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의혼(意魂) 유적지를 돌아보기 위한 행로.
북이면 소재 '개천정사'를 향해 다리를 건너는데
'국토종단' 이란 깃발을 배낭에 꽂은 위 사진상의 일행이 시야에 들어 온다.
어른 한 명에 세 명의 귀여운 꼬맹이들.
곡절을 물으니, 파주 임진각에서 부터 내려 오는 길이라고.
살아있는 교육을 위해 홈스쿨링으로 자녀들을 케어하고 있다는 아빠의 설명.
하도 기특하고 대견해서 한참을 붙잡고 이런 저런 궁금증을 해소한 다음
돌아서는데 웬지 모를 가슴 뿌듯함이 일시에 몰려든다.
느낌상, 아빠의 대범하고도 올곧은 신념을 아이들이 일백 퍼센트 잘 소화하고 있는 듯.
부디 이 가정과 아이들의 앞날에 밝은 서광만이 가득하길...
개천정사(介川精舍)
국도종단 아빠가 방금 지나쳐온 '개천정사'의 내력을 내게 물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기에 이 자리에 개략적인 내용만.
과거와 달리 정사 오름길 입구를 펜스로 가로막아 놓았더라는 사실.
더 궁금하시면 이내 블로그 검색창에 '개천정사'를 쳐 보시길...
(과거 사진 재 인용)
<개천정사 중건기>에 나오는 하곡 정운룡의 시 한 편.
皓月盈天地(호월영천지) 밝게 빛나는 달은 천지에 가득한데
人間夜未央(인간야미앙) 인간의 밤은 아직도 중간이네.
起看松竹影(기간송죽영) 일어나서 송죽의 그림자를 바라보니
蒼翠滿池塘(창취만지당) 푸르고 푸른 빛이 연못에 가득하네.
三一祠
삼일사는 모현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사 신상우, 신태식, 유상설, 신국홍, 유상학,
고용석, 유상순, 박광우, 정병모, 오상구, 신경식, 유상능, 신종식 등 13인을 제향하는 사우다.
모현리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음 3월 3일) 화전놀이를 빙자하여 당산에 모여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유상학, 신국홍 등이 마을 사람 200여명과 모현리 일대를 돌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모자로 유상설, 고용석, 유상학, 신경식 등을 끌고 갔다.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등이 4월 4일 주민 200여명을 앞세워 헌병대 주재소로 몰려 갔다.
마침 사거리 장날이라 유상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2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가
전일에 잡혀 간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 등을 체포
장성읍으로 옮겨 고문을 가하고 법원으로 넘겨졌다.
광주지방법원의 판결은 유상설, 고용석은 2년,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은 1년 6월,
유상학, 유상순은 1년, 오상구, 박광우를 징역 6월에 처했다.
해방이 되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거리에 3·1운동의적비를 건립하고, 3·1계를 조직
3·1절에 지사들의 위령제를 지내오다 1990년에 삼일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일사 묘정비
성암신공태호공적비
호남의 실업가로 '동화석유' 를 이끌었던 고 신태호 회장이 아마도 이 마을 출신인 듯.
대체적인 추세이지만, 요즘 어딜가나 과거와는 달리 사우를 비롯한 어지간한 유적지는
관리자가 없는 이상 어김없이 자물쇠를 걸어놓아 내부를 둘러보기 어려운 형편.
이곳 역시 마찬가지.
헌창 사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 석자만이 텅빈 마당을 지켜보는 형상.
'장성읍 소재 공원' 에 자리한 <호남창의 영수 기삼연선생 순국비>
이 역시 '장성공원'에 자리한 <삼일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
삼일운동 기념 사업비
한낱 '운동' 이라니....!
'3 · 1 운동' 이란 명칭은 너무도 당연하게 <3 · 1 혁명>으로 바뀌어야 한다.
삼일혁명 기념사업에 동참한 인물들과 그 의의를 적은 비석 들.
삼일운동 열사 추모단
장성읍 성산교회를 찾았다.
새로 부임했다는 이 교회 목사를 만나 동판에 관한 내용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대답.
장성군 북이면 백양사역 앞에 자리한 '독립탑'
축령산의 봄
호수 너머로 검푸른 편백숲이 울창한 모습.
칠현(七賢) 유적지
장성 최초의 서원인 '모암서원' 이 있었던 곳.
분위기 상, 고사 속 '죽림칠현' 을 떠올리게 한다.
장성서삼초등학교
성재 김기철 스승님 항일운동 추모비
(이 분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찾을 길이 없어 숙제로 남겨 둔다.)
애국지사 경사 변순기 선생 기적비
(장성 봉암서원 앞)
변순기(舜基)선생의 자는 중화(重華) 호는 경사(耕史)로 1884년(고종 21) 5월 16일
이곳 장안리에서 아버지 쌍용(雙容)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익히고 광주농림학교에 진학 신학문을 배웠으며 함평학교에 교사로 재임하였다.
일본의 조선 강제 침탈로 학교에서 애국계몽을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학교를 떠나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 후로 함평여관을 운영하며 동지를 모아 변호사 서정희 등과함게 조국해방의 뜻을 펴기 시작.
마침내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김복현 등과 함께 1,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및
독립가를 인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안마을 영사정(永思亭)
출옥한 후 1921년부터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서 전남학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가
창립되자 적극 가담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안리 입구에 있는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광주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을 때는 “조선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승려가 된 독립운동가 변진설>
변진설은 위 기적비의 주인공 변순기 선생의 아들로 1909년 11월 이곳 장안리에서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 부터 한학을 익히다 성산초교를 졸업, 1925년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1928년 광주고보 4학년 때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만주 등지에서 조선독립군의 활약을 듣고,
일제의 탄압에 성토하는 동맹휴업을 주도하며 “악랄한 식민지정책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5월부터 동맹휴학을 시작하여 1선이 구속되어 무너지면 2선이 이어가고 또 2선이 구속되면 3선이
시위를 이어갔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1928년 8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지난 23일 장성경찰서 형사 4명이 광주고보 동맹휴업으로
퇴학 처분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변진설을 검거하였고, 정학처분을 당한 장성의 김천기와 김인중
등을 소환조사한 뒤 두 사람은 석방하고 변진설만 구금하였다”고 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그해 11월 29일 대구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징역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출소하였다.
출소한지 한 달 뒤인 1928년 12월 변진설은 양친에게 출가할 뜻을 전하고 1929년 1월 백양사로 출가,
4월 8일에 만암대종사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운문암에서 참선 수행을 시작하였다.
<백용성스님의 제자가 되어 독립자금을 공급하다>
변진설에 대한 기록은 그가 출옥한 뒤 승려가 되었다는 내용이 그의 부친인 경사 변순기의 기적비에 나타나 있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출가하여 법명을 월주(月舟), 법호는 백용성 스님이 제자로 받아들이며 지어준 봉암(鳳庵)이다.
법호를 봉암으로 한 것은 그가 태어난 장안의 봉암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양사에서 송만암스님에게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 화엄사에서 당대 불교학의 대가였던 진진응 스님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1939년 독립선언문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받았다.
서울 대각사에 있던 조선불교선종총림 문서에 의하면 당시 용성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은 승려가 4명이었는데
변진설은 법명이 월주(月舟), 법호가 봉암(鳳庵)으로 나타나 있다.
월주스님은 1938년까지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에 있는 화과원 원주로 재임하였는데
화과원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독립자금을 제공한 곳으로 드러났다.
동아대학교 최영호교수는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사 승격 지정 용역보고회]에서
화과원을 "백용성 선사와 당대의 선지식인들이 선농 불교를 실천하면서 항일독립운동과 함께 불교의 개혁, 사원의
자립경제, 지역 빈민 아동의 교육복지사업, 불교 경전의 역경과 저술 등을 전개한 역사·문화적인 거점 공간"이라며
“'화과원(華果院)'이 독립자금을 대던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적 거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에 있는 화과원은 47만7천274㎡의 임야로 일제강점기 3·1 운동의 민족대표로
항일민족운동과 함께 불교개혁운동을 실천한 백용성 선사가 1927년 설립하여 운영한 곳으로 월주스님이
이 곳의 원주로 실질적인 운영을 한 것이다. 그는 1941년 조선불교선종(현 대한불교조계종)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해인사 법보학원 강사, 대원사 강원 강사를 역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인대학, 마산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한다.
※ 위에서 말하는 '화과원'은 오늘날의 '백장암' 을 지칭 하는 듯.
<월주스님은 왜 잊혀버린 인물이 되었나?>
백용성 스님의 제자로 화과원 원주를 지낸 월주스님은 불교계는 물론,
장성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그의 업적과 족적에 비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주스님은 일제시대 홍덕희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딸 주이를 얻고 곧 헤어진다.
변주이씨가 아버지 월주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스무 살 때 진해 대광사를 찾아가서였는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주이씨의 큰딸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하고 청도 운문사 강원에 들어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불교의 종조(宗祖) 다툼에 환멸을 느낀 월주스님은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과 마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마산대학이
경남학원에 넘어가자 학교를 떠나 은둔수행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입적하였다고.
지난 2006년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에서 포상을 받은 드문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월주스님이 만주의 대각교 농장과 함양 화과원의 원주로 재임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소문으로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증명하기 어려워 그의 공적에 수록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 변순기와 변진설 부자에 관한 내용은 '장성신문' 에 게재된 것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인들의 유람록 <한라산 > (0) | 2021.05.10 |
---|---|
선인들의 유람록 <백두산> (0) | 2021.05.09 |
남문창의비와 오산창의사 (0) | 2021.04.23 |
공부하다 죽어라 (0) | 2021.04.04 |
6종의 독립선언서 (0) | 2021.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