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 두 머리 오리모양 잔>, 1~2세기, 가야시대,
높이 26cm, 길이 29.5cm, 입지름 5.6cm, 창원 다호리 출토.
한국 차 문화에서 가장 신비롭고 경이로운 가야시대의 역사가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一然 1206~89)에 의해서다. 그의 저술 <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의 성립과 문화 전반에 걸친
논라운 역사가 알려진 뒤로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가야사는 외면당해 왔다. 특히 중국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중화 사대주의 관학파 역사가들이 가야사를 멸시하고 고구려 · 백제 · 신라만의 삼국시대라는 개념을 고착화시켰다.
가야는 42년에 건국되어 562년에 멸망할 때까지 10代 491년 동안이나 한반도 남쪽에 명백하게 존재했던 국가다.
그런데도 한사코 가야를 제외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문화가 가야 문화에 미친 영향은 고구려 · 백제 ·신라에 비해 그 정도가 매우 약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고 존속했던 가야와 달리 다른 세 국가는 중국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유지되었고
차 문화는 특히 그랫다. 결국 중화 사대주의에 물든 관학파 역사학자들의 편견이 가야사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 정도로 왜곡시켰다. 하지만 가야의 차 문화는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과
세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 차 문화와도 차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래는 <삼국유사>의 한 대목이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으로 오는 배가 있었다.
(............)
그리고는 향기가 나는 좋은 음료인 난액(蘭液)과 혜서(惠醑)를 주고, 무늬를 새긴 채색 침구를 넣어주며
의복과 보화도 주되 군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경호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향기 나는 좋은 음료' 난액이 다름 아닌 오늘날의 차이다.
이 사실은 661년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행한 축문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문무왕은 자신이 가야의 건국자 수로왕의 15대 후손임을 말하면서 가야시대의 아름답던 차 문화를 지적했다.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이 수로왕의 제사 때 차를 올린 사실을 말하고, 이같이 아름다운 풍속이 제9대 구형왕까지
330년 동안 계속되다가 신라의 공격으로 가야가 멸망함으로써 단절되었음을 고백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옛 한국의 차 문화가 중국과는 아무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좌), <토기 사슴뿔모양 잔>, 4세기, 가야시대, 높이 20.2cm, 입지름 2.7cm, 밑지름 8.7cm, 사슴길이 11.7cm, 거창지방 출토.
우), <토기 기마모양 잔>, 4~5세기, 가야시대, 높이 19cm, 입지름 10cm, 김해지방 출토.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약 500여 년 동안 이어진 가야시대 차 문화는 매우 번성했고 화려했다.
특히 가야는 페르시아 문화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매우 수준 높은 그릇 문화를 구가했다.
그중에서도 사슴 등의 동물모양 토기 찻잔의 발달은 매우 이채롭다.
밑굽이 둥글고 넓으면서 유려한 형태로 가늘어지는 형식은 일찍이 이집트와 인더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
공통적으로 발달했던 형식과 매우 닮아 있다. 또한 밑굽에서 허리로 뽑아올린 형태의 정교함은 물레를 이용했음을
짐작케 하며, 굽 언저리와 중배 · 허리 부분에 마름모꼴 등의 기하학 문향을 창문 형식으로 뚫어 균형을 유지하려
한 점은 4세기 이전 한반도에서 생각해내기 어려운 고도의 기술이었다.
4세기 이전 가야시대의 토기 찻그릇들은 페르시아 문화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사슴 형태는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이다.
좌), <수레바퀴 달린 뿔모양 잔>, 4세기, 가야시대, 높이 17.1cm, 입지름 4.6cm, 밑지름 10.3cm, 함안지방 출토.
<토기 오리모양 잔>, 4~5세기, 가야시대, 높이 18.3cm, 입지름 7.2cm, 밑지름 1.8cm, 김해지방 출토.
<수레바퀴 달린 뿔모양 잔>은 페르시아 문화와의 관련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토기 잔을 역사적으로 해설할 때는, 수레의 소유는 부유층만이 가능하므로 특수 신분층에서 의례용 음료를 담아
마셨던 찻잔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즉 소가 수레를 끌었다는 기록과 벽화가 남아 있으므로
가야에 실제로 수레바퀴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토기 오리모양 잔>은 장례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의 영혼이 새를 타고 천상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영혼관의 산물인데, 이 같은 종교관은 이집트, 인더스,
서아시아 등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이 찻잔도 서아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청자인형주자>
고려시대, 높이 28cm, 국보 제167호,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의 차 문화는 신라의 것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거기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차 문화를 더하여 발전해간다.
이때 왕 · 귀족 · 승려 등 상류사회는 물론 평민사회에까지 차 마시는 풍습이 확산되었다.
동양 최초로 차 예절 규범을 제정하여 사찰 승려들에게 생활화하도록 한 책인
<백장선원청규(白丈禪苑淸規)>를 필사하여 <고려판선원청규>를 펴내는 등 차 문화의 품격을 높였다.
<백장선원청규>는 당나라 승려인 백장(720~814)이 지은 책으로, 선종 승려들의 수행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계율 중심의 규범으로서 차 생활에 관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에서처럼 단차와 말차를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여 마셨고,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고려에서 직접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드물게는 잎차도 만들어 마셨는데, 이 잎차는 고려 차문화의 특성을 지닌 제다법의 산물이었다.
'춘배차'(春焙茶)가 바로 고려를 대표하는 잎차인데,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찻잎으로 만든 것으로,
중국의 잎차인 부초차화는 만드는 방법이 전혀 달랐다. 이 춘배차는 맛이 매우 빼어나고 약효 또한 높은 잎차였다.
좌), <청자조각구룡문정병>, 고려시대, 높이 33.5cm, 일본 야마토문화관.
우),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고려시대, 높이 32.7cm, 국보 제133호, 호암미술관.
고려 귀족들의 고급스러운 취미와 폭 넓은 사유의 세계는 청자의 예술세계를 한층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해내기도 하였다.고려시대에는 집안의 다실과 야외의 경치 좋은 장소에서 이뤄지는
풍류로서의 다풍(茶風)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는 신라의 차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풍류차(風流茶) 혹은 차 풍류로 일컫는 야외에서의 차회는 고려 차 문화의 특징이다.
차는 그 맛을 음미하고 또한 신묘한 약효를 얻기 위하여 마시는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고려의 차 문화에는 차를 달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 같은 경향은
'차 겨루기' 혹은 '투차', '차 달이기 경연' 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겨루기 때는 여러 가지 형태의 주자들이 선을 보였고,
그때마다 청자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은 고려인들의 미적 감각을 한껏 자극했다.
좌), <청자비룡형주자>, 고려시대, 높이 24.4cm, 국보 제61호, 국립중앙박물관.
우), <청자상감포도동자문표형수주>, 고려시대, 높이 38.5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좌), <청자귀형수병>, 고려시대, 높이 17cm, 국보 제96호, 국립중앙박물관.
우),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 고려시대, 높이 34.4cm, 국보 제116호, 국립중앙박물관.
중국과 일본에서는 만들 수 없는 고려만의 상감청자와 비취빛 청자는
고려 사람들의 탁월한 예술적 감성과 창조성으로 성취한 도자예술이었다.
이렇듯 우수한 도자기술로 완성된 차 도구들은 차 문화를 크게 번성시켰는데,
이렇게 번성한 차 문화는 그 폐해도 매우 심각했던 모양이다.
정작 차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도탄에 빠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차의 주 생산지인 지리산 아래에서 귀족들이 사는 개경까지 만든 차를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은 물론이요,
차 세금이 해마다 늘어나 이것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이 겪는 고통과 좌절은 극한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이규보 같은 문인은 차밭을 불태워버리고 싶은 농민들의 심정을 시로써 드러내보이기까지 했다.
고려가 쇠망해가는 순간까지 고려인들의 차 마시는 문화는 계속되었다.
좌), <청자상감보상당초동자문주자>, 고려시대, 높이 19.2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우), <청자귀형수주>, 고려시대, 높이 17.2cm, 보물 제452호.
<청자상감무란문주자>, 고려시대, 높이 19.2cm, 보물 제1029호, 개인소장.
조선시대 차 문화는 고려시대의 다풍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려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는 비교적 활발하게 차를 즐겼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차 문화가 현저하게 쇠퇴하여 후기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왕실에서의 다례(茶禮)도 차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행사에 국한되었고,
왕실은 차 대신 술을 즐겨 마셨다. 사찰의 차 문화도 급격하게 변해갔다.
국가에서 지급한 사원전(寺院田)의 축소와 폐지에 따라 사찰의 경영이 어려워지고
승려의 출가와 수행생활 전반에 걸친 제도적 제한, 억압, 체포 등의 위압으로
생존 자체가 위험해지자 차 문화는 거의 절멸상태로 매몰렸다.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목숨을 내건
수행에 전념했던 소수의 승려들에 의하여 불교 본래의 예절과 수행법에 따른
검소하고 소박한 차법이 이어졌는 바, 이른바 선차(禪茶)가 바로 그것이다.
숭유억불의 시대에 다풍을 이어간 이들은
고려말의 지조 높은 선비였던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그 효시로 삼는다.
고려조 대표적인 차인이었던 익제 이제현이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를 제자로 삼은 데서
문인 혹은 선비차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목은 이색은 포은 정몽주와 도은 이숭인을
제자로 삼았고, 포은과 도은은 야은 길재를 문하에 두었다.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야은 길재는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학교를 열고 인재 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야은 길재는 김숙자를 제자로 길렀고, 김숙자는 그의 자식인 김종직을 자식이 아닌 제자로 키웠다.
영남 사림의 시대를 연 김종직의 문하에서 길일손, 김굉필, 조광조, 이목 같은 당대의 천재들이
배출되면서 조선시대의 이상과 개혁이 현실로 떠올랐다. 이들 모두가 청렴한 차인들이었으니,
익재 이재현에서 한재 이목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을 조선시대의 문인차법 또는
선비차법의 시대가 꽃을 피운 시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학적 이상주의의 실현을 꿈꾸었던 이들은 지조와 헌신을 차의 성품과 선비의 이상으로 여겨
매우 독특한 차 문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야은 길재는 그 구체적 실천을 위해
함양군수 시절, 농민들과 함께 차 농사를 짓기도 했고,
한재 이목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인문주의적 차 이론인 <다부(茶賦)>를 지어
사림학파의 이상과 차의 성품이 하나로 귀결되는 또 하나의 이상향을 노래했다.
다부는 조선 후기 초의가 편술한 <동다송(東茶頌)> 보다 350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서,
조선시대 차 문화의 자긍이자 한국 차 문화에 있어 불멸의 금자탑인 것이다.
인용: 정동주 著 <한중일의 茶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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