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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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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제작된 고지도 속의 독도 서양에서 제작된 고지도 속의 독도     조선왕국도 프랑스 / J.B. d'Anville / 1737년 / 36.6×53.7cm / 역사박물관 소장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인 당빌이 1737년에 제작한 서양 최초의 한국전도이다. 중국의 실측지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바탕으로 제작하였고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제작되는 한국지도의 모델이 되었으며 19세기까지 영향을 미친 지도이다. 울릉도를 'Fchian-chan-tao'로 적었는데 이는 울릉도(鬱陵島)를 울릉도(菀陵島)로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로 잘못 읽고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레지의 조선왕국도프랑스 / Jean-Baptiste Regis / 18세기 초 / 프랑스국립도서관 ..
일본이 제작한 고지도 속의 독도 일본에서 제작된 고지도 속의 독도     조선지도朝鮮地圖일본 / 가와카미 히사요시(川上久良) / 17세기 / 34×114cm / 가고시마 현립도서관 소장 1장으로 된 채색 필사본 전국도이다.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현재 가고시마현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조선 전기형 지도를 저본으로 제작하였을 것인데 하천은 잘 표시되었지만 산맥은 없으며 유명한 산만 개별적으로 그렸다.각 군현을 표시하고 일본으로 병기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진격로를 붉은색으로 표시하였다. 우산도(독도)를 울릉도 서쪽에 표기하여 두 섬이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조선경도일본대판서국해변항로지도朝鮮京都日本大版西國海邊航路之圖일본 / 오아키라 가타오카 / 1748년 / 64.5×49cm / 독도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의 서울과 ..
한국 고지도 속의 독도 2 한국 고지도 속의 독도 (2편)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 『요도瑤圖』한국 / 작자미상 / 1839년경 / 20.5×31.5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조선 후기에 민간에게 많이 보급되었던 13장으로 구성된 목판본 지도책을 필사하여 채색하였다.동람도식인 「동국팔도대총도」에서는 울릉도를 그렸고 그 하단에 우산도(독도)를 표기하였다.       대조선국전도大朝鮮國全圖  접역지도『鰈域地圖』한국 / 작자미상 / 19세기 중반 / 38.0×29.0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대조선국전도, 한양경성도, 경성부근지도와 8도도를 합쳐 11장으로 구성된 목판본 지도책이다.바다가 파도무늬로 되어 있고 산맥과 하천이 잘 표시되어 있는데 도로망은 없다. 울릉도를 표시하고 그 동쪽으로 우산도(독도)를 표시하여 두 섬이..
한국 고지도 속의 독도 1 한국 고지도 속의 독도 (1편)    독도가 우리네 땅이라는 사실은 고난의 역사를 겪어낸 한민족에게는 불변의 진리이자 천리(天理).과연 독도가 언제부터 우리의 영토가 되었으며, 고려나 조선에서는 어떻게 관리되었으며 조선의 공도정책은...?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어떤 활동을 했으며 19세기 이후 독도는 어떻게 관리되었으며,칙령 제41호의 내용은 무엇이며 19세기 이규원이 울릉도에 파견되어 조사한 내용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독도 편입고시는 왜 불법이며, 2차 대전 후,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명확히 매듭짓지 않은 까닭은...? 방대한 내용이 수록된 한 권의 책을 곱씹어가며  몇 차례에 걸쳐 이 자리에 옮겨보기로 한다.       천하여지도 모회증보본 天下..
중용에 바탕을 둔 선비의 역사 15세기는 사화의 시대였다.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선비들이 연이어 거꾸러진 것. 물론 사화에 희생된 선비 모두가 급진적 세력은 아니었지만 정암 조광조를 비롯, 상당수 선비들은 성리학의 이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다 목숨을 내 놓은 게 분명했다. 초야로 물러난 그들은 본질적인 것, 즉 깊은 철학적 사유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킬 동력을 찾는다. 그러자니 『중용』에 대한 천착은 필수였을 터. 얼마 후 형이상학의 세계가 그들 앞에 활짝 펼쳐진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형이상학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봇물을 이루었던 것이다. 선비들은 『중용』 제1장에 언급된 '천명天命'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조선 초기에는 통치질서에 집중하느라 아직 형이상학이 크게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 허나 시대가 달라진 ..
정약용의 친시親試 답안 앞서 "정조와 중용" 편에서 언급 했듯이 정조는 당대 재사들 모두가 성리학에 정통하기를 바랐다. 1781년(정조 5)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138인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선발했다. 그 명칭을 '초계'라 한 것은 의정부의 추천을 거쳐 선발했기 때문. 왕은 37세 이하의 젊은 신하들을 선발하여 성리학을 연구하게 한것이다. 과강課講이라 하여 한 달에 두 차례씩 경전을 외우고 풀이하도록 했고, 과제課製라는 명목으로 매달 초하루마다 친시親試를 보았다. 임금이 창덕궁 희정당에 나와서 초계문신들이 논술을 작성하는 광경을 주관한 것. 장차 국가의 동량棟梁, 즉 정승 판서로 성장할 신하들의 성리학적 이념 무장을 촉구한 것이다. 허나 이 초계문신 제도를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다. 노론의 영수 김종수 같은 이는 정조가 거만하..
정조와 중용中庸 자사 공급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편찬한 인물.       첫 장에 나오는 선언적 명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정조 어진 탁월한 학자이자 수완 좋은 정치가였으며, 각종 예술 등 다방면에 출중했던 정조에게도 난제가 많았다.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웠던 대목은 천주교(서학)가 성행하는 것이었다. 서양 상선의 서남해안 출몰로 양인들의 물리적 위력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과 맞물린 시점이었다. 사실 천주교 문제는 1780년대 말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이에 대한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 정조의 선택은 성리학적 이념의 강화로 가닥을 잡았다. 강도 높은 과강課講과 과제課製, 즉 경전 강의와논술 시험을 통해 초계문신들을 성리학적 이념의 전사로 다잡고자 했던 것..
한국 재즈 음반사 2 Brownskin Woman / The Joey Gilmore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