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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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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계와 소산화보 꽃과 풀을 그리는 화훼화는 산수화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동양 회화의 대표적인 분야이다. 하지만 역대 동양화론에서는 화훼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론서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소산小山 추일계鄒一桂(1686~1772)의 《소산화보小山畵譜》는 중국 화론서 중 보기 드물게 화훼만을 대상으로 쓰인 이론서로서 독자적인 의의를 지닌다. ··· 추일계는 청대淸代 시기에 활동했던 공필채색 화훼화 분야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727년 진사가 된 후 내각학사, 예부시랑 등의 직책을 맡아 오랫동안 관직을 지냈다. 특히 건륭제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소위 '사신화가詞臣畵家'로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다수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화사한 채색과 정교한 필치의 화훼화를 추구했으며, 절지, 분경 등..
명대明代 강남 문인들 꽃에 빠지다 명대明代에는 강남 소주蘇州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꽃을 그린 화훼화가 크게 유행했다. 소주의 문예계를 선도한 심주沈周(1247~1509)가 문인풍의 화훼화를 새롭게 개척하면서 이 장르는 문인화의 주요 화목으로 부상했다. 오랫동안 문인화의 소재가 되었던 매화, 난초, 송죽뿐 아니라 각종 화훼와 초목, 과일과 채소 등의 식물 소재는 전통적으로 우위을 점해왔던 화조화를 압도하며 다른 양상 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직업 화가들의 주요한 장르였던 화훼화가 문인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다양한 작가군의 등장과 함께 그내용과 형식 및 표현이 다변화되어 화훼화의 혁신을 이룬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10여 종에서 수십여 종에 이르는 화목花木과 화초를 5~10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에..
금대金代 동물 초상<소릉육준도> 현재 북경北京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는 금대金代(1115~1234)의 희소한 회화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220년이라는 분명한 하한 연대를 지니고 있는 회화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 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기년명 회화는 창작연대가 확실한 진작으로서의 의의뿐 아니라, 전칭 작품 및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해당 시기 회화의 성격을 신빙성 있게 규명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된다는 점 에서 중요하다. 또 의 경우, 유명한 당 태종의 무덤 소릉昭陵에 있는 부조 (1637~649)을 토대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금대의 회화에 대한 현재까지이 연구 성과는 다른 시대에 비해 매우 미진한 편이다. 소수의 연구 성과들도 대부분 산수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인물화나 화조영모화에 대한 연구는 그간 ..
중국 묘실의 화훼도 장성 묘(張姓 墓) M6 후실 동남벽, 요, 하북성 선화구. 중국 벽화에서 화훼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唐代부터이다. ···· 요대遼代에는 벽화가 중원 지방보다 내몽골 지역에서 더 많이 그려졌다. 특히 선화宣化에 있는 장씨張氏 집안의 묘실에 들어가면 여러 형태의 화훼도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마치 꽃의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대 이래로 발전을 거듭해왔던 화훼도의 표현이 정정에 이른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 선화요묘宣化遼墓에는 화훼도 외에도 다른 여러 주제가 그려져 있지만, 화훼도가 단연 시선을 끈다. 화훼도에는 이전 시대의 모든 표현 양식이 망라되면서 새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장문조 묘(張文藻墓) 후실 북벽, 요 1093년, 하북성 선화구. 왕처..
당唐 고분벽화 속 화조화 당唐대의 고분 벽화는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데, 바로 화조화花鳥畵의 출현이다. 물론 당대 이전인 남북조시대에도 꽃과 새들이 고분벽화에 종종 출현하기는 했지만, 독자적으로 다루 어기기보다는 인물의 배경이나 상서로운 공간을 암시하는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화조화가 인물의 배경 같은 장식적 요소에서 단독 주제로 표현되는 것은 고분벽화에서뿐 아니라 당대의 화단에서도 동시에 발견되는 중요한 회화적 경향이다. 중국회화는 당대에 이르러 남북조시대의 회화적 성취를 바탕으로 인물화, 산수화, 영모 · 화조화 등 각 분야 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뤘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마침내 당대 미술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 후 회화 발전 방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대의 회화적 성과는 ..
조선미전의 모란화 허련, 6폭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각 79.0×34.0cm, 홍익대학교박물관 수묵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제작되었지만, 제시에는 '꽃의 왕', '미인', '부귀' 등의 의미가 함께 농축되어 있다. 공자는 홀려서 가져와 등불 아래서 보고, 미인은 머리에 꽂고 거울 속에서 보네. 동군東君이 모든 꽃의 왕에 봉하고, 다시 보배를 하사하여 상방尙方에 내보냈네. 금화 주고 다 사면 온 궁중이 웃고, 다투어 말 달려 열흘이나 먼지가 나네. 말을 알앗다면 나라가 기울었을 것, 바로 이 무정함이 사람을 움직이네. 한수漢水 오리의 머리색을 변하게 하고, 농산隴山 앵무새는 사람을 부르지 않네. 하늘의 향 나라의 미인 뭇꽃의 으뜸, 모두 서울 부귀한 집에 속하네. 이처럼 조선시대까지 모란화는 복합적인 의미체계를 ..
화조화가 이한복 작업중인 무호 이한복, 「매일신보」, 1929년 8월 15일자, 2면.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1897~1944)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로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敎 일본화과日本畵科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등단했다. 당시는 대개 동양화가들이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그림을 익혔고, 더욱이 전통적 으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을ㄹ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한복의 일본 유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등단 초부터 엉겅퀴 같은 초화류와 학, 오리 같은 동물화를 그려 근대기 화조동물화 분야의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도쿄미술학교 학생 시절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관설 조선미술전람회의 첫 회부터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과 20대 후반에 '동양화..
홍세섭의 영모화 19세기 후반의 화단은 여항문인閭巷文人을 비롯한 중인들이 서화 수요층으로 급부상하며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중인들은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면서 사군자화나 괴석도를 선호하였다. 동시에 일부 사대부화가들은 서화를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로 접근하면서 화훼나 영모를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아속공상雅俗共嘗의 새로운 화풍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 중기까지 사대부 화가들이 완물상지로 인해 수묵의 관념산수화에 갇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시기에 들어 확연하게 다른 시대적 미감과 취향을 보여준다. 반면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신명연申命衍(1809~1886), 남계우南啓宇(1811~1890), 홍세섭洪世燮(1832~1884) 은 대표적 사대부화가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