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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6종의 독립선언서

●   3 · 1 독 립 선 언 서    ●   2 · 8 독 립 선 언 서   ●  대 한 독 립 선 언 서

●  대한독립여자선언서    ● 조  선  혁  명  선  언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태극기

1923년, 189×142cm, 등록문화재 395호, 이군옥 소장, 독립기념관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김붕준(金朋濬: 1888~1950년 납북)이 보관하였던 유품으로

지금은 유족에 의하여 독립기념관에 기탁되어 있다.

 

 

 

 

 

 

 

 

 

 

3 · 1 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하야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야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야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야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의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에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幷進)하기 위(爲)하야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천(是天)의 명명(明命)하며
시대(時代)의대세(大勢)이며, 전(全) 인류(人類) 공존(共存) 동생권(同生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天下) 하물(何物)이던지 차(此)를 저지(沮止) 억제(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掠主義), 강권주의(强勸主義)의 희생(牲)을 작(作)하야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累千)년에 처음으로 이민족(異民族) 겸제(箝制)의 통고(通告)를

상(嘗)한 지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生存權)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심령상(心靈上) 발전(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민족적(民族的)

존영(尊影)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對照流)에

기여(寄與) 보비(補裨)할 기연(奇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창(宣暢)하려 하면,
장래(將來)의 협위(脅威)를 삼제(芟除)하려 하면,
민족적(民族的) 양심(良心)과 국가적(國家的)염의(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興奮) 신장(伸張)하려 하면,
각개(各個) 인격(人格)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 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고치적(苦恥的) 재산(財産)을 유여(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자자손손(孜孜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 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民族的) 독립(獨立)을 확실(確實)케 함이니,

각개(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하매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김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안이 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 하야,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樂)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야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려 안이 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원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안이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함이오,
결코 구원(舊怨)과 일시적(一時的) 감정(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羈)미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功名的)

희생(犧牲)이 된 부자연(不自然), 우(又) 불합리(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自然), 우(又) 합리(합理)한 정경대원(正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로서 출(出)치 안이한 양국병합(兩國倂合)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統計數字上) 허식(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兩) 민족간(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업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실적(今來實績)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이해(理解)와 동정(同情)에 기본(基本)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 안인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안일 뿐 안이라,
차(此)로 인(因)하야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축(主軸)인 사억만(四億萬)
지나인(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야,
그 결과(結果)로 동양(東洋) 전국(全局)의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금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東洋) 지지자(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금 몽매(夢寐)에도 면(免)하지 못하는 불안(不安), 공포(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내(來)하도다.
과거(過去) 전세기(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내(來)하야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 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에
세(勢)이니, 천지(天地)의 복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世界)의 변조(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모 주저(躊躇)할 것 업으며, 아모 기탄(忌憚)할 것 업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야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民族的) 정화(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오등(吾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幷進)하는도다.
남녀로소(男女老少) 업시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萬彙) 군상(群象)으로 더부러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하게 되도다.
천백세(千百世)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곳 성공(成功)아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를인뎌.

공약삼장(公約三章)

일(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하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일(一).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일(一).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 조선 민족 대표 -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해설>

 

'3 · 1 독립선언서' 는 천도교 측의 부탁을 받은 최남선이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고,

종교 지도자들 33명이 민족을 대표해 서명했다. 민족 대표 33명은 천도교 지도자 15명, 기독교 지도자 16명, 불교

지도자 2명이다. 선언서에는 천도교 대표 손병희,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

순으로 먼저 각 종교 대표 이름이 들어갔다. 이후 이름은 '김'이 '권'보다 앞서거나 '량', '류', '리'로 발음하는 등

순서와 표기가 지금과는 조금 다르지만 가나다순으로 적었다.

최종적으로 민족 대표 33명이 확정된 날은 1919년 2월 27일이다.

 

'3 · 1 독립선언서'는 그날 저녁 무렵부터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만일천 장에서 삼만오천 장쯤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28일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전국에 배포했다. 3월 1일, 7개 도시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모두 3 · 1 독립선언서는 인쇄 기계가

있는 학교나 교회에서 수백 장, 수천 장씩 찍어 냈고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열리던 만세 시위 현장에 뿌려졌다.

 

'3 · 1 독립선언서'에는 자유와 평등, 인권 등 근대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조선의 독립이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인류 행복에 기여할 것이라는 국제주의 시각도 녹아 있다.

특히 비폭력을 내세우면서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독립을 향한 민족의 뜻을 외치자는 결연함이 강조되어 있다.

 

 

 

 

2 · 8 독립선언서

 

2 · 8 독립선언 유학생 출옥기념 사진.

 

1919년 2 · 8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으로, 대표자 9인이 모두 출감한 후인 1920년 4월에 찍었다.

 

 

 

 

 

 

 

조선청년독립단 모든 단원은 우리 이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룰 것을 기약하고 선언하노라. 사천삼백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문명 민족의

하나이다. 비록 어떤 때는 중국 황실에 새해 인사를 바친 적도 있었으나 이는 조선 황실과 중국 황실 사이에 맺은

형식적 외교 관계에 불과했고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요, 한 번도 통일 국가를 잃고 이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일이 없도다.

 

일본은 조선과 일본이 입술과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자각한다고 하여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했다. 또한, 영국 · 미국 · 프랑스 · 독일 · 러시아 등 여러 나라도 독립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전 하기를 약속했도다. 한국은 그 은헤와 의로움에 감격해 각오를 단단히 하여 여러 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도모했도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할 때 일본은 한국과 공수 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벌이니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근본 취지였다. 한국은 더욱 그 호의를 받아들여

육해군의 작전을 돕지는 못했으나 주권의 위엄까지 희생하며 가능한 모든 의무를 다하여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추구했도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 회의가 열렸을 때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이 참가할 수 없게 했고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의 대표자가 임으로 일본이 한국에 행사하는 종주권을 결정했다.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믿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과거 약속을 위반하고 당시 유약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였으니 '국력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얻을 만한 시기까지' 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 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한국이 세계 나라들과 직접 교섭할 길을 막았다.

이로써 '상당한 시기까지' 라는 조건으로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았다.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 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 군대와 헌병 경찰을 각지에

두루 배치하였고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 경찰을 고용해 한국이 전혀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후에 다소 명석하다 일컫던 한국 황제를 몰아내고, 황태자를 받들어 모시고, 일본의 앞잡이들로 이른바 합병 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 속에서 합병 조약을 체결하니 이에 우리 민족은 건국 이래 반만년 만에 한국을 지도하고

원조하노라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이와 같이 엄청난 사기의 성공은 세계 흥망사에

특별히 기록할 인류의 크나큰 치욕이라 하노라. 보호 조약을 체결할 때 황제와 몇몇 역적 아닌 대신들은 모든 수단을

다해 반항했고 발표 후에도 온 국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반항을 다했다. 사법권과 경찰권을 뺏고 군대를

해산했을 때에도 그랬고, 합병을 당학도 나서는 손안에 작은 쇠붙이조차 없는데도 가능한 온갖 반항 운동을 다하다가

정밀하고 예리한 일본 무기에 희생된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 후 십 년간 독립운동을 하며 희생된 사람이 수십만이며

참혹한 헌병정치 아래 손발이 묶이고 입과 혀로 말을 못 하는 억압을 받으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어진 적이 없으니

이를 보더라도 힐한합병이 조선 민족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는지라.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일본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어긋나는 운명을 겪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때에 올바른 정의를

세계에 청구할 권리가 당연히 있으며 또 세계 개조를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앞장서서 승인했으니

지금 과거의 죄악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 하노라.

 

또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때의 선언과 반대로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고대의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비인도적 정책을 응용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크고 작은 정치 권력, 집회 결사의 자유, 언

론 출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며 심지어 신앙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상당히 구속하고 행정, 사법, 경찰 등

여러 기관이 조선 민족의 인권을 침해했다. 공공 이익에서 우리 민족과 일본인 간에 우열의 차별을 두어 일본인에 비해

조선 민족에게 열등한 교육을 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영원히 일본인의 노예가 되게 하고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민족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욕하고 모욕했다. 소수의 관리를 빼고는 정부의 여러 기관과 교통,

통신, 군사 경비 관련 기관은 전부 또는 대부분 일본일만 고용하여 우리 민족이 국가 생활의 지식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영원히 빼았으니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무력 압제와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 아래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원래 인구가 많은 조선에 무제한으로 일본인을 옮겨 오게 해서 토박이인 우리 민족은 해외로 떠돌게

되었으며 국가의 여러 기관은 물론이요, 여러 사설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고용하여 조선인이 직업을 잃게 했다.

또한 조선인의 부를일본으로 유출하고 상공업에서는 일본인에게 특수한 편익을 주어 조선인이 산업적으로 발전할

회를 빼앗았다. 이와 같이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인은 이해관계가 부딪치며,부딪치면 그

손해를 보는 사람은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되찾고자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를 염원하는 처지에서 보건대 위협자이던 러시아는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박애를 기초로 한 새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중이며 중화민국 역시 그러하다. 아울러 점차 국제연맹이 실현되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라. 그러므로 한국을 합병한 가장 큰 이유가 이미 소멸되었다. 따라서

조선 민족이 무수한 혁명과 반란을 일으킨다면 일본에 합병된 한국은 오히려 동양 평화를 어지럽힐 화근이 될지라.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이로써 성공치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온갖 자유행동을 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향한 뜨거운 피를 흩뿌릴지니 어찌 동양 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오. 우리 민족은 한 명의 군사도 없도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 일본에 저항할 실력도 없도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항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하리라.

 

우리 민족은 수준 높은 문화를 오래도록 누리고 반만년 동안 국가 생활을 경험해 온 민족이다. 비록 여러 해 전제

정치의 해악과 불행이 우리 민족을 오늘에 이르게 했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해 왔기에 우리 민족이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것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부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자유행동을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을 반드시 이룰 것을 선언하노라.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

 

최팔용  이종근  송계백  이광수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백관수  서 춘  윤창석

 

 

 

 

결의문

 

1.  우리 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조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또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힐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우리 단은 일본 의회와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이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단할 기회를 부여하기를 요구함.

 

3.  우리 단은 만국강화회의 민족 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하기를 청구함.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일본에 머무는 각국 대사와 공사에게 우리 단의 주장과 대의를 각기 정부에 전달하기를 의뢰하고 동시에 위원

두 명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함. 이상 위원은 이미 파견한 우리 민족의 위원과 행동을 같이함.

 

4  앞항의 요구가 실패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항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함.

이로써 일어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책임지지 않음.

 

 

 

<2 · 8 독립선언서 해설>

발표될 때의 제목은 그냥 '선언서' 였지만 다른 독립선언서와 구별하려고 발표된 날짜를 붙여 2 · 2 독립선언서' 라고

부른다.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일본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 [YMCA]회관에서 유학생 총회를 가장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하여 이광수가 작성하고 유학생 11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대회를 마친 다음에는 시가 행진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이광수를 제외한 서명자 전원은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했다. 한편 이광수는 선언서를 다 작성하고 1월 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으로

된 선언서를 각국으로 발송했다. 2 · 8 독립선언서는 국내에도 들어와 3 · 1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고가 되었으며,

민족 대표의 3 · 1운동 준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선언서에는 일본의 침략과 국권 찬탈을 '사기와 폭력' 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당한 [독립]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항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성시내를 행진하는 사람들

 

 

 

 

대한독립선언서

 

 

<해설>

'대한독립선언서' 에는 작성 날짜가 1919년 2월로 적혀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월을 양력으로 보아 3 · 1운동 이전에 발표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음력으로 보아 3 · 1 독립선언서가 발표

되고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던 1919년 3월 11일 발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으 주도 아래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신채호, 이승만, 박은식,

안창호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1917년 7월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

과 함께 조소앙이 초안을 잡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석판으로 사천장을 인쇄하여 만주 일대와 연해주, 유럽, 미국,

베이징, 상하이, 일본 및 국내로 발송했다고 한다.

"섬(일본)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한국)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중국)은 대륙으로 돌아갈지어다.

각기 원상을 회복함은 아시아에 다행인 동시에 너희(일본)에게도 다행" 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담고 있으며,

특히 독립을 실현할 방법으로 '육탄혈전'이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폭력'을 원칙으로 삼은 3 · 1 독립선언서와 차이가 있다.

 

 

대한독립선언서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대대로 전하고자

여기 이민족 압제의 학대와 억압을 벗어 버리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부터 우리 대한의 韓이지, 이민족의 한이 아니다.

반만년 역사의 정치와 외교는 한국 왕과 황제의 고유 권한이요, 백만 방리의 높은 산과 수려한 물은

한국 남녀의 공유 재산이다. 우리 민족은 기골과 문화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뛰어나므로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함께 전진할 하늘 백성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털끝만 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한 뼘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다.

 

슬프도다. 일본이 무력으로 지은 재앙이여!

임진왜란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숨기지 못할지며, 갑오년(1894년)이후 대륙에 지은 죄는 세계 만국이

용납지 못하리라 저들은 전쟁을 즐기는 악습으로 자국 보호니 자위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사람의 도리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했다. 맹세를 어기는 저들의 패역한 버릇은 영토니 문호 개방이니 기회니

하는 구실로 거짓을 일삼다가 결국 불의하고 무법한 밀약을 강제로 맺었다. 저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를

핍박하여 신앙의 전파를 방해했고, 교육을 제한하여 문화의 유통을 막았고,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의 무단 통치와 이민移民의 술수로 한민족을 멸하고 일본인을 이식하려는 간악한 흉계를 실행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우리 한민족을 없애려 했던 계략이 얼마인가.

지난 십 년 간 무력으로 지은 재앙이 일으킨 난리가 지금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저들의 좋지 않은 행실을

꺼리시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셨다. 이에 우리들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람의

도리에 응하여 대한 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저들이 합방한 죄악을 널리 알리고 잘못을 밝히니,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저들의 이른바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멋대로 실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 협박과 불법 무도와 무력 폭행이 극에 달했으니, 이는 국제 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방 결과는 군경의 만행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없애고, 종교를 억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가로막았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와 정의와 정의와 법리에 비추어 세계 만국에 입증함으로써

합방 무효를 선포하고, 저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이 무력으로 지은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돌아갈이어다. 각기 원상을 회복함은 아시아에 다행인 동시에

너희에게도 다행이거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 너희에게 있으니,

옛것을 돌이켜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의 이로움을 거듭 타이르노라.

 

보라! 인민에게 악마와 도적이었던 압제와 강압 정권의 잔불은 이미 꺼졌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은 실로 오랜 세월의 모질고 사나운 운명을 모조리 씻어 내려는

하늘의 뜻을 실현함이요, 힘없는 나라들과 스러져 가는 민족들을 구제하는 대지의 복음이다.

 

장하도다! 시대의 정의여! 이때를 만난 우리들이 함께 나아가 무도한 강압 정권의 속박을 벗어 버리고 광명한 평화

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널리 알리며 인심에 따르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서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 건설을 함께 돕는 까닭이다. 우리 여기 이천만 대중의 뜨거운 마음을 대표하여, 감히 거룩한 신께

분명히 아뢰고 세계 만방에 고하노라.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함께 응하는 순수한 동기로써 민족 자주와

보전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 함이요, 결코 눈앞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우연히 생긴 충동이 아니다.

 

또한 은혜와 원한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비분명적인 보복 수단에 만족함이 아니라, 실로 항구적이고도

일관된 국민의 지극한 정성이 격렬히 일어나 저 이민족이 깨닫고 스스로

새로워지게 함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치 계략을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다.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사람은 공의로써 나아갈지라. 모든 방법으로 군국 압제를 제거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첫째가는 뜻이다. 무력으로 병합함을 근절하여 천하를 평등하고 균등하게

하는 도리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다. 밀약과 사사로운 전쟁을 엄금하고 대동 평화를 널리 알리지니

이는 우리가 나라를 되찾아야 하는 사명이다.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고 남녀 차별과 빈부

격차를 없애며,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고루 지혜로워지고, 나이 든 사람과 어린 사람이 고루 제 수명을

누릴 수 있도록 사해 인류를 균등하게 헤아릴 것이니, 이는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기치이다. 나아가 국제 사회의

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이니 이는 우리 한민족이

때를 만나 부활하여 이루려는 궁극적 의의이니라.

 

아,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이천만 형제자매여!

단군 대황조께서 상제의 도움을 받으시어 우리의 기회와 운수를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을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훔쳐 간 도적을 한 번에 무찌르라. 이로써 사천 년

조상의 찬란한 빛을 드높일 것이며, 이로써 이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일어나라 독립군아! 삼가 나아가라

독립군아! 천지간에 얽혀 한 번 죽음은 사람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니, 개 돼지와 같은 일생을 누가 구차하게

꾀하리오. 살신성인하면 이천만 동포와 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니 내 한 몸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되찾으면 삼천리 옥토가 내 집안의 소유이니 어찌 내 한 가족 희생하지 않으랴!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이천만 형제자매여!

국민의 본분을 자각한 도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 평등을 실현하려는 자립임을

명심할 것이며,하늘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온갖 사악한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건국임을 확신하며,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단군 기원 4252년(1919년) 2월 일

 

 

 

가나다순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정재관  조용은  여 준  유동열  이 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 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 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 방  윤세복  조 욱  최병학  한 흥  허 혁  황상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상해애국부인회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게 보낸 문서.  1919년 6월

1919년 6월에 상해애국부인회에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게 보낸 문서이다.

두 단체는 정신과 목적이 같은 독립운동단체이므로 앞으로 통신과 연락을 취해 서로 많은 이익과 도움을 주자는 내용이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1940년 6월 17일.

1940년 6월에 결성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단체로 활동했던 여성 민족운동 단체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해설>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도 작성 날짜가 1919년 2월로 적혀 있지만, 중국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와

밀접한 관련이있기 때문에 작성 시점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양력 2월로 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

음력으로 보아 1919년 3월 무렵 대한독립선언서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선언서는 여성들이 작성한, 여성들의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이후 1919년 9월 중국 지린 부근의 훈춘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언서는 1,290자의 순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대표자 8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1919년 4월 8일 연해주에서 선언서 1천여 장을

보내 간도 지역에 배포했으며, 국내와 도쿄 등지에도 보낸 흔적이 있다고 한다.

남자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비록 아는 것이 적고 몸이 약하지만 여자들도 다 같은 국민이고

양심을 가졌기에 "의리의 갑옷투구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진격의 신발을 신고 한마음으로"

일어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우리는 반만년 문명 역사와 이천만 신성 민족으로 삼천리 강토를 족히 누릴만

하거늘, 침략적 야심으로 세계의 공공 법리를 무시하는 저 일본이 야만적 추세로 조국의 흥망 이해는 안중에 없는

역적들과 협동하여 형식에 불과한 합방을 강요 했다. 또한 갖가지 악독한 정치 아래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가 노예가

되고 희생되어 오랜 세월 동안 씻지 못할 수치와 모욕을 받고 모진 목숨이 죽지 못해 스스로 멸망할 함정에 갇혀서

하루가 일 년 같은 지루한 세월이 십여 년을 지났으니, 그동안 무한한 고통은 다 말할 것 없이

우리 동포의 마음 속에 품은 비수로 징계해야 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더든, 하물며 수천만 생명이 억울해하고 불평하는 하소연을 지극히

공평무사 하신 상제께서 통촉하심이 없으리오. 고금에 없는 세계 대전의 끝에 민본주의로 만국이 평화를 앞장서서

주장하는 오늘에 이르러 감사하신 남자 사회 곳곳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만세 소리에 엄동설한의 반도 강산이

봄바람을 만나 만물이 소생할 시기에 이르렀으니 아무쪼록 용기 위에 용기를 더하고 열성에 열성을 더하여

그 결실을 거두심을 피 끊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바이다.

 

우리도 비록 규중에서 생활하며 지직이 적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의 무리이나 다 같은 국민이요, 양심은 한가지다.

용기가 월등하고 지식이 높은 영웅 도사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마친 사람이 허다하건만, 비록

지극히어리석은 아녀자라도 정성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소소한 하늘의 이치이다.

우리 여자 사회에서도 동서를 막론하고 후대에 모범될 만한 숙녀현원이 허다하건만 특별히 오늘날 우리가 본받을

선생을 들어 말하자면,서양의 '스파르타' 라는 나라의 '사리' 라는 부인을 들 수 있다.

 

부인은 농촌 태생으로 아들 여덟을 낳아 국가에 바쳤더니 전장에 나가 승리하기는 했으나 불행히 여덟 아들이 다

전사했다. 부인은 그 참혹한 소식을 듣고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며 말하길 "스파르타야, 스파르타야,

내 너를 위하여 여덟 아들을 낳았다." 라고 했다더라. '이탈리아'의 '메리야' 라는 부인은 사창가 출신으로 이탈리아가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있음에 분개해 극복 방안을 연구하고 청년 사상을 고취하여 결코 굽히지 않는 투지와 신출

귀몰하는 수단으로 마침내 독립 전쟁을 지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열렬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감은 눈을 다시 뜨고 "여러분, 국가! 국가!" 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이에 전 군대가 일시에 격렬히 피가 끓어올라 맹세했는데, 이탈리아가 그날로 독립되었다더라.

 

임진왜란 때 진주의 논개, 평양의 화월이라는 여인 또한 화류계 출신으로 그 힘이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적장 청정과 소섭을 죽였으므로 국가를 다시 붙든 공이 두 분 선생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이러한 급한 때를 당해 비겁하고 나약학 습관을 버리고 용감한 정신으로 분발하여 이러한 여러 선생을

본받아 의리의 갑옷투구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진격의 신발을 신고 한마음으로 일어나면,

지극히 자비하신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우리나라 충혼열백이 지하에서 도우시고 세계 만국의 여론이 일 것이니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 깃발 아래 활발한 새 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고함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 의무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가슴 깊이 우러나는 붉은 마음으로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오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않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 독립 만만세.

 

 

[단군] 기원 4252년(1919년) 2월  일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다뉴바에서 거행된 3 · 1운동 1주년 기념행사. 1920년

중가주 지역의 한인들이 3 · 1 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뉴바에 모였다.

기념식과 함께 말과 자동차를 앞세워 대대적인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미국사회에 호소했다.

 

 

 

 

 

 

 

조선혁명선언

<해설>

 

'의열단' 이름으로 발표되어 '의열단 선언' 이라고도 한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13명이 조직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는데.

일본에 대항하려면 더욱 과감하고 급진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암살, 파괴, 폭동 등

폭력을 독립운동의 주요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이후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의 대상으로 선정한 관청이나 인물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이 비판을 받자 의열단이 추구하는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정립하려고 1922년 12월

신채호에게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다. 온건하고 외교적 방법에 치중하는 독립운동 노선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결별한 신채호는 한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선언문을 작성하여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선언문은 3 · 1 운동 이후 제기된 자치론과 준비론, 외교론을 비판하고

나라를 빼앗은 일본을 폭력을 동원해 몰아내자는 '민중 직접 혁명론'을 주장했다.

강력한 민족주의적 이념과 함께 혁명에 사용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정부주의적 요소 담고 있다.

 

 

 

 

조선혁명선언

 

1

강도 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애고, 우리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다 박탈했다.

경제의 생명인 산과 숲, 내와 못, 철도, 광산, 어장 ....... 에서부터 소규모 공업의 원료까지 다 빼앗아, 모든 생산을

칼로 베고 도끼로 끊었다.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세, 지방세 주초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등 기타 잡세를 날로 늘려서, 피를 있는 대로 다 빨아 간다. 웬만한 상업가들은 일본 상품을 조선인에게 매개

하는 중개인이 되어 자본집중의 원칙 아래에서 차차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인민, 곧 일반 농민들은 일 년 내내 피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거둔 것을 자기 한 몸과 처자식의 입에 풀칠할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쳐, 영원히 일본의 살을 찌워 주는 소와 말이 될 뿐이다. 끝내는 그 소와 말 같은 생활도

못 하게 되니 일본인 이주민이 우리 땅에 들어오는 숫자가 해마다 높은 비율로 빠르게 늘어서,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한 뼘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시베리아의 황야로 내물려 가서

굶주린 귀신에서 떠돌아다니는 귀신으로 될 뿐이다.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엄격하게 시생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고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가 전혀 없어, 고통과 분노와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행복과 자유 세계에는 눈뜬 장님이 된다. 자녀가 태어나면, '일본어가 국어다. 일본 문자가 국문이다.' 라고 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서 어쩌다 조선사를 읽게 되면, '단군은 소잔명존의 형제다.',

'삼한 시대 한강 이남은 일본이다스리던 땅이다.'라고 일본 놈들이 거짓말로 적어 놓은 것을 그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보게 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쯤 일본화한 노예 같은 글뿐이다.

 

똑똑한 인물이 태어나면, 환경의 압박을 받아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러지 않으면

'음모사건'이라는 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단근질, 채찍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을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적전제 정치를 하는 나라의 형법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감옥 문을

나온다고 해도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하고 창작하는 본능은 생활이 곤란하여

단절되며 진취적이고 활발한 기상은 형편의 압박 때문에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 하게 온갖 방면으로 속박,

채찍질, 구박, 압제를 받아, 바다로 둘러싸인 삼천리가 하나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예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타고난 본능까지 잃고서 노예에서 기계가 되어, 강도의 손아귀에서 부림을 당하는 물건이

되고 말 뿐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긴다. 을사 이후 의병이 일어났던 13도의 각 지방에서 일본 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최근 3 ·1운동 이후 수원, 선천 .....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 서간도, 노령

연해주 곳곳까지 가는 곳마다 주민을 함부로 죽인다. 마을을 불태운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능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또는 몸을 두 동강 세 동강 내어 죽인다, 아동을 모질고 잔인하게 벌준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일본의 강도 정치, 곧 이민족의 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우리는 혁명적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애는 것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누구녀?

너희들은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틀림없이 이루겠다는 굳은 약속이 먹도 마르기 전에 삼천리 강토가 집어

먹힌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 인민의 생명 재산 자유를 보호함', '조선 인민의 행복을 증진함' 등을 거듭 밝힌 선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천만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았느냐?

3 · 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누그러뜨리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한두 매국노를 시켜

이따위 미친 주장을 퍼뜨리는 것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사람은장님이아니면 어찌 간사한 역적이 아니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이런 요구를 기꺼이 허락한다 하자.

 

이른바 내정 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 민족은 모두 굶주린 귀신이 될 뿐 아니냐?

참정권을 얻는다 하자. 자기 나라 무산 계급의 피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 나라의 식민지 인민으로서 노예

대의원 몇 명을 선출한들 굶어 죽는 재앙을 어찌 구제하겠느냐?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식의 자치이든지 간에

일본의 강도적 침략주의의 명패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하는 이상에는, 거기에 딸린 조선 인민이 어찌 자치라는

구차하고 헛된 이름으로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나 보살이 되어 하루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과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한꺼번에 철수하여, 일본인 이주민을 한꺼번에

소환하고 명목상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일 과거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치욕'이라는 말을 아는인간이라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높이 받들 수 없다.

 

일본 강도 정치 아래에서 문화 운동을 부르짖는 사람이 누구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이 발달하여 쌓인 전체를 일컫는 말이니 경제 약탈의 제도 아래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한 민족은

종족을 보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문화를 발전시킬 가망이 있으랴? 쇠퇴하고 망한 유태 민족

인도 민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돈의 힘으로 조상이 남긴 종교적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예전의 유산을 지키는 것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시키거나 지킨 전례가 있더냐?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 잡지를 가지고 '문화 운동'의 목탁이라고 스스로 떠들며, 강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고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근거하여 우리는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사람이나

정치에 기생하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 일본을 쫓아내자는 주장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외교론이다. 조선 시대 오 백 년 문약 정치가 '외교'를 나라를 지키는 좋은 계책으로 삼아 오면서 말세에는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갑신 이래 유신당, 수구당의 번성과 쇠퇴가 거의 외국의 도움이 있고 없음으로 결정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이 나라를 끌어들여 저 나라를 제압하는 것에 불과했다. 남에게 의뢰하는 그러한 습성이

일반 정치 사회에 전염되어 갑오, 갑진 두 전쟁에서 일본은 수십만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나라와

러시아 두 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에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 하는 이들은 어리석고 욕심 많고 포악한 관리나 역적에게 칼 한 자루, 폭탄 한 개를 던지지 못하고

겨우 청원서나 여러 나라 공관에 던지며 기껏탄원서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나라가 외롭고 힘이 약하다고 슬피

호소하면서,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 심지어는 적군인이 처리하여 결정해 주기만

기다렸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 년 만에 처음 당하는 치욕에

조선 민족이 분노를 표시한 것이 겨우 하얼빈의 총, 종현의 칼, 산림 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지난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사람이 보면 침 뱉고 욕할 역사일 뿐이며, 어진 사람이 보면 마음 상할

역사일 뿐이다. 그러고도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가는 아무개 아무개 지사들의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에게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거의 천편일률로 '앞으로 미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기회가 오면' 같은 문장이었다. 최근 3 · 1운동에서 여러 인사가 '평화회의, 국제연맹'을 지나치게

믿고 선전한 것이 도리어 이천만 민중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뜻과

기운을 없애버리는 매개가 되었을 뿐이었도다.

 

둘째는 준비론이다. 을사조약 당시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발치듯 보냈던 종이쪽지로 나라의 주권이 넘어가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정미년(1907년)의 헤이그 밀사도 독립을 되찾았다는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의심이 들고 전쟁 아니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겼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 전쟁을 하겠느냐?

산림 유생들은 대의 명분 앞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따지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큰 갓에 소매 넓은 도포를 입고

대장이 되어 지휘 하면서, 사냥꾼으로 화승총 부대를 모아 가지고 조선과 일본의 전투에 나섰다.

그렇지만 신문 쪼가리나 본 사람들, 곧 시대 흐름을 짐작한다는 사람들은 그리할 용기가 안 난다.

이에 "오늘, 지금, 곧바로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교나 졸병감까지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 하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느껴져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바깥에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전시켜야겠다,

기타 무엇 무엇 모두가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 이후 여러 지사들이 혹 서간도, 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경,

북경으로 돌아 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들어가며, 혹 서울이나 시골에 출몰하여 십여 년을 내외 곳곳에서 목이

터질 만큼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소득은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 없는 모임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성과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이 잘못된 것이었다.

강도 일본이 정치와 경제 두 방면으로 괴롭혀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 기관을 전부 빼앗기고 먹고 입을

방법도 끊어지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시키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과 비교하여 백분의 일이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따라 우리는 '외교', '준비' 같은 어리석은 꿈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이라는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 민족이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시작하겠느뇨?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 세력이 있어

이른바 혁명이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바꾸는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자면 '을'이라는 특수 세력으로 '갑'이라는

특수 세력을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 을 두 세력, 즉 신.구 상전 중

누가 더 어질고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선하고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어느 편에 설지를 정할 뿐이요, 혁명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고 백성을 위로한다' 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백성들이 도시락 싸 들고 나와서 임금의 군대를 환영했가'가 혁명사에서 유일한 미담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해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민중혁명', 또는'직접혁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민중이 직접 수행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끓어오르고 불어나는 열기는

숫자로 강약을 비교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이며, 성공과 실패의 결과는 늘 전쟁학에서 예측하는 궤도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이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돈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도 쫓아낸다.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첫걸음은 민중의 각오를 요구하는 것이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新人이나 聖人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 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이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하는 그런 열렬하게 부르짖는 소리에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민중이 향상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불평, 부자연, 불합리한 것부터 먼저 타파하는

것이 곧 '민중을 각오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해 혁명의

선구가 되는 것이 민중이 각오하는 첫 번째 길이니라. 일반 민중이 굶주림, 추위, 피로, 고통, 아내의 호소, 아이의

울음, 납세 독촉, 사채 재촉, 행동의 부자유 등 모든 압박을 받아,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요 원인인 강도 정치를 펼친 강도들을 때려 죽이고, 강도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며, 모든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려, 이에 사람마다 '굻어 죽는 것' 말고도 오히려 혁명이란

길 하나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사람은 의분을 못 이겨, 약한 사람은 고통을 못견뎌,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 나아가며 널리 옮아가서 국민이 뭉쳐서 하나가 되는 대혁명이 일어나면 그날이 간사하고

교활하며 잔인하고 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쫓겨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새 생명을 개척하고자 하면,군인을 십만 명 키우는 것이 폭탄을 한 번 던지는

것만 못하며, 수억 장 신문과 잡지를 찍어내는 것이 폭동을 한 차례 일으키는 것만 못할지니라.

 

민중의 폭력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거니와, 이미 일어났으면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린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닿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 지나온 경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 세력이 특수 세력과

싸우던 궁중의 한 때 활극일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 애국이라는 대의에 흥분하여 힘차게 일어난

독서 계급의 사상일 따름이다.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은 뜨겁고 맹렬했지만 그 배후에 민중적

역량이 기초가 되지 못했으며 3 · 1운동의 만세 소리에 민중이 일치하는 장한 마음이 잠시 나타났지만

그 폭력의 중심을 가지지 못했도다. '민중.폭력' 둘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비록 사납고 세찬 소리가 나는

장하고 통쾌한 행동이라도 또한 천둥 번개같이 사그라지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만들어 낸 혁명의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 혁명이 시작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 하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나아가면

목적을 이루고야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사하고 교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뒤에는 캄캄한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앞에는광명한 활로이니, 우리 조선 민족은 그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 조선 총독 및 각 관리와 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리와 공리

3. 염탐꾼, 매국노

4. 적의 모든 시설물

 

이밖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두드러지게 혁명 운동을 방해한 죄는 없을지라도 만일 말이나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누그러뜨리고 헐뜯는다면 우리는 폭력으로 대응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 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는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5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는

다만 형식상으로만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으로는 파괴가 곧 건설이라.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은, 첫째는 이민족의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 이라는 그 위에 '일본' 이라는 이민족이 전제를

하고 있으니, 이민족의전제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의 조선이 아니다.

그러니 고유의 조선을 발견하려고 이민족의 토잋를 파괴함이니라.

둘째는 특권 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 민중' 이라는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 계급이 압박하고 있으니, 특권 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 민중은 자유로운 조선 민중이 아니다.

그러니 자유로운 조선 민중을 찾으려고특권 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셋째는 경제적 약탈 제도를 파괴하고자 함이다. 왜? 약탈 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고자

조직한 경제가 아니요,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고자 조직한 경제이다.

그러니 민중 생활을 발전시키려고경제적 약탈 제도를 파괴함이니라.

넷째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한 사람 위에 강한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 위에 높은 사람이 있어,

온갖 불평균이 있는 사회는 서로 약탈하고, 서로 벗겨 먹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원수로 보는 사회가 되어, 처음

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마지막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쳐, 민중 전체의 행복이 끝내

숫자상 영이 되고 말뿐이다. 그러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끌어올리려고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함이니라.

다섯째는 노예적 문화 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해내려오는 문화 사상 중에 종교, 윤리, 문학, 미술, 풍속,

습관, 그 어느 것이든 강자가 만들어서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로 만들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의 계급이 강자가 되고 다수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에 반항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농적 문화 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니 만일 민중의 문화를

주장하여 속박의 쇠사슬을 끊지 않으면, 일반 민중은 권리에 관한 사상이 희미하고 자유를 얻어 향상하는 데

흥미가 없어서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 문화를 주장하려고 노예적 문화 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한 조선의', '자유로운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려고, '이민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 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의 정신이 곧 건설하자는 주장이다.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걸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건설할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면 오백 년을 지나도 혁명은 꿈도 꾸어 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현재 조선 민중은 오직 민중의 폭력으로 새로운 조선 건설에

장애가 되는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 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않으면내가 망하게 되는 '외나무 다리 위' 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이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과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모든 제도를 개조하여

인간이 인간을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가 사회를 착취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걸설할지니라.

[단군 기원] 4256년(1923)  1월

의열단

 

 

 

 

 

 

 

1919년 10월 11일

1열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2열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3 · 1 유치원 추계 개학기념. 1941년 10월 10일, 중국 중경

 

 

 

 

상해임시정부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 시민증. 1924년 10월 15일.

1919년 미국 워싱턴에 설립된 구미주차한국위원회가 1924년 발행한 안재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시민증이다.

안재창은 1903년에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하였고, 1914년 한인소년병학교의 재정자금지원,

유지단 조직 및 1929년 동지회 디트로이트지회, 1942년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회 등을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공채

1921년 4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로 재무총장 이시영의 직인이 찍혀 있다.

 

 

 

 

3 · 1 독립선언 제19주년 기념대회 유흥조 공연

 

 

 

 

 

 

 

1945년 11월 3일 한국독립당 환국기념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 앞에서 환호하는 독립운동가들.

 

 

 

 

참고도서  

<쉽게읽는 독립선언서>

3 · 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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