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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중용에 바탕을 둔 선비의 역사

 

15세기는 사화의 시대였다.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선비들이 연이어 거꾸러진 것.

물론 사화에 희생된 선비 모두가 급진적 세력은 아니었지만 정암 조광조를 비롯, 상당수 선비들은

성리학의 이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다 목숨을 내 놓은 게 분명했다.

 

초야로 물러난 그들은 본질적인 것, 즉 깊은 철학적 사유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킬 동력을 찾는다.

그러자니 『중용』에 대한 천착은 필수였을 터. 얼마 후 형이상학의 세계가 그들 앞에 활짝 펼쳐진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형이상학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봇물을 이루었던 것이다.

 

선비들은 『중용』 제1장에 언급된 '천명天命'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조선 초기에는 통치질서에 집중하느라 아직 형이상학이 크게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 허나 시대가 달라진 만큼

성리학 특유의 우주관과 세계관, 심성론 등에 관한 연구에 매달렸고 그것의 바탕은 『중용』이었다.

 

16세기 조선에서의 형이상학적 연구를 시작한 이들은 정지운, 김인후, 이황, 서경덕, 노수신 등이었다.

'천명天命'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결실은 정지운鄭之雲이 작성한 「천명도설天命圖說」(1543)이었다.

그는 이것을 들고 전라도 순창에 머물던 아우 김인후를 찾아간다(1549).

 

 

 

 

 

 

하서 김인후 초상

 

 

당시 하서는 성리학적 우주관이 집약된 「태극도설」에 있어 조선의 최고봉이었다.

북송의 주돈이가 저술한「태극도설」은  불과 249자였으나, 우주의 생성과 인륜의 근원을 풀어낸 것이었다.

무극이 태극이 되고, 이로부터 음양과 오행이 생겨나 그들의 조합으로 만물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다.

16세기 전반, 조선에는 그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선비가 하서 김인후 말고는 거의 없었던 실정.

때문에 정지운은 천리를 마다 않고 하서를 찾아갔던 것이다.

 

하서는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대한 소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형기形氣(사람의 마음)가 사사롭기 때문에 질곡桎梏(몹시 속박함)이 생겨서"

『하서전집』(권3, 186쪽) 우주만물의 운동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째, 우리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정성을 다해 본성대로 살고자 노력한다면,

결국은 천명의 기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사사로운 마음이 세상 문제의 근원인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천명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서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이기화생理氣化生'으로 보았다.

 달리 말해 천명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여한다는 입장이었다.

 

퇴계의 주리론主理論과 달리 그는 理뿐만 아니라 氣도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파한 것이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상호 유기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천도가 일방적으로 인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의 본질은 다름 아닌 『중용』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악'을 설명할 때도

'선'은 화和(가장 적절함)요, '악'은 과불급過不及이라 결론지었다.

 

선비들은 『중용』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토대로 형이상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다.

시야는 넓어지고 철학적 사고는 한층 고매해졌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담론이랄 수도 있지만,

그들 덕분에 성리학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하나의 독특한 사유체계로 완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나 한 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중용』에서의 주장은 선비들에게 있어 희망을 불씨였다.

추악한 정치 사회적 현실 앞에서도 결코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음은 크나큰 용기를 주었을 게 너무도 분명.

그리하여 선비들은 형이상학과 결합된 수양론修養論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人心道心說인심도심설'에 이른다.

 

 

 

 

 

 

 

퇴계 이황 영정

 

주리론의 거장인 이황은 천리야말로

사물의 존망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인심도심설의 대가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였다.

퇴계는 "인심이 칠정七情(다양한 감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인의예지仁義禮智)이 된다"라고 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仁], 부끄러워하는 마음[義], 사양하는 마음[禮],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智].

사단은 인간의 도심道心이다. 사단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적인 인의예지의 단서가 된다.

그에 비해 칠정은 희로애락 등 다양한 감정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황이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수정 · 개작한 「천명도

 

 

 

 

퇴계는 인심을 인욕人慾이라고 단정해, 칠정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반면에 도심은 인의예지로 표현되는 착한 마음이라 이해했다. 하지만 율곡의 견해는 달랐다.

1582년, 이이는 「인심도심도설」을 지어 선조에게 바친다. 그 핵심인 즉,

 

나쁜 기질도 고칠 수 있다는 것, 즉 어떤 경우라도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었다.

퇴계와 달리 칠정을 인심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망라한 것이었다.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에 이이의 견해가 잘 드러난다. 처음에 도심이었다 해도

태만하면 인심으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율곡 초상과 「인심도심도설」

 

 

 

 

『중용』서문에서 주희는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도심은 하늘이 준 본성이므로 착하지만, 인심은 삶의 조건에 좌우된다고 했다. 주희는 맹자의

성선설을 계승하면서, 그런데 왜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는지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이는 주희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의리를 존중하면 누구나 도심을 얻게 되고,

자신을 욕망의 흐름에 맡기면 인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경계했다.


 

16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토론 주제 중에 이기론理氣論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담론의 열기는 애시당초 「천명도서」에서 불씨를 제공했다 해야겠다.

 

1635년(인조 13) 당시 30세의 동춘당 송준길이  자신의 스승 사계 김장생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황과 이이의 이기설理氣說을 논평한 대목이 나온다. 그 글이 영남의 사림을 자극해 많은 비판이 일어난다.

송준길은 외사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재천명 한다.

 

 

퇴계 선생은 사단 칠정을 논하면서,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요[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하였네. 이 주장을 율곡 선생이 상세히 고찰한 결과,

'펼치는 것은 기氣요, 펼치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 기가 아니면 펼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쳘치게 할 수 없다.

하필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는 칠정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도 그와 같다'라고 결론지었네.

선사先師(김장생)께서는 율곡의 주장을 따랐네. 선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할아버지(정경세)도 그러하였지.

일찍이 내가 외할아버님께 '퇴계와 율곡의 이기설이 서로 다릅니다. 누구의 주장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여쭈었네.

외할아버지께서는 '율곡의 설이 옳은 것 같다. 내가 체험한 것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사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것은 존경심이 나타난 것인데, 그 숙연함은 기가 아니냐'라고 하셨다네. 그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도네.

그분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을 존경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는가. 송나라의 정자程子(정씨 형제)는

맹자를 존경했으나, 성性에 관한 맹자의 주장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하였네. 그래서 정자는 기질설氣質說을 주장 하였네.

주자가 정자를 존경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나, 경전을 해석할 때 정자의 주장을 부정한 곳이 실로 많았네.

(송준길 『동춘당 속집』제6권, 「동춘당 연보1)」

 

 

전국의 선비들이 자신의 독창적 주장을 내놓기보다는 대학자 이황과 이이의 편으로 양분되어

서인은 이이를 동인은 이황을 추종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는 형이상학의 전성시대였다.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등장하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부여한 것이다.

그 절정을 체험한 것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동년배들이었다. 그들은 거유들로부터 형이상학적 사유를

직접 배웠고, 스스로도 형이상학적 논의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한 세기 뒤, 17세기 초반의 선비들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는 임란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깊어가는 당쟁의 폐해로 어지러울대로 어지러운 정국이었다.

그즈음 선비들에게 있어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파구로 선택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예학[禮學].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로 태두는 사계로 보는 게 일반적인 시선.

 

 

 

 

 

 

 

사계 김장생 영정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이어받은 큰선비 김상생은 좀 더 실천적 학문으로서 예학을 제창한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예학이 크게 위세를 떨친다. 그렇다고 예학이라는 학문이 사계를 비롯한 기호畿湖 선비들의전유물은 아니었다. 가령 한강寒岡 정구의 전통을 이은 유장원柳長源등이 이름을 떨쳤다. 예학의 전성시대는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학문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여,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난다. 조정 대신들이 왕실의 상장례喪葬禮를 둘러싸고 극심한 정치적 투쟁을 벌인 것이다.  본디 예법이란 하나같이 번거롭고 적잖은 비용이 들어 간다.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예학에 힘쓴다 한들 성리학의 이상세계는 공리공론에 그칠 게 뻔했다.

 

17~18세기 들어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끔직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나타난다.

'사문'은 유교적 질서요,이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난적'으로 규정한 것. 그 시비의 전말에는 학문적 견해 차이 못지 않게

정치적 이해관계가 마치 복마전처럼 얽혀 있었다. 정치 현안을 둘러싸고 기득권층과 심한 갈등을 보인 선비만이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주희의 경전 해석을 비판했다거나 새로운 해석의 시도만으로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힌 게 아니다.

 

1637년(인조 15), 서른 살의 젊은 선비 우암 송시열이 속리산에서 윤휴를 만난다.

병자호란의 폭풍이 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뒤라, 젊은 지식인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젊은 선비가 있노라는 소문에 반신반의 하며 윤휴를 찾아간 송시열은 밤을 세우며 학문을 토론한다.

문제는 1644년(인조 22)에 시작되었다. 약관 28세의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저술했는데,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독자적 관점에서 장과 절의 순서를 바꾸었고, 주희가 채택한 주석도 자신의 견해대로 바꾸거나 빼버린 것.

 

 

 

 

 

 

윤휴와 송시열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용』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기에 이른다.

먼저 손을 쓴 것은 송시열 측이었다. 그들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약을 내렸다. 윤휴 사후 9년 만에

송시열도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기에 이른다. 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이 복수의 칼날을 번뜩인 것.

 

 

 

 

 

 

 

윤증 초상

우암은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증과도 결별한다.

윤휴와의 관계 악화로 송시열은 친구와 제자를 잃는다. 윤휴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친구 윤선거와 갈라섰고,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증과도 결별했다.1683년(숙종 9)의 일이었다. 그때 송시열은 회덕에 살았고,

 윤씨 부자는 이성尼城에 집이 있었다. 그리하여 '화니시비懷尼是非'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였으며, 결국 당시

거대 당파인 서인西人이 두 쪽으로 갈라질 정도였으니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셈이다.

 

 

 

 

 

 

서계 박세당 초상

 

 

개성이 강했던 큰선비 박세당도 송시열과 충돌했고,

결국 '이단'으로 몰려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형을 받았다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곧 풀려나기는 했으나

돌아온지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1703) 또 한명의 출중한 선비가 사문난적의 시비에 휘말려 고난을 겪다가 세상을 뜬다.

 

숙종의 능수능란한 치세를 자세히 살피자면 숙종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 모두

『중용』에 집약된 성리학적 가치관의 포로였음이 명백하다. 물론 송시열은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왕과 다른 대신들도 송시열과 다르지 않았다. 추상적 이념에 사로잡혀 자신과 타인의 언행을

극히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검열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의 아들 영조는 한 가지 점에서 매우 현명했다. 그는 아버지 숙종의 정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안팎에 분란만 초래하고 당쟁을 고질화했다는 점을 정확히 꿰뚫었던 것이다. 군자와 소인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당쟁은

 즉각 중단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조의 지론이었다. 정재두가 천수를 누린 것도 영조 덕분이었다. 사문난적의 시비가

한 세대 만에 시들해진 것도 오로지 영조의 현명함 때문이었다는 사실.

 

 

 

 

 

 

영조 어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8세기를 빛낸 영조와 정조는 스승을 자임한 군주였다.

두 사람은 국왕인 동시에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수준의 성리학자였다.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하여

당파를 초월한 군주이자 스승이 되고자 했으나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영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치세동안 대체로 조정이 안정되었고 민생 역시 다소 나아졌다. 그러나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파탄나면서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 일어났다. 결국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일당집권을 보장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기대와는 다른 부작용도 컷던 셈이다.

 

 

 

 

 

 

영조가 희정당에 나가 친정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

 

 

영조의 손자로 왕위에 오른 정조의 조정에는 훌륭한 선비들이 많았다.

체제공, 정약용, 이가환, 김종수, 심환지, 박지원, 이덕무, 홍대용, 김조순 등의 선비가 가득했으나 정조의 시름은 깊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왕은 과거시험장에서 유생들에게 자신의 고뇌를 담담한 어조로 고백하고 있다.

 

 

어찌하여 인심은 나날이 갈라지며 현안에 대한 주장은 더더욱 괴리되는지 모르겠다.

신하들이 동서남북으로 제각기 당파를 만들어 이편과 저편으로 갈려 자기 당의 이익만 추구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각 당파의 주장을 살펴보면 하나도 공평하지 못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도

사람답지 못할 것이다. 내가 천하의 중심에 서서 사방의 백성들 바로잡으로 하지마는 실제로는 뒷걸음질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꼴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임금과 신하 모두 中道를 얻어서, 하는 일마다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이 될까. 어찌하면 정직하고 공정한 다스림이 가능할까. 진실로 『중용』에서 말한 바, 즉 中과 和를

이루어 천지만물을 성장하게 하는 공적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너희 유생은 제각기 대책을 작성하되

하나도 숨김없이마음속에 있는 대로 다 쓰라. 내가 친히 다 읽어보겠노라.

 

 

알다시피 조선에는 모두 27명의 국왕이 있었다. 그중 누구도 정조처럼 187권(100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초야에 묻혀 일평생 학문에 몰두한 대학자라도 이처럼 많은 저술을 남긴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정조도 '당쟁' 두 글자 앞에서는 무력했던 것. 중용의 근본을 헤아리며 과거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으나

당파의 이익에 목숨을 건 선비들에게서 무슨 대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창덕궁 희정당

 

 

이곳에서 정조는 이직보와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조선 제일의 학자군주였던 정조는 초야의 큰 선비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토론을 벌였다.

허나 정조의 대화 상대가 될 만한 선비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의 너르고 깊은 공부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중용』을 통해 '시중'의 '군사'가 되기를 힘쓰면 힘쓸수록 그는 보수적인 성리학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셈이었다.

설령 심성론이나 이기설 같은 형이상학을 멀리한다 해도 여전히 성인군자의 도덕론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후세 사가들은 이 대목에서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조금만 더 밖으로 시선을 돌렸더라면 하는 아쉬움 말이다.

일진일퇴를 뛰어넘는 전환과 비약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절실한 때이다.

 

인용서적: 백승종 著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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