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737) 썸네일형 리스트형 그림이 된 문학, 문학이 된 그림 (1) ※ 아래 내용은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 를 간추린 것이다. 옛 그림 속에 깃든 문학성은 그림을 독해하는 기본 문법이었고, 문자 향유의 특권을 누렸던 문사들의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건드린 장치이자, 그림 이해의 핵심 코드였다. 이것은 화면 위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면서 감상자를 끌어당겼던 '매력' 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건져 내면 그림에 무엇이 남을까 싶은 문학성이, 그러나 오히려, 역사의 격변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 옛 그림을 즐기지 못하도록 밀어 내는 힘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문학성, 즉 문학적 매력이라면, 이것은 모순된 상황이다. 현대인들은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하면 긴 스토리에 문제의식을 담아낸 장편소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그들에게 문학의 최고.. 신비로운 영혼의 그림들 (2) 성과 육체 도록 묵시론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그림 연작 혼동과 파괴 도록 1944 부활절 1150년경.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중앙문 팀파눔 취리히 C. G. 융 연구소의 그림 아카이브 C. G. 융은 당대 중요한 심리학자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기 내면의 발전이라는 범위 내에서 그림과 조각품 들을 만들었다. 2008년 이후로 대중이 접할 수 있게 된 ≪레드북≫은 그의 그림과 관련된 연상 및 생각에 대한 인상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미 1917년부터 그의 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꿈과 환상 에 대한 그림을 그릴 것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했다. 그로써 그들이 자신의 무의식의 입구를 열어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상징적인 소재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략.. 신비로운 영혼의 그림들 (1) C. G. 융이 분석심리학적 치료를 위해 가시화한 내면의 이미지들 Das Buch der Bilder / 내면의 그림 취리히 C. G. 융 연구소의 그림 아카이브에는 지금까지 소수의 사람만 열람할 수 있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 1917년부터 1955년 무렵까지 C. G. 융의 환자들이 그린 그림과 스케치를 포함한 약 4500점의 작품들이다. 융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꿈과 상상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도록 격려했고, 가시화한 내면의 이미지를 치료에 응용했다.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C. G. 융 연구소는 이 아카이브를 공개하고, 전체 그림들 중 매우 특별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예술적 표현이 돋보니는 작품들을 소개했다. ※ 여기 소개하는 모든 내용은 루트 암만 / 베레나 카스트 / 잉그리트 리델 공저共著, 박경.. 선인들의 유람록 <산향제山響齋> 강세황姜世晃, 중 1757년경,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은 45세 되던 1757년 7월에 송도를 여행하며 16첩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화담을 그린 것으로,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서재가 있던 곳이다. 그림 위의 제사題詞에서는 화담 가에 있는 조대釣臺가 곧 화담 선생이 낚시하면서 유유자적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강세황姜世晃, 「산향기山響記」 나는 성격상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지만, 이른 시기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한 번도 산에 올라 관람하고 싶은 바람을 실천한 적이 없고, 다만 그림 그리는 일에 흥을 부쳐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고 있을 다름이다. 하지만 기이한 흥취와 아득한 상상이 어찌 참 산수를 즐기는 일만 하겠는가! 이것은 정말로 나.. 선인들의 유람록 <첨화령> 도판 /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19세기 초기, 50×40.8cm, 개인 소장. 퇴계 이황은 「글 읽기는 산놀이와 같다讀書如遊山」라는 시를 남겼다.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 읽기가 산 놀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 함은 원래 아래에서 비롯되나니 淺深得處摠由渠 얻음이 깊으냐 얕으냐도 모두 거기에 달렸도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묘한 이치를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가다가 근원에 이르러 비로서 사물의 시초를 깨닫네. 絶頂高尋免公等 절정을 높이 찾으려고 그대들처럼 힘썼다만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해서 중도에 그만두다니 내가 부끄럽구려. 이황은 절정에 올라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곧 '아래' 에서 이미 결정된.. 선인들의 유람록 <주왕산> 고람古藍전기田琦 19세기 전반, 87.3×3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전기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익혀 추사파 중에서도 가장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의 경지를 구사한 화가로 평가된다.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림의 제시에는 "청산은 또렷하고 나무는 겹겹인데 절은 구름 깊은 봉 몇 번째 봉우리에 있는가. 민가 즐비한 서산 아래서, 석양의 강설講設 알리는 종소리를 듣네" 라고 하였다. 고요하고도 담백한 경지를 그림과 시로 드러낸 것이다. 장현광張顯光 「주왕산록周王山錄」 산의 높이가 대단하지도 않은데, 산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이 산에 예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바위 골짝이 기이하다는 것은 내가 들은지 오래였으므로, 한 번 구경하여 먼지 덮인 눈을 씻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 한참 되었.. 선인들의 유람록 <비봉산> 필자 미상, , 17세기, 31.4× 25.5cm, 개인 소장. 니금으로 그린 화려한 산수도이다. 괴송과 기암을 올려다보는 고사高士를 그린 방식이 다소 상투적이지만, 괴송과 기암 자체는 매우 웅혼하다. 허훈許薰, 「수정사 유람기遊水淨寺記」 진성眞城(진보眞普)을 마주하여 우뚝 솟은 것이 구봉대舊烽臺(남각산봉수南角山烽燧)이고, 그 북쪽 지맥이 비봉산이다. 그 남쪽 기슭에 수정사가 있다. 절 앞 계곡에서는 문석文石(무늬가 있는 수석)이 많이 난다. 내가 세들어 사는 집과 겨우 40여 리 떨어져 있다. 을미년(1893) 칠석날, 나는 이명숙 李明叔 · 박경순朴敬淳 · 이치첨李穉瞻 · 이순칠李舜七 등과 가서 보았다. 각산에 이르러 권화여權華汝를 방문하였더니, 그는 기꺼이 길 안내를 맡기로 하였다. 겨우 1리를 가.. 선인들의 유람록 <덕유산> 임훈林薰, 「덕유산 향적봉 등정기登德裕山香積峯記」 정축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개가 잔뜩 끼어 산을 묻었고, 비 올 기세가 일어났으므로, 산에 올라 구경할 방도가 없었다. 성통性通 등은 비가 오기 전에 곧바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여러 날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봉우리 위에 오르려는 것이 내 뜻이네." 저녁 무렵에 구름의 음울한 기운이 흩어져 없어지고, 하늘의 햇빛이 먹장구름을 뚫고 새어 나왔다. 나는 내일 날이 완전히 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성통은 말하였다. "산에서는 날이 늘 어둡습니다. 이런 정도면 족합니다. 내일 구름과 안개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침내 신발을 챙겨서 올라갔다. 혜웅惠雄에게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였다. 2리쯤 가서 산등성이에 이르렀고,..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9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