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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유람 칠지가람(七池伽藍) 천봉산 대원사 대원사 구품연지(九品蓮池)에서의 음악회. 대원사 극락전 달마도 극락전의 동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한 승려가 달마대사에게 팔을 잘라 바침으로써 자신의 깊은 신심을 표현한 그림이다. 승려의 머리 옆에 작게 '신광선사단비'라고 기록되어 있어 혜가대사가 선종의 조사인 달마에게 팔을 잘라 바치면서 제자가 되길 원했다는 고사에 신광선사를 대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마대사는 적갈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구이며, 크게 뜬 눈과 찡그린 미간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팔을 잘라 바치는 신광선사를 보자 움찔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한 그림이다. 대원사 극락전 수월관음도 달마도와 마주한 서벽에 그려진것으로 해변가 바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이다. 곁에 ..
석탄일의 보광사 세계평화통일완성 / 염 불 선 / 정밀수행도량 광 보 사 廣 寶 寺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옥동리길 19-20) 석탄일을 하루 앞둔 석양의 「보광사」경내. 큰길에서 보광사에 이르는 길에 내걸린 연등 행렬. 보광사 주지 자황 스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주신 정갈한 숙소로... 석탄일 아침 햇살을 등에 진 보광사 무량전 무량전 삼존불 1. 염불참선 견성오도 수도정진 도량 세계의 완성의 시작은 인간의 완성에 있으며, 인간의 완성은 인간정신의 완성에 있다.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정신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인류문화의 꽃인 참선, 그중에서도 가장 수승하다는 이근원통법인 염불선, 그리고 진정한 정혜쌍수법을 겸비하고 깨달음을 지름길로 인도하는 염불선법을 공부인들에게 전수하며 견성오도하는 염불선 수행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염불..
옥산서실玉山書室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129 대문위로 송산세사(松山世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 옥봉사 강당 중건 기실비 너머로 보이는 유물관. 조선 선조 때의 문장가인 옥봉 백광훈(1537∼1582)과 그의 아들인 송호 백진남(1564∼1618) 등 후손들과 관련된 유품들로, 옥봉유물관에 모두 모아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그 가운데 9종 113점이다. 백광훈은 최경창, 이달과 함께 3당 시인으로 불리었으며, 조선 8대 문장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아들인 백진남은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지정된 유물을 보면 『백광훈교첩』, 유학백진남백패, 『옥봉집』, 『가장필적』, 『장서동수창록』, 백옥봉 목판, 한석봉서증백진사 목판, 『옥봉집』목판,..
동학인 양한묵 선생 양한묵梁漢黙 지강, 芝江, 경조, 景朝, 길중, 吉仲 1862년 4월 29일 전남 해남군(海南郡) 옥천면(玉泉面) 영계리(永溪里)에서 아버지 상태(相泰)와 어머니 낭주(郞州) 최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10대조 이래로 능주(綾州)에서 해남으로 옮겨 세거한 향반이었다.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였고, 18세 이후에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천주교와 음양술에 관한 서적도 널리 읽었다고 한다. 20세에 결혼하여 나주 남평면(南平面) 송촌(松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면서 우주의 근본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당시 피폐한 현실사회에 대한 인식도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2년 관직에 나아가 18..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3편> 전傳 김응환金應煥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중, 18세기, 32×42.8cm, 개인 소장. 정조 때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그렸다고 전하는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그는 1788년 늦가을에 어명을 받아 김홍도와 함께 50여 일 동안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법을 배웠다 하고 인물도 중국화풍이라고 하지만 냇가의 백석을 그린 솜씨는 재평가하여야 하리라. 유몽인柳夢寅, 「풍악에서의 기이한 만남 楓嶽奇遊記」 어우於于 유柳 선생이 풍악의 표훈사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3개월 동안 앓다가 비로소 일어나서는 밤마다 남루南樓에 올라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홀연 이인異人이 나타났는데, 외모가 우람하고 훤칠하였다. 동자를 시켜서 이름을 통하게 하였더니 "견백주인堅白主人이 선생을 뵙..
죽녹원 담양 '죽녹원' 후문 일대. 이곳에는 '추성창의기념관'을 비롯, 계산풍류의 상징 '정자재현단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죽록원 대숲길로... 성인봉聖人峯 동쪽으로 가장 멀리 금성산성에서 순창의 강천산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쪽으로는, 이성계가 무등산 산신을 설득치 못하고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뾰족한 삼인산과 그 너머는 불태산 라인인데 그리 선명치 못하네요. 오월의 상징 우후죽순雨後竹筍 대숲속의 죽로차밭 딸 아이의 비명에 이은 "엄마~~ 나 살쪘나봐!! ㅎ 회맹단 담장밑을 장식한 샤스타데이지. 제봉 고경명 장군 출정도 고경명 장군상.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2편> 김하종金夏鐘, 《해산도첩海山圖帖》, , 1815년,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    이원李黿, 「금강산 유람록遊金剛錄」   날이 늦어 장령獐嶺(노루목)을 넘어 계곡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들어가니 유점사 골짜기 입구였다.뭇 산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수많은 계곡은 흐름을 다툰다. 가파른 봉우리와 끊어진 바위벽이 시내를 끼고 둘러 서 있다.뒤를 잠깐 보고 다시 앞을 보니, 들어온 길을 알지 못하겠다. 봉우리들과 바위 벽들은 훌륭한 사람과 열사烈士들이 옷깃을 여미고 서 있는 것처럼 단정한 모습이다.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고요하며, 점잖은 외형이나 묵묵한 언색이 거의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시를 지었다. 계곡 북쪽에는 고개 하나가 있는데, 환희령이라고 부른다. 걸어갈 수는..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1편> 정선, 《풍악도첩》 중 , 1711ㄴㄴ,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이 36세 되는 때에 엮은 《풍악도첩》에 실려 있다. 빽빽한 구도이지만 너럭바위에 앉은 수 사람을 중심에 두어, 그들의 한담에 주목하게 하였다. 그들은 필시 시내 소리로 시비 소리를 차단해 두고 흉금을 털어놓았으리라. 이곡李穀, 「동유기東遊記」 지정 9년(1349) 가을에 금강산에서 노닐고자 8월 14일 개성을 출발하였다. 이후 8월 21일에는 천마령을 넘고, 산 아래에 있는 장양현에서 잤다. 이곳은 금강산과는 30여 리 떨어져 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마을 사람이 "풍악에 놀러 오는 분들이 많지만 구름과 안개 때문에 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