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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공부하다 죽어라

 

 

혜암성관대종사 행장 慧菴性觀大宗師 行狀

 

혜암대종사慧菴大宗師1920년(庚甲) 음력 3월 2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은 김원태金元泰이고 모친은 금성 정丁씨이며 속명은 남영南榮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은 강직하면서도 자비로웠다.

14세에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수학修學한 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열람하였으며,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17세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 · 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던 중 어록을 보다가,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하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호되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로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하였다.

1946년(27세) 합천 해인사에 입산 출가하여 인곡麟谷 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성관性觀' 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스님은 출가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자불와長坐不臥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하였으며, 가야총림선원伽倻叢林禪院에서

효봉 스님을 모시고 첫 안거를 하였다.

 

1947년(28세)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 자운 · 우봉 · 보문 · 도우 · 법전 · 일도스님 등 20여 납자衲子와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 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였다.

1948년(29세)에 해인사에서 상월霜月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比丘戒를 수지하고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하였다.

1949년(30세)에는 금정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 회상과 가야총림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51년(32세) 초봄에 해인사 장경각에서 은사이신 인곡스님께서 묻기를

 

여하시달마척리지소식如何是達磨隻履之消息인고?

금오야반서봉출金烏夜半西峰出입니다.

여하시유마두구지소식如何是維摩杜口之消息인고?

청산자청산靑山自靑山이요 백운자백운白雲自白雲입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오 오역여시吾亦如是로다

 

'어떤 것이 달마대사가 한쪽 신을 둘러메고 간 소식인고' 하시니

'한밤중에 해가 서쪽 봉우리에서 떠오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어떤 것이 유마 힐이 침묵한 소식인고' 하시자 '청산은 본래 청산이요 백운은 본래 백운입니다' 라고 답하니

인곡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러하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며.

 

다만 한 가지 이 일을 고금에 전해주니 머리도 꼬리도 없지만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

하시고 '혜암慧菴' 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통영 안정사 천제굴闡提窟, 설악산 五歲庵, 오대산 서대西臺와 동대東臺,

태백산 동암東庵  등지에서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더욱 고행 정진하였다.

특히, 1952년(33세) 범어사 동산스님 회상에서는 하안거 대중 88명 가운데 유일하게 안거증을 받았으며,

천제굴에서는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방바닥 한 가운데 구들장을 파내고 성철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다.

1953년(34세) 봄, 6 · 25 전쟁 말기에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행 정진하였고,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서는 적멸보궁까지 6개월 동안 밤낮없이

걸어 다니며 행선行禪 정진을 하였다.

 

1957년(38세) 겨울, 오대산 사고암史庫庵 토굴에서 방에 불을 때지 아니하고 검정콩 10알과 한 줌의 잣 잎으로

일종식一種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수마睡魔를 항복받고 5개월 동안 초인적인 고행 정진 끝에

주야불분晝夜不分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하더니 홀연히 심안心眼이 활개豁開하여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미즉생멸심迷則生滅心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오래진여성 悟來眞如性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오구타료 迷悟俱打了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  일출건곤명日出乾坤明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

 

이로부터 동화사 금당선원, 오대산 서대와 북대, 상원사 선원, 지리산 상무주암, 통도사 극락암 선원,

묘관음사 선원, 천축사 선원, 용화사 법보선원 등 제방 선원에 나아가 더욱 탁마장양琢磨長養하였다.

1967년(48세)에 해인총림 유나維那, 1970년(51세)에는 대중의 요청에 따라 해인사 주지를 잠깐 맡기도 하였다.

1971년(52세) 통도사 극락암 선원에서 동안거 중에 경봉 조실스님께서 '봉통홍중공峰通紅中空' 의

음자韻字에 맞추어 심경心境을 이르라고 하시니, 다음과 같은 계송을 지었다.

 

영산회상 영취봉(靈山會上 靈鷲峰)이여  만리무운말이통(萬里無雲萬里通)이로다
세존염화일지화는(世尊拈花一枝花)는  역천겁이장금홍(歷千劫而長今紅)이라
염화당시오견참(拈花當時吾見參)이면  일봉타살투화중(一棒打殺投火中)하리라
본래무물망언어(本來無物亡言語)하니  천진자성공불공(天眞自性空不空)이니라


영산회상 영취봉이여 구름 한 점 없으니 만리에 통했도다
세존께서 들어보인 한 송이 꽃은 미래제가 다하도록 길이 붉으리라
꽃을 드실 때 내가 보았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 불속에 던졌으리
본래 한 물건도 없어 언어마저 끊겼으니 천진한 본래성품 공마저 벗어났네



다음 해 봄, 수행처를 남해 용문사로 옮겨 정진함에 제방諸方의 납자와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이 모여들어

첫 회상會上이 이루어졌으며, 그 후 1973년(54세),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더욱 용맹정진하니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여 다시 회상이 이루어졌으며, 그해 봄 운상선원雲上禪院을 중수重修할 때에 먼지 속에서 작업 도중 홀연히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수기授記를 받았다.

 

진철심금강마塵凸心金剛하야   조견연섭고비照見蓮攝顧悲하라

때묻은 뾰족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베어내고  연꽃을 비춰보아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라

 

1979년(60세)부터는 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1990년(71세)까지 총림선원 대중과 함께 정진하였으며

유나維那 · 수좌首座 · 부방장副方丈으로서 해인총림의 발전과 수행 가풍 진작을 위하여 진력盡力 하였다.

특히, 스님은 출가 이후 가야산 해인사 선원, 희양산 봉암사 선원, 오대산 상원사 선원, 금정산 범어사 선원, 영축산

극락암 선원, 지리산 상무주암과 칠불암 선원, 조계산 송광사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 · 효봉 · 동산 ·

인곡 · 경봉 · 전강선사 등을 모시고 45년 동안 용맹정진하였으니, 그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두타고행頭陀苦行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龜鑑이요, 계율이 청정함은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1981년(62세)부터는 해인사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달마선원)을 개설항 매 안거 마다 1주일 철야 용맹정진을 지도하고

매월 2회 토요 철야 참선 법회를 개최하여 약 500여 회에 이르는 참선 법문參禪法問을 설說 하는 등 수 많은

재가불자를 오직 참선 수행으로써 20년 동안 교화하였다.

1987년(68세)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4년(75세)에는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74세) 11월, 당시 조계종 종정이시며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성철 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심에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6대 방장에 추대외어 총림 대중을 지도하였다.

특히, 선원 대중에게는 오후 불식을 여법히 지키도록 하고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 하며 납자衲子로서 철저히 수행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매 결제 안거 중에 총림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1주일 용맹정진 기간에는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도

빠짐없이 대중과 함께 정진하며 직접 후학을 지도하고 경책하였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불사와 1998년 종단 분규사태 시에는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종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戒行과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올곧게 수행 정진한 스님은 1999년(80세) 4월,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되어 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2001년(82세) 12월 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인과因果가 역연歷然하니 참선 공부 잘해라' 라고 당부한 후 임종게를 수서手書하니

 

我身本非有요 心亦無所住라 

鐵牛含月走하고 石獅大哮吼로다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마침내 열반에 드니 세수는 82세요 법랍法臘은 56년이었다.

2002년 1월 6일 해인사에서 5만여 사부대중이 운집하여 영결식을 종단장宗團葬으로 엄숙히 거행하고

다비茶毘를 봉행하니, 오색영롱한 사리 86과顆가 출현하였다.

100일 동안 사리 친견법회를 봉행하였더니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2007년 12월, 문도들은 스님이 남기고 간 친필원고를 모아서 <혜암대종사 법어집 I , II>를 발간하고

해인사 일주문 입구에 위치한 '비림'에 사리탑과 행적비를 세웠다.

 

 

 

 

 

 

 

 

원당암 염화실에서

 

 

 

 

 

 

 

 

 

 

원당암 선방 용맹정진 (불기 2544년)

 

 

 

 

선방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 종정 취임식에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는 모습(불기 2543년)

 

 

 

종정 추대식에서 불자를 들어 보이시는 모습

 

 

 

 

장성 백암산 백양사 무차법회(불기 2542년 8월)

 

 

 

 

 

혜암 스님 친필

 

 

 

 

 

 

 

 

 

 

 

 

 

 

 

 

 

 

가야산 일원 암자순례길, 원당암 추녀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아직도 이내 귓전에 생생히 들려오는 듯.

 

 

 

 

 

 

광복 직후, 당시 화물칸에 몸을 싣고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할 때였어요.

그 때 화물칸에는 30여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며 가더니

어느 장로가 내게 와서 혀를 차는 거예요,

 

"스님을 보아하니 젊은 양반이 불쌍하군요. 금을 캐러다니며 금맥을 모르고 다니니 말이오."

 

이 말에 나는 거듭 고맙다고 치하하고 나서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예수님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라고 물었지.

 

그 장로가 '예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신데 나오고 말고 할 게 있느냐?' 고 대답하기에 나는 재차

 

'만약 제게 그러한 질문을 해주신다면, 예수는 내 아들놈이라고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장로가 몹시 화를 내더군. 그래서 그들 30명이 모여 앉은 곳으로 가서 '속 시원한 해명을 해주겠다' 고 하니

 

그들이 '한 번 들어보자' 고 합디다.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도 내 아들놈이요. 이제 속이 시원합니까?

 

이 범부가 어찌 성인들께 욕을 하겠소. 다만 여러분들이 우상, 우상 하면서도

참으로 우상을 모르기에 말씀드린 것이외다.

 

별 보고 진리를 깨달은 정반왕의 아들 싯달태자의 육체가 성인입니까?

 

그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분이 예수입니까?

 

역시 육체는 고깃덩이요, 그 마음이 예수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들이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갑디다.

 

- 혜암선사문화진흥회 <공부하다 죽어라>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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