소 흙을 밟았다.

동쪽으로 내려가기를 5리쯤 하여 상원사에 묵었다. 이날 80여 리를 갔다.

 

 

 

 

 

필자미상, <금강산십이곡병풍>, 19세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하단에 해금강, 중단에 계곡 물과 사찰, 상단에 봉우리를 배치한 구도이다.

봉우리는 곧 지고한 세계를 뜻하며 계곡 물과 사찰은 하행의 지향과 상승의 의지를 의미한다.

바다는 곧 해인海印의 세계이다. 평면 속에 정신 의지의 지향을 담아낸 것이 놀랍기만 하다.

 

 

 

 

 홍인우(1515~1554)는 금강산의 내산을 주로 돌아보았다.

특히 외산의 거찰인 유점사는 가보지 않았다. 그 까닭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산수를 원유遠遊하기도 하고 청유淸幽를 즐기기도 한다. 천석을 즐기는 것은 만폭동에서 다하였고, 

높이 올라 조망하는 것은 비로봉이 홀로 가장 뛰어나다. 하물며 지세에는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고 경치에는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높은 것은 낮음의 누적이고 큰 것은 작음의 극치이다. 높고 큰 것을 이미 내

눈으로 다 보았거늘 낙고 낮은 것을 보려고 하필 내 다리를 수고롭게 하랴. 또한 이에 관해서는 나의 견해가 있다.

높고 낮음과 크고 작음은 물物이다. 만수萬殊의 관점에서 보면 나我의 동정動靜이지 물物의 동정動靜이 아니다.

일본一本의 관점에서 보면 물物도  또하 나我이다. 그것을 둘로 보면 산의 푸르름과 물의 아스라함을 마주하여

나는 형과 색이 나의 귀와 눈을 어지럽힘을 알 뿐이다. 하지만 하나로 회동시키면 푸르름과 아스라함은 모두 나의

성정性情 속의 물物이다. 도道는 물物과  아我의 구별이 없고, 이理는 피彼와 차此의 차이가 없다. 큰 것을 보고서

작은 것까지 깨우친다고 하면, 정말로 역시 도道에 해롭지 않다. 이것이 내가 유점사를 감상하려 하지 않는 뜻이다.

 

 

 

홍인우의 「관동록」은 당대의 명유 퇴계와 율곡의 깊은 관심을 끌었기에 그 두 인물의 발문을 얻었다.

이이는 그 글에 주석을 달기까지 하였다. 홍인우가 관동에서 돌아온 후 6월 초사흘, 성균관 대제학으로 있던

퇴계가 홍인우의 <동유시고>를 보내달라고 하였고, 초닷새에는 성균관 관리를 보내 홍인우의 「등유록」을

배껴 오도록 하였다. 1553년(명종 8, 계축) 중양절 서너 날 전, 홍인우의 「금강산 유람록遊金剛山錄」에

서문을 지어 '방외지유方外之遊' 로서의 산수 유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동 산수의 아름다움은 동방에서 으뜸이되, 금강산이 천하에 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불교 서적에 기록되어 있고

원나라 황제가 칭송하였으며 명나라 고황제(태조)도 경탄하였다. 무릇 천하의 외딴 지역에 처해 있으면서 천하의

뜸 명성을 치달리고 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세상 선비들 가운데 진실로 방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모두 한번

산을 엿보고 싶어 하지만, 조정과 저자에 연연하여 구름과 노을이 아득히 동떨어져 있으므로, 민령岷嶺(아미산)

을 상상하는 일을 그저 수고로이 할 뿐이며 구지仇池의 꿈도 파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다행히 단두 사람 직접 가

서 유람하는 자가 있더라도, 능히 기이하고 장대한 광경을 궁극에까지 다 보아 온 산의 요령을 얻고 한 구역의 거려

鋸麗를 다하는 자는 대개 드물다. 무릇 명산이경名山異境은 실로 천지의 비장秘藏이요, 영진靈眞의 굴택窟宅이니

어찌 사람마다 모두 엿볼 수 있겠는가?

 

 

 

홍인우는 1554년에 29세로 요절하였다. 퇴계는 조목趙穆에게 홍인우의 '유산록'을 보내면서

문도 있고 문학도 있던 그가 요절한 것을 애도하였다.

율곡 이이도 1576년 중춘에 홍인우의 <관동록>에 발문과 함께 주注를 달았다.

 

 

 

천하의 산수는 삼한만큼 기특한 것이 없되, 관동이 가장 뛰어나다.

관동의 천석泉石 가운데서도 가장 맑은 것은 금강산 동학洞壑이 이것이다. 유람하는 선비들이 그 승경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가 아니로되, 오로지 남양 홍장洪丈이 그 정수를 얻었다. 그 글은 상세하면서도

번다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았다. 산의 뿌리와 맥, 물의 원류와 지파, 사물을 삼키는 구름과

토해내는 안개, 모여선 수풀과 무리진 바위 등 천태만상을 하나의 붓으로 모두 다 거두어서 남거나 빠진

것이 없기에, 열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밖을 나지 않고서도 일만이천 봉우리가 또렷하게 눈앞에 있게

만들었다. 문장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기에 금강산의 산수와 더불어 그 기이함을 함께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래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물은 각각 이理를 지녀, 위로는 일월성진과 아래는

목산천, 미세하게는 조박漕粕과 깜부기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체道體 가 깃들어 있어서 지극한 가

르침이 아닌 것이 없되, 사람들이 비록 아침저녁으로 시선을 주고 있으면서도 그 이理를 모른다면 그러한

사물을 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선비들 가운데 금강산에 노니는 사람들도 역시 눈으로 볼 따름이고,

산수의 취향을 깊이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 가운데 나날이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와 아무 구별이 없다.

홍장으로 말하면 산수의 취향을 깊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산수의 취향만

을 알고 도체를 알지 못한다면, 역시 산수를 안다고 해서 높이 칠 것은 못된다.

장의 앎이 어찌 이것에 그치겠는가?

(후략)

 

 

 

한편 홍인우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위험한 사상가' 였던 허균虛筠(1569~1618)은 광해군 초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바람 · 물 · 삼나무 · 회나무가 밤새도록 비벼대고 너울거려 음향을 냅디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 권필權鞸에게 보낸 일이 있다.  

 

 

 

벼슬할 뜻은 식은 재처럼 싸늘해지고, 세상맛은 씀바귀처럼 쓰며, 조용히 사는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으니,

어찌 내 몸 편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수고하겠소. 오직 벗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속에 맺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회포를 다 풀 수 없습니다. 가을 기운이 점점 짙어가니 부디 양친을 잘 모시고 양지養志를 다

하기 바랍니다. 편지로는 말을 다 못하고 뜻도 다 적지 못합니다. 다 갖추지 않습니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금강산 유람록>을 들여다 보노라면,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조정에서 쫓겨난 사람 할 것 없이

사고와 사유의 폭이 일망무제로 뻗어나감을 볼 수 있다.

 

동네 뒷산만 올라도 시원한 판에 하물며 그 대상이 금강산인 바에야!

그것은 모름지기 백회혈이 뚫리면서 영적靈的 감흥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열락의 지경이리라.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