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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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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民畵) 산책 민화(民畵) 산책  민화에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민화의 세계는 사실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세계다.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느끼고 아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여 실제적인 사실성보다 관념적인 구성이 두드러진다.  ※ 아래 내용은  정병모 著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19세기, 종이에 채색, 49.0×31.0cm, 일본 구라시키민예관 모란과 화초, 그리고 닭이 오버랩되어 있다. 가운데 꽃병에는 모란이 꽂혀 있다.그런데 웬일인지 화려한 모란꽃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닭이 목을 길게 뽑아 모란 잎과 중첩됨으로써 닭 벼슬이 모란을 대신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왼쪽 아래의 흙더미에서는 죽순이 사선 방향으로 뻗쳐 올라가 닭과 교차하고 있다. 이것은 ..
서민(庶民) 풍속화 서민(庶民) 풍속화   조선 후기 풍속화에는 대부분 서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그들의 생활상을 가장 먼저 화폭에 담은 이는 의외로 사대부 화가였다, 서민들의 일상사를 뛰어난 관찰력과소묘로 형상화 한 것이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이룬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 후기의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롯한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사실성, 묘사의 현장성, 그리고 당시의 풍물에나타난 시대성을 뛰어난 조형예술로 성취해 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윤진영 著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중에서     윤두서, 18세기, 모시에 수묵, 34.2×21.1cm, 개인 소장 어느 여름날,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에 한 남성이 짚신 삼기에 열중해 있다. 짚더미를 깔고 앉아 두 다리를 뻗고서 양 발..
사인(士人) 풍속화 사인(士人) 풍속화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널리 알려졌지만 관인(官人)과 사인(士人) 풍속화는 그렇지 못했다.풍속화는 우리나라 생활 풍속의 역사를 가장 입체적으로 기록한 사료(史料)이자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사인 풍속화에 포함되는 그림들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사례가 적지 않다. 일상을 그린 그림보다 기념을 위해 제작된 사례가 많다. 사인 풍속화는 주로 전문 화가에게 주문하여 그리도록 했다. 당연히 수준과 화격이 매우 높다.  - 윤진영 著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중에서 -    《평생도》중 혼례식     1499년 추정, 두루마리, 종이에 채색, 38.0×208.0cm, 삼성미술관 리움 오백 년 전 노인들의 모습과 뜻깊은 사연을 오늘에 전하는 그림이다.1499년(연산군 5) 전라도 순창..
관인(官人) 풍속화 관인(官人) 풍속화 풍속화는 전문 화원(畵員)을 포함한 직업 화가와 일부 사대부 화가로 나뉜다.인물 묘사에 있어 오랜 숙련을 요하는 만큼 결코 간단한 그림이 아니다.시대의 사회상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뛰어난 안목을 요하는 장르가 바로 풍속화 라는 사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1535년, 화첩 종이에 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임금이 신하들에게 베푼 연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을 사연도(賜宴圖)라고 한다.위 그림은 중종(中宗)이 신하들에게 베푼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1535년(중종 30), 왕세자가 강학(講學)에서 중국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마치자 39명의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한 관리들을 불러 연회를 배푼 것. 서연관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사부이..
오상조 교수의 雲住寺 인연과 집념은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고 곧 사진철학의 밑바탕이 되어 왔다. 1984년부터 수없이 운주사에 드나들면서 만산계곡에 산재한 석불 · 석탑에 빠져들어 지금까지도 사진작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피사체의 시각적인 겉모습에 몰입된 나는 깊은 아상(我相)때문에 심오한 신비성을 표현하는 데 정신적인 고민과 사진 표현에 대한 고통이 늘 따라다녔다. 한밤중 꿈속에서 촬영한 신비로운 석탑 · 석불 사진에 만족하여 행복해 했던 황홀감이 한낱 꿈이었을 때의 허탈감은 나를 더욱더 고민 속으로 밀어넣어 사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참으로 많이 맛보았다. 그러나 처음에 보았던 운주사의 석탑 · 석불에 대한 오랜 인연의 끈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때때로 불경(佛經)을 보기도 하고 사경(寫經)을 하면서 나의 아상에서..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1981년  종이에 채색, 96×76cm    천경자 1924년 ~ 2015년      1983년 종이에 채색 97×74cm이 작품은 완성 후에도 계속 수정하였다. 천경자는 이처럼 완성한 작품도계속 고쳤기 때문에 한 작품이 연도별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작품을 팔기 위해 양산하지 않고한 작품에 온 정성과 혼을 담아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1995, 종이에 채색, 96×129cm1995년 완성 당시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때의 그림에 차이가 있다. 처음에 있던 사인과 낙타를 지우고 여인들의 표현도 달라졌다. 천경자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을 두고두고 수정을 가한 경우가 많았다.     1976년 무렵에 그린 의 원본 스케치     수정 전과 후1977, 66.5×68.5cm   ..
키스가 본 20세기 초반의 한국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미술의 세계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계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모든 사람이 미술가의 친구이고, 모델이 특히 그렇죠." 20세기 초 한국, 중국, 필리핀, 일본 등지를 여행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그녀는 자신의 시선에 담긴 동양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언니에게 틈틈이 여행기를 적은 편지를 보낸다.1915년 봄 일본에 온 것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동양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풍속화, 인물화 등을 그리고 세 권의 책도 출판한 바 있다. 정규 미술 커리귤럼을 이수한 적은 없으나, 나중 영국은 물론, 유럽이 인정하는 판화의대가 반열에 오른다. 키스 자매가 한국을 처음 찾은 때는 1919년 이었다.    4월 초파일 / 1919년..
백범일지 중에서... 아래 내용은 『백범일지』중에서 와  > 등을 발췌한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 존영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둘째줄 왼쪽 끝이 백범     1930년대 전후 미주 동포들. 이들은 1940년대 한국독리방 화와이지부의 중심이 되었다.       1932년 4월 26일 선서식을 마친 윤봉길 의사와 백범      1941년 1월 1일 한국광복군 제5지대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      반탁 집회에서 연설하는 백범     1946년 9월 23일 탈옥 후 숨어 있었던 함평을 50년 만에 찾아와 훈화하는 백범         1948년 1월 26일 백범은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