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740) 썸네일형 리스트형 공부하다 죽어라 혜암성관대종사 행장 慧菴性觀大宗師 行狀 혜암대종사慧菴大宗師는 1920년(庚甲) 음력 3월 2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은 김원태金元泰이고 모친은 금성 정丁씨이며 속명은 남영南榮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은 강직하면서도 자비로웠다. 14세에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수학修學한 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열람하였으며,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17세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 · 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던 중 어록을 보다가,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하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호되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로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 6종의 독립선언서 ● 3 · 1 독 립 선 언 서 ● 2 · 8 독 립 선 언 서 ● 대 한 독 립 선 언 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 조 선 혁 명 선 언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태극기1923년, 189×142cm, 등록문화재 395호, 이군옥 소장, 독립기념관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김붕준(金朋濬: 1888~1950년 납북)이 보관하였던 유품으로지금은 유족에 의하여 독립기념관에 기탁되어 있다. 3 · 1 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 한국 다관의 현재 조선조 말, 정치적 격동기를 지나면서 선비들에 의해 이어지던 차 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19세기 들어 청나라 신문물을 접한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다시 차 문화가 일구어 지는 바. 초의와 다산 그리고 추사를 잇는 일련의 선구적 지성들에 의해 조선 차 문화의 절멸 위기가 극복 되는 것. 허나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침탈과 해방과 전쟁을 겪는 동안 우리네 차 문화는 사실상 소멸되고 말았다. 차와 관련된 도자 문화 또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해방 후 20년이 되던 1965년,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었고 그 해를 전후하여 다시 찻그릇이 만들어진다. 일인들의 요청과 필요에 의해 우리의 도자 문화가 다시 명맥을 잇게 된 것이다. 일제 때 일본 도자기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던 토우土偶 김종희 선생.. 한국의 다관(茶罐) , 1~2세기, 가야시대, 높이 26cm, 길이 29.5cm, 입지름 5.6cm, 창원 다호리 출토. 한국 차 문화에서 가장 신비롭고 경이로운 가야시대의 역사가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一然 1206~89)에 의해서다. 그의 저술 에서 가락국의 성립과 문화 전반에 걸친 논라운 역사가 알려진 뒤로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가야사는 외면당해 왔다. 특히 중국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중화 사대주의 관학파 역사가들이 가야사를 멸시하고 고구려 · 백제 · 신라만의 삼국시대라는 개념을 고착화시켰다. 가야는 42년에 건국되어 562년에 멸망할 때까지 10代 491년 동안이나 한반도 남쪽에 명백하게 존재했던 국가다. 그런데도 한사코 가야를 제외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문화가 가야 문화에 미친 영향은 고구려.. 일본의 규스(急須) 앞선 중국 편에서, 우리네가 다관(茶罐)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차호(茶壺) 일본에서는 규스(急須)라 호칭한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다. 무가문화가 발달하면서 일본에서는 쇼인즈쿠리 차실에서 차회를 열고 차를 마시는 유행이 무사들 사이에 퍼져나간다. 과거, 교토의 천황정권이 공가문화(公家文化)를 지향했다면, 쇼군으로 대표되는 바쿠후 체제는 당연히 무가문화(武家文化)를 형성하게 된다. 한 국가에 사실 상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한 셈인데 이들 무사정권은 천황과 귀족들에게 족쇄를 채워 필요한 예산과 대우를 편성하고 집행을 넘어 심지어는 천황 계승권까 쥐고 흔들었다.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와 무역. 이 모두가 전문 소양을 필요로 했고, 이일을 처음부터 승려들이 담당했다. 당시 일본 승려는.. 중국의 차호(茶壺) 차 생활에 필요한 그릇을 통칭하여 다기(茶器)라 한다. 그중에서 찻잎을 우려내는 데 쓰이는 그릇을 우리는 다관(茶罐)이라 일컫는데, 이는 아마도 한약을 달이는 약탕관(藥湯罐)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동양 3국 중 가장 먼저 차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한 중국은 차호(茶壺)라 칭하는 모양이고, 바다 건너 일인들은 규스(急須)라 호칭한다고 들었다. 암튼 다관은 그릇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가장 늦게 등장한 축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잎차를 우려내기 위해 등장한 손 안의 그릇인지라 민족과 종교, 그리고 개인 취향에 근거하여 다양한 미학적 요소가 적용되어왔음을 볼 수 있다. 한 · 중 · 일 다관 문화사를 다룬 책의 편린을 일부나마 더듬어 보기로 한다. 먼저 중국 편. 높이 8.7.. 오채현 조각展 '무각사' 경내 (광주광역시) 사면불 거친 질감 속에 피어나는 자비의 미소. 작가의 손에 쥐어진 정 끝의 진동을 따라가며 그의 심성을 유추하는 즐거움. 수년 전 '통도사 전시회' 에서 감상한 바 있었던 오채현 작가의 작품 들. 탐매 차 찾아간 광주시 무각사에서 작가의 석조 전이 열리고 있어 여간 반가운 마음. 여러 미술 분야에서도 석조각은 많은 시간과 공력, 그리고 인내와 끈기가 동반되어야 하는 그야말로 난이도가 높은 분야. 거의 모두 불교를 테마로 하는 작품이기에 지난한 공부 또한 필수 요소일 터. 작가의 건투를 빌며, 부디 크나큰 발전과 원대한 예술적 가피(加被)를 기원드린다. 동서양의 차 문화 II 유럽은 차와 그 문화에 관한 가장 후발 지역이었다. 유럽엔 차나무가 자생하지 않은데다, 차의 원산지랄 수 있는 중국이 '극서'(極西)에 위치한 관계로 물리적으로 머나먼 중국과의 교류가 당연히 늦을 수 밖에 없었을 터. 15세기 말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발견하기까지 동서간의 교류는 실크로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동양의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인들이 광동에 도래한 것이 16세기 초였으니 아마도 그들에 의해 처음 차가 유럽에 알려졌으리라. 중국차에 관한 유럽 최초의 기록은 1545년경 이탈리아의 항해기에 수록된 것이라 한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차를 수입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고 한다. 1610년 일본 녹차를 ..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9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