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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일본의 규스(急須)

앞선 중국 편에서, 우리네가 다관(茶罐)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차호(茶壺) 일본에서는 규스(急須)라 호칭한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다.

 

 

 

무가문화가 발달하면서 일본에서는 쇼인즈쿠리 차실에서 차회를 열고

차를 마시는 유행이 무사들 사이에 퍼져나간다.

 

 

 

과거, 교토의 천황정권이 공가문화(公家文化)를 지향했다면,

쇼군으로 대표되는 바쿠후 체제는 당연히 무가문화(武家文化)를 형성하게 된다.

한 국가에 사실 상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한 셈인데 이들 무사정권은 천황과 귀족들에게 족쇄를 채워

필요한 예산과 대우를 편성하고 집행을 넘어 심지어는 천황 계승권까 쥐고 흔들었다.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와 무역. 이 모두가 전문 소양을 필요로 했고,

이일을 처음부터 승려들이 담당했다. 당시 일본 승려는 최고의 지식인이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현실.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선종의 승려들에 의해 차문화가 급속도로 퍼져나가자 덩달아 무사계급들도

차문화에 몰입하면서 일본열도에 차문화에 대한 광풍이 일게되는 것이다.

 

 

 

 

 

<영지문수주(靈芝文水注)>, 19세기 초, 높이 14.2cm.

 

 

1602년의 에도 바쿠후 시대에 이르러 가장 괄목할만한 차문화의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뿌리깊은 말차 문화 일색이었던 다법에 전차법이 추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차법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차 도구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에서 수입한' 차호'라는 낮선 그릇.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말차법의 꽃으로 여겨지는 다완과 차실에서 필요로 하는

찻물을 떠다두는 위 사진상의 수주 정도만을 알고 있었던 것.

 

수주는 중국의 주자와 똑같은 그릇이며, 이름만 다르게 부를 따름이다.

실제로 일본 수주는 임란 이전까지는 모두 중국에서 수입했으며, 그 형식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주자에 있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조선에서 납치해온 조선 도공들의 손을 빌어 만들기도 했고,

18세기 중엽부터는 새로운 차문화 운동과 더불어 일본 도공들에 의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위 사진상의 수주 몸통 전면에 영지버섯 모양을 형상화하여 돋을새김하였는데,

이는 송나라와 명나라의 주자를 모방한 것이다. 차호와 주자는 극명하게 다르다.

그런 까닭에 일본 차인들은 잎차와 차호의 출현에 당혹감과 동시에 흥미를 느꼈던 모양.

 

 

 

 

 

 

<사자당초문탕비(獅子唐草紋湯沸)>, 18세기 말, 높이 8.8cm.

 

 

일본에서는 워낙 말차 문화가 뿌리 깊었기에 전차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알려졌다고.

한가지 유의할 점은 전차에서 달일'煎' 이란 글자를 쓴다고 하여 반드시 잎차만을 우려내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덩어리를 쪼개고 가루를 내어 탕관에 넣고 끓이는 것도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일본에서는 다도에서 차를 끓이는 도구를 말할 때 '탕비'(湯沸)라는 말을 즐겨 쓴다.

 

 

 

 

 

 

 

<매화첨부문(梅花添附紋) 규스>, 높이 8.3cm.                                     <모란문(牡丹紋) 규스> 높이 10cm.

 

 

일본 청자는 모쿠베이에 의해 처음 제작되기 시작했다.

<매화첨부문 규스>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데, 규스의 모가지 부분과 뚜껑 가장자리에 매화를 덧붙였다.

재료와 제작 방식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규스라는 형식이다.

 

<모란문 규스>에서는 세련된 붓끝의 움직임과 볼륨이 느껴지는 활력 넘치는 입체감을 볼 수 있는데,

모쿠베이가 색채화가 였음을 새삼 확인 케 해주는 부분이다.

 

모쿠베이가 동양 도자사에서 기여한 공로를 말할 때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규스라는 형식을 창안해냈다는 사실이다.

잎차를 달이거나 우려내는 도구는 17세기 이후 일본 문인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중국의 차호를 수입해서 사용해도 될 일이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경제적 문제에 대한 염려 보다도

무사들이 만든 문화를 극복하기를 갈망했다. 이 염원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자유의지의 표현과 상상력의 분방함에서 잉태되는 창조성까지 꿈꾸게 되었다.

 

 

 

 

 

<청자규스>, 높이 10.6cm.                                                    <기린문(麒麟紋) 규스>, 높이 12cm.

 

흔히 순청자라고 부르는 <청자규스>는 새감보다 디자인 감각이 한층 볼 만하다.

비평가들은 "정신이 맑아지는 매력 넘치는 조형" 이라 극찬했다.

 

청자 <기린문 규스> 는 몸통 전면에 그려진 동물과 식물들로 보아 당나라 때

혹은 그 이전의 청동그릇을 보고 이를 도자 형식으로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린문탕비(麒麟紋湯沸)>, 높이 12cm.

 

뚜껑과 손잡이가 전혀 다르다. 이것은 그릇 안에 물이나 차를 넣어 끓이는 도구여서,

뚜껑은 뜨거운 김이 새어나오도록 조각문으로 처리했다.

중국의 주자와 차호는 몸통과 동일한 재료인 흙으로 손잡이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일본인의 정서를 작품에 반영한 것이다.

 

 

 

 

 

 

<봉황문(鳳凰紋)규스>, 높이 10.6cm.

 

명나라 때 크게 유행했던 삼채도자기의 기법을 그대로 응용한 것으로,

황, 적, 청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돋을새김과 음각을 병행하여 사실적인 입체감과

꽃송이와 꽃나무 잎의 색깔을 대비시킴으로써 청색 바탕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있다.

 

 

 

 

 

 

<보상화문탕비(寶相華文湯沸)>, 높이 16cm.

 

모쿠베이의 또 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보상화 문양의 오른편에는 황색 바탕에 詩 한 편이 음각되어 있다.

 

진실을 속인 사람 찾아 봉래섬에 갔더니

차 향은 일지 않고 솔꽃이 세었네

 

모쿠베이는 명나라 후기의 도예 명인 시대빈과 이대방을 특히 흠모했다.

시대빈의 독서량과 서예 실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항상 시대빈을 닮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 <보상화문탕비>는 중국 역사에 등장한 모든 주자와 차호, 그리고 무쇠나 구리 등으로 제작한

제기들이 지닌 장점과 특징들을 한데 모아 정리한 느낌이다.

 

 

 

 

 

 

<황기문(荒磯紋) 규스>, 높이 10.3cm.                                          <화조문(花鳥紋) 규스>, 11.2cm.

 

두 작품 모두 다 모쿠베이 규스가 지닌 색채와 문양의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수주>, 높이 19.5cm.                                                     <초화문탕비(草花文湯沸>, 높이 16.4cm.

 

하쿠데(白泥)는 백자에 속한다. 산화철 함유량이 적은 회백색 점토를 구워서 만드는데, 유약을 입히지 않고

무유(無釉) 도자기다. <수주>는 중국 의홍요(宜興窯) 작품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비평가들은

영묘한 식기(神器)를 본 듯이 기품이 넘쳐나는 그릇이라고 평가한다. 이 수주는 소장처인 가게쓰안의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이곳에서 일본 전차를 완성시킨 인물 다나카 가쿠오가 차실로 쓰던 건물의 이름인데, 뒷날

다나카 가쿠오라는 이름 대신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화조문(花鳥文) 규스>, 높이 9.7cm.                                                <난반데규스>, 11cm.

 

아카에는 도자기에 붉은빛을 주로 하여 그린 그림, 또는 그런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말한다.

이때 붉은 빛 위에 금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을 긴란데라 하여, 아카에긴란데 규스라는

비교적 긴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 그냥 기란데라고도 한다.

이 <화조문 규스>는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다. 붉은색은 옻칠을 여러 겹으로 입혀서 얻어내며, 그 위에 순금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거나 또한 금박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작품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재력이 필요하다.

다른 작품들도 보통 도자기와는 사뭇 다른 공정이 필요하고 그만큼 재료도 많이 들어 간다.

 

<난반데규스>는 모쿠베이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위조품이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선명한 느낌을 주며 그 형태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맑아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니규스> 높이 10cm.

 

주니(朱泥) 규스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점토를 재료로 한 것인데, 강서성 의흥요에서 주로 생산하였다.

주니는 자사와는 전혀 다른 흙이지만, 성형이 쉽고 색깔이 고와 자사를 대신하여 많이 만들었다.

이 <주니규스> 또한 시대빈, 이대중방이 만든 작품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모쿠베이 특유의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규스로 발전했다.

 

 

 

 

 

<아고타형수주(阿古陀形水柱)>, 높이 19.5cm, 교토부립총합자료관.

 

모쿠베이가 만든 여러 종류의 차 도구 가운데 비교적 작은 백자로 된 작품이다.

고급 청화백자의 한 종류로서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 경덕진에서 생산되었던 그릇을

모쿠베이는 숀즈이라는 이름으로 모방했다.

 

쪽빛 무늬를 넣어 구운 소메쓰케도 백자에 속하지만, 대체로 백자로 된 그릇은 그 수가 적은 편이다.

좋은 백토를 구하기 어려웠고, 백자 유약 또한 다른 그릇에 비해 무척 예민하여 완벽한 색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비교적 산화철분 함량이 적은 편인 하쿠데 그릇을 많이 남기고 있다.

 

 

 

 

 

<화조문수주>, 높이 13.5cm.                                                    <국수문(菊水文) 규스>, 높이 8.6cm.

 

흙으로 만든 청동으로 불리는 쓰치가타(土型) <국수문규스)에 기울인 노력의 흔적을 보면 그가 작품에 얼마나

몰두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모쿠베이는 작품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예사롭지 않은 작가였다.

그가 평생에 걸쳐서 이룩해놓은 전차의 완성을 위한 위대한 헌신에는 보통의 재능 있는 도공의 부류를 넘어서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비록 메이지유신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인문주의적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던 후원자

들의 마음을 자신의 열정과 각고의 노력으로 표현해낸 모쿠베이의 예술혼이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토대로 녹아 들었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아픈 상처라도 역사로 껴안고 살다보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지혜와 깨달음이 자라난다는

철학적 인식을 찻그릇으로 형상화시켜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고 있는 일본의 전차도.

 

무릇, 모방은 흉내 내기에 그치면 아둔함이며,

창조를 위한 도전으로 실천하면 크나큰 지혜의 빛이 된다 했던가.

 

 

 

 

인용: 정동주 著 <한중일의 茶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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