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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중국의 차호(茶壺)

차 생활에 필요한 그릇을 통칭하여 다기(茶器)라 한다.

그중에서 찻잎을 우려내는 데 쓰이는 그릇을 우리는 다관(茶罐)이라 일컫는데,

이는 아마도 한약을 달이는 약탕관(藥湯罐)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동양 3국 중 가장 먼저 차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한 중국은 차호(茶壺)라 칭하는 모양이고,

바다 건너 일인들은 규스(急須)라  호칭한다고 들었다. 암튼 다관은 그릇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가장 늦게 등장한 축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잎차를 우려내기 위해 등장한 손 안의 그릇인지라

민족과 종교, 그리고 개인 취향에 근거하여 다양한 미학적 요소가 적용되어왔음을 볼 수 있다.

 한 · 중 · 일 다관 문화사를 다룬 책의  편린을 일부나마 더듬어 보기로 한다.

 

먼저 중국 편.

 

 

 

 

<청유갈채(青釉褐彩) 새모양차호> 높이 8.7cm, 입지름3.3cm, 당나라.

 

8세기 무렵 당나라가 지향했던 외래문화의 중국화 정책이 빚어낸 걸작으로, 부도 혹은 탑 형식과

나는 새 모양을 중첩 기법으로 빚었다. 불교적 특성과 함께 새 꽁지 모양의 손잡이와

새의 부리 적용에 이어 몸통에는 날아가는 새 날개가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영(馬永), 구리로 만든 화(盉), 은나라. 높이 25.1cm, 입지름 7.5cm.

부리와 몸통 위로 붙여진 윗선잡이 형식은 차호로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주전자가 술 문화의 소산인 데 반하여, 주자(注子)는 그 형태의 모체였던 서아시아 청동물병부터가

이미 신을 제사하는 제의용(祭儀用)이었거나 상류계급의 물병이었다가, 차츰 중국 차실의 귀한 자리에

놓이게 된 일종의 예술품이다. 주전자는 주자의 발달 과정에서 변형된 일반 생활잡기이기 때문에

그 형식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주자와 청동물병에 있다 하겠다.

 

 

 

 

<온완부주주(溫碗付酒注)>, 북송시대, 높이 23cm, 입지름 5.6cm, 강소성 진강시박물관.

 

겉의 완(碗)에 뜨거운 물을 붓고 그 안에 술이 담긴 주전자를 담가 술을 데운다.

 

 

 

 

上, <채도선형쌍이호(彩陶船形双耳壺)>

신석기시대, 1높이 5.6cm, 길이 24.8cm, 섬서성 보계시 북수령 출토.

 

下, <회도돈형규(灰陶豚形鬹)>, 신석기시대, 폭 18.7cm, 길이 21.5cm.

 

 

 

 

<백도규(白陶)> 신석기시대, 높이 14.8cm.

 

청동으로 만든 그릇을 모방했는데, 손잡이와 부리의 모양이

오늘날의 차호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고려시대, 높이 33.5cm, 국보 제92호, 국립중앙박물관.

 

 

 

 

<용수류정병(龍水流淨甁)>, 북송 전기, 높이 32.2cm, 하북성 정형박물관.

 

 

 

 

 

<수형이(獸形匜).

 

춘추전국시대에 제작된 짐승 형태의 청동그릇. 높이 23.3cm로 비교적 높다.

손 씻기, 제관의 양칫물, 술과 차 등, 그릇의 용도에 대한 논쟁이 있다고 한다.

앞선 시대인 상나라 때의 세 발 달린 그릇과 달리 발이 네 개 달렸다. 중요한 것은

손잡이와 부리의 모양으로, 차호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데,

한나라 청동기에 깊은 영향을 준 그릇이라고.

 

 

 

 

<용병계두호(龍柄鷄頭壺)>, 동진시대, 높이 22.2cm, 입지름 9cm.

한나라 문화를 계승한 동진시대의 주자.

 

 

 

 

<채색유도첩화용수집호(彩色陶貼花龍首執壺)>, 당나라, 높이 26.9cm.

 

 

 

 

좌), <삼채새머리물병(三彩鳳首注)> 당나라, 높이 31.5cm, 입지름 3.5cm, 섬서성박물관.

우), <쌍복이용두병계두호(雙復耳龍頭柄鷄頭壺)>, 수나라 높이 48cm, 입지름 11cm, 남경미술관.

 

 

 

 

<백자용수쌍신호(白瓷龍首双身壺)>

수나라, 높이 18.6cm, 입지름 4.5cm, 밑지름 4.5cm.

 

 

 

 

좌), <봉수용이수병(鳳首龍耳水甁)>, 당나라, 높이 41cm, 입지름 9.4cm.

 

새의 머리와 용 모양 손잡이에다 각종 문양을 부조 형태로 덧붙인 위에 여러가지 색상의 유약을 입혔다.

이 물병의 기원은 그리스로 귀가 쌍으로 달린 청동물병이다.

 

우), <삼채봉수주자(三彩鳳首注子)>, 당나라, 높이 32.2cm, 하남성박물관.

 

 

 

 

좌), <장사밀청유록채갈지물병(長沙密淸釉綠彩擖注子)>, 당나라, 높이 9.6cm, 입지름 4.5cm.

 

고대 페르시아의 것을 모방하여, 사산왕조에서 사용되던 푸른 유약을 입힌 둥근 여행용 물병이다.

장사(長沙)는 이 그릇이 만들어진 호남성에 있는 지명이다.

 

 

우), 각화연변문용병계두호(刻花蓮弁文龍柄鷄頭壺), 당나라, 높이 51cm.

 

불교미술이 활기에 찬 시대, 시앙의 자유로움이 행복하게 표현된 이 물병은 불상을 모신 곳에서 물을 공양할 때

사용된 법물(法物)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물병은 원래 사찰의 의식용이었던 정병을 당 시대 특유의

창조적 열정과 자신감으로 과감하게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이 사실이다면, 이 물병의 원형인 그리스

청동물병이 인도의 정병으로 발전하였다가 동진시대와 수나라, 또 당나라 시대에 이르는 세월 동안 다시 한 번

변형되어 당나라 형식으로 발전한 셈이다.

 

 

 

 

<새머리모양차호>

당나라, 높이 6.4cm, 밑지름 2.9cm, 영파시문물관리위원회.

 

당대(唐代)에 제작된 수 많은 주자와 차호 중에서도 희귀한 사례다. 새 머리 모양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이 차호도 외래종교와 관련 있어 보인다. 새 머리 부분은 뚜껑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몸 전체와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

 

 

 

 

 

<월주요청자주자(越州窯靑磁注子)>, 당나라, 높이 13.4cm, 입지름 5.9cm.

 

빼어나 솜씨가 적용된 것으로 1936년 저장성 북부 소흥에 있는 당나라 시대 무덤에서 발굴한 것이다.

묘지(墓誌)에 따르면 월주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다른 여러 차 도구와 함께 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채로운 점으로는 육각형으로 된 짧고 담백한 부리를 들 수 있겠다. 부리를 박은 위치 또한 몸통과 목이 만나는

곡선상의 한 점을 선택함으로써 감각적 절정을 이룬 느낌이다. 연한 황색 바탕 위로 불규칙하게 터진 잔금의

다양한 빙열이 몹시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히 월주요 청자의 전형으로 꼽는다고.

 

 

 

 

좌), <녹유횡병수주(綠釉橫柄水柱), 당나라, 높이17cm, 입지름 7cm, 호남성 장사시무물공작대.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널리 사용해온 녹색 유약을 입힌 주자로서,

차 도구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의  대상이자 귀한 물병이다.

 

 

우), <석문황녹유주자(蓆文黃綠釉注子)>, 당나라, 높이 23.9cm, 입지름 9.8cm, 중국역사박물관.

 

이 또한 녹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먼저 몸통에  바닥에 까는 자리 문양을 찍어 말린 다음 황색 녹유를 입히고,

그 위에 다시 청색 유약을 거칠게 입혀 만든 작품이다.

 

 

 

 

 

좌), <과형집호(瓜形執壺)> , 당나라, 높이 10.8cm, 입지름 5cm, 영파시문물관리위원회.

 

주자 형식을 빌려서 만든, 차를 붓는 데 사용한 차호다. 참외 모양이지만 골을 파기보다는

세로로 흘러내린 유약의 모양으로 굴곡 형상을 만든 수작이다.

 

 

우), <닭과 개머리 모양 차호(鷄犬頭壺)>, 당나라

 

이 작품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좌), <마갈어호(摩鞨魚壺)>, 요나라.

 

당나라 때 크게 유행했던 삼채색 유약을 입힌 물병이다.

 

 

우), <황록채용병반구호(黃綠彩龍盤口壺), 요나라. 높이 25.6cm, 입지름 5cm.

 

조형의 원류는 용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당나라, 수나라 및 동진시대 물병이다.

이것은 남북조 때 일시적으로 성행했으며 주로 당나라 때 크게 유행했고 주로 부장품으로 제작되었다.

 

 

 

 

 

좌), <삼채마등호(三彩馬鐙壺)>, 요나라, 높이 20.4cm, 중국역사박물관.

 

청 · 홍 · 황 또는 녹색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 유약은 당나라에서 널리 사용되던 것을 그대로 썼지만, 주제와 형태는

철저하게 요나라 특유의 것이다. 주로 유목민들이 말을 타고 이동시 사용하는 가죽 물주머니를 도자기로 표현 한

것으로 두 개의 끈을 꿰는 구멍과 물을 마시는 아구리는 흡사 가죽 주머니 처럼 보일 정도다.

 

 

우), <황유마등호(黃釉馬鐙壺)> , 요나라, 높이 25.5cm, 중국역사박물관.

 

 

 

 

 

 

좌), <갈유마등호(褐釉鐙壺)>, 요나라, 24.4cm, 중국역사박물관.

우), 녹유마등호(綠釉馬鐙壺), 요나라, 높이 30.5cm, 중국역사박물관.

 

'녹유마등호;는 유약이 어떻게 입혀지는지를 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먼저 흰색 유약을 발라

말린 뒤, 그 위에 푸른색이 나는 유약을 입혀서 불에 구운 것이다.

가죽 물주머니는 말이나 낙타로 이동 시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발달한 것인데,

이를 다시 도자기로 표현한 것은 요나라 유목문화의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겠다.

 

 

 

 

좌), <각화쌍계주자(刻花雙系注子)>, 북송 중기, 높이 18.5cm, 입지름 9.6cm, 하북성정현박물관.

 

정요(定窯)의 고전적인 제품은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낸 섬세한 자질(磁質)의 흰 바탕에 상아빛 유약을 바른 것이다.

초기에 주로 제작된 작품의 꽃문양은 굽기 전에 점토 바탕 위에 자유롭게 무늬를 새겨넣은 것이다.

 

 

우), <녹유교태호(綠釉絞胎壺)>, 송나라, 높이 9.5cm, 입지름 3cm.

 

당나라 때 녹색 유약을 두껍게 발라 제작했던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차를 담아 찻잔에 따르는

차호였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명나라 중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차호, 즉 잎차를 넣은 차호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달여 먹는 자사호(紫砂壺)가 송나라 때 이미 제작,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화앙복연변주자(刻花仰覆蓮弁注子)>, 북송 전기

높이 22.2cm, 입지름 4.8cm, 요녕성박물관.

 

궁중이나 격조 높은 사찰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잎을 여러 겹으로 새겨 넣고

뚜껑은 작은 연꽃송이로 살짝 덮어 정결함과 신성함을 표현하고 있다. 주자는 궁중이나 사찰의

큰 방에서 화롯불로 찻물을 끓일 때 차솥에 물을 보충하기 위해 항상 준비해두어야 하는

차 도구이기 때문에 차호 못지않게 장식성과 기능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더구나 편차 종류는 차솥에 끓여서 다완(茶碗)에 담아 마시는 차법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차호로의 쓰임새는 아직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인들 중에는 가끔 차솥에서 끓인 차를 차호에 옮겨 다시 다완이나 찻잔에 따라

마시기도 했는데,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때의 차호는 주로 궁중이나 큰 사찰에서 격조 높은 찻자리 때 사용되었던 것이어서

그다지 많이 전해지지 않는 희귀한 물건이다.

 

 

 

 

 

<인화문차호(印花文茶壺)>, 송나라, 높이: 왼쪽 6cm, 오른쪽 8.5cm, 복건성박물관.

 

송대의 차호는 주로 푸른빛이 도는 백자이다. 화려함에 있어서나 물량의 풍부함으로만 친다면

명대가 앞서겠지만, 이는 송대에 실용성을 크게 높인 백자 제작의 튼튼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절묘한 형태는 고려의 가마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좌), <용문군지(龍紋軍持)>, 송나라, 높이 13cm, 복건성 덕화현문물관리위원회.

우), <군지(軍持)>, 송나라, 높이 15cm, 입지름 8cm, 복건성박물관.

 

'군지(軍持)' 는 승려의 필수품인 18성물 중 하나인 정병을 이른다. 산스크리트어로 군디카라 하는데

이를 중국에서 음역하여 군지라 불렀다. 감로병(甘露柄) ·  보병(寶甁) · 불기(佛器)로도 썼으며, 부처나

보살이 지닌 구원과 자비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청백유인화차호(靑白釉印花茶壺), 송나라, 높이 8.1cm, 입지름 2.4cm.

 

송대에는 남방의 많은 가마들에서 청백자가 모방 제작되었고,

 대부분이 동남아시아나 일본 등지로 수출되었다.

 

 

 

 

좌), <승모형주자(僧帽形注子)>, 원나라, 높이 19.8cm, 수도박물관.

우), <청백유과릉차호(靑白釉瓜稜茶壺)>, 명나라, 높이 8cm. 입지름 2.2cm.

 

원나라에서 사용한 차는 명차(茗茶 · 말차 · 사차(蜡茶) 등이 있는데, 명차는 솥에 볶아서 푸른색을 없앤 잎차이며,

말차는 찻잎을 건조시켜 가루로 만든 차이고, 사차는 말차 중에서 품질이 고급인 것이다.

원대의 음다법에는 점다법(點茶法)이었지만 전차법(煎茶法) 도 성행했는데, 이 전차법은 예술가나 문인들이

매우 선호하여 일반인에게 퍼지게 되었고, 훗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세력들이 일본에 도입하게 된다.

 

점다법이 널리 퍼졌던 송대에는 흑유(黑釉) 찻잔이 유행했는데, 천목다완(天目茶梡)이 그 대표적이다.

반면 원나라에서는 청백 찻잔이 주류를 이우었든데, 송대 작품들의 형태와 문양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원나라 통치자들은 세련된 취미가 없었으므로 예술에 대한 후원이 가히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 승모형주자가 원나라를 대표하는 주자 중 하나라는 사실.

 

중국 역사상 한나라 고조 유방에 이어 두 번째로 농민 출신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

그가 재위 기간 이룩한 독특한 업적중의 하나가 바로 단차의 제조를 금한 것이다. 이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공정을 거쳐 건안에서 생산한 건령차를 용단차(龍團茶)로 만들어 황제에게 진상되었다.

찻잎을 쪄서 말린 뒤 맷돌에 빻아 결이 고운 체로 여러 번 쳐서 고운 가루을 내어

이를 반죽하여 용무늬를 찍은 것이 용단차다.

 

암튼 이와같은 홍무제의 혁명같은 조치 이후,

말린 찻잎을 차호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는 포차법(泡茶法)이 탄생하게 된다.

오랜 기간 생겨난 이런저런 다양한 형태의 차법이 모조리 바뀌게 되면서

그동안 유행했던 투차(鬪茶) 풍속도 사라졌다.

 

차 마시는 방법의 변화는 필히 차 도구의 변화를 불러왔을 터.

청백 유약을 입힌 위 참외 모양의 차호는 명대 백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명품이다.

이같은 차호의 등장은 곧 '전차의 시대' 를 알리는 화려한 서곡이었다.

 

 

 

<청화호(靑花壺)>, 명나라, 높이 29.2cm.

 

도자의 역사에서 중국의 청화만큼 오래토록 상찬 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명대의 코발트색으로 그림을 그려넣는 방식은 서아시아에서 들여온 것이겠지만, 그릇의 형태나 그림의 기법과 주제들은

대부분 중국적인 것이었다. 주제와 도안은 자유롭고 대담하며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른 바 청화(靑華)의 오묘함과 양채(洋彩) 의 우아함이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좌), <분채방호(紛彩方壺)>, 청나라, 높이 14cm.

 

옹정(甕井) 년간에 제작된 <분채방호>는 황갈색의 철유(鐵釉) 위에 녹채(綠彩)를 뿜어서 만든,

찻잎가루로 만든 유약을 적용시킨 작품이다.

 

 

우), <두채오상제량호(斗彩五常提梁壺)>, 청나라, 높이 14cm.

 

이 차호 그림 내용에는 봉황, 원앙, 척령 등 새 종류가 그려져 있다. 각각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아버지와 아들, 친구와 친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내용이 적용되어 있다.

명청시대는 뭐니뭐니해도 자사호의 시대였기에 다른 종류의 도자기들은 해외 상인의

상업적 이익이 고려 대상 일순위였음을 이해하면 되겠다.

 

 

 

 

<주니호(朱泥壺)>, 청나라.

 

자사(紫砂)는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철분 함량이 높은 사질토의 한 종류로서,

이를 이용하여 유약을 입히지 않고 구워내는데 불속에서 익는 정도에 따라 갈색, 담황색, 자흑색 등

여러가지 아름다운 색깔을 보여주게 된다. 찰기가 없는 자사 한 가지만으로는 어렵고 점력을 높이는

특별한 기술을 요한다. 당연히 개인의 능력과 실험정신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면 저 오만방자한 중국인들이 자사호를 그리 상찬했겠는가?

명성이 명성이다 보니 당연 유사품 자사호가 주변에 차고도 넘치는 실정이다.

까닭인 즉,  철분 함량이 매우 높은 주니(朱泥)라는 또 다른 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흙은 점력이 매우 높아서 형태를 만들기가 매우 쉽고, 화도(火度)도 비교적 낮아서 소성이 수월한 편이다.

이들은 약간의 자사토에 주니를 듬뿍 섞어 차호를 만들고, 이를 자니(紫泥)라고 부른다.

 

명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사호의 가격은 계속 상승중이다.

많은 수집가들이 기둥뿌리를 뽑아 진품 자사호를 손에 넣기 위해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실정.

그러나 그 뜻을 이루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사실. 이윤 즉, 진품 자사호의 매우 높은 희귀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선 예사로 자사호가 거래되고 있고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로 넘쳐난다.

 

 

 

 

<공춘호(供春壺)>.

 

자사호의 선구자로 칭송되는 인물 공춘의 작품으로

흔히 황니(黃泥), 이피니(梨皮泥)로도 부르는 주니로 제작한 것이다.

 

 

 

 

좌), 수선화판방호(水仙花辦方壺)>, 명나라 후기, 높이 9cm, 밑지름 10.5cm, 개인소장. 

우), 국화팔판호(菊花八辦), 높이 9cm.

 

 

 

 

<제량호(提梁壺), 명나라, 높이 17.7cm, 남경박물관.

 

 

 

 

좌상), <특대고집호(大高), 명나라, 높이 27cm, 입지름 13.5cm, 북경고궁박물원.

좌하), <옥란화육판호(玉蘭花六辦壺)>, 1597년, 명나라, 높이 8cm, 밑지름 12cm, 홍통 차기구박물관.

우상), <육방호(六方壺), 1616년, 명나라, 높이 11cm, 입지름, 5.7cm.

우하), <정족원호(釘簇圓壺)>, 1629년, 명나라, 높이 11cm, 입지름 8.4cm.

 

 

 

 

<옥벽호(玉璧壺)>, 명나라

 

 

 

 

좌), <자사태매식석호(紫沙胎梅式壺)>, 청나라, 높이 8.5cm, 폭 17cm.

우), <자사자모난호(紫沙子母暖壺), 청나라, 높이 15cm, 폭 13cm.

 

 

 

 

인용서적: 정동주 著  <한중일의 茶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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