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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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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유람록 <가야산> 수도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 상봉 일원 정구鄭逑, 「가야산 유람록遊伽倻山錄」 13일, 날이 맑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근사록近思錄》 서너 판坂과 「남악창수서南嶽唱酬序」를 읽고 있는데, 김 박사가 부르기에 학사대學士臺에 나가 잠시 만나보고는 뜰을 산책하였다. 사찰(해인사)은 신라 애장왕 때 창건하였는데, 여러 번 개축하여 규모가 웅장하고 수려하다. 그러느라 백성들의 공력이 꽤 많이 소모되었다. 편지를 덕원德遠에게 보내어 같이 유람하자고 청하니, 부친이 편찮으셔서 보름날 김지해金志海(김면金沔)를 맞아서 이 사찰에 모이자고 답해왔다.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다. 산비탈이 가팔라서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내원사에 이르렀다. 문밖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석 앞에는 사람 입 크기만한 우물이 있..
선인들의 유람록 <팔공산> 정시한丁詩翰, 「산중일기山中日記」 6월 초 1일(임인), 간혹 흐리고 간혹 갬. 보기普機가 아침밥을 갖추어 주었다. 자원紫遠이 은해사銀海寺로부터 왔으므로, 즉시 두 종으로 하여금 짐을 지게 하고는 걸어서 상용암으로 올라갔다. 진언 · 혜원 · 천우 등 여러 승려들이 운부사雲浮寺 문밖의 산 아래에서 전송해 주었고, 초선 · 보기 · 대영은 멀리 산허리에서 전송해 주었다. 벽원碧遠이 따라와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갔는데, 험한 산비탈을 5리쯤 가서 암자에 이르렀다. 아래를 굽어보니 미륵전의 채색한 누각이 높은 봉우리의 암석 사이에서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신기루 같았다. 상용암 앞의 누각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종장 향학向學이 맞이한다. 한참을 쉬었더니 흐르는 땀이 조금 말랐다. 벽원과 암자..
선인들의 유람록 <청량산> 이의성李義聲, 1828년, 130×5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의성이 정원용鄭元容과 유철조柳喆祚의 부탁으로 안동 및 하회 부근을 그린 그림으로 그리고, 동래 정씨의 선산이 있는 순흥順興 부근 지보知保 구담龜潭도 함께 그렸다. 16세기에 유중영柳仲郢이 그렸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周世鵬,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 계미일, 걸어서 문수사에서부터 보현암을 거쳐, 절벽을 돌아서 몽상암夢想庵에 다다랐다. 벼랑길이 끊어져 있어 두 개의 나무를 꺾어다 걸쳐서 잔도棧道를 통하게 하였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어, 두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모골이 쭈뼛하였다. 게다가 문원文圓(司馬相如) 처럼 소갈병을 앓아서, 목구멍에 연기가 나듯 하였다. 비폭飛瀑이 있는 것을 보고, 절..
선인들의 유람록 <소백산> 정선鄭敾, 17세기 말~18세기 초, 61.2×3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본래 계절산수와 산수인물도로 이루어진 8폭 가운데 한 점이다. 본래 병풍이었으나 지금은 낱쪽 족자로 개장되었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속에 도롱이 입은 인물이 낚시하는 광경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윗면의 비기운과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쏠려 있는 모습이 무척 생동적이다. 이황李滉, 「소백산 유람록遊小白山錄」 그 다음 날 계해, 걸어서 중백운암에 올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는 그 속에서 좌선을 해서 선리禪利에 자못 통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떠나서 오대산으로 들어갔으므로, 지금은 승려가 없다. 창 앞에는 옛 우물이 완연히 남았고, 뜨락에 푸른 풀은 쓸쓸할 따름이다. 암자를 지나서부터는 길이 더욱..
선인들의 유람록 <금골산> 이주李胄, 「금골산록金骨山錄」 금골산은 진도珍島 읍내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는데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바위라서 바라보면 옥부용玉芙蓉 같다. 서북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남의 지맥이 구물거리며 남으로 달려 2리쯤 가서 간재가 되고, 또 동쪽으로 2리쯤 가서 용장산龍莊山이 되어 벽파도碧波渡에 이르러 그친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 리이다. 산 아래에 큰 절터가 있어 해원사海院寺라고 한다. 9층의 석탑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다.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다. 맨 밑에 있는 것이 서굴西窟로, 산의 서쪽에 있는데, 창건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근자에 일행一行이란 스님이 와서 향나무로 십육나한의 소상을 만들어 그 굴에 안치하였다. 굴의 곁에 별도로 옛 사찰 예닐곱 칸이 있어 중들이 거처..
선인들의 유람록 <서석산> 필자미상, , 19세기,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제 때 무진악武珍岳.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라고 하였다. 무등산을 그린 이 그림은 매우 희귀한데, 그린 이를 알 수 없다. 고경명高敬命, 「서석 유람록遊瑞石錄」 22일 병인丙寅, 날이 개었다. 아침에 판관判官과 찰방察訪이 입석立石(선돌) 으로 곧장 갔다. 어제 날이 어둡고 깜깜해서 제대로 찾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은 곧장 선생을 좇아 상원등사上元燈寺 에 이르렀다. 작은 암자가 새로 엮어져 있었지만 작고 좁아서 쉴 수 없었기에 선생은 암자 서쪽 단상에 앉아 쉬었다. 약간 서쪽에 노송 두 그루가 마주해 있고 그 아래 발을 뻗고 쉴 만한 돌이 있었다. 조금 있다가 판관과 찰..
선인들의 유람록 <월출산> 도판 : 팔도총도八道總圖 1683년, 124×90.5,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구정봉 구정봉 상단. 김창협金昌協, 「월출산 구정봉 등반기月出山九井峰記」 월출산의 절정은 구정봉이다. 사방 모서리는 모두 험준한 벼랑이 가파르고 아슬아슬하다. 다만 서쪽 벼랑 아래에는 지름이 겨우 한 자 남짓한 굴혈이 위로 뚫려 절정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굴혈 속으로부터 길을 취한다. 그 굴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기고 뱀처럼 나아가서야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관모나 망건을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쥐가 또아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굴혈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다. 그러다가 굴혈에 들어가면 비로소 사람처럼 간다. 하지만 여전히 굴혈 속으로 가는 것이며, 굴혈은 길둥글고 좁으므로, 그 속을 가는 사..
선인들의 유람록 <가야산> 1872년, 74×52cm, 조선후기지방지도 충청도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인. 이 지도에서는 덕산 관아 서쪽에 상왕산象王山과 가야산伽倻山을 별도로 표시하여 두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두 산을 하나로 보아 가야산으 이칭이 상왕산이라고 한다. 가야산은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斗山 이라고 불렀으며 상왕산象王山 · 중향산衆香山 · 지달산 · 설산이라고도 한다. 이철환李嚞煥 「상산삼매象山三昧」 회잠會岑과 여옥呂玉이라는 두 사미승이 있는데, 나이는 각각 17세이다. 용모가 단아하게 잘 생겼으므로 두 눈은 빛이 났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각각 그 맑고 고움을 다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회잠이란 자는 또한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어 나각螺角과 비슷한 소리를 잘 내었는데, 천연스레 교묘하여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