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尹斗緖 자화상>
저 형형한 눈빛을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이 자화상은 결코 단순한 인물화가 아니다.
정밀한 돋보기로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신의 내면을 해부했을 것만 같은 공재의 자화상.
치밀하고 정밀한 작가의 안목과 봇놀림은 탄복을 넘어 전율 그 자체.
조선시대를 일러 '초상화 왕국'이라 할 만큼 좋은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중에서도 이 자화상은 가히 독보적 존재라 해야겠다.
공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심득경의 초상을 비롯, 여러 성인들의 초상을 그렸다.
공재의 절친한 벗 이하곤(1677~1724)은 아래와 같은 평을 남겼다.
"육 척의 체구에 세상을 넘어서는 큰 뜻이 있었다. 긴 수염이 바람에 나부끼는 얼굴은 붉고 윤택하여,
보는 이는 그를 도사나 검객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은 훌륭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공재의 자화상에 첨단 기법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처음 그림이 그려졌을 때는 도포를 입은 모습이었고,
x선 형광 분석기를 이용한 안료 분석 끝에 애당초엔 귀가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판명났고,
뒷면엔 옷 주름까지 그려졌었다는 주장도 나오는 형편.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 1500년, 패널에 유채, 67×49cm, 알테 피나코테크
윤두서의 자화상에 비교되는 흥미로운 작품.
뒤러는 마치 자신을 예수처럼 표현했는데, 정면을 응시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서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예수와 작품의 창작자로서의 화가를 동일시 하고 있는 듯.
<유순정柳順汀 초상>
작사 미상, 비단에 채새, 188×99.8cm, 경기도 박물관(진주 유씨 종중 기탁)
조선 전기 장원급제를 했던 문신 유순정(1459~1512)의 초상이다. 연산군 연간에 이조판서에 올랐던 인물.
하지만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중종(中宗)을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적으로
정국공신으로 추대되었고, 역모를 다스려 정난공신이 되었고, 출세가도의 정점 영의정에 오른다.
사후 평가에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
그림 맨 위쪽에 1506년 정국공신이 표기되어 있고, 왼편 윗 부분에 훗날 김상헌이 찬한 시가 보인다.
그 밑에는 1720년 후순 유수가 김상헌의 시를 자신이 다시 적었음을 밝힌 글이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원본을 기초로 후대에 다시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머리 양 옆으론 긴 날개가 달린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있으며, 짙은 푸른색의 기다란 단령團領을 입고있다.
조선 관리들이 입던 관복으로 목 주위 깃이 둥글게 파여 있다. 가슴에는 금 물감으로 공작새 한 쌍의 흉배를 그렸으며,
무소뿔로 장식한 허리띠가 보인다. 구름무늬가 자세히 그려진 단령의 오른쪽 아래 트인 사이로 안에 받쳐 입은 붉은색의
㙮호와 초록색의 철릭이 겹겹이 보인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페르시아 계통의 것으로 보이는데 느낌을 살리기 위해
작은 점으로 치밀하게 그려넣었다. 의자는 교의交椅로, 아래 받침 부분은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위쪽 등받이와
팔걸이 부분은 둥글게 휘어있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자주색 끈은 방석을 묶은 것이다.
조선조에는 '충훈부忠勳府'라는 관청을 두어 공신 선정과 상을 내리는 일을 맡겼다.
공신녹권功臣錄券으로 선정되면 여러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화원畵員을 동원하여
해당 인물의 초상화르 그리게 하였으니 만큼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얼굴은 사십 대 중년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데,
양 볼과 콧등으론 천연두를 앓아 생긴 곰보 자국까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지 않게 그려야 했고 나아가 인물의 정신까지를 표현해야 했던 것이 바로 조선 초상화의 특징.
답호와 철릭 사이로 튀어나온 노란색 주머니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던 병부를 넣은 것이다.
<정탁鄭琢의 초상>
작자 미상, 167×89.5cm, 비단에 채색, 한국국학진흥원(천주 정씨 약포종택 기탁)
조선 중기 문신 정탁(1526~1605)은 임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 갔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다.
당연히 이 초상화도 화원이 그린 작품일 터. 강원도 관찰사와 대사헌 등 여러 벼슬을 거쳤고 외교 사신으로 두 차례에 걸쳐
明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임란 때 곽제우와 김덕령 등을 천거하였고, 특히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그가 무죄임을
강력 주장하여 죽음에서 구해내기도 했던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진 인물.
선조의 피난길을 함께했던 신하들을 '호성공신'으로, 왜적과 싸운 신하들은 '선무공신'으로 선발한다.
그리고 임란 중 발생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청난공신'으로 명했다.
1604년에 이들 세 공신들의 초상화가 한꺼번에 제작되었는데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그 수가 60여 명에 이른다.
당시 초상화 제작을 위해 이신흠, 이정, 이징을 비롯, 12명의 화원이 참여, 먼전 한양에 있던 공신들 부터 그리기 시작,
다음으로 향리에 내려가 있던 공신들까지 차례로 불러 초상화를 그리려 했는데 경상도에 머물던 정탁은 당시 79세 노령으로
병이 깊어 올라오지 못해 화원을 직접 향리로 내려 보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족자 테두리의 기록을 보면 영조가 이 초상화가 있다는 말을 듣고 궁궐로 가져오게 하여 살펴본 뒤,
'선조때의 의젓한 명신名臣'이라고 칭찬하는 글을 손수 지어 내렸다고 한다.
구름무늬가 비치는 날개 달린 사모를 쓰고 검은 단령의 관복을 입었는데, 목에는 흰 직령直領이 나와 있다.
한 쌍의 공작과 모란이 들어간 흉배와 푸른 바탕에 무소불로 장식한 서대를 허리에 둘렀다. 이는 정1품에 해당.
몇 개의 윤곽선으로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냈는데, 굳게 다문 입슬과 마른 뺨에선 위엄이 드러난다.
. 살구색으로 얼굴을 칠한 후 밑선 없이 주황색 선으로 윤곽을 그었으며, 눈과 코 언저리에는 살짝 명암을 표현했다.
아주 가는 세필로 그린 백발의 수염과 눈썹은 노년의 풍모를 잘 드러낸다.
조선 후기 무신 이창운(1713~91)은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영, 정조의 총애 아래 제주목사,
파주목사, 어영대장을 거쳐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총융사 등 중요 직위를 두루 거쳤다. 군복으로 두루마기 비슷한
짙은 청색의 동달이를 입었는데, 주홍색 소매가 붙어있다. 안에 받쳐 입은 힌옷의 소맷자락이 살짝 나와 있다.
채찍의 일종인 등채를 쥐고 있는데 조선 시대 초상화로는 드물게 손가락을 표현했다.
전립戰笠 꼭대기에는 청렴의 상징으로 해오라기를 조각한 옥로玉鷺 장식을 달았다.
노란 호박과 붉은 산호 구슬을 꿴 패영貝纓(갓끈)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이창운李昌運 초상>
작자 미상, 1782년, 비단에 채색, 153×86cm, 개인 소장
관복을 입은 이창운의 초상인데 옷차림을 제외하곤 얼굴과 자세가 거의 똑같기 때문에 초본을 사용하여 한 화가가
동시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단령본 초상화에는 '이창운의 70세 초상'이라고 제목을 달았고,
당시 도승지였던 엄린이 지은 찬시를 강세황이 적어 놓았다.
"고결하기는 처사處士와 같고 온화하기는 문사文士와 같다. 위엄을 드러낼 때는 마치 솔개가 하늘을 나는 듯하고
일을 해결할 때는 말이 천 리를 달리는 듯하다. 집안에는 효성과 근면함이 전해지고, 대를 이어 맑고 깨끗함이 있다네.
지금 인재르 두루 구한다고 한들 어찌 그대와 비교하리오. 그대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은 당연하도다."
당시 70세 전후였던 세 사람은 모두 조정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기에
이창운의 초상화 제작을 기념하여 우정을 나눈 것이다.
<채제공蔡濟恭 초상>
이명기, 1792년 비단에 채색, 120×79.8cm, 보물 제1477호, 수원화성박물관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 채제공(1720~99)의 초상화다.
1743년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사도세자 복권을 주도하면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 인물.
퇴계의 학맥을 이은 남인 계열이었으나 탕평책을 추진 당쟁을 조화롭게 다스렸다. 초대 화성華城 유수留守로 임명되어
수원성 축조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정조 시절 문예부흥을 이끄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분홍 시복時腹 차림의 73세 채제공의 모습으로 찬에 따르면 1751년 이명기가 41세 종조 어진을 그렸는데,
이때 채제공이 도제조都提調라는 직책을 맡아 자문 역할을 해냈다는 공로를 기려 임금이 이명기로 하여금 채제공의 초상을
그려 주도록 명했다. 정조와 채제공의 각별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명기는 어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를 맡고, 김홍도, 신한평, 김득신 등이 함께 참여 하였다.
흉배가 없는 옅은 분홍빛 단령을 입고 허리에 서대를 두른 채 화문석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림 왼편으로 "몸과 정신은 부모님의 은혜이나, 머리에서 발끝까지는 임금의 은혜이다.
부채와 향낭도 임금님의 은혜이니 온몸을 꾸민 것이 무엇인들 은혜가 아니겠는가.
부끄럽고 무능한 몸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구나."라고 읇었다.
그림 속 향낭은 지금까지 전해져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얼굴은 다소 어둡게 처리 했는데 이목구비에는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주었으며 오사모의
반투명한 날개에는 착시 현상에 의해 물결 모양으로 무늬가 나타나는 것까지 표현했고, 왼쪽 눈에 사시斜視 기운과
눈동자가 옆으로 살짝 돌아간 것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채제공 초상 유지 초본>
이명기, 1791년, 유지에 채색, 65.5×50.6cm, 보불 제1477호, 수원화성박물관
현재 채제공의 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된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과 시복본,
흑령포단본의 전신상과 나주 미천서원에 봉안되었다가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는 단령포본과
대영박물관 소장의 시복본까지 모두 5점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초본 3점이 더 전해지고 있다.
대영박물관에 거의 같은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는데 양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화문석 대신 호피 방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채제공 초상>
이명기, 1784년, 145×78.5cm, 보물 제1477호, 개인 소장
인물과 똑 같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유지油紙에 초본을 그린 후 이를 기초로 정본을 완성한다.
유지는 반투명해서 앞면과 뒷면에 칠한 채색의 조화를 미리 살펴볼 수 있고, 모사할 경우 밑에 깔린 원본을 쉽게 비춰 볼 수 있다.
초본은 정본이 완성되면 대개는 없애지만, 채제공 초상화의 초본처럼 보관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린 가장 낮은 어깨선에 맞추어 정본을 그렸는데, 중간에는 흰 물감을 대충 칠해서 효과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오재순吳載純 초상.
이명기, 비단에 채색, 151.7×89cm, 보물 제1493호,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 후기 명신 오재순(1727~92)은 정조 때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오른 인물.
제자백가를 두루 통달하 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족자 뒷면에 "오재순의 65세 초상으로 이명기가 그렸다."라고 적힌 종이가
함께 붙어 있다. 생동감 있는 얼굴의 사실적 묘사,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옷과 가구의 표현은 당연 이명기의 작품일 터.
정면상의 경우 코를 중심으로 한 얼굴의 입체감 표현이 어렵기 때문에 조선 초상화는 대부분 옆으로 몸을 살짝 돌리는 게
상례. 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듯, 정면상도 능숙하게 그려냈다. 풍성한 수염의 극사실적 표현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쌍학 흉배는 색상이 선명하고 서대는 1품의 품계를 나타내고 있다. 관복은 주름을 많이 잡아 굴곡을 강조하고 그림자
효과까지 노렸다. 이 작품의 경우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화 기법을 사용했지만 이전에 발달했던 필선 위주의 맑은 얼굴
표현의 전통을 잃지 않으려 했다. 명암법을 사용할 경우 실물과 비슷해 보이지만 대체로 그림이 어두워진다.
조선 후기 초상화는 이러한 단점을 잘 극복하여 맑고 청아한 선비의 풍모를 이상적으로 잘 드러냈는데, 이 초상화은 이러한
화풍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결과 사실성과 이상미가 어우러지는 전신傳神의 지극한 경지를 이루게 되었다.
상세한 세부 묘사와 새로운 기법으로 조선 후기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하응李昰應 초상>
이한철과 유숙, 1869년, 비단에 채색, 130.8×66.2cm, 서울역사박물관
금관 조복 차림의 이하응 50세 초상으로, 이하응 스스로 제발題跋을 적어 이한철과 유숙이 합작으로 그렸고,
한홍적이 장황(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책이나 화첩, 족자를 꾸미는 일)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의자에 단정히 앉아 상아 홀을 들고 있다. 배경은 생략되었고 바닥의 화문석은 인물을 돋보이게 한다.
다섯개의 세로줄 금관은 1품 지위의 오량관五梁冠에 해당하며 호분을 사용하여 돋을새김으로 무늬를
표현한 뒷 반짝이는 금박을 붙였다. 금관에 꽂은 비녀에는 푸른 술이 달린 유소流蘇가 걸쳐져서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조복의 풍성한 적초의는 옷 주름이 접힌 부분의 주위를 살짝 어둡게 색칠하여 입체감을 표현했다.
이하응의 초상화는 현재 8점이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 중 이하응이 거처하던 운현궁에 다른 초상화 4점과 함께
전해 오던 것이다. 여기에는 50세 초상화로 흑단령본, 와룡관학창의본과 61세 초상화로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이 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을 한 초상화를 그린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초상화를 감쌌던 보자기와 상자까지 현재 잘 보관되어 있다.
<황현黃玹 초상>
채용신, 1911년, 비단에 채색, 120.7××72.8cm, 보물 제1494호, 개인 소장
조선 말의 우국지사 황매천(1855~1910)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구례에서 은둔했다.
한일합방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 말의 최고 초상화가 채용신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채용신은 항일 투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바 있다. 이 작품은 황현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이용해서 그린 것이다. 얼굴은 채용신이 즐겨 사용한 사실적 기법을 써서 그렸다.
황매천의 동생은 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생김새가 깔끔하고 매서워 가을 매가 솟구칠 듯 서 있는 것 같고, 이마는 훤칠하여 윤기가 돌았으며, 눈썹은 성글고
목소리는 맑으면서 찌렁찌렁하고, 시력은 근시에 오른쪽 눈이 약간 사시였고, 콧마루는 오뚝하며 귓불은 쳐졌으며,
이는 쥐 같고 입술은 검푸르고 수염의 길이는 두어 치였다."
실제로 사진이나 초상화를 살펴보면 동생의 표현이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황현 사진>
해강 김규진, 1909년, 15×10cm, 보불 제1494호, 개인 소장
구 한말의 서화가이자 사진가였던 해강 김규진의 사진으로
채용신은 당시의 변화를 잘 받아들여 사진과 초상화를 결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물 표현을 만들어 냈다.
오 부인(吳夫人) 초상.
표암 강세황, 1761년, 비단에 채색, 78.3×60.1cm, 개인 소장
강세황(1676~1761)이 86세 그린 초상화다.
오 부인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의 후손 밀창군 이직의 부인이다. 복천 오씨로 80대 후반까지 장수한 인물.
조선 초상화 가운데 여성이 주인공인 예는 몇 점 되지 않는다. 비록 얼굴과 상반신의 색채가 검게 변했지만 매우 중요하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잡고 있는데 힘없이 늘어진 느낌으로 보아 뇌졸증 같은 질병으로 마비가 온 듯 보인다.
가르마를 탄 머리는 숱이 많지 않고 흰 머리카락이 보이지만 86세 노인치고는 검은 편이다.
처진 눈두덩이와 눈꺼풀이 처지는 안검하수로 증세로 보인다.
그림 위쪽에 '복천 오 부인 86세 초상'이라 적혀 있고, 왼족에는 친척인 이강이 초상을 그리게 된 사정을 적어놓았다.
이에 따르면 오 부인의 맏아들이 친척인 강세황에게 그려달라 부탁했을을 알 수 있다. 표암은 이강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그림 윗부분에 푸른 휘장이 쳐있고 양 옆으론 고리에 걸어 젖혀 놓아서 내부를 보여 준다.
화문석 바닥은 역원근버 구도르 사용하여 정교하게 그렸는데, 이는 은밀한 공간에서 생활하던 여인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길게 놓인 지팡이는 손잡이에 비둘기 모양 장식이 붙어 있어 '구장鳩杖'이라 부른다.
왕이 70세가 넘은 원로대신들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1753년 영조가 왕실의 친척인 오 부인에게
옷가지와 음식물을 선물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남아 있다.
<화담대사 華潭大師 초상>
작자 미상, 19세기, 비단에 채색, 109.8×77.2cm, 직지사 성보박물관
조선 말의 승려 화담대사 경화(敬和,1786~1848)의 진영이다.
화엄종주華嚴宗州, 동국율사東國律師로 존경되어 직지사, 표충사, 통도사 등 여러 절에 봉안되어 있는 인물이다.
경상엔 <화엄경>, <법망경> 등이 펼쳐져 있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메부리코와 광대뼈가 두드러진다.
형형한 눈빛과 붉은 입술의 강건함이 잘 드러나 있는 인상적인 초상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의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1272.2×78.5cm, 국립중앙박물관
약간 측면의 자세로 검은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회색빛 장삼에 붉은 가사에다 오죽烏竹으로 만든 불자佛子를 들었다.
불자는 짐승 털을 묶어서 막대기에 붙여 만든 것으로, 벌레를 쫒는 데 쓰는 도구이자 번뇌를 털어내는 상징이 되었고
부처뿐만 아니라 고승을 표현하는데 종종 등장하곤 한다.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이명욱, 종이에 채색, 173×94cm, 간송미술관
은자의 네 가지 즐거움으로 어초경독漁樵耕讀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소옹邵雍은 벼슬을 사양한채 은둔하면서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세워 성리학의 기틀을 다졌다.
그가 지은 어초문대漁樵問對가 바로 어부와 나무꾼이 대화 하는 것으로 천지 사물의 원리를 밝혀 놓은 것.
북송의 서예가 소식蘇軾이 쓴 <어초한화록漁樵閑話錄>에도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가 나온다.
그림의 내용은, 어느 글을 근거로 했건 자연을 벗하여 은일의 삶을 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속명리를 떨치고 자연 속에서 천지만물의 조화와 세상의 이치를 구하고 설하는 내용의 그림인 것이다.
화원 이명욱(1640~?)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숙종은 그를 매우 아껴
"조선의 화가 가운데 이명욱만이 맹영광(孟永光)을 감당할 만하구나. 재주가 묘하니 그림이 무궁할 뿐이다."라고 했다.
(맹영광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조선에 와서 4년간 머물렀던 청나라 화가이다.)
<탁족도濯足圖>
이경윤, 비단에 먹, 31.1×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왕족 출신 화가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그림으로,
10폭으로 된《山水人物畵帖》의 마지막 장면.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냇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라고 했으며,
시인 좌사左思는 <영사詠史>에 "천길 벼랑에 옷을 걸고, 만 리 흐르는 물에 발을 씻노라."라고 읊었다.
'탁족도'는 냇물에 발 담그는 정도의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홀가분함으로 더 큰 세상과 우주를 보는 안목과 지혜를 얻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바위에 앉아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고사의 모습이다.
근처 바위와는 달리 정확한 필선으로 얼굴과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의상은 굵은 선으로 그려 대조를 이룬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잔잔한 살랑 물결 가운데 결코 흐트러짐 없는 선비의 매무새가 인상적이다.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이경윤, 비단에 먹, 31.1×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아래 거문고를 타고 있는 선비의 모습과 넋을 빼앗긴 시동의 뒷모습을 사선으로 배치했다.
만물의 고요에 어울리는 선율이 미루어 짐작되지 않는가?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으로 압축되는 이른바 '금기서화琴棋書畵'는 은자의 부전공 쯤에 해당할 터이다.
그 중에서도 거문고가 맨 앞줄에 놓인다는 사실을 그림이 증명하고 있다.
낚시, 음주, 바둑, 관폭, 탐매 등, 모두 10폭으로 구성된 화첩 중 한 면인데,
먹의 적절한 농담이 능숙한 경지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피면 고사가 뜯고 있는 거문고에 현弦이 보이지 않는다.
무현금無絃琴은 이른바 은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목으로 도연명의 트레이드 마크.
"거문고의 흥취만 알면 되었지, 어찌 줄 위의 소리가 필요하겠는가."
<채근담採根談>의 "글 없는 책은 읽을 줄 모르고, 줄 없는 거문고를 뜯을 줄도 모른다."
라는 내용을 떠올리면 될 터이다. 인격의 고아함에 음악이 필수 요소임을 그림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중 <순흥화상>
작자 미상, 1617년, 목판화, 27×20.2cm, 서울대규장각
그림 속 인물들의 행적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했던 내용이다.
위 목판화는 이징, 이신흠을 비롯한 여러 명의 화가가 동원되어 그린 것이다.
고려 때의 효자 손순홍의 예를그린 것인데 그의 효자비는 지금고 구례읍 봉북리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다.
두 행동이 손순홍의 효심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한 화면에 함께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행실도 목판화에서 묘사되는 인물은 구체적 개성보다는 사회적,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어 개별 인물의 특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화된 인물의 모습이 이 책에서 의도하는 관습과 규범을 널리 확산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금궤도金櫃圖>
창강 조속, 1636년, 비단에 채색, 105.5×56cm,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그린 작품이다.
화려한 색상으로 묘사한 높은 봉우리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가운데 시종과 함께 선 호공이 나뭇가지에 걸린 커다란
금궤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그림 위쪽 인조仁祖가 지은 글에 따르면, 그가 삼국 시대 역사책에서 김알지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고 이를 그리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림을 그린 창강 조속趙涑(1595~1668)은 인조반정에 참여했지만 공신을 사양하고 향리에 내려갔다.
사대부 화가로 시 · 서 · 화에 능했으며 책과 미술품을 열심히 수집했다. 조속은 시조 탄생이라는 경사스런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키 위해 청록색으로 색칠한 산봉우리와 바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을
아래쪽에 넓게 배치했다. 금궤를 쳐다보는 흰 닭도 예사롭지 않다.
<투기도鬪技圖>
김명국, 비단에 채색, 172×100.2cm, 국립중앙박물관
이른바 상산사호商山四皓는 은일의 상징.
진秦나라 말엽의 혼란함을 피해 상산에 숨어들어 일생을 바둑으로 보냈던 이들 네 사람의 고결한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왕질王質이라는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아이들이 바둑을 두고 있기에 정신없이 구경하다 한 판이 끝나자
돌아가려고 도끼를 보니 자루가 썩어 있었고 정신을 차려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세상이 두 번이나 바뀐 뒤였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의 유래다.
김명국(1600~?)이 그린 바둑 장면은 아주 특이하다. 나무가 우거지고 폭포가 쏟아지는 산 속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옆에는 바둑판이 쓰러져 있고 소년이 흩어진 바둑알을 주워 담고 있다. 한 노인이 또 다른 노인을 뒤에서 꼼짝 못하도록
부둥켜 안고 어깨를 이빨로 물어뜯고 있다. 바둑과 관련된 고상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장면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 즉,
위나라에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어 하루는 밭에서 일하는 소년을 보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년에게 술 한 병과
안주를 준비해서 앞 산 뽕나무 아래로 가 보라고 일러 주면서 그곳에는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이쓸 터이니 인사만 하고
오라 했다. 바둑을 두던 두 노인은 소년이 가져간 술과 안주를 먹고 그 보답으로 19세인 소년의 수명을 91세로 늘려주었다.
이들이 바로 죽음을 다루는 북두칠성과 삶을 다루는 남두육성이었다.
김명국은 바둑알로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두 노인이 소년의 운명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상상력을 발위하여 이처럼
흥미로운 그림을 그린 듯 하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을 그린 김명국이었기에 바둑판을 난장판으로 바꾸어 버린 모양.
<제갈무후도諸葛武厚圖>
작자 미상, 1695년, 비단에 채색, 164.2×99.4cm, 국립중앙박물관
제갈량諸葛亮(181~234)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충성스러운 신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그림은 아마도 출사 전의 유유자적을 표현한 듯 하다. 와룡관과 학창의 차림으로 멋진 소나무 아래 앉아있는 모습.
이 그림이 그려진 1695년에 숙종은 평안도에 있던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인 와룡사臥龍祠에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를
함께 모시도록 명했는데, 이때 이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을 수도 있다. 후대에는 또 다른 충신인 문천상文天祥도 추가하여
세 명의 충신을 칭송하는 뜻으로 삼충사三忠祠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쟁으로 바람잘 날 없었던 숙종 대는 제갈량처럼 지략이 뛰어나면서도 변함없는 충성의 신하가 필요했을 터이다.
숙종은 아마도 고대부터 모범이 되어 온 제갈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긴 시를 지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빌었을 것이다.
상단 오른쪽 제시의 내용은 이렇다.
"참으로 선생께서는 만세萬世의 스승이시다. 나는 느낀 바가 있어 선생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떠올려 본다.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선새의 모습 그대로다. 같은 세상에 태어나 함께 세상을 다르려 보지 못함이 한스럽다."
<주소정묘誅少正卯>
김진여, 1700년, 비단에 채색, 32×57cm, 국립중앙박물관
공자의 일생 가운데 중요한 사건을 추려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 《공자성적도公子聖跡圖 》인데,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목판으로도 인쇄되었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도의道義 정치를 실현키 위해 애쓴 공자의 일생이
상세하게 그려진 그림이다. 여기서 보느 장면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재상을 맡은 지 이레 만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소정묘少精卯를
과감하게 처형시키는 장면을 그렸다. 도덕을 강조한 공자가 사람을 죽인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은 대목이기도 하다.
원나라 화가 왕진붕의 작품을 기초로 조선 후기 김진여(생몰미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화첩이었으나 현재 열 개의 장면이
두루마리 족자에 들어 있다. 김진여는 평양에서 활동한 작가로 초상화에 뛰어났다. 조세걸을 사사했으며
숙종의 어진을 그리는데 참여한 공으로 벼슬을 제수 받기도 했다.
인물마다 다르게 처리한 화사하고 밝은 색채가 그림을 장식적으로 만들어 준다.
교훈을 강조하는 그림이지만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작품이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
작자 미상, 1715년, 비단에 채색, 170×418.6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동진東晉의 장수 사현謝玄(343~388)이 안휘성 비수 부근에서
전진前秦의 왕 부견俯堅(338~385)이 이끄는 백만 대군을 단지 8만의 군사로 격파하는 장면을 병풍으로 그린 것이다.
수 많은 병사와 말이 험준한 산야를 내달리는 스펙터클한 구성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린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사와 말, 산수를 매우 정교하고 능숙하게 그렸다.
선명한 색채와 물감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도화서 화원들이 제작한 궁중 회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여덟 번째 폭 위에는 검은 익선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달아나는 전진의 왕 부견이 보인다.
호위병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도망치는 그의 모습은 다소 비겁하고 과장되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당시 왕의 옷차림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왕의 복식으로 표현했다. 그것도 군복이 아니라 평상복인
금박이 붙은 붉은 옷으로 그려 놓아 눈에 잘 띄도록 했다.
이 그림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전생을 벌여 나라를 멸망시킨 어리석은 군주 부견을 비판하고,
이를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당시 숙종은 선왕 효종이 내세운 북벌을 명분상 포기할 수도 없고, 그대로 추진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숙종은 그 시점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을 피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무의미한 전쟁의 결말과 패망한 군주의 운명을 눈으로 확인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
전(傳) 윤두서, 1715년, 비단에 채색, 110.9×69.1cm, 국립중앙박물관
복건을 쓴 선비가 흰 나귀에서 고꾸라지는 순간과 기겁을 한 동자는 책보따리를 내던지고 주인을 붙잡으려 달린다.
헌데 나귀에서 떨어지는 선비는 웃고 있다. 떨어지는 순간을 즐기기라도 하는걸까?
이 작품의 배경에 얽힌 이야기인 즉,
당唐이 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에 진단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진단이 길을 가던 둥 조광윤이 송宋나라를
세웠다는 말을 행인에게 듣는다. 조광윤이야말로 천하를 다스릴 훌륭한 인물임을 알고 있던 진단은 기쁜 나머지 너무 크게 웃다가
나귀 등에서 미끄러져 버렸다. 떨어지는 급박한 순간에도 "이제 천하는 안정될 것이야." 라고 외쳤다는 것.
진단의 얼굴에서 얼핏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오르지 않는가? 박식한 공재였기에 옛 고사를 실감나게 그렸을 터이다.
윤두서는 인물과 말을 정교하게 잘 그렸는데 여기서도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아래쪽 가운데서 전개되고, 뒤편 숲에는 상서로운 안개가 서려있다.
안개 위로 적힌 시는 앞서 말한 진단의 고사를 적은 것이다.
<서호방학西湖放鶴>
윤덕희, 18세기, 비다에 먹, 28.5×19.2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임포(967~1028)의 이야기를 그린 것.
배를 탄 선비가 절벽 아래서 하늘을 쳐다는데 날아가던 학이 선비를 돌아 본다.
넘실대는 파도 너머론 높은 산봉우리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다. 오대십국 가운데 오월吳越의 백성이었던
임포는 북송에 의해 오월이 망하자 항주에 있는 서호西湖 옆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던 그는 홀 몸으로 매화를 심고 한 쌍의 학과 함께 은일처사의 삶을 영위했다.
그의 삶은 후대에 많은 그림으로 그려졌다. 목은 이색(1328~96)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매화 피고 떨어질 때 고개를 돌려 임포를 추억한다." 라고 할 만큼 임포가 탐매探梅에 나서는 모습을 자주 그리곤 했다.
옛 선인들은 종종 학을 길렀던 모양. 학의 깃촉을 잘라 날지 못하도록 한 뒤 뜰에서 키웠다고 한다.
고상한 기품의 학을 위해선 대숲이 있어야 했고, 물고기와 벼가 있어야 한다. 정성을 다해 기른 학의 깃털에선
윤기가 흐르고, 정수리는 붉은색으로 빛난다. 이른바 단정학丹頂鶴인 것이다.
학을 어느 정도 길들이고 나면 춤까지 가르쳤다는데, 그 방법이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방을 뜨겁게 달군 뒤 나무토막과 학을 넣어두면 뜨거움을 참지못한 학이 나무토막에 올라섰다를 반복한다고.
이때 피리나 거문고를 뜯어 박자를 맟춰 주기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음악 소리만 나오면 율동(?)을 반복하게 된다는...
이 그림을 그린 윤덕희(1685~1766)는 문인 화가 윤두서의 장남으로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
다소 복잡한 모습의 절벽을 배경으로 인물과 학을 섬세하게 배치하고 시원스런 여백으로 신비로움을 잘 표현해 냈다.
<강상조어江上釣魚>
강세황, 18세기, 종이에 먹, 58×34cm, 삼성미술관 리움
풍성한 먹의 번짐을 이용하여 녹음 짙은 여름날의 풍경을 그려 놓았다.
강태공姜太公의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周나라 문왕이 민짜 낚시를 하는 그를 스카웃하여
자신의 아들 무왕武王 대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케 하였다는 고사는 너무도 잘 알려진 내용.
낚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전한前漢 말엽의 엄광에 관한 얘기로 어려서 부터 알던 친구가 후한後漢의 황제인
광무제光武帝로 즉위하자 몸을 숨기고 양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낚시로 세월을 보낸다.
옛 친구를 그리워한 광무제가 벼슬을 제안했으나 그는 계속 사양하고 낚시로 일생을 접었다.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용의 핵심인 즉,
선비는 세상에 나아갈 때와 물러 날 때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 그림을 그린 표암도 물경 60이 넘어서야 관직에 나아갔다. 자신의 심정을 강태공이나 엄광에 빗댄 것은 아닐까?.
글씨에도 뛰어났던 표암. 윗편에 적어놓은 간결한 싯귀 내용인 즉,
"구름이 스쳐 지나가는 나무 끝에는 담백한 기운이 머무르고,
더운 기운이 가득한 산허리에는 파란 기운이 솟아 오르는도다."
<오수도午睡圖>
이재관, 19세기 초, 종이에 옅은 채색, 122×56cm, 삼성미술관 리움
더운 여름날, 책을 읽다 오수에 든 선비의 모습으로, 소나무 조차 더위를 먹었는지 축축 늘어졌다.
한 쌍의 단정학과 동자가 불을 지펴 찻물을 끓이고 있는 모습은 오수도의 전형 중 하나.
송나라 나대경이 지은 《한림옥로》에 수록된 <산정일장)에 나오는 시를 적어 놓았다.
"새소리 위아래서 들려오고, 낮잠은 절로 쏟아진다."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장승업, 비단에 채색, 141.8×39.8cm, 삼성미술관 리움
원나라 사대가에 속하는 문인 화가 예찬倪瓚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으로
뒤틀린 고목 오동나무가 푸른잎을 피워낸 가운데 그림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먼지떨이와 세면도구가 등장하는 것은 예찬의 유별난 결벽증을 뜻하는 것이다.
예찬은 주로 산수화를 그렸는데 대부분 적막한 산중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작은 정자가 놓여 있는 풍경이다.
그의 그림에서 사람은 일체 보이지 않는데, 고결한 그의 품성을 잘 일러 주는 대목이다.
오원은 조선 말엽의 화단을 진동시킨 천재 화가로 괴팍한 예찬의 이야기를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다.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정선, 비단에 채새, 28.5×23.2cm, 간송미술관
도교의 주인공 노자老子의 원래 성은 이 씨(李氏). 태어났을 때 귀가 남달리 커서 부모는 '이이李耳'라 지어
주었다는데. 게다가 눈썹은 늙은이 처럼 하얘서 '귀가 크다'는 뜻의 '담聃'자와 함께 '노담老聃'이라고도 불렀다.
그가 추구한 것은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배격하고 우주 만물이 원래 모습인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노자는 주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중국을 떠나 서역으로 가기로 했다. 그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윤희라는 관리가 노자를 알아보고는 道를 물었다. 처음엔 시치미를 떼던 노자가 윤희의 정성에 감복하여 5,000여
글자로 이루어진 《도덕경道德經》을 남겼다. 그 후로 노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후로 장자莊子가
계승하였고 불로장생의 신선 사상이 더해지면서 점차 종교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후대의 노자는 초월적 신으로 추앙된다.
이 작품은 노자가 서역으로 가기 위해 함곡관을 나섰다가 윤희를 만나는 장면이다.
기록에는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갔다고 한다.
커다란 물소 등에 앉아서 느릿느릿 길을 가는 노자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겸재는 고대 중국의 고사를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자신이 즐겨 사용한 산수화 풍으로 배경을 그렸다.
오른쪽 절벽에 달라 붙어 솟아오른 커다란 소나무는 기다란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려 이야기의 주인공을 감싸 주는 듯하다.
멀리의 함곡관과 그 아래로는 상서로운 흰 구름이 길게 흐르고 있어 노자의 신성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오른쪽 절벽에는 '소매 속에서 책을 찾다'라는 뜻의 '탐수중서'探袖中書라 적고, 왼편 중간에는 '도의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다'는 의미로 '도기만면道氣滿面'이라고 썼다.
이 작품과 매우 비슷한 정선의 그림이 왜관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는 화첩 속에 포함되어 있다.
모두 21점이들어 있는 화첩에는 그의 금강산 그림과 함께 노자, 공자, 제갈량 등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을 그린 인물화가 들어 있다.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
윤덕희, 1739년, 모시에 먹, 160.2×69.4cm, 간송미술관
인간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수성壽星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라고도 불리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별이 하늘에 나타나면 나라가 번영한다고 믿어 추분 날에는 수성을 구경하는 풍습이 생기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수성노인은 흥미로운 존재이기도 한데, 술을 무척 좋아하여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키는 3척(1미터 미만)에 불과했지만 머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길쭉했다고 한다.
신령스러운 동물인 학이나 흰 사슴을 타고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신선들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괴상한 생김새와 기이한 행동으로 인하여 수성노인은 연극이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다루어졌다.
소나무에 기대어 오른손엔 술잔을 들고 등 뒤로 술이 담긴 호리병이 보인다.
옆의 바구니에는 불로장생의 상징 영지와 불로초가 담겨있고, 그 아래엔 용머리 장식을 한 지팡이와
두루마리 족자가 놓여 있다. 족자에는 분명 인간 개개인의 수명을 적어 놓았을 터이다.
나무와 인물 표현이 섬세하고 전체 구도와 인물의 자세도 무척 자연스럽다.
1749년 윤덕희가 55세 되던 해에 환갑을 맞은 최창억에게 축하용으로 그려 준 것으로 그림을 받는 사람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수성노인 그림은 사찰 회화에 까지 등장하며
서민층의 민간회화에도 등장할 만큼 그 인기가 매우 높은 그림이다.
<기섬도騎蟾圖>
이장, 종이에 먹, 30.3×23.9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우거진 숲길, 절벽 아래 머리에 가는 띠를 두른 사내가 커다란 두꺼비 등에 앉아서 길을 가고 있다.
두꺼비는 힘에 부치는지 입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환상의 장면이다.
뒷다리가 하나뿐인 세 발 두꺼비를 타고 있는 인물은 유해섬이다. 도교 경전에 따르면 유해섬은 오대십구 시대에
실존한 인물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관리가 되었으나 나중에 수양을 통해 신선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커다란 세 발 두꺼비다.
이 신비한 동물은 유해섬을 세상 어디로든 데려다 주는데가끔씩 우물 속으로 도망을 쳐 동전을 이용해 잡아 올리곤 했다.
이 컨셉은 나중엔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교의 신선 이미지 보다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수호신 쪽으로 기운다.
그 결과 판화 같은 민간 예술 등에 자주 등장하고 복을 비는 연화年畵로도 그려지곤 한다.
<절름발이 신선 이철괴>
심사정, 비단에 채색, 29.7×20cm, 국립중앙박물관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지팡이를 짚고 한쪽 발을 의지한 사내가 신기하게도 물에 빠지지 않고 한 발로 서 있다.
오른손에 든 호리병에선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연기 속에 자신의 분신처럼 똑같은 자세를 한 인물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철괴李鐵拐는 쇠로 만든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신선이다.
맨발 차림에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가슴과 배를 드러낸 모습으로 어깨를 잔뜩 움추린 채 콧구멍이 다 보이도록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표정이 자뭇 심각하다.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 열심히 수련할 것을
강조 했는데, 여기서도 이철괴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린 금욕적인 수행자의 모습이다. 많은 인구에 회자되었기에
심지어는 이철괴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까지 공연되기도 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었기에 그림에 집중했던 심사정에게 신선은 가히 매력적인 소재였으리라.
현실의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심오한 도의 비밀을 파헤치는 기괴한 신선의 모습은
어쩌면 심사정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낸 것은 아니었을지...
참고 서적 : 군자의 삶, 그림으로 배우다.
Into The Sunset - Michele McLaugh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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