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 를 간추린 것이다.
옛 그림 속에 깃든 문학성은 그림을 독해하는 기본 문법이었고, 문자 향유의 특권을 누렸던 문사들의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건드린 장치이자, 그림 이해의 핵심 코드였다. 이것은 화면 위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면서 감상자를 끌어당겼던 '매력' 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건져 내면 그림에 무엇이 남을까 싶은
문학성이, 그러나 오히려, 역사의 격변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 옛 그림을 즐기지 못하도록 밀어
내는 힘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문학성, 즉 문학적 매력이라면, 이것은 모순된 상황이다.
현대인들은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하면 긴 스토리에 문제의식을 담아낸 장편소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그들에게 문학의 최고봉은 응당 '시詩' 였다. 문인이라면 마땅히 시 한 자字를
제대로 넣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야 했다. 한 글자의 적중에 숨통이 끊어지고, 한 글자의 기력에
귀신이 도망갔다는 전설이 믿어지던 시절이 믿어지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절의 문인들마저도 아! 하고 감복을 마지않으며 두고두고 음미하였던 명구名句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림으로도 거듭거듭 그려진 명구라면, 천년 문사들의 가슴을 건드리고
그들의 머리를 두들겨온 주옥같은 걸작품이다.
최북崔北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종이에 수묵담채. 31×36.1cm, 개인 소장
송宋의 대문장가 소식蘇軾의 명구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라는 여덟 자를 큼지막하게 적었다.
"빈 산에 사람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문자의 경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최북의 심중이 묵직하게 실렸다.
사람이 없어 '빈' 산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고 산이 비겠는가. 여기서의 '빌 空'은 문자 너머의 의미를 낳고 있다.
소식蘇軾이 당나라 말의 화가 장현의 그림<아라한상>을 구하게 되었다.
소식은 몹시 기뻐하며 그림을 새로 표구하고, 그림 속 열여덟 나한의 모습을 차례로 묘사한 게송 <십팔대아라한송>을
지었다. 소식의 나한 묘사는 이후의 나한도 제작에 활용되어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지만, 문학사적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문사들은 이를 '동파東坡(소식의 호)의 나한찬羅漢贊' 이라 줄여 불렀다. 나한을 한 분씩 묘사하고 칭송한
18수의 나한찬 가운데 한 구절 '공산무인 수류화개' 는 이 작품의 압권으로 통한다.
아홉 번째 아라한님께서
식사를 마치신 후 바리때를 엎어 놓으시고 염주를 헤아리며 앉아서 염불을 하시네.
그 아래 한 동자 불붙여 차茶를 달이고, 또 한 동자 연못에 물통 담궈 물 담고 있네.
찬송하노라. 식사 이미 마쳤으니 바리때 엎고 앉으셨네.
동자가 차 봉양하려고 대롱에 바람 불어 불 붙이네.
내가 불사佛事를 짓노니, 깊고도 미묘하구나!
빈 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네.
- 소식, <십팔대아라한송> 중 제 아홉 번째 아라한 -
'空山無人 水流花開' 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한 중국 문인들의 논의는 무궁하기만 하다.
대체로 깨달음 후에 다시 보는 산수, 즉 '나我' 라는 인격과 외물外物과의 경게가 사라진 물아합일物我蛤一의
경지를 뜻한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나의 생각과 욕심으로 비롯하는 모든 인과因果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이며, 그 속에 꽃도 여전히 피고 진다.
이 구절은 송나라의 선승들에게 운치 있는 깨달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산' 혹은 '공산무인' 이란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나라에서 시어로 쓰이던 말인데
소식이 이를 활용하였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당의 시인 위응물韋應物이 산속에 사는 벗을 찾으며
'빈 산空山'에서 벗을 찾지 못한 상황을 시로 읊었다. 소식이 위응물의 이 시에 차운을 했다.
소식은 '---적迹' 의 운韻을 정확히 맞추면서 그 내용이 연결되도록 했다.
낙엽이 빈 산空山에 가득하니, 어디서 간 자취를 찾을 것인가.
落葉滿空山,何處尋行跡.
암자 안의 사람에게 물으니,
"빈 곳空을 누비시니 본래 자취가 없답니다."
寄語庵中人 , 飛空本無迹
후대의 평가는 소식이 위응물의 공空 자를 묘하게 운용하였다고 한다. 이를 나한찬의 게송에 활용하여
'공산무인 수류화개' 라는 천하의 명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북송의 학자 허의의 책에 실려 전한다.
중국의 선승들은 이 두 시구를 순서대로 접수했다. 위응물의 '낙엽만공산 하처심행적' 은 선의 제1경으로 삼고,
소식의 '무인공산 수류화개'를 제2경으로 삼았다. '공空' 자의 쓰임이 선가의 핵심 철학과 맞닿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로 그칠 일이 아니다. 사실, '무인공산 수류화개'의 유래에 대한 탐색은 명구의 창작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깨부순다. 당唐의 시를 모은 <전당시>와 당의 글을 모은 <전당문> 등을 검색하면
유사한 구절들이 나온다. 다음은 당나라 시인 유건의 구절이다.
빈 골짝 사람이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이 피네.
空谷無人, 水流花開
소식이 이를 몰랐을까? 곡谷(골짝)만 산山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당나라 장적의 시에는
"눈 쌓여 평편한 언덕이 없고, 산은 비어 길에서 사람이 없네" 라는 구절이 나오니, '공산' '공산무인' '공곡무인' 도
이미 있었다. '谷' 과 '山' 의 교체도 소식의 창작이 아니란 말이다. 이로 보건대, 위의 단어들은 당나라 때 만들어져
송나라 문인들 귀에 익숙한 시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唐詩의 운치 있는 풍경이 송시宋詩에서
선종禪宗의 경지로 받아들여져 의미 무궁한 명구로 탄생된 것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문사들은 '공산무인 수류화개' 의 의미를 거듭 논하였고, 운을 붙여 시를 짓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들의 시 작품에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조귀명은 금강산 보덕굴에 들어 철쪽꽃 만발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바위에 이 여덟 자를 보기 좋게 써 넣고 그 아래 설명까지 적어 놓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동파노인이 선리禪理를 깊게 깨달으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로다." 말하자면 동계 조귀명은
산속 바위벽에 '空山' 이라 적어 넣음으로써 지울 수 없는 사람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조선 중기의 이식은 늦은 봄 택당에 홀로 앉아 흥이 나서 막걸리 두어 사발을 들이켰다.
그러자 문득 '동파선생 나한찬'의 '공산무인 수류화개' 가 떠오른다고 흥얼거리며 시를 지어 남겼다.
음주 후의 만족은 아홉 째 아라한님 식후의 포만감과 비슷한 조건이었을 터.
만발한 매화 이미지를 좋아했던 조희룡은 아예 우스겟 소리를 해보기로 마음 먹은 듯,
"공산무인 수류화개라, 이는 동파공이 나한을 찬양한 노래야. 그런데 어이하여 '매개梅開라 하지 않았을꼬?"
우봉 조희룡이 그린 산에는 빈 산에 물 흐르고 '매화' 만 피었다.
'공산무인 수류화개' 이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생각을 비운 무심無心의 경지라는 것을 화가 최북은
그림에 담아 내었다. 그림이란 생각의 구상을 통하여 완성되는 하나의 물질적 매체이며 물질적 결과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무심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최북은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이다.
최북은 자신의 호를 '호생관' 이라 하였다. '호생毫生'(붓에서 나다)이라는 이 말은 원래 명나라의 동기창董其昌이
나한도를 그린 화가에게 한 칭송에서 비롯한다. 동기창은 이 화가에게 '호생관' 이라는 인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화가가 붓으로 그릴 때 보살이 하생하신다" 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말하자면 화가의 붓 끝으로 보살을 탄생시키는
창생創生의 공력에 대한 지극한 예찬이다. 스스로 '호생관' 이라 자호한 최북의 호기와 포부가 느껴진다 해야겠다.
화면 왼편 끝에 흥건한 먹 사이 필선을 대어 흐르는 물水流을 그렸고. 화면 오른편 끝에는 대여섯 묽은 점으로
보일 듯 말 듯 붉은 기운을 찍어내어 꽃이 핀 것花開을 그렸다. 사람이 없는 텅 빈 정자는 빈 산空山임이 분명.
축자적인 이미지에 그치는 그림이라면 유치하기 짝이 없겠지만, 휘둘러 기량을 펼친 이 그림 속에
축자적인 이미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한 화가 최북의 충실한 정성이 가슴에 와 닿는다.
좌) 가도, <심은자불우>
우) 장득만張得萬, <송하문동자도>, 《만고기관萬古奇觀》 중, 종이에 채색,
각 폭 38.0×30.0cm, 18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송하문동자도松下問童子圖는 조선후기 화원화가 장득만이 그렸고,
곁에 적힌 시는 <방도자불우>라는 당나라 시인 가도의 작품이다.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말하길,
"스승께선 약초 캐러 가셨어요. 이 산속에 계신데요, 구름 짙어 어딘지 알 수 없어요."
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
이 시의 제목은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자면, 위에서 소개한
위응물의 공산空山에 송나라 소식이 차운하며 이어 붙였다는 시의 내용과 매우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가도의 이 시는 적은 글자 수와 간결한 시상詩想으로 더욱 맑은 기상을 담아내었다. 마치 부재중을
알려주는 현대의 전화통화 문답인 양 간단하다. 다만 구름을 가리키는 동자의 대답이 너무 느긋할 뿐이다.
이 시가 읊고 있는 것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저 산에 든 시인의 벗, 은자의 참된 은자다움이다.
아무 걱정 없이 저 산에 계시다고 대답하는 동자의 순박한 표정, 은자의 빈집, 그리고 구름 자욱한
먼 산의 풍경이 모두 은자의 은자다움을 뒷받침해주는 정제된 이미지들이다.
송나라의 소식은 가도의 시세계를 통틀어 '말랐다' 고 평가하였다. 그후 명나라의 문인들도 소식의 가도 평가에
동의하였다. 말랐다瘦는 의미의 '수瘦' 자는 가도 시의 병폐로 말해진 것이지만, 중국 문예상 미학적 개념이다.
소식은 고기 먹고 살찐 선비의 속俗됨은 고칠 약이 없다고도 선언하였으니, 그가 말한 '수瘦' 는 군더더기 없는
시작詩作의 극단성을 평한 것이다. 정약용은 가도의 시가 금속이 울리는 듯하면서 곱다고 평가하고,
맛난 음식이나 부귀함을 즐기는 부류와 달라 숭상할 만하다고 하였다.
가도는 본디 승려였는데, 그의 글솜씨를 아깝게 여긴 한유韓愈의 권유로 환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환속해서 과거시험에 도전하였으나 딱하게도 10년 동안 낙방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힘껏 세웠으니, 버석거리는 낙엽 위를 거니는 한 마리 학처럼 마른 몸을 휘청이며 오만하게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짐짓 미친 사람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속했지만, 고행하는 승려처럼 평생을 살았던 가도가 자신을 지키고자
시를 지었기에, 그 시의 세계가 무척이나 맑고 여위었을 것이다. 가도는 시를 지을 때 한 글자 한 글자에 몹시 고민
하였던 시인으로 정평이 난 인물. 승려 시절 "스님이 달빛 비치는 문을 민다僧推月下門" 는 시구를 짓고, '민다推' 를
'두드린다敲' 로 고쳐 보았다가 다시 '두드린다' 를 '민다' 로 고치느라, 밀고 두드리는 흉내까지 내며 정신없이 다니고
있었다. 한유가 이 모습을 보고 가도에게 환속을 권하였고, 세상에서는 이를 가도의 퇴고推敲' 라고 하였다. 오늘날
에도 초고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퇴고' 라 한다. 이 퇴고가 지나치니 시인도, 시도, 마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도의 삶과 그의 시를 우리나라 문인들이 어찌 아끼지 않았겠는가.
고려 시인 이곡은 벗을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였을 때 돌아오며 읊기를
"약을 캐러 가셨다가 돌아오길 잠깐 잊으신 게야" 라고 하며 짐짓 벗을 치켜세웠다.
특히 이 시의 마미작 구절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는 이런 저런맥락에서
후대 문인들이 거듭 활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초기의 서거정이 우리 산천 죽서루에서 "해 저물고 구름 깊어 어딘지 알 수 없는데,
스님은 어디에서 밥을 얻어 오시는고" 라고 읊은 것은 일종의 고전 속 패러디였다
장득만 <송하문동자도>의 세부도
그림을 보자.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묻고 답하는 시 속의 두 인물이 선명하다.
망연히 묻고 선 시인과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동자를 그렸는데, 산을 가르키는 동자의 식지食指가 유난히 길다.
동자가 가리키는 방향의 산은 험한 산봉우리가 넘어질 듯 높고, 구름이 그 사이로 자욱하다.
시가 읊은 모든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누구라도 대뜸 화가의 성실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헌데 그림을 다시 살피자니, 시 작품과 그림 사이의 먼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이 그림은 이 시만 훨씬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 속의 그 무었도 이 그림은 빠뜨린 것이 없고,
산수와 인물의 배치가 적절하여 안정감이 있으며, 주인공인 두 인물이 잘 드러나도록 한 구성법도 좋고, 가벼운
색을 베풀어 살려낸 산뜻한 색채감도 좋다. 단, 시를 읽었을 때의 그 아득함의 운치가
이 그림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애당초, 시를 그림으로 그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움은 오래도록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되어왔다.
우선, 시간의 흐름 속에 드러나는 시간예술 문학을 어떻게 공간에 펼쳐내는 공간예술 그림에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이 시와 그림에도 적용된다. 시인의 질문과 동자의 답으로 진행되다가 구름 자욱한
산을 바라보는 방문객의 망망함으로 끝을 맺는 흐름, 그 시간적 전개에서 드러나는 운치와 소박한
해학을 한 폭의 그림에서 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형상을 묘사한 언어표현이라면
그림이 전하기 좋지만, 언어로만 전달되는 추상의 개념을 그림으로 전하기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구름이 자욱한 풍광은 그림이 전달할 만하겠지만, '어딘지 알 수 없네' 라는 생각을 전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시에서 느껴지는 운치와 정감을 그림으로 담아내고자 한다면
다른 차원의 문제가 다양하게 노정된다.
그림이 시적 수준에 오르기 위한 노력은, 시가 회화적 수준에 오르기 위한 노력과 함께,
'적과의 포옹' 이라고 지적한 중국 학자도 있었다. 이 학자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에서 이 구절을 끌어왔다.
사랑을 하려고 끌어안아도 그것은 적과의 포옹이며 결국은 상대의 숨을 조르는 포옹이란 뜻이다.
시와 회화의 장르적 상호침투를 설명한 기발한 표현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조선후기의 왕실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조선의 왕실에서 제작한 《만고기관萬古奇觀》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이다.
그 내용은 곁에 두고 볼만한 불후의 명시문名詩文을 모은 후 이에 맞게 그림을 그려 만든 것이다.
명시문은 학자들이 뽑았고, 그림은 왕실의 화원들이 몇 폭씩 맡아 그렸다. 나라를 이끌어갈 왕실의 자제들이
올바른 품성과 교양을 갖추어나갈 수 있도록 고전을 익히는 데 있어서, 그림을 곁들여 흥미롭게 접하도록 하자는
일종의 교육용 프로젝트였다는 뜻이다.
이 프로젝트을 위하여 가도의 명시를 맡아 그림으로 옮긴 화가 장득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18세기 전반부 궁전의 어진 등 중요한 그림 제작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화원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대대로 화원을 내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전문 화원으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장득만을 평하길, '설채設彩 분야에서는 최고겠으나,
화격畵格에 있어서 어찌 뛰어나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실상, 가도의 이 시를 그림 중국과 조선의 다른 화가의 작품들도 그 화면 구성이 장득만의 <송하문동자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나무 아래 어른과 한 손을 치켜든 아이가 마주 선 그림이면, <송하문동자>이다.
간혹 배경산수는 생략되기도 한다. 장득만의 이 그림은, 배경산수를 넓게 안배하면서도
산뜻한 채색으로 인물을 부각시켜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며 특징적이다.
강세황, <수석유화>의 글과 그림, 《표옹서화첩》, 종이에 수묵, 각 폭 28.5× 18.0cm, 1787, 일민미술관
수석유화瘦石幽花(여윈 바위 숨은 꽃)
그림 옆에 적어 넣은 육유의 시를 읽고 그림을 들여다볼라치면, 이 시 한 구절을 택해
「수석유화」를 그려낸 표암의 속내에 잔잔한 감회感懷가 일 것이다.
꽃이 미소 지으면 도리어 일이 많고, 돌은 말을 못하니 가장 맘에 든다.
花如解笑還多事 石不能言最可人
그림 속 돌은 오래 묵은 뼈다귀처럼 바짝 야위었고, 가운데로 커다란 구멍까지 휑하니 뚫려 있다.
야윈 꼴로 치자면, 돌 틈에 끼어 자란 조그만 꽃도 마찬가지다.
야윈 바위의 가는 그늘에도 몸이 모두 가려질 듯, 가는 꽃대로 겨우 피워낸 꽃이다.
돌은 침묵을 지키느라 야윌대로 야위었고, 꽃은 미소를 감추느라 돌 틈에 꼭꼭 숨어 있다.
꽃의 문제와 돌의 미덕을 대비시키는 위 시의 구절은, 중국 남송의 시인 육유의
「한가롭게 머물며 나에 대해 읊노라」에 출처를 둔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산노인이라 부르며 본래 게으른 양 하리니,
얼키설키 산 밖의 세상일들에 어찌 몸을 연루시킬꼬.
꽃이 미소 지으면 도리어 일이 많고,
돌은 말을 못하니 가장 맘에 든다.
말끔하게 치운 밝은 창에 깨끗한 책상 마주하고,
한가롭게 자라 빽빽한 대숲에 검은 두건 쓰고 서리,
남은 세월 나 스스로 청천관을 가졌으니,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더라도 가난하지 않다네.
自許山翁嬾是眞, 紛紛外物豈關身. 花如解笑還多事, 石不能言最可人.
淨掃明窓應素几, 閒穿密竹岸烏巾. 殘年自有靑天管, 便是無錐也未貧.
강세황은 그 스스로 "시는 육방용(육유)을 사모하여 구상하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붓을 잡으면 마구 지을 수 잇었노라" 라고 하였고, 청나라 학자 박명이 강세황의 시를 보고
"육유를 배운 시체詩體" 라고 대뜸 평하였을 정도이다.
위 시에 나오는 청천관靑天管은 육유가 피리를 미칭美稱한 것이다.
《십죽재서화보》 명대, 호정언 엮음, 「석보(石譜)」 중 '괴석', 다색인쇄 목판화
강세황의 수석 그림은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그가 오래전부터 즐겨 보고 베껴 그리던 중국의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중의 한 화면을 활용한 것이다. 이 중국화보에서는 이 화면을 '괴석怪石'의
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괴석' 이란 말 그대로 괴이하게 생긴 돌이다. 강세황은 이 화보 속 괴석을 '수석瘦石' 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수석' 이란 원래 괴석의 일종이다. 괴석을 미치도록 좋아했던 북송대의 문인 미불이
괴석의 네 가지 측면을 제시한 글이 있다. 첫째가 '투透' (구멍이 뚫림), 둘째가 '준皴' (주름짐), 셋째가 '수秀'
(빼어나게 잘생김), 넷째가 '수瘦' (여윔)이다. 강세황이 택한 이 화보의 괴석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수석' 은 괴석의 하나였지만, 말 없는 돌의 이미지로 선정되는 순간 말이 없어 여윈 돌이 된다. 돌의 여윈 속성이
과묵의 미덕을 뜻하게 되면, 괴석의 심미적 의미와는 완연히 다른 속성이 된다. 과묵함이 좋은 이유는
뜻을 지키는 의지, 즉 변치 않는 지조에 대한 신뢰가 좋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이 기리어온 덕목의 돌이 그러했다.
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 윤선도 시조 <오우가>의 '석(石)'
게다가 '수석' 이라는 말은 차가운 계절의 돌, 마른 형체로 맑은 기운을 연상시키는 시어로 한시에서
널리사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강세황의 「수석유화」 속에서, 괴석의 이미지는 이렇게 과묵하고 맑게
마른 '수석'의 이미지로 바뀌어 있다.
강세황, 「괴석, 《표암첩》」 제1권 중 제10면, 28.5×19.7cm
강세황이 이후 유사한 화면을 다시 그렸다. 다시 그린 그림 속 수석은 그 과묵함과 신뢰의 이미지가
더욱 부각된 듯하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표암첩》 중 한 화면이다.
강세황이 모본으로 삼은 《십죽재서화보》는 채색 화보여서, 화보 속 괴석 곁의 작은 꽃이 노란 민들레인 점을
선명하게 알려준다. 삐죽거리는 잎사귀를 바닥에 깔고 긴 꽃대로 피워낸 것도 틀림없는 들꽃 민들레이다.
강세황의 그림 「수석유화」는 수묵화로 그려져 있어 꽃 색은 볼 수 없고, 바위 아래 작은 꽃의 꽃잎이 약간
길고, 잎의 삐죽거림도 뭉개어지면서 꽃의 정체가 애매해졌다. 들국화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수영, 「수석유화」, 《지우재산수십육경첩》제3면, 종이에 옅은 채색
후배 화가 정수영이 다시 유사한 그림을 그렸다. 강세황의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것이 분명하다.
정수영의 그림에는 옅은 채색이 가하여져 있다. 정수영의 화면 속 작은 꽃은 선명한 국화이다.
꽃에는 붉은색이 베풀어져 있고 잎은 국화 잎으로 그려져 있으니, 결코 민들레가 될 수 없다.
「수석유화」의 꽃이 대당초 국화로 인식되어온 정황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민들레와 국화는 본적이 다르다. 자연 속 꽃이야 모두 한 가지겠지만, 오래전부터 생각이 많은 시인묵객들이
꽃의 품격을 다르게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국화는 은자의 꽃으로 칭송되었다. 전원에 숨어 산 지식인 도연명에 대한
추앙에서 비롯된 뜻이며, 송나라 유학자 주렴계가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 라고 부른 뒤 국화는 누가 뭐래도 은일
군자의 표상이 되어온 터였다. 그래서 숨은 꽃이라면 국화가 제격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강세황은 '괴석' 의 멋을 '수석' 의 덕목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괴석을 장식하는 들꽃 '민들레' 를 덕성을 발휘하는
꽃 '국화' 로 바꾸었다. 채색판화도가 운치 넘치는 수묵문인화로 바뀌면서 그 의미도 주제도 계절도 바뀌었다.
서늘한 가을 물에 드러나는 말근 돌 곁 가을국화가 되었으니, 민들레 핀 화보 속 '봄날' 이 '가을' 로 바뀌었다.
강세황은 중국 문인의 옛 시 한 구절과 중국에서 출판된 판화도 한 면을 활용하여 작은 그림 한 폭을
그려 보았지만 그 속에서 이루어진 환골탈태의 묘미가 지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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