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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사인(士人) 풍속화


사인(士人) 풍속화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널리 알려졌지만 관인(官人)과 사인(士人) 풍속화는 그렇지 못했다.

풍속화는 우리나라 생활 풍속의 역사를 가장 입체적으로 기록한 사료(史料)이자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사인 풍속화에 포함되는 그림들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사례가 적지 않다.

일상을 그린 그림보다 기념을 위해 제작된 사례가 많다.

사인 풍속화는 주로 전문 화가에게 주문하여 그리도록 했다. 당연히 수준과 화격이 매우 높다.


- 윤진영 著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중에서 -




《평생도》중 혼례식






<십로도상축(十老圖橡軸)>

1499년 추정, 두루마리, 종이에 채색, 38.0×208.0cm, 삼성미술관 리움


오백 년 전 노인들의 모습과 뜻깊은 사연을 오늘에 전하는 그림이다.

1499년(연산군 5) 전라도 순창에서 열 명의 노인이 모여 '십로회(十老會)'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평범한 시골 노인들의 사적인 모임처럼 보이지만 훗날 매우 주목받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관심을 끌었다.

모임의 주도자는 순창 출신의 문신이자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5)이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의 앞부분에는 신말주가 쓴 글이 있고,

이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열 명의 노인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신말주는 십로회를 조직하게 된 동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러 고향의 소중함을 깨닫고 친목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썼다.

이 모임은 나이 70세 이상이고 고향이 같아야 한다는 점. 이때 신말주의 나이는 71세였다.

그림 속 인물 배치 순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하였는데, 신말주는 여덟 번째에 앉아 있다.


신말주는 이 모임을 중국의 기로회 관련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즉 고전 속의 운치 있는 모임으로 잘 알려진 백거이(白居易)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와 문언박(文彦博)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계승한 뜻깊은 모임으로 평가했다. 몇가지 규약으로는 서열은 생년월인 순으로 할 것,

연장자부터 돌아가며 모임을 주관할 것, 술자리에서의 예절을 간략히 할 것, 술을 억지로 권하지 않을 것,

찬은 한두 가지로 한다는 등의 소박한 약속이었다.


신말주는 서문에서 이 그림을 만든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이 모임에 참여한 노인들 간에 맺은 약속을 오래 전하고, 기쁘고 즐거운 뜻을 담은 기념물이라고 했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경계(警戒)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후손들에게도 이 모임을 계승케 하고자 이 첩을 제작한다고 했다.

화면 왼편 끝에 탁자로 공간을 막은 것은 더 이상의 추가 회원은 받지도 않고 그리지도 않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추가로 회원이 들어올 경우, 종이를 연결하여 사람을 더 그릴 수는 있다.

하지만 탁자로 공간을 막은 것은 그렇게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십로도상축> (부분)


 <십로도상축>에서 춤추는 김박의 모습은 아래 <난정수계도>에 등장하는 사등(謝藤)의 춤사위 동작과

우연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흡사하다. 자리를 깔고 앉은 모습, 그림 아래에 곡수(曲水)의 표현을 암시한 점,

그리고 배경에 성글게 나무를 그린 점 등도 그러하다. 이러한 요소는 중국에서 전래된 <난정수계도>를

부분적으로 참고하여 그렸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난정수계도>







<십로도상축> (부분)

'십로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신말주가 <십로도상축>을 직접 그렸다고 하지만 이는 분명치 않다.

인물은 모두 머리에 건(巾)을 썼고, 바석 위에 앉거나 일어서서 춤추는 모습, 혹은 엎드린 모습 등

가장 편안하고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인물의 위쪽에 자신이 지은 詩와 이름을 기록하여 누군지 알 수 있게 했다.






<십로도상축> (부분) (왼쪽 그림)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를 보면, 인화문이 장식된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 도자기의 특징을 띈 것이 많다.

이는 그림의 제작 시기가 분청사기가 유행하던 15세기였음을 말해 주는 좋은 단서가 된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십로도상축> (오른쪽 그림)

1790년(정조 14)에 강세황이 발문을 남긴 이 그림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 속의 도자기는 조선 후기의 특징을 지닌 백자로 그려져 있다. 모사본에는 모사한 당시의 문물들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부분)

이기룡, 1692년, 족자, 비단에 채색, 116.7×72.4cm, 서울대학교박물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숭례문(崇禮門)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숭례문은 화산(火山)에 해당하는 관악산(冠岳山) 쪽을 향하고 있기에 연못에 물을 담아 그 화기를 누르려고 했던 것.


1629년(인조 7) 6월, 남지에서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나이 많은 전 현직 원로 관료들의 회동이 있었다.

이들의 만남을 기념하고 추억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

족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위쪽에서 부터제목, 그림, 서문, 그리고 좌목(座目)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좌우 비단에도 축하의 글 한 편이 적혀 있다.

그림 속의 건물은 남지 바로 옆에 있던, 이 모임의 일원인 홍사효(洪思斅, 1555~?)의 집이다. 81세의 이인기(李麟奇)를 비롯,

두 열한 명으로 모두 70세 이상이며, 80세가 넘는 노인도 세 명이나 된다. 젊은 시절부터친분이 두터웠던 이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거치며 더욱 결속을 다지게 된 이들이다.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그림에서 노인들이 자리잡은 왼편 공간에는 동행한 자제들이 앉았고,

오른편은 시녀들이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간은 자신의 일기인《동추공일기》에

 이날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림 제작하는 비용은 자제들이 부담하기로 했고, 기로회가 있은 지 24일 만인 6월 29일에

기로회도 11본이 완성되어 한 점씩 나누어 가졌다고 적었다.

 지금의 기념사진과 같은 그림이었다.







수선전도(首善全圖)의 남지 주변


남지기로회의 노인들이 살았던 근동, 약현, 남산아래, 명례방에서 가장 중심지가 남지였다.

남산 다음으로 사대부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629년 당시 각자 나누어 가진 열한 점의 <남지기로회도>는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 잃어버리거나 망실을 면치 못했다. 원본이 없어진 경우에는 다른 집안의

원본을 빌려 모사하였고, 원본마저 손상된 경우에는 다시 이모본을 배껴 그려서 남기기도 했다.






<이원기로회도(梨園耆老會圖)>, 이원기로계첩(利園耆老契帖) 중

1730년, 두루마리, 종이에 담채, 34.0×48.5cm, 국립중앙박물관


궁중 음악과 무용을 운영하던 부서를 장악원(掌樂院)이라 한다. 다른 이름으로 '이원(梨園)'이라 불렀다.

명동에 있던 장악원은 도성 안에서도 전망이 좋은 곳으로 꼽혔기에 선비들의 사적인 연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1730년(영조 6)의 어느 봄날, 원로 전 현직 관료들이 이곳 장악원에서 모임을 갖고 제작한 그림으로

전 장악원 도정(都正) 홍수렴을 비롯하여 모두 스물한 명이다. 참석자들은 65세에서 85세에 이르는 노인들로,

5품에서 6품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이다. 조선 후기 기로회의 저변 확대에 따라 생겨난 사적(私的)인 기로회에 속한다.


갓쓴 노인들의 도포나 이목구비의 묘사도 비교적 구체적이다. 처용무를 추는 무용수, 시녀와 악공, 그리고

누각의 계단 아래 서 있는 자제들의 모습도 다채롭고, 누각 아래의 구경꾼들도 자연스럽다.

18세기 전반의 남녀 복식의특징도 살필 수 있다.

예컨데 조선 후기 여성 복식의 특색인 치마가 길어지고 저고리가 짧아지는 등의 변화도 확인 할 수 있다.


공간 운용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점 등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필치나 구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점은 이 그림의 시기가 1730년이라기보다 18세기 후반기나 19세기 초반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16세기의 기로회는 고위 관료층이 중심이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노인회의 성격으로 변용되어 참여 계층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기로회의 저변 확대는 다양한 형식의 기로회도가 그려지는 계기를 가져왔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풍속화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려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원기로회도(梨園耆老會圖) (부분)


기로회도를 포함한 연회도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연 장면이다.

그림의 누각 오른쪽에 가면무(假面舞)인 처용무(處容舞)가 펼쳐지고 있다. 처용무는 다섯 명이 추는 매우 역동적인 춤이다.

그 왼쪽에는 기녀가 추는 포구락(抛毬樂)을 그렸다. 포구락은 나무판에 구멍을 뚫어 공을 던져 넣는 춤 놀이이다.

그런데 이 두 종의 춤은 대궐 안의 잔치 때 벌이던 궁중 무용의 일종이다. 기로회나 사적인 계회에 이러한 춤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아마도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장악원의 관리가 포함되었고, 이들의 지시로 궁중 연회에서

볼 수 있는 춤들이 이 자리에서 공연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누각 앞쪽의 큰 탁자 좌우에는 각각 두 그룹의 기녀가

앉아서 현악기를 타고 있다. 대청 아래에는 박(拍)을 잡은 악사와 해금 한 명, 대금 한 명, 장구 한 명, 피리 두 명, 북 한 명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이 반주로 연주되고 있다. 악공들은 청색 도포에 갓을 썼으며 집박(執拍)은 붉은 도포를 입었다.


<이원기로회도>는 18세기 전반기의 사적인 연회 풍속을 사실적인 장면 묘사로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장악원에성 열린 연회답게 음악과 무용이 어울린 전통적인 기로회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특색이다.






<석천한유(石泉閑遊)>

김희겸, 1748년경, 종이에 채색, 119.5×87.5cm, 개인 소장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지붕을 가린 누정 안에서 한 남성이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맞은 편에는 기녀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사방이 트인 누정은 한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누정의 한쪽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성은 손 위에 야생 매를 올려 놓은 채 밖을 바라보고 있다.

전일상(田日祥, 1700~1753)이라는 인물이다. 그림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의 집안에서 전일상을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림의 제목이 <석천한유(石泉閑遊)>인 것은 전일상의 호인 '석천(石泉)'을 붙여서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전일상의 자는 희중(羲中),  호는 석천(石泉),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1721년(경종 원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이후 전라우수사를 거쳐

경상좌수사에 올랐다. 그림 왼편에 '무진류월일 제(戊辰流月日 製)'라 적혀 있다.

무진년이면 전일상이 종3품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1748년(영조 24)이며, 이 그림은 당시에 그린것으로 추측된다.


전일상은 매를 손 위에 올린 채 누정 밖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잠긴 듯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대금과 가야금

음색이 한층 운치를 더해 주는 분위기다. 전일상은 소창의에 조끼 모양의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망건을 썼으며,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누정의 계단에는 술병과 과일을 들여오는 기녀들이 보인다. 누정 아래의 연못에는

윗옷을 벗은 마부가 검은 얼룩이 있는 백마를 씻기고 있다. 마부는 전일상과 같은 마을 출신의 오평산(吳平山)

이라는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며, 평생 전일상의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석천한유(石泉閑遊)> (부분)



특이한 것은 전일상의 주변에 무인(武人)에 어울리는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호걸스러운 남자가 좋아한다는 매 · 검 · 마를 의도적으로 갖추었다. 즉, 전일상의 오른 손에 앉힌 매, 누정의

기둥에 걸린 검, 그리고 누정 아래의 얼룩백이 말이 그것이다. 또한 누정의 바닥에는 지필묵 등 문방사우(文房四友)와

포갑에 싸인 책도 그려져 있어 문무를 겸한 전일상의 취향을 잘 드러내준다.








<전일상 초상>


현재 단령을 입은 전일상의 초상화 한 점이 후손가에 전한다.

<석천한유> 속의 전일상을 이 초상화와 비교해 보면, 실제 그의 용모대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약간 처진 듯한 눈두덩이, 넓적한 코, 섬세하게 그린 머릿결과 성근 수염, 뚜렷한 주름, 그리고 양볼의 홍조 등이

사모를 쓴 전신상의 얼굴과 일치한다. 전일상의 초상화 덕분에 <석천한유>의 주인공이 전일상임을 확일할 수 있다.

일상생활 공간 속에 있는 특정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경우가 된다.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익명의 풍속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종휘의 문집인 《수산집》에는 "형 운상과 동생 천상이 무예로 현달 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전일상은 체구가 크고 힘이 매우 셌으며, 먹는 음식도 보통 사람의 몇 배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과감하고 추진력이 뛰어나다는 그의 성격은 전신상의 초상화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도 잘 부합된다.

이 초상화는 도화서 화원 김희겸이 그린 것으로 집안에서 전해 왔다고 한다.

초상화는 사모에 녹색 관복을 입은 전신상이다.

얼굴은 눈매 주변의 높낮이에 따라 음영을 넣었고, 볼고 콧등 부분에 붉은 홍조가 뚜렷한다.

그런데 전일상 초상의 관복에는 학 두마리를 수놓은 쌍학 흉배가 그려져 있다.

 이 흉배는 문관 정3품 이상이 착용하는 흉배이다. 전일상은 무관이므로 호랑이나 사자 흉배를 달아야 하지만,

18세기 초반기에 무관이 문관 흉배를 하는 것이 한때의 유행이었다.


 <석천한유>는 당시 전일상의 초상을 그린 김희겸에게 부탁하여 그린 것으로 전한다.

김희겸은 본관이 전주, 자는 중익(仲益), 호는 불염자(不染子) 혹은 불염재(不染齋)다.

1748년(영조 24) 숙종의 초상화를 베껴 그릴 때 동참화사(同參畵師)로 참여한 적이 있다.






<독서여가(讀書餘暇)>

정선, 18세기, 비단에 채색, 24.0×16.8cm, 간송미술관


<독서여가>는 겸재가 한강 일대의 진경을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의 맨 앞 장에 붙어 있다.

화첩을 완성한 60대 중반에 이른 자신의 모습으로 추측되지만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얼굴 채색이 검게 변했지만,

선비의 고아한 품격을 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작은 그림이지만 밀도가 충만한 내용이다. 

툇마루 뒷편은 서재이다. 문과 벽이 없고 초당의 바닥은 갈대로 엮었다. 보통 책도 있지만 네 개의 구멍을 뚫어

4침법으로 묶은 책은 중국책인 듯하다. 5침법으로 묶은 조선의 책과는 장정 방식이 다르다.






<독서여가(讀書餘暇)> (부분)


이 작은 그림 속에서 두 점의 그림을 더 보여 준다. 한 점은 서가의 여닫이 문 안쪽에 붙어있고,

 나머지 한 점은 부채에 그려져 있다. 먼저 여닫이 안쪽에 붙인 산수도는 문짝의 크기에 맞추어 그린 맞춤형 그림이다.

 그런데 이 산수도는 서가가 열려 있을 때만 볼 수 있다. 그림을 꾸미는 일반적인 형식인

 축(軸), 첩(帖), 권(卷), 병(屛)과 달리 생활공간 속에서 볼 수 있는 붙박이 그림을 붙인 형식이다.


서가의 문에 붙인 산수도는 어떤 그림일까?

그림 아래쪽에 물가 언덕 위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는 인물인 처사(處士)의 모습이 등장한다. 따라서 폭포를 바라보는

그림이라는 뜻의 '관폭도(觀瀑圖)'라는 제목을 붙일 만하다. 처사는 자연을 관망하는 관조자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늘에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어렴풋한 형태이지만 초승달 주변을 물들여 달의 형태를 그렸다.

한 낮의 상황은 아닌 듯하다. 이와같이 처사가 폭포를 관조하는 구도는 조선 중기 그림의 전통에 가깝다. 즉 인물에

비중을 두고, 배경을 간략히 처리한 절파(浙派) 계통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형식과 비슷한 면이 많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승달이 떠 있는 그림 속의 시각은 이른 새벽녘일 듯하다. 이 그림은 새벽녘에 폭포를 마주하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처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닐까? 특히 책장의 문을 열 때마다 보게 되는 이 그림은

늘 청신한 새벽처럼, 독서가의 마음을 새롭고 경견하게 하는 감상화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독서여가(讀書餘暇) (부분)


이번에는 부채에 그려진 그림을 보자. 크기가 워낙 작아 분명하진 않지만, 수묵(水墨)으로 그린 산수도다.

부채의 아래쪽에 근경이 있고, 그 위로 강이 가로지르며, 강 너머로 언덕과 배경을 이룬 풍경이 어렴풋이 잡힌다.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 가운데 예찬(倪瓚) 그림의 구도와 유사하다.

부채속의 그림은 정선이 중국에서 전해진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익히기 위해 선호했던 그림으로 추측된다.


서가에 그려 붙인 <관폭도>와 부채에 그린 <산수도>는 정선의 그림 속에 그려진 또 하나의 그림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감추어진 그림을 감상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서가의 문도 열어 두고, 부채도 펼쳐 들었던 것은 아닐까.

책이 가득한 서가, 아취 있는 그림, 그리고 화초가 놓인 공간은 단아한 선비의 취향과

일상의 여유를 고스란히 전해 주고 있다.






<가을날의 야유회>, 《도국가첩(桃菊佳帖》 중

1778년, 화첩, 종이에 담채, 40.7×57.2cm, 해주오씨 추탄 종택


1778년(정조 2)에 만든 <도국가첩>이라는 화첩에 실린 그림 2점 가운데 가을 장면이다. 

아름다운 가을날에 선비들이 만나 사교와 풍류를 즐긴 여가 문화의 일면을 그린 것으로 가을 색이 완연하다.

시를 써서 감상하는 인물, 취기와 함께 한담을 나누는 등 다채롭고 정겨운 야유회가 펼쳐지고 있다.

그림 한 쪽에는 시동(侍童)들이 활짝 핀 국화를 따서 술동이와 술잔에 띄우고 있다.  건네받은 한 잔의 술에도

운치가 충만하다. 언뜻 산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중국이 '아집도(雅集圖)'나 '아회도(雅會圖)'에 보이던 생경하고, 이상적인 장면들이

《도국가첩》에는 현실 공간 속의 친숙한 인물들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가을날의 야유회> (부분)


이 두 점의 그림은 계절감이 다르지만, 부드러운 담묵(淡墨)을 구사한 뒤 담채(淡彩)를 더한 화법으로 그려서

산뜻한 분위기가 살아나 있다. 인물 묘사는 간략히 처리했지만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화가의 개성과 기량이 돋보인다. 그런데 인물들 사이에 술잔을 나르는 시동은 언뜻 중국 왕희지의 <난정수계도>

에 그려진 시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도국회의 주인공인 선비와 시동의 모습은 중국의 난정수계도와 전혀

다른 조선의 공간과 인물로 구성해 놓은 독자적인 설정이다.








<봄날의 야유회>, 《도국가첩(桃菊佳帖》 중

1778년, 화첩, 종이에 담채, 21.2×33.8cm, 개인 소장


이 화첩의 뒤편에 실린 <첩헌(帖憲)> 내용을 보면, 구성원들이 돈을 모아 이자를  늘리는 활동을 겸하였음을 알게 된다.

1년에 두 번 돈을 내는 등 금전 관리의 조항과 이를 어겼을 때의 벌칙을 적어 놓았다. 조선 후기 선비들의 사적인 모임이

확산되면서 금전을 모아 이자를 늘리는 일반 계(契)와 유사한 성격으로 변모해 가는 현상을 도국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국회의 주된 목적은 친목에 있었고, 이르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금전 계의 형태였다고 이해된다.


이들이 도국회를 만든 사연을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는 그윽한 도화(桃花)와

국화(菊花) 향기만큼이나 여유아 멋스러움이 잘 드러나 있다. 빛바랜 화첩 속에 간직된 두 폭의 그림에는 약 240년 전

어느 봄날과 가을날의 정경이 가득하다.







<연당야유(蓮塘野遊)>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인물들의 표정에서는 속 마음이 읽혀질 정도라고나 할까?

인물 묘사도 묘사려니와 스토리 전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느낌이다.

 

챙이 넓은 갓과 유난히 긴 갓끈, 단정한 도포에 두른 자주색 허리띠로 보아 높은 관직의 관료들로 추측된다.

화가는 인물에 한정된 묘사보다 이야기 장면을 설정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 듯하다.

또한 그려진 인물의 표정에는 속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어, 화면속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폭넓게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신윤복의 뛰어난 화면 연출과 회화적 감각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그림 속의 장소는 어느 집의 후원인 듯하다. 높은 담장과 나무가 어우러져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을 관아의 후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도포를 입은 이들이 기녀를 불러들어 노닐기에 적절치 않다.

그렇다고 개인의 저택이라고 할 수 도 없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도 집 안에서 기녀들과 유흥을 즐긴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아마도 이곳은 기방(妓房)의 후원이 아닐까 싶다.


왼편의 사내가 갑작스레 기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자리 위에 앉혔다. 이걸 바라보는 오른편 사내의 표정은

품위를 질책하는듯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해당 기녀가 자신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

이 그림은 '청금상련(聽琴賞蓮)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지만 등장인물 가운데 정작 연꽃 감상자는 아무도 없다.


검은 가리마를 쓴 여성의 신분은 의녀(醫女)의 표식. 연산군 대 이후로는 의녀가 기녀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이른바 '약방기생(藥房妓生)'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는데, 이처럼 의녀의 지위가 추락하자 중종 연간에는 금지령이

 내리기도 했지만,  의녀는 의료 행위와 공식적인 가무를 병행하였다. 《영조실록》(1738.12.21)에

'침비와 의녀들이 각기 풍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시 의녀들이 기녀의 자리로

나가게 된 세태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양반들의 요구와 경제적 수입을 위한 기녀들의 욕구가 상응한 것.


상단의 화제엔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 차 있고, 술 단지에 술이 비지 않으니 (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이 구절의 출전은 <삼국지>라고 한다. 손님 접대를 좋아하는 후한대의 학자 공융(孔融, 153~208)의 성품을 표현한

 말로 전한다. 여기에 근거한다면, 이 그림 속 공간은 기방으로 볼 수 있다. '좌상의 객'과 '술'은 손님의 접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기녀가 등장하면 기방을 운영하는 객주와 기녀가 바로 문장의 주체가 된다.

다시 말해 연못가의 양반들이 바로 고객들이고, 기녀가 접대를 맡고 있으니

 '가득찬 손님'과 '비지 않은 술'은 최고의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뱃놀이(舟遊淸江)>, 《혜원전신첩》중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채색, 28.2×35.2cm, 간송미술관


배는 큰 절벽 아래에 머물러 있다.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앟는 한적한 공간이다.

배경을 이룬 바위 벼랑은 <연당야유>에서의 담장처럼 누구도 눈길로 넘을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절벽의 묘사는 은은한 담채로 채색하였고, 이끼와 나무도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했다.


본디 뱃놀이는 양반들이 자연의 풍광을 마주하여 시를 짓고 술을 즐기는 이른바 최상급 풍류였다.

물결에 손을 담근 기녀를 바라보는 양반의 표정에는 연정이 가득이다. 헌데 이 남성은 수염이 없는 매끈한 얼굴로 나이가

 어려 보인다. 그 오른편에 기녀의 담뱃대를 잡아주는 양반도 동년배로 보인다. 그러나 뱃사공과 악동 사이에 서 있는 갓을

제쳐 쓴 양반은 앞의 두 사람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 나이든 사람이 권세가의 자제들을 접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양반 자제들과 함께 어울리기 어색했던지 뒷짐을 진채 물끄러미 앞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화제를 보자. "젓대 소리 늦바람에 들을 수 없고(一笛晩風聽不得), 백구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白驅飛下浪花前)."

언뜻 그림과 잘 연결 되지 않아 보인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 아닌 뱃놀이 주인공들의 시점에 적용한 글로 보인다.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풍류의 현장이 그림 위에 드러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가능했다.

속화(俗畵)라는 그림이 유행하고 신윤복과 같은 걸출한 화가가 등장한 시기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연당야유>와 <뱃놀이>는 조선 후기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신윤복의 뛰어난 '춘의풍속화(春意風俗畵)'일면을 

잘 예시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쌍검대무(雙劍對舞)>, 《혜원전신첩》 중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채색, 28.2×35.2cm, 간송미술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순발력 넘치는 무용수들의 동세가 흩날리는 옷자락과 함께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왼펴 상단에 앉은 양반과 기녀들의 시선은 검무에 집중되어 있고, 화면 아래에는 여섯 명의 악공들이 연주에 한창이다.

술과 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찬(酒饌)을 즐기기 전에 먼저 검무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서로 마주본 두 무희는 양손의 검으로 장단을 맞추며 춤사위를 이어간다. 오른쪽 무희는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끝까지 발걸음을 옮겼지만, 또다시 순식간에 좌우를 왕래하며 동작이 이어질 태세다. 가발을 올린 머리 위에는

공작 깃털로 장식한 전립(戰笠)을 썼고, 군복의 일종인 전복(戰服) 위에는 남색 띠를 둘렀다.









<쌍검대무(雙劍對舞)> (부분) 


죽부인에 등을 기대어 앉은 사람이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인다. 파란색으로 마감하 고급 돗자리 위에 혼자 앉았다.

그 뒷편에 앉은 이는 갓끈을 붙잡고 편히 앉았다. 그 윗쪽 갓을 쓰고 부채를 든 젊은이는 나이가 한참 어려 보인다.

갓과 옷이 커 보이며, 어색해 하는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오른쪽 맨 끝에 초롱을 쓴 남자도 나이가 젊어 보인다.

연소한 두 사람이 이 자리에 참석한 데에는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하다. 그 사이에 앉은 두 기녀는 용모가 곱고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이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담뱃대 심부름을 하는 동자가 신기한 눈빛으로

검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래쪽의 악공 여섯 명이 다루는 악기는 해금, 피리, 젓대, 장고, 북 순이다.

여성 무용수가 나온다고 하여 차선을 갖고 나왔던 것일까? 매우 소심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차선은 쓰지 않고 내려놓았다.









<쌍검대무(雙劍對舞)> (부분) 


검무를 추는 무용수들은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들로 추정된다.

검무는 원래 민간에서 가면무(假面舞)로 추던 춤이었으나 순조(純祖) 때 이르 궁중정재(宮中呈才)로 채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그 맥이 전승되고 있다. 검무는 검이라는 무기를 들고 추는 춤이지만 살벌함을 나타내는 전쟁 무용과는 다르다.

힘찬 기상을 보여 주고 평화롭고 유연한 동작으로 일관된 아름다운 춤으로 알려져 있다. 춤을 출 때 쓰는 칼은

 날이 꺾이고 고리를 자루에 연결시켜서 자유롭게 돌리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많다.


검무는 후대로 오면서 유연성이 강조된 검기무(劍器舞), 첨수무(尖袖舞), 항장무(項莊舞)라는 이름으로

궁중연례에서 자주 공연되었다. 또한 지방에서는 감영에 설치된 교방청(敎坊廳)이 검무를 전담하도록 함으로써

지역 명칭에 따른 여러 종류으 검무가 존속할 수 있게 하였다. 검무의 감상 포인트는 검을 돌리거나 회전하는 동작과

그때 나는 소리이다. 칼로 바람을 가르거나 칼이 부딪치는 소리는 검무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색이다.

하지만 임금께 바친즌 정재무(정呈才舞)로서의 검무는 번뜩이는 검의 느낌은 사라지고 고상함을 갖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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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도병> (부분)

작자 미상, 1848년, 비단에 채색, 136.1×47.6cm, 국립중앙박물관


헌종 14년 작인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이다. 이 그림에는 검무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무신년의 진찬은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의 육순(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40세 생일을

맞아 열렸다. 이해 3월 17일에서 19일에 걸쳐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거행된 진연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이 검무에서는 4명이 짝을 이루어 춤을 추고 있다. 이 가운데 한 무용수가 칼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 칼을 땅에 놓고 춤을 추는 동작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에 칼을 떨어뜨린 일이 있었더라도 그림에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무는 원래 상무정신(尙武精神)에서 나온 것이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춤도 달라졌고, 대부분 관아의 교방청에 의해

전수되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진주 지방의 검무나 검기무 이외에도 전주 · 평양 · 해주 등 관기들이 있던 곳에서도 검무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신윤복의 <쌍검대무>는 약 200년 전 검무의 구체적 재현인 것이다.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 제1면 회혼례장 주변

18세기, 비단에 채색, 33.5×45.5cm, 국립중앙박물관


장수를 기념하는 연회에는 세 종류가 있다. 

회갑연(回甲宴), 과거 시헙 합격 60주년을 기념한 회방연(回榜宴), 혼인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回婚禮)로

모두 다 장수와 연관이 있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조선 시절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림은 회혼례도의 첫 장면으로, 남편이 기럭아범을 앞세우고 부인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남편은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관료들에게 내리는 궤장(櫃杖)을 짚고 있다.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 제2면 회혼례식 장면


자손과 하객들에 둘러싸여 회혼례식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남편과 아내가 찬탁(饌卓)을 앞에 두고 마주섰다. 서로 백년회로를 비는 맞절을 올리기 작전인 듯하다.

그 시절에는 정식 혼례식 때 신랑과 신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 제3면 노부부에게 헌수(獻酬)하는 장면


노부부가 자손들로부터 술잔을 받는 장면이다. 오래 살기를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는 장면으로,

이 자리에서 자손과 하객들은 노부부에게 시문을 지어 올려 장수와 여생의 평안함을 빌기도 했다.

노부부의 뒷편으로 포도를 그린 병풍을 쳤고, 남성 하객들 뒤로는 산수화 병풍이 펼쳐져 있다.

조선 후기 유행한 남종화풍(南宗畵風)으로 그린 산수화로서의 특징이 뚜렸하다.

남녀로 나누어 앉은 자손들도 각각 소반을 하나씩 받았다. 여성들의 소반을 유난히 작게 표현한 이유가 궁금하다.


건물보다 훨씬 그리기 어려운 것이 인물이다. 행사 장면을 사진처럼 실제와 똑 같이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가의 편의를 위해 사람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다양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그린 뒤 이를 재구성하여 그림을 완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 제4면, 5면 하객들과의 연회 장면(부분)


네번째와 다섯 번째는 연로한 신랑이 하객들과 함께 연회를 갖는 장면이다.

네번째가  하객들에게 술잔을 권하는 장면이라면, 다섯 번째는 반대로 노부부가 잔을 받는 장면이다.

사람들의 등 위로 설치한 병풍에는 사군자와 묵포도가 그려져 있다.

공간을 가리고 장식하는 기능은 물론 사대부의 취향에 어울리는 그림들이다.







《제재경수연도(諸宰慶壽宴圖)》제5면 대부인(大夫人)의 연회

18세기 이모(移模), 종이에 채색, 34×24.7cm, 고려대학교박물관


4백 년전 효행(孝行)의 미담(美談)을 담은 화첩으로 '제재(諸宰)는 '여러 재상급 고위 관료'를 뜻하며,

'경수연도(慶壽宴圖)'는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 속의 현장은 1605년(선조 38)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70세 이상의 노모(老母)를 모신 열세 명의 관료들이

서울 장흥동에 모여 경수연을 열었다. 당시의 그림은 병자호란 당시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잃어버린 화첩을 대체하고자 1655년(효종 6)에 50년 전의 연회 장면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한 본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첩도 언제가 사라져 버렸다.

 이후 18세기 무렵 다시 그린 세 번째 화첩이 바로 이 《제재경수인도》라고 추측된다.


이 그림에는 18세기에 가능했던 투시법과 화풍으로 그려졌다.

특히 공중에서 내려다본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획기적인 화면 구성은 17세기 중엽의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재경수연도(諸宰慶壽宴圖)》제1면 저택 입구

그림은 다섯 장면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시차를 두고 진해된 연회의 장면이다.

1, 2면은 연회가 열린 청사(廳舍)의 입구와 음식을 준비하는 조찬소 주변을 그렸다.

타고온 말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고, 문 안쪽에는 가마와 수행원들 그리고 방문객의 일부가 앉아 있다.


1603년(선조 36) 정월, 예조참의 이거(李蘧, 1532~1608)의 어머니 채씨(蔡氏)가 백세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백세는 평균 수명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나이다. 단연 장안의 화제였고, 선조 임금은 세상에 보기 드문

미담이라 하여 넉넉하게 선물을 내렸다. 또한 이거의 품계를 올려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세순(李世純)도 이조참판으로 관직을 올려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2년 뒤인 1605년(선조38) 4월, 서평부원군 한준겸

(韓俊謙, 1557~1627)이 여러 관료가 모인 자리에서 계(契)를 제안했다. 70세 이상의 어머니를 모신 관료들 끼리의 계였다.

이에 열세 명의 관료가 참여하여 봉로계(奉老契)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첫 번재 모임으로 백세의 채 부인과 각 계원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장수 잔치를 열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는 잔치에 드는 비용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고,

궁중 가무단과 악동도 보내 주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풍악(風樂)을 금했으나 이날 만큼은 특별히 이를 허락했다.





《제재경수연도(諸宰慶壽宴圖)》제2면 조찬소 주변(왼쪽), 


《제재경수연도(諸宰慶壽宴圖)》제3면 관료들의 봉로계회(奉老契會) (오른쪽)


연회의 장소는 장흥동에 있는 고급 가옥이었다. 그런데 경수연이 펼쳐진 공간은 실내가 아니라 가옥의 야외였다.

공터에 장막을 쳐서 내부 공간을 임시로 꾸몄다. 이 자리에 참석한 관료들의 노모는 모두 아홉 분이었다.

이 경수연에서는 간단한 몇 가지 규약을 두었다. 연회가 있는 날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모두 모일 것.

계원들은 수레에 태워 모시고 올 것, 여러 자제들은 새벽에 모일 것 등 의전(儀典)과 관련된 내용이다.

계원은 진흥군 강신(姜紳)을 비롯해 모두 열세 명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시고 온 어머니, 즉 대부인은 왜 아홉 명일까?

 계원 중 이거와 이원(李䕂)이 형제였고, 강신, 강인, 강담도 형제였기 때문이다.


연회의 장면을 보면, 채 부인은 남향하여 북쪽에 앉았고, 강신의 노모가 남편의 관직 서열이 앞서므로 채 부인과

나란히 앉았다. 나머지 여덟 명의 대부인은 지위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관료들의 부인도 대부인의 수와

같았으므로 각각 대부인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음악이 연주되자 여러 제신이 돌아가며 축수(祝壽)의 잔을 올렸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경수연의 가장 핵심 장면이다.


1655년의《제재장수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채 부인의 손자인 이문훤이 화첩 만들 생각을 하고, 그 실무를 아들인 이관에게 맡겨 추진하게 했다.

그는 이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당시의 연회 장면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 후대에 영영 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에게 경수연 장면을 이야기해 주어 그리게 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첩을 만들게 된 것이다.

4백 년 전 노모를 모신 관료들의 효심과 경수연은 이 화첩에 담겨, 가문의 미담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넘어선 아름다운 교훈으로 전하고 있다.







《평생도(平生圖)》제1면 돌잔치(부분)

18세기, 비단에 채색, 53.9×35.2cm, 국립중앙박물관


평생도의 첫 주제인 돌잔치에서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상 위에 놓인 물건을 집는 장면이다.

아이의 미래르 축복하는 의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를 향해 있다.


일생에서 가장 보람있고 행복했던 기억과 사건들을 그림으로 구성한 것을 평생도(平生圖)라 하고,

특히 조선 후기에 그려진 양반 관료들의 일생을 그린 풍속화는 시대의 유행이었다.

주로 여덟 폭이다 열 폭의 병풍으로 제작된 평생도는 여러 점의 그림을 펼쳐 두고 보기에 가장 효과적이다.

 주로 생애의 순서에 따라 돌잔치부터  시작하여 혼인, 과거 급제, 관직 부임, 회갑, 회혼 등의 내용으로 채워졌다.


모두 그 주인공들의 일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들이다. 이러한 평생도에는 다양한 종류의 풍물과 풍속의 장면들이

들어가 있고 묘사가 뛰어난 그림이 많아 조선시대의 생활풍속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다.






《평생도(平生圖)》제2면 혼례식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 오는 장면이다.

 나무 기러기를 든 기럭아범의 뒤를 말을 탄 신랑과 쓰개치마를 쓴 신부가 따르고 있다.






《평생도(平生圖)》제3면 삼일유가


과거에 급제자가 사흘동안 고향의 부모와 선배, 친척을 방문하여 인사를 올리는 풍속이다.

어사화를 사모에 꽂고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장원 급제자만이 누릴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


네 번째부터 일골 번째까지가 관직 생활과 관련된 주제다. 여덟 개의 주제 가운데 절반에 해당한다.

즉 '관직 부임', '지방관 부임', '판서 행차', 정승 행차', 등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관직에 대한 집착과 출세의식을

이러한 구성에서 엿볼 수 있다. ,관직 부임>은 관직에 첫 발령을 받아 임명장을 받고서 관아를 향해 가는 장면이다.

그날의 설레던 심경을 주인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평생도(平生圖)》제5면 지방관 부임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될 지역의 관리들이 서울로 올라와 지방관을 맞이해 가는 장면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말이 끄는 가마를 탔고, 깃발과 취타(吹打)가 길을 인도하고 있다.

관직 생활 중에서도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로 여긴 듯하다.


다음은 <판서 행차>와 <정승 행차>이다. 판서나 정승이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다.

특히 <정승 행차>는 야간에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하인들이 횃불이나 짚단에 불을 붙여 길을 안내하고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혼인 60주년을 기념한 혼례식 장면을 그린 <회혼례식>이다.


평생도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 출세와 행복을 추구한 많은 사람의 바람을 담은 그림이 아니었을까?

같은 장면을 배껴 그린 그림이 많았던 것은 그러한 배경이 있음을 말해 준다.

《평생도》는 한 개인의 일생에 관한 그림이지만, 어린 자녀의 미래와 남편의 출세에 대한 바람을 담은

그림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양반 관료층에게 평생도는 자신들의 인생이나 선조의 일생을 추억하는 그림이다.

하지만 신흥 양반층이나 중산층에게도 평생도는 인기 있는 그림이었다. 서민화가들이 그린 민화(民畵) 형식의

<평생도>가 여러 점 전하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았음을 말해 준다.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평생도>

누구나 꿈을 갖고 노력한다면 저 <평생도>에 담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시대,

그런 시대에 그려질 수 있는 그림이 평생도였다.








<소과응시(小科應時)> 《평생도》중

19세기, 화첩, 종이에 담채, 57.2×40.7cm, 개인 소장


조선시대의 과거(科擧) 시험 장면을 그린 그림은 매우 드물다. 대표적인 한 사례가 여기에 소개하는 <소과응시>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시험에 응시하는 모습을 자신이 가장 기억하고 싶은 장면으로 선택한 것이다.


화면 가장 위쪽 대청에 감독관이 앉아 있고, 주변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천막으로 빈틈없이 가렸다.

주변에는 관리들이 제출 받은 답안지를 옮기거나 중간 현황을 감독관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청 입구 쪽에 설치한 거치대 위에 합격의 향배를 좌우할 이 날의 시험 문제지가 걸렸다.


커다란 우산처럼 생긴 일산(日傘) 안에 모여 답안을 작성하는 모습인데 어인일인지 응시생 모습이 아닌 사람도 있다.

응시생의 답안 작성을 돕도록 고용된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들을 거벽(巨擘)이라 하고, 정리된 답안을

대신 써주는 이를 사수(巨擘)(寫手)라 하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이 그들로 추측된다.









<소과응시(小科應時)> (부분)


소과는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3년에 한 번씩 전국에서 200명을 뽑아 자격을 주었다.

시험은 두 차례로 시행되었는데, 1차 시험은 각 지방에서 실시하여 일정한 인원을 뽑았다.

지방에서 합격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2차 시험은 서울에서 치렀으며, 여기에서 생원과 진사 각 100명씩 선발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 부분에 거벽(巨擘)과 사수(巨擘)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답안을 읽으면서 지적해 주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명백한 부중행위의 장면들인 것이다.

그 왼편으로 이어지는 일산 아래에는 한 사람이 술잔을 들었고, 또 한 사람은 답안을 읽고 있다.

이런 모습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두 명씩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거벽과 사수인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한 팀을 접(接)이라 하여 거접(居接) 혹은 동접(同接)이라 불렀다. 이들의 부정행위는

재력이나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를 과거에 합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헌데, 이처럼 부정행위로 얼룩진 장면을 왜 <평생도>의 한 폭으로 그렸을까 하는 점이다.

《평생도》는 원로 관료들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볼 때 가장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장면들을 선별하여 그린 그림이다.

즉 <소과응시> 속의 장면 설정은 《평생도》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만약 이 《평생도》의 주인공이 <소과응시>에서 처럼 부정행위를 자행 했다면, 그러한 부끄러운 모습을 평생도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과응시>를 《평생도》의 한 장면으로 그린 이유는 단 하나다.

즉 부정행위가 난무하는 소과 시험장에서《평생도》의 주인공은 정당하게 시험에 임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시험 장면을 떠올려 그리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평생도》에는 각 장면마다 반드시 주인공의 모습이 예외없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소과응시> 속에도 주인공의 모습이 분명 그려져 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응시자들 가운데 가장 오른펴 위쪽에 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그는 이미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한 듯

 여유롭게 앉아그 누구와도 결탁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소과응시>는 과거 시험장의 실제 모습을 담으면서도 풍자적인

재구성이 이루어진 그림으로 보는 게 타당하리라.








<소과응시(小科應時)> (부분)


과거 시험장의 풍경은 시험의 종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정해진 인원만이 치르는 소과의 2차 시험은 응시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하여 앉아 시험을 보았을 것이며, <소과응시>의 장면과 같은 부정행위는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무질서하고 부정행위가 만연하는 행태로 치러진 것은 아마도 소과의 1차 시험, 그것도 지방에서 치러진 경우일 터이다.


출세의 사다리라고 하는 과거 시험, 《평생도》의 주인공은 당당하게 이 사다리에 올랐다.

<소과응시>에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삼일유가(三日遊街)>이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즉시 사흘 동안 가두행진을 하며

합격의 영광을 알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즉 당당하게 실력을 발휘한 합격자에게 더 큰 영광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소과응시>가 보여 주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소과응시>는 《평생도》속의 과거 시험

장면은 합격을 기원하는 그림이기보다 출세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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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영 著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옛 그림을 보면서...


오로지 역사의 씨줄과 안목(眼目)의 날줄이 지혜롭게 어우러지는 지경이어야

 작은 심미안(審美眼) 이나마 얻을 수 있다는 사실만 절감할 뿐.






Da Capo - Adam Zap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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