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정조와 중용" 편에서 언급 했듯이 정조는 당대 재사들 모두가 성리학에 정통하기를 바랐다.
1781년(정조 5)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138인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선발했다. 그 명칭을 '초계'라 한 것은
의정부의 추천을 거쳐 선발했기 때문. 왕은 37세 이하의 젊은 신하들을 선발하여 성리학을 연구하게 한것이다.
과강課講이라 하여 한 달에 두 차례씩 경전을 외우고 풀이하도록 했고, 과제課製라는 명목으로 매달 초하루마다
친시親試를 보았다. 임금이 창덕궁 희정당에 나와서 초계문신들이 논술을 작성하는 광경을 주관한 것.
장차 국가의 동량棟梁, 즉 정승 판서로 성장할 신하들의 성리학적 이념 무장을 촉구한 것이다.
허나 이 초계문신 제도를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다. 노론의 영수 김종수 같은 이는
정조가 거만하여 스스로 성인 행세를 하며 신하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진사시進士試 부터 주목을 받았던 정약용 조차 불만이 적지 않았던 듯.
이미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마치 유생처럼 다루며 '이 책을 외워라', 저 구절의 뜻을 말해보라' 하는
요구가 끊임 없었던 데다, 작은 실수라도 할 양이면 노골적인 질책과 비판이 날아들었다고 하니
비록 앞날의 출세는 보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초계문신 노릇이 몹시 고달팠던 모양.
1790년(정조 14) 정약용이 초계문신으로 작성한 친시 시권詩卷(시험답안지)가
『다산시문집』(권8)에「중용책中庸策」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당시로선 최고 난이도의 문제에다,
당대 최고의 수재가 작성한 답안지였던 셈. 당시 약용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는 한 해 전인 1789년, 식년시式年試(정규시험)에서 갑과甲科 아원亞元을 차지한 바 있었다.
60명을 뽑는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던 것. 여기서 당시 문제지와 답안지를 정밀하게
분석해보면 『중용中庸』에 관한 당시 조정의 태도와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연히 정약용의 학문적 경향도 어느 정도 드러날 터이다.
정조라는 인물은 모두 다 알다시피 최고 학식의 소유자였던 데다 성품 또한 매우 꼼꼼했다.
당연히 시험 문제도 직접 검토했을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 시험 출제 경향을 분석해 보면
당시 조정의 기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답안을 작성할 때 시험 문제를 크게 6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의 특징을 묻는 1번 문제는 세부 질문이 따로 없으나, 나머지 5개 문제는 여러 개의 세부 질문으로 나뉘었다.
2번 문제는 '천명天命'을 다룬 것인데 5개의 작은 질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천인합일'과 '중용'을 묻는 3번 문제는
6개의 작은 질문으로 구획되었다. 4번 문제는 『중용』전편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개념의 정의를 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