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인(官人) 풍속화
풍속화는 전문 화원(畵員)을 포함한 직업 화가와 일부 사대부 화가로 나뉜다.
인물 묘사에 있어 오랜 숙련을 요하는 만큼 결코 간단한 그림이 아니다.
시대의 사회상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뛰어난 안목을 요하는 장르가 바로 풍속화 라는 사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1535년, 화첩 종이에 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임금이 신하들에게 베푼 연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을 사연도(賜宴圖)라고 한다.
위 그림은 중종(中宗)이 신하들에게 베푼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1535년(중종 30), 왕세자가 강학(講學)에서
중국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마치자 39명의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한 관리들을 불러 연회를 배푼 것.
서연관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사부이자 관료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서연관들이 사연 장면을 그리게 하여 한 점씩 나누어 가졌는데
그 중 한 점으로, 지금은 후대에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 몇 점만이 전하고 있다.
그림 속의 장소는 경복궁 근정전 앞뜰로, 화면 위에 자리한 근정전은 임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회랑의 지붕은 좌우 대칭이지만, 근정전과 어도는 사선 방향으로 그렸다.
조선 중기 기록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징으로 한 화면에 정면과 사선 두 개의 시점이 그려진 것이다.
근정전 뒷편으론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산이 산뜻한 담채에 점과 선묘로 처리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모두 39명이 참여했다는데, 그려진 사람은 이보다 적다. 참석치 못한 사람들의 이름도 참석자 명단에 기록해 두었다.
천막 옆 주탁에는 왕이 내린 술항아리가 놓였고사옹원(司饔院) 관리와 승지가 술잔을 전해 주고 있다.
왕이 내린 술이기에 승지가 전달하는 잔을 한 사람씩 나와 정중히 받는 모습이다.
(부분)
아마도 이날 만큼은 과음도 허용되었던 듯.
그림 아랫쪽으론 과음으로 몸을 못 가누는 이가 부축을 받으며 빠져나가는 관리의 사실적 모습 재미 있다.
흥겹게 춤을 추는 기녀 두 명과 다섯명의 악공이 해금, 비파, 거문고 등을 연주하고 있다.
<중묘저서연관사연도>
18세기 이모(移模) 화첩, 종이에 채색, 44.0×61.0cm, 고려대학교 박물관
근정전 아래의 월대(月臺) 모습이 앞서의 그림보다 더 구체적이다.
좌우의 회랑은 마치 넘어져 있는 것처럼 그려서 일화문과 월화문이 담장 위에 어색하게 놓여 있다.
배경의 산은 녹청색 계열로 채색하여 이전과 달라진 화풍을 보인다. 약간 미숙하지만, 이러한 청록산수의 표현은
18세기 이후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화법이어서 모사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모사(模寫)는 낡고 해진 그림을 재현하여 원본의 형상을 후대에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약 480년 전에 그린 <중묘조서연관사연도>가 오늘날 그 모습을 자세히 전하는 것은
이러한 모사의 전통과 방법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효종어제희우시회도(孝宗御題喜雨詩會圖) (부분)
1652년, 족자, 종이에 채색, 57.4×64.0cm, 개인 소장
1652년(효종 3) 3月7일, 밤사이에 큰 비가 내렸다. 온 나라가 간절히 기다리던 단비였던 모양.
동이 트자 효종은 어젯밤 입직한 승지를 비롯한 관료들을 불러 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시의 주제는 '기쁨의 비'인 희우(喜雨).
기쁨에 겨워 있던 신하들에게 효종이 베푼 시회는 더없이 큰 영광이었을 터.
시회의 좌장 도승지 이응시(李應蓍 1594~1600)의 제안과 승지 김좌명(金佐明 1616~1671)이 동의하여 제작한 그림으로.
김좌명의 문집에 실린 희우시계족서(喜雨詩契簇序)에 이 시회가 열리게 된 저간의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계족(契簇)'은 '계회도 족자(簇子)'라는 뜻.
이 시회도를 특별한 만남과 인연을 기념하여 만든 계회도(契會圖)와 같은 의미로 본 것이다.
본래 그림의 상단엔 제목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좌목(座目)엔 승정원 홍문관,세자시강원 소속의 관원 열 세 명의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장소는 승정원으로 추정된다. 병풍 왼편으로는 왕이 내릴 표피(豹皮)가 걸려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왕이 하사한 선온주(宣醞酒)로 보이는 술 단지와 내관(內官)이 술을 내오는 모습도 보인다.
열세 명은 관직의 서열에 따라 앉았다. 맨 위쪽 상석에는 좌장인 도승지 이응시가 앉았고, 그 다음은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아래(남)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그림과 좌목을 대조해 보면
각 위치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효종어제희우시회도 (부분)
부채를 들고 상념에 잠겨 있는 사람, 붓을 쥐고 시상을 떠올리는 사람, 적은 시를 읽고 있는 사람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인 계회도와는 달리 인물의 개성적 표정 묘사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신하들이 지은 시는 대제학이 등수을 매겼으며, 홍문관 수찬 김휘(金徽)가 1등을 했다.
자리 서열로 볼 때 김휘는 왼쪽 칸 위에서 두 번째 인물로 일번적인 계회도 처럼 '기록'과 '기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포함하는 그림이라는 데 그 특징과 의미가 있다 하겠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어제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중
1760년, 비단에 채색, 34.2×22.0cm, 부산박물관
영조는 1760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에 걸쳐 청계천 준천(濬川)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공역이 끝난 후 영조는 자신의 행적과 공사에 참가한 공로자들에 대한 사은(賜恩) 장면을 도해한 그림으로 화첩을 꾸미게 했다.
또한 준천 공사 후 춘당대(春塘臺)에서 개최한 행사에서 자신 및 여러 신료들이 지은 시가 함께 들어가 있다.
어제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은 이때 제작된 계첩 중 하나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7년 9월 7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수문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왕의 행차를 알리는 황룡기와 둑기가 보인다.
영조는 연을 타고 계단을 올라 수문 위에 자리를 잡았다. 햇빛을 가리는 차일을 쳤고, 그 중앙에 진 의자가 놓였다.
의자는 비어 있으나 실제론 왕이 좌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관이 일산(日傘)을 들고 옆에 서 있다.
영조의 앞에서 보고를 돌리고 있는 관원은 준천 사업의 책임 관료로 추정된다.
뒷편으론 수행 관원과 내관들이 서 있고, 바깥쪽은 조총과 활로 무장한 호위 무사들이다.
오간수문은 성곽 아래에 다섯 개의 수문을 만들어 물이 빠지도록한 구조물이다.
수문에는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쇠창살문을 설치했다. 홍예 앞쪽에는 석축을 길게 돌출시켰다.
양 가장자리 석축 위에는 돌거북이 조각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영조의 애민 정신이 녹아있는 청계천 준천 사업.
위민(爲民) 정치의 실천이자 현장 르포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그림일 터이다.
구한말의 오간수문
<수문상친림관역도>에서 영조가 앉아 있는 오간수문 바로 위쪽은
성곽이 약간 위로 볼록한 아치형의 곡선을 그리고 있으나 사진에서의 모습은 위쪽이 평평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약간의 구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경이물훼첩(敬而勿毁帖》 중
1767년, 비단에 채색, 42.9×60.4cm, 국립문화재연구소
1395년(태조 4)에 완공된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기까지 무려 270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황량한 터를 일러 조선 후기 사람들은 '구궐(舊闕)이라 했다.
영조는 태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곳을 찾아 여러 행사를 치르게 했다.
위 그림은 그 가운데 하나인 1767년(영조 43) 12월에 있었던 진작례(進爵禮)에서 술잔을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진작례는 왕이나 선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의례'라는 뜻.
1767년 12월 16일, 세손(정조)을 대동, 폐허가 된 근정전 옛터 에서 문무과(중시重試)를 치른다.
그리하여 소작례(小酌禮)를 베풀었던 것. 이 진작례는 옛 고사를 계승한 행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1407년(태종 7) 10월에 태종이 태상왕(太上王)인 태조의 탄신일을 맞아 술잔을 올린 옛일을 영조가 계승한 것.
태종이 태조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술잔을 올린 현장이 바로 경복궁이었기 때문이다.
근정전의 옛터 위에 장막을 쳤고, 그 뒷편과 좌우에도 천으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군사를 배치하여 경호에도 만전을 기했고 기단 아래에는 영조가 타고 온 가마 등이 보인다.
근정전 기단 위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봉병이 펼쳐져 있고,
어좌 앞쪽에 그려진 노란색 돗자리가 영조가 술잔을 받던 자리이고, 황색 사각 표시가 왕세손이 앉은 자리.
이 화첩인《경이물훼첩》에는 의령남씨인 남은로(1730~1786)가 서문을 썼다.
진락례의 동기, 절차, 참석자, 그림의 제작 등에 대하여 기록한 것으로 문관 열여섯 명, 무관 열세 명,
왕세손과 대신들, 육조(六曹)의 판서,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등이 참여 했다.
이 <영묘조구궐진작도>는 19세기 말에 원본을 모사한 이모본으로 짐작한다고 한다.
짙은 색감과 음영법이 들어간 묘사는 19세기 양식으로 판단되기 때문.
하지만 최초에 제작된 원본의 내용을 충실히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옹원 선온사마도(司饔院宣醞賜馬圖)> (부분)
1770년, 비단에 채색, 140.0×88.2cm, 국립중앙도서관
부감 기법으로 청사 내부가 잘 드러나 있다. 중앙에 영조와 관료들이 있는 건물 앞쪽으로 차일이 쳐졌고,
임금 곁에는 승지들이 서 있고, 사옹원 관료들은 좌우로 작은 음식상을 두고 앉았다.
전각 앞쪽에는 왕을 모시는 수행원과 임금이 타는 여(輿)가 놓여 있다.
그 아랫쪽엔 사방이 트인 건물이 있고,
그 왼편으론 관리들에게 나누어 줄 다섯 마리의 말이 그려져 있다.
사옹원은 궁중에 식재료와 음식물을 공급하고 관리하던 곳으로 이곳을 찾은 영조는 전에 없던 행보를 보인다.
신하에게 말을 하사하는 것을 '사마(賜馬)'라 한다. 영조가 사옹원 관리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글과 음식을 내린 것은
자신이16세 때인 1709년(숙종 35) 사옹원에서 도제거(都提擧)라는 녹봉 없는 직책을 지냈기에 이를 추억한 것.
그 중에서도 말을 내려주는 것은 특별한 선물이자, 성은(聖恩)이요, 커다란 영광이었다고.
옛일을 회상하면서 지은 영조의 글에는 7년간의 사옹원 도제거로서의 부왕(父王) 숙종을 위해
음식과 탕약을 올리며 숙직을 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자신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일과 무술년(戊戌年)
생모의 죽음 등을 회고하는 심경을 적었다.
글의 말미에 영조는 "가슴을 누르고 눈물을 삼키며 기록한다."라고 했다.
사옹원 도제거에게 자신의 글을 배껴 쓰게 한 뒤, 한 본은 궁중에 올리고, 한 본은 사옹원에 보관케 했다.
그리고 그 글 아래에 사옹원 신하들의 이름을 쓰게 한 뒤, 정서(正書)하여 한 점씩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어서 관료 다섯 사람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내려 주었던 것. 영조가 하사한 말에는 등급이 있었다.
궁궐에서 기른 내구마(內廐馬), 제조 세 사람에게는 궁 밖에서 키운 외구마(外廐馬),
부제조에게는 길들인 말인 숙마(熟馬)를 주었다.
영조는 말을 하사할 때 '면급(面給)'했다고 한다. 즉 신하를 가까이 오도록 한 뒤,
면전에서 말고삐를 직접 하나씩 건네주었다. 다섯 마리의 말은 백마가 세 마리, 갈색과 흑마가 각각 한 마리씩이다.
이에 도제조 우의정 김상철을 비롯한 여섯 명의 사옹원 신하들은 임금의 은덕에 감사하는 전문(箋文)을 지어 바쳤다.
그 경위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족자로 만든 이 사마도는
상단에 그림, 하단에 관료들의 명단과 영조의 글 등을 빽빽이 적어 놓았다.
이는 그림에 기록을 붙인 조선 전기 유행했던 계회도와 유사한 것으로
'사마도' 한 편에 250년 전의 진한 역사가 녹아있음을 본다.
(사옹원 선온 사마도 부분)
고삐와 연결된 끈을 붙잡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영조의 명을 받아 말을 가져온 사복시(司僕寺)의 관원들로 추정된다.
사복시는 말과 수레 및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사옹원 선온 사마도(司饔院宣醞賜馬圖)
그림 상단에 제목이 없고 그림 아랫 부분에 기록이 많다.
또한 죄목의 이름 앞에 '신(臣)'자를 붙였다. 왕이 함께한 자리였기에 자신들의 이름만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익정은 서문에서 "이에 계족(系族)을 각각 장황하여 손을 씻고 삼가 발문을 썼다고 했다.
여기에서의 '계족'은 '계회도 족자'를 말한다.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1531년, 족자, 비단에 채색, 95.0×57.5cm, 삼성미술관 리움
족자로 꾸민 <미원계회도>는 위쪽에는 표제(標題),와 그림, 시를 쓰기위해 비워 둔 공간,
참석자들의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에는 사간원의 별칭인 '薇院(미원)' 두 글자가 쓰였으나 한 글자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애초에는 (薇垣契會之圖)”미원계회지도)'라 썼던 것이다. 계회의 장면을 작게 그렸고,
주변과 배경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비중있게 표현했다. 감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의도로도 이해된다.
참석자들의 품계 · 관직 · 이름 · 본관 등을 순서대로 썼고, 왼편으로 부친(父親)의 관직과 이름도 기록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인적 사항 기록의 기본 방식인 것이다.
<미원계회도> (부분)
이 모임에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황사우(1486~1536)를 비롯한 일곱 사람이 참석했다.
화면의 배경은 지금의 청와대 뒤편 백악산이다. 백악산 오른쪽 능선 너머로 삼각산 보현봉이 어렴풋이 솟았다.
아랫쪽으론 도성 성벽의 윤곽이 간략하게 드러난다.
한강의 작은 지류이거나 한양의 도심을 지나는 청계천의 한 지점일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 장면은 작게 그려졌으나, 세부 묘사는 결코 그렇치 않다.
한 사람은 시내에 발을 담그었고, 또 한 사람은 관복 자락을 들고 개울을 건너고 있다.
미원계회도 (부분)
탁족을 나온 사람들의 차림새가 모두 관복이다.
미루어 짐작컨데 이날 사간원 관원들은 모두 정상 출근을 하지 않았을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물가로 나가휴식을 즐기는 모습이라 유추할 수 있겠다.
무릇 태평성대의 예라고 보면 별 무리가 없겠다.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郞官契會圖)>
1550년경, 족자, 비단에 담채, 93.5×58.0cm, 국립중앙박물관
좌목(座目)을 보면 호조의 낭관들이 대부분으로 전직 낭관 몇 사람도 참석해 있다.
호조 낭관은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요직(要職)이다.
배경의 산은 호조의 관아에서 바라본 산봉우리를 그린 듯한데 호조가 육조 거리 동편에 있었으므로
뒤편의 산은 백악산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밀도 있는 필치로 보아 당대 최고 기량을 소유한 화가의 그림으로 짐작된다.
호조낭관계회도 (부분)
둥치 큰 소나무로부터 산등성이로 갈수록 수목이 점점 작아지는 원근의 질서를 갖추었다.
16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 중기(약 1550년~1700년)로 넘어가는 회화 양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호조낭관계회도 (부분)
중앙에 앉은 좌장을 제외한 관원들이 소반을 받은 채 모두 기둥과 난간 쪽으로 물러나 있다.
중앙의 공간을 비워두고 벽을 등진 채 앉는 것이 전통적인 연회의 자리 배치 방식이다.
좌목에는 전직 관원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다. 전 호조정랑 안홍과 전 좌랑 김익이다.
건물 안 맨 왼쪽 아래 앉은 두 사람이 이들로 추측된다. 이유인 즉, 관모(官帽)가 아닌 갓 형식의 외출모를 썼고,
허리띠도 각대가 아닌 띠를 맸기 때문이다.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은 사람들은 호조의 관원들이다.
난간 밖에는 시중을 드는 여성 일곱 명이 앉아 있다. 머리의 가체로 보아 기녀로 추측된다.
오른편 섬돌 아래로 시녀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 모습이고, 탁자 위에는 청화백자를 비롯한 도자기류가 보인다.
이 모임에 참석한 황준량(1517~1563)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에는
그가 1550년(명종 5) 호조의 낭관으로 임명한 기록이 보인다. 이 그림의 제작 시기를 1550년으로 보는 이유이다.
<호조낭관계회도>는 조선 초기의 계회도 가운데인물 묘사가 뛰어난 사례로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견주어
손색이 없는 16세기 관인(官人) 풍속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희경루방회도(喜慶樓枋會圖) (부분)
1567년, 비단에 담채, 98.5×76.8cm, 동국대학교박물관
1567년(명종 22)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喜慶樓)에서 1546년(명종 1)의 증광시 문·무과에 합격한
동기생 5명이 만나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여 그린 계회도로 세부 묘가가 그리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사실적 관계를 정확히 살핀 그림이다.
누정 위 일렬로 앉은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관모가 아닌 외출모를 썼다.
두 사람은 전직 관원으로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동기생들을 '동방(同榜)'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 '방회(䅭會)라고도 했다.
이날의 방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라도 광주(光州) 인근의 요직에 있던 전 · 현직 관리들인데, 광주 목사와
전라도 관찰사 강섬(姜暹,1516년생),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林復),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전 낙안군수 남효용 등이다.
희경루는 《광주읍지》에 광주의 객관(客官)에 딸린 누정으로 나온다.
<희경루방회도(喜慶樓枋會圖)>
족자 맨 위쪽에 전서체로 제목을 적었고 아래에 연회 장면을 그렸는데
관료 다섯 명에 기녀가 서른 다섯 명이나 동원되어 누각에 올라 앉은 모습으로,
이토록 많은 기녀가 동원 된 모습은 다른 계회도나 기록화에서도 유래가 드물다고.
풍류인지 향락인지의 판단이 쉽지 않다는데. 지방이었기에 가능했지 않았겠느냐는 미술사가의 평.
희경루방회도(喜慶樓枋會圖) (부분)
이날 동기생들이 앉은 자리 서열의 상석엔 전라관찰사가 아닌 광주 목사 최응룡이 앉았다.
문과시험에서 최응룡이 장원 급제자라는 예우 차원에서의 배려인 듯.
두 사람은 좌목의 세 번째인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과 다섯 번째인 전 낙안군수 남효용이다.
현직 관원과 달리 외출모인 평량자를 쓴 것으로 사실 관계를 정확히 살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광주목사 회응룡의 오른편 댕기머리 어린 아이는 15세 미만의 기녀인 동기(童妓)인 듯하다.
기녀의 흰색 화장한 모습과 또 하나의 특징인 가체와 장식물인 두식(頭飾)도 눈에 띈다.
연회 장면 이외의 부분으론 희경루 아래의 그늘밑에 하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고
누정 왼편 아래로는 한 무리의 악공들이 보인다. 화살 과녁은 실제로 오른쪽으로 훨씬 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하지만 거리를 단축시켜 화면 안에 넣었다.
<기영회도(耆英會圖)> (부분)
1584년, 족자, 비단에 채색, 163.0×128.5cm, 국립중앙박물관
연회 공간 왼편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이 서로 술잔을 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연회 장면은 이 두 사람으로 인해 친밀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로 연출되었다.
인물의 표현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보다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이야기를 나누는 표정과 동작이 매우 사실적이다.
한양의 육조 거리 남쪽에 기로소(耆老所)가 있었다.
기로소는 고위 관료를 지냈거나 현직에 있는 국가 원로들의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매년 봄 가을 한 차례씩 정기적인 모임인 기영회(耆英會)를 열었다.
나이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정승을 지냈거나 품계가 1품 이상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곳이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9호.
1585년(선조 18) 7월에 개최된 기영회의 모습을 그린 필자 미상의 기록화이다.
화면 상단으로 부터 전서체(篆書體)의 제목, 그림, 참석자의 자필 찬시, 좌목(座目) 순으로 이루어진 계축(契軸) 형식이다.
좌목에는 좌의정 노수신(盧守愼), 우의정 정유길(鄭惟吉), 판중추부사 원혼(元混), 팔계군 정종영(鄭宗榮),
우찬성 심수경(沈守慶), 지중추부사 강섬(姜暹), 동지중추부사 임열(任說) 등 7인이 관직순으로 배열되었다.
<기영회도(耆英會圖)>
기영회가 열리는 건물 안쪽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왼편은 매화와 동백이고, 오른편은 소나무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주변 인물 묘사이다. 부속 공간 왼편에서 술을 데우는 여성들은 가리마를 쓴 의녀(醫女)들이다.
그 오른편에는 화려하게 분장한 기녀들이 대기하고 있다. 서로 돌아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기녀들 아래에는 아홉 명의 악공(樂工)들과 중앙에 박을 든 지휘자를 비롯, 오른쪽에 여러 악기가 보인다.
화면 왼편으로 음식상을 나르는 두 남자와 엎드려 있는 수행원이 보인다.
작은 크기이지만, 옷차림과 동감이 정확하게 표현되었다.
섬돌 아래로 가마꾼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기다림에 지루해하는 표정에 이르기까지.
<임오사마방회도(壬午司馬榜會圖)>
1630년, 비단에 담채, 42.5×56.0cm, 한국학중앙연구원
건물 앞쪽에 차일(遮日)을 쳤고 배경은 생략했으며, 건물 안쪽의 모임 장면을 강조하여 그렸다.
1630년(인조 8) 늦은 봄 어느 날, 지금의 인사동 북쪽에 있던 충훈부(忠勳府)에 백발의 노인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임오년인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함께 입격한 동기생 중, 돈녕부사 윤방(1563~1640)을 비롯한
당시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열두 명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으로, 20대 청년이었던 이들이
70세를 넘어 백발 성성한 노인으로 방회를 갖는 모습이다.
임오사마방회도(壬午司馬榜會圖) (부분)
건물 안쪽의 중앙에 앉은 네 명은 윤방, 오윤겸, 이귀, 김상용이다.
이들은 모두 정1품이기에 가장 상석인 북쪽에 앉았다. 동기생들의 모임이지만 자리 서열만큼은 엄격히 지켜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634년(인조 12)에 이들은 또 한 번 방회를 가졌다. 그리고 4년 전처럼 방회도도
새롭게 한 점을 그렸다. 이후론 더 이상의 모임은 없었다.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기 때문.
<기유사마방회도(己酉司馬榜會圖)>
1669년, 화첩, 비단에 담채, 41.8×59.2cm,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이 최고령자들이 참여한 방회이자 회방으로 기록을 세운 그림.
방회도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관료들이 남긴 사례는 이 그림이 유일하다.
사마시 동기생들이 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방회를 갖고 그린 것으로 81세의 이조참판 이민구,
91세의 돈지돈녕부사 윤정지, 85세의 동지중추부사 홍헌 등 세명의 노인들이 주인공이다.
과거 시험 중 문과(文科)보다 예비 시험인 사마시 동기생의 관계가 더욱 친밀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마시 동기생들은 서로를 형제관계에 비유할 만큼 소중한 인연으로 여겼다고 한다.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서 의미가 컸고,
또한 순수한 청년 시절의 만남이었던 만큼 결속과 유대가 특별히 돈독했다.
<선전관청계회도(宣傳官廳契會圖)>
1789년, 족자, 종이에 채색, 115.0×74.3cm, 진주박물관
18세기 계회도로는 매우 특별한 족자 형식의 그림으로, 연회 장면을 크게 그린 반면에
배경의 경관은 면의 한 부분에 한정시켰다. 이처럼 계회도 속의 인물과 장면 묘사에 비중을 둔 것은
18세기 유행한 풍속화의 영향과고 관련이 있을 듯하다.
선전관(宣傳官)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계회도는 전해지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위 그림은 1789년(정조 13) 작으로 그림 속의 장막 안에는 관복 차림의 선전관들이
각각 상(床)을 받은 채 앉아 있고 시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다. 천막 바깥에는 하급 관리들이 서 있고,
배경을 이룬 한강에는 배 위에 올라 취타를 울리는 관원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아래로 계회에 참석한 스물세 명의 직함과 이름을 기록했다.
정3품 당상관이 네 명, 당하관이 여섯 명, 그리고 종4품이 열두 명, 모임의 실무를 맡은 조사(曺司)가 한 명이다.
좌목 왼편에는 '정미구월(丁未九月)'이라 적혀 있다.
즉 1787년(정조 11)9월에 모임을 갖고 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연회의 분위기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느낌. 무슨 사연일까?
이를 살필 수 있는 단서가 선전관청의 업무일지인 《선전관청일기》이다.
이날 오전 창덕궁의 춘당대에서 정조가 초계문신(抄啓文臣)들과 활쏘기를 했다.
이를 마친 뒤 선전관들이 자리를 옮겨 별도의 모임을 가진 것.
새로 임명된 선전관 김익빈과 양협의 면신례(免新禮)에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신참을 면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주로 관직에 첫발을 딛는 신임 관원이 치르는 신고식 관행이자 통과의례 였던 것.
두 사람의 품계는 절충장군으로 되어 있다. 결코 신임 관원이 아니다. 당상관(堂上官)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식을 치렀다는 것이다.
백허면참(白許面參)이라 하여 얼굴에 분칠을 하고 해진 옷과 신발을 걸친 남루한 차림으로 곤혹스러운
벌칙을 주저 없이 따라해야 했는데 이를 '벌례(罰禮)'라고 하였다.
그림의 장막 안쪽 한가운데 흰색 관복 차림의 네 명이 당상관이다.
이 중 두 명이 신고식의 주인공 김익빈과 양협이다.
이런 신고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조대왕이었던 것.
그림에서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이다.
정조는 자신이 믿고 기대하는 선전관원들의 신고식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흥미로운 볼거리로 삼았던 듯 하다.
<선전관청계회도> (부분)
그림 속 참석자들은 마치 기념 촬영하듯이 품위 있는 모습으로 그림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 안에 감추어진 면신례의 관행은 《선전관청일기》 몇 줄 기록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면신례의 실상은 결코 그림 속의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관행으로 남을 수 없었다.
면신례를 행하는 날에는 신임 관원이 참석자들의 수만큼 여러 점의 계회도를 준비하여 선배 관원들에게
한 점씩 나누어 주었다고. 이를 분급(分給)이라 하는데 계회도는 필수 지참물이었던 셈이다.
《평안감사환영도(安監司歡迎圖)》 중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島)> (부분)
19세기, 종이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누각처럼 천장을 덮은 선박 안에 평안감감사(平安監司)가 앉아 있다.
등불과 깃발을 들고 탄 병사들의 배가 평안감사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듯 하다.
감영(監營)이 평양에 있었기에 '평양감사'로도 불렸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을 지키는 변방으로 이곳에서 수확한 공물(貢物)은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그 지역에서 군사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 말 하자면 중앙 정부가 변방에 준 일종의 혜택이었던 셈.
<평양감사환영도>는 세 점의 그림을 묶어서 붙인 제목이다.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島) 가 각 그림의 제목이다.
<부벽루연회도>의 오른쪽 위에 김홍도의 글씨와 인장이 있지만, 어색함이 있어 김홍도의 그림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데.
선행 연구에서는 이 그림을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전문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부분)
19세기, 종이에 담채, 71.2×196.6cm, 국립중앙박물관
성곽 안족으로 민가의 일부가 보인다. 기와와 초가로 된 집들이 반듯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동문 너머의 고요한 강변 풍경은 연회의 분위기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연광정은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며, 건물 두 채를 연결하여 지어 건축미가 뛰어나다.
누정 안에는 기생들이 춤 추는 장면을 감사와 아전들이 바라보고 있다. 연광정 아래로 갓을 쓴 도포 차림의 구경꾼들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 아마도 환영연에 초대받은 손님이거나 감사를 환영키 위해 나온 선비들로 추측된다.
오른쪽 성문은 평양성의 동문인 대동문(大同門)이다. 문루 안쪽엔 '읍호루'라는 편판이 걸렸다.
평양감사환영도 중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부분)
19세기, 종이에 담채, 71.2×196.6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에 보이는 부벽루는 원래 영명사 남쪽에 있던 부속 건물이었다. 오른편으로는 대동강에 자리잡은 능라도와
그 건너편의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배경에 이러한 풍경을 그러 넣은 것은 이 그림 속의 장소가 경관이 빼어난
평양임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읽힌다. 연회 공간은 늘어선 병사들에 의해 구획되었고,
그 안에서 다섯 팀의 무용수가 골시에 공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신선에게 복숭아를 바치는 헌선도(獻仙桃)를 비롯한 처용무(處容舞), 포구락(抛毬樂),무고(舞鼓), 검무 등이다.
실제로는 치간차를 두고 진행되었지만, 모든 것을 한 장면에 보여 주어야 하는 기록화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島) (부분) 《평안감사환영도》중
19세기, 종이에 담채, 71.2×196.6cm, 국립중앙박물관
대동강의 남단에서 북쪽 평양성을 바라보고 그린 웅장한 뱃놀이 장면이다.
불야성을 이룬 장관으로 그 중심에 감사가 탄 배가 이 그림의 핵심이다. 누각처럼 천장을 덮은 공간 안에 감사가 있고
주변에 3~4명의 기녀가 있지만 춤 추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세 점으로 구성된 《평안감사환영도》는 모두 대동강을
배경으로 한 환영연 장면을 그린 것으로 지방관 관리들이 왜 앞다투어 평양감사를 선망했는지를 짐작케하는 그림이다.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島)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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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을 보존하는 데에는 그림 보다 좋은 것이 없다"라는 고전 속의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 온다.
문자가 아닌 실존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기에 말이다.
위 그림과 해설 대부분은
윤진영 저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를 참조하여 구성한 내용이다.
Let Your Heart Fly - Kishore 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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