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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알라만다의 그늘>

1981년  종이에 채색, 96×76cm




천경자

1924년 ~ 2015년




<노오란 산책길>

1983년 종이에 채색 97×74cm


이 작품은 완성 후에도 계속 수정하였다. 천경자는 이처럼 완성한 작품도

계속 고쳤기 때문에 한 작품이 연도별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작품을 팔기 위해 양산하지 않고

한 작품에 온 정성과 혼을 담아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황혼의 통곡>

1995, 종이에 채색, 96×129cm


1995년 완성 당시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때의 그림에 차이가 있다.

처음에 있던 사인과 낙타를 지우고 여인들의 표현도 달라졌다.

천경자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을 두고두고 수정을 가한 경우가 많았다.






1976년 무렵에 그린 <장미와 여인>의 원본 스케치





<여인상> 수정 전과 후

1977, 66.5×68.5cm





<조부>

1942. 종이에 채색. 153×127cm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51.5×87cm





<내가 죽은 뒤>

1952. 종이에 채색. 43×54cm





<목화밭에서>

종이에 채색. 1954. 114×89cm





<정>

1955. 종이에 채색. 160×90cm





모기장 안에 쫑쫑이>

1959. 종이에 채색. 123×150cm





<전설>

1959. 종이에 채색. 123×150cm





<두 사람>

1962. 종이에 채색. 182×152cm





<비 개인 뒤>

1962. 종이에 채색. 150×104cm





<환>

1962. 종이에 채색. 105×149cm





<여인들>

1964. 종이에 채색. 118.5×103cm





<초혼(招魂)>

1965. 종이에 채색. 162×130cm





<자살의 미>

1968, 종이에 채색, 137×95cm 





<사군도>

1969, 종이에 채색, 198×136.5cm





<웨스턴 사모아 아피아市>

1969, 종이에 채색, 34.8×24cm





<알라만디의 그늘 2>

1985, 종이에 채색, 94×130cm





<괌도에서>

1983, 종이에 채색, 45.5×37.9cm





<나부>

1970, 캔버스에 유채, 45.5×60cm





<이탈리아 기행>

1973, 종이에 채색, 91×72cm





<정글 속에서>

1972, 종이에 채색, 227×162cm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162cm





<세네갈 고레 섬>

1974, 종이에 채색, 21.2×34.8cm





<카이로 테마 기행>

1984, 종이에 채색, 90×72cm





<초원 1>

1978, 종이에 채색, 102×146cm





<갠지스 강에서>

1979, 종이에 채색, 24.5×33cm





<플라사 메히코 투우장>

1979, 종이에 채색, 33×24cm





<아마존 아키토스>

1979, 종이에 채색, 24×33cm





<탱고를 찾아서(카미니토)>

1979, 종이에 채색, 24×27cm





<폭풍의 언덕 2>

1981, 종이에 채색, 24×27cm





<헤밍웨이의 집 2>

1989, 종이에 채색, 32×41cm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87, 종이에 채색, 31.5×41cm





<모뉴먼트 밸리>

1987, 종이에 채색, 32×41cm





<애틀랜타 마가렛 미첼 생가>

1987, 종이에 채색, 32×40cm





<청춘의 문>

1968, 종이에 채색, 145×89cm





<팬지>

1973, 종이에 채색, 62×48cm





<길레 언니>

1973, 종이에 채색, 55×43.5cm





<고>

1974, 종이에 채색, 40×26cm





<황금의 비>

1982, 종이에 채색, 34×46cm





<어느 여인의 시 2>

1985, 종이에 채색, 60×44cm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2×34cm






- 에필로그 -


자신의 한을 승화시킨 실존적 낭만주의자


예술이란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이상에 대한 지향 사이의 공터에 자아의 씨앗을 심어 열매를 맺는 행위가 아닐까?

좋은 예술가들은 인습에 찌든 현실에 순응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저항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행위야 말로 에술적 창조의 원천이 된다. 어느 예술가가 동시대 예술의 경직된 관습을 문제 삼아 이에 저항한다면

그는 영향력 있는 선구적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또 부조리한 사회에 던져진 개인의 불행한 실존을 문제 삼아 이에 저항한다면

그는 자신의 체험과 혼이 담긴 감동 있는 작품을 할 수 있다.


천경자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의 전형이다.

예술작품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어떤 놀라운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다.

예술가 자신이 삶의 역경속에서도 불안과 슬픔 같은 어두운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그에 저항하여 미적인 승화를 일구어냈을 때 관객들은 감동한다. 반면 미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한 감정들은

자신의 영혼을 좀먹고, 폭력적으로 작용하여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감정을 승화시킨다는 것은 감정을 억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감정의 상태를 예민하게 느끼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학이 아니라 자기 연민이며,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천경자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불행하고 슬픈 감정들을 그림과 글로 승화시켰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등 사회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천경자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한 두 남자와의 갈등,

여동생의 이른 죽음, 그리고 집안의 몰락으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당시 불행했던 사회적 상황에서 누구나 나름대로 역경이 있었겠지만, 천경자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녀도 생존을 위해 미술교사와 대학교수직에 몸담았지만 그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했고,

사회적 명예보다 고독한 화가가 되기를 갈망했다. 결국 그녀는 용기 있게 교수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꿈을 사회가 아닌 작품 속에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으로서 그녀의 꿈과 이상은 작품에서 그레타 가르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대중스타들을 통해 표출되기도 했고,

때로는 길례 언니나 우주소녀 같은 이상향의 여인상에 투영되기도 했다.

 또한 인생의 후반기에는 남태평양과 아프리카의 원시림, 인도, 중남미의 잉카 - 마야 문명 등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킬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낭만적 이상을 경험하고 이를 작품으로 옮기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천경자의 작품을 샤갈이나 고갱, 루소, 혹은 프리다 칼로 같은 서양 작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화풍을 적당히 섭렵한 작가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학적으로는 샤갈의 환상적인 화풍이나 고갱과 루소의 원시주의적 작품에는 삶에서 비롯된

자신의 실존적 불안과 고독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는 불행한 자신의 실존적 고통이 절절하게 반영되어 있지만,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환상과 낭만이 부재한다.

 이들과 달리 천경자는 자신의 고통스런 실존과 환장적인 낭만을 공존시켜 생명 내부의 갈등을 해소시킨

 실존적 낭만주의자이며, 이것은 한국인 특유의 한과 심명의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巫 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인들은 슬픈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고 마음에 응고되어버린 한을 신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다.

 굿이나 판소리 같은 한국의 전통문화는 한을 신명으로 전환시키는 의식이었다.

 천경자는 박초월의 육자배기와 심청가, 춘향전 등을 들으면서 인생의 고뇌를 극복했고, 작업을 할 때도 창을 즐겨 들었다.

 천경자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신의 한을 색채에 녹여 신명나는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종교의식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천경자의 색채는 인상주의자들처럼 빛의 파장에 의한 객관적인 색도 아니고,

칸딘스키의 이론처럼 내적 필연성을 따른 주관적인 색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도달한 무아지경의 황홀한 체험을 상징한다.

무당이 음악과 춤을 도구로 접신하듯이, 천경자는 색채를 통해 자연에 취하고 신명에 이르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신명나는 굿판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색채의 향연 속에 감각을 열고 감정의 승화를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플로로그에서 밝히고 싶어 했던 천경자 예술의 마력이다.

서양의 비극 미학은 해결된 수 없는 대립과 모순, 투쟁이 전제된다.

반면 한의 미학에서는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슬픔의 정화를 통해 우주적 신명과 화합한다.

그럼으로써 슬품과 기쁨, 현실과 환상, 한과 신명은 이분법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순환하면서 내적 갈등을 해소 시키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천경자의 예술세계는 이러한 한국 특유의 한의 미학이 회화적으로 구현된 것이며,

 여기에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 운명적 슬픔과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국인 특유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녀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운명적 슬픔을 신명나는 아름다움으로 반전시키는 한의 미학은 이제 국제적인 조명만을 남겨두고 있다.




희대의  진위 논란, <미인도>의 진실


"내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그림이라는 것이 자기의 심장을 부딪쳐 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근데 이건 막 보니까 허깨비 같고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 꽃은 제가 즐겨 그리는 블루메리아라고 남방계에서 많이 피는 꽃인데,

그걸 보니까 테크닉이 그냥 더덕더덕 되어 있어요. 저는 어떻게 하든지 말끔하게 하거든요, 그게 좋아서요.

눈 같은 것도 저는 한없이 오래 그리다 보니까 금색을 칠하지 않아도 어떤 빛이 보일 때까지 그려요.

입도 다르고, 모든 것이 엉성한 그림이예요.··· 

그리고 여러 가지 색감을 내는 데 있어서 저는 처음에 엉뚱한 색을 칠합니다.

예를 들어 갈색이랄지 황토 계통의 색이랄지 그래서 점점 검은색으로 만들거나 짙게 만들어요.

그런데 이것은 한 색 가지고 다 칠해버린 느낌이예요.

눈에도 힘이 없고 대개 저는 코를 그릴 때 콧방울을 하얗게 넣는데 그게 다르고요,

그런건 설명할 필요 없이 약하고 팍 오는 게 없어요.

그림이란 것이 자기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자식같은 것 아니겠어요,

저는 오래전부터 방문 열고 집에 들어올 때 제 그림보고 '집 잘 보았냐' 하고 들어옵니다.

제가 그 정도로 그림과 밀착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그림은 통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문제의 그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







위 내용 모두는 '천경자 평전' 중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Schlafe, Mein Prinzchen Schlaf Ein - Edward Sim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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