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2506)
선인들의 유람록 <산향제山響齋> 강세황姜世晃, 중 1757년경,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은 45세 되던 1757년 7월에 송도를 여행하며 16첩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화담을 그린 것으로,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서재가 있던 곳이다. 그림 위의 제사題詞에서는 화담 가에 있는 조대釣臺가 곧 화담 선생이 낚시하면서 유유자적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강세황姜世晃, 「산향기山響記」 나는 성격상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지만, 이른 시기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한 번도 산에 올라 관람하고 싶은 바람을 실천한 적이 없고, 다만 그림 그리는 일에 흥을 부쳐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고 있을 다름이다. 하지만 기이한 흥취와 아득한 상상이 어찌 참 산수를 즐기는 일만 하겠는가! 이것은 정말로 나..
선인들의 유람록 <첨화령> 도판 /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19세기 초기, 50×40.8cm, 개인 소장. 퇴계 이황은 「글 읽기는 산놀이와 같다讀書如遊山」라는 시를 남겼다.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 읽기가 산 놀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 함은 원래 아래에서 비롯되나니 淺深得處摠由渠 얻음이 깊으냐 얕으냐도 모두 거기에 달렸도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묘한 이치를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가다가 근원에 이르러 비로서 사물의 시초를 깨닫네. 絶頂高尋免公等 절정을 높이 찾으려고 그대들처럼 힘썼다만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해서 중도에 그만두다니 내가 부끄럽구려. 이황은 절정에 올라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곧 '아래' 에서 이미 결정된..
선인들의 유람록 <주왕산> 고람古藍전기田琦 19세기 전반, 87.3×3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전기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익혀 추사파 중에서도 가장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의 경지를 구사한 화가로 평가된다.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림의 제시에는 "청산은 또렷하고 나무는 겹겹인데 절은 구름 깊은 봉 몇 번째 봉우리에 있는가. 민가 즐비한 서산 아래서, 석양의 강설講設 알리는 종소리를 듣네" 라고 하였다. 고요하고도 담백한 경지를 그림과 시로 드러낸 것이다. 장현광張顯光 「주왕산록周王山錄」 산의 높이가 대단하지도 않은데, 산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이 산에 예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바위 골짝이 기이하다는 것은 내가 들은지 오래였으므로, 한 번 구경하여 먼지 덮인 눈을 씻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 한참 되었..
선인들의 유람록 <비봉산> 필자 미상, , 17세기, 31.4× 25.5cm, 개인 소장. 니금으로 그린 화려한 산수도이다. 괴송과 기암을 올려다보는 고사高士를 그린 방식이 다소 상투적이지만, 괴송과 기암 자체는 매우 웅혼하다. 허훈許薰, 「수정사 유람기遊水淨寺記」 진성眞城(진보眞普)을 마주하여 우뚝 솟은 것이 구봉대舊烽臺(남각산봉수南角山烽燧)이고, 그 북쪽 지맥이 비봉산이다. 그 남쪽 기슭에 수정사가 있다. 절 앞 계곡에서는 문석文石(무늬가 있는 수석)이 많이 난다. 내가 세들어 사는 집과 겨우 40여 리 떨어져 있다. 을미년(1893) 칠석날, 나는 이명숙 李明叔 · 박경순朴敬淳 · 이치첨李穉瞻 · 이순칠李舜七 등과 가서 보았다. 각산에 이르러 권화여權華汝를 방문하였더니, 그는 기꺼이 길 안내를 맡기로 하였다. 겨우 1리를 가..
선인들의 유람록 <덕유산> 임훈林薰, 「덕유산 향적봉 등정기登德裕山香積峯記」 정축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개가 잔뜩 끼어 산을 묻었고, 비 올 기세가 일어났으므로, 산에 올라 구경할 방도가 없었다. 성통性通 등은 비가 오기 전에 곧바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여러 날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봉우리 위에 오르려는 것이 내 뜻이네." 저녁 무렵에 구름의 음울한 기운이 흩어져 없어지고, 하늘의 햇빛이 먹장구름을 뚫고 새어 나왔다. 나는 내일 날이 완전히 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성통은 말하였다. "산에서는 날이 늘 어둡습니다. 이런 정도면 족합니다. 내일 구름과 안개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침내 신발을 챙겨서 올라갔다. 혜웅惠雄에게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였다. 2리쯤 가서 산등성이에 이르렀고,..
선인들의 유람록 <가야산> 수도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 상봉 일원 정구鄭逑, 「가야산 유람록遊伽倻山錄」 13일, 날이 맑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근사록近思錄》 서너 판坂과 「남악창수서南嶽唱酬序」를 읽고 있는데, 김 박사가 부르기에 학사대學士臺에 나가 잠시 만나보고는 뜰을 산책하였다. 사찰(해인사)은 신라 애장왕 때 창건하였는데, 여러 번 개축하여 규모가 웅장하고 수려하다. 그러느라 백성들의 공력이 꽤 많이 소모되었다. 편지를 덕원德遠에게 보내어 같이 유람하자고 청하니, 부친이 편찮으셔서 보름날 김지해金志海(김면金沔)를 맞아서 이 사찰에 모이자고 답해왔다.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다. 산비탈이 가팔라서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내원사에 이르렀다. 문밖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석 앞에는 사람 입 크기만한 우물이 있..
선인들의 유람록 <팔공산> 정시한丁詩翰, 「산중일기山中日記」 6월 초 1일(임인), 간혹 흐리고 간혹 갬. 보기普機가 아침밥을 갖추어 주었다. 자원紫遠이 은해사銀海寺로부터 왔으므로, 즉시 두 종으로 하여금 짐을 지게 하고는 걸어서 상용암으로 올라갔다. 진언 · 혜원 · 천우 등 여러 승려들이 운부사雲浮寺 문밖의 산 아래에서 전송해 주었고, 초선 · 보기 · 대영은 멀리 산허리에서 전송해 주었다. 벽원碧遠이 따라와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갔는데, 험한 산비탈을 5리쯤 가서 암자에 이르렀다. 아래를 굽어보니 미륵전의 채색한 누각이 높은 봉우리의 암석 사이에서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신기루 같았다. 상용암 앞의 누각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종장 향학向學이 맞이한다. 한참을 쉬었더니 흐르는 땀이 조금 말랐다. 벽원과 암자..
선인들의 유람록 <청량산> 이의성李義聲, 1828년, 130×5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의성이 정원용鄭元容과 유철조柳喆祚의 부탁으로 안동 및 하회 부근을 그린 그림으로 그리고, 동래 정씨의 선산이 있는 순흥順興 부근 지보知保 구담龜潭도 함께 그렸다. 16세기에 유중영柳仲郢이 그렸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周世鵬,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 계미일, 걸어서 문수사에서부터 보현암을 거쳐, 절벽을 돌아서 몽상암夢想庵에 다다랐다. 벼랑길이 끊어져 있어 두 개의 나무를 꺾어다 걸쳐서 잔도棧道를 통하게 하였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어, 두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모골이 쭈뼛하였다. 게다가 문원文圓(司馬相如) 처럼 소갈병을 앓아서, 목구멍에 연기가 나듯 하였다. 비폭飛瀑이 있는 것을 보고,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