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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잊혀진 미술가들 . 배운성 1930~1935년 경, 캔버스에 유채, 140×200cm, 개인 소장, 등록문화재 제534호. 배운성(裵雲成, 1901~1978)의 는 대가족이라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소재를 대형 캔버스 위에 그린 대작이다. 그림 속에는 젊은 시절 신세를 졌던 백인기白寅基 가족과 배운성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국 최초의 유럽 미술유학생으로 알려진 배운성은 독일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고 각종 전람회에 입선 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940년 귀국, 광복 후에는 잠시 홍익대 미술과 초대 학장을 지냈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월북했다. 북으로 간 배운성은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78년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월북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후 남한 미술계에서 그..
조선 왕실의 현판 7 기타 현판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도성을 축조하고 돈의문敦義門과 혜화문惠化門 등의 출입문을 내어 도성 안팎을 오갔다. 문 밖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朱之蕃이 현 판의 글씨를 써 주기도 했다. 한양의 명승과 관련하여, 영조는 한강의 두무포에 있던 유하정流霞亭을 보수하고 효종이 잠저에 있던 시절 머물렀던 내력 등을 글로 짓기도 했으며 종종 인왕산 아래 세심대洗心臺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신하들과 시를 읊기도 했다. 그 밖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을 보관했던 지방의 사고史庫에도 현판을 걸어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또한 충신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 에도 현판을 걸고 추모의 정성을 보였는데,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조선 왕실의 현판 6 -2 기로소에 대한 서문과 관리들의 명단을 새긴 현판으로 기로소의 연청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에는 기로소가 세 임금이 입소하였던 중요한 곳이므로, 청사를 수위하고 항상 경계해야 하며, 관원들끼리 서로 아끼고 태만하지 말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기사연청 좌목에는 수석 선생 등 소속 관리들의 관직과 이름, 생년 등이 새겨져 있으나, 현판의 훼손이 심하여 전체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연청은 기로소 관리들의 집무 공간이며 기영관의 북쪽에 있었다. 기로소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명단을 새긴 현판이다. 현재 세 점의 현판이 남아 있는데, 각각 1891년 8월과 1892년 6월 1893년 10월에 만든 것이다. 봉상시奉常寺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를 거행하고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태상시라고..
조선 왕실의 현판 6 -1 궐외각사 현판 闕外各司 懸板 부분, 18세기 종친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인 종친부宗親府에 걸었던 현판이다.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1865년(고종 20 2월 20일 기사를 보면, 황폐해진 종친부 건물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수리되어 예전보다 더욱 웅장해졌으며, 고종이 자손과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며 종친부 편액을 친히 써서 내렸 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종친부 현판은 두 점 전하는데, 모두 어필이라는 표기는 없으며 간기나 인장도 새겨져 있지 않아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한필교(1807~1878)가 근무했던 관아의 모습을 그린 화첩 《숙천제아 도宿踐諸衙圖》 중, ,종친부. 그림을 보면, 정문인 외삼문에 종친부 현판이 걸려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종친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근무하는 서리청書..
조선 왕실의 현판 5 행궁行宮 현판懸板 도성 안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정사를 펼치기 위한 궁궐이 있었다. 왕은 때때로 궁궐을 벗어나 지방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임시로 거처하던 곳을 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도성 밖 행차는 주로 한양 근방에 분포되어 있는 왕릉 참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능행陵幸과 관련한 행궁으로는 과천, 시흥, 수원의 화성행궁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왕은 정사에서 벗어나 휴양과 심신의 치료 를 위해 온천을 찾기도 했는데, 온천 일대의 행궁에는 대표적으로 온양행궁이 있다. 또한 전쟁과 같은 국난에 대비 하고자 전국의 요충지역에 행궁을 건립하였는데, 강화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등이 그 예이다. 조선시대 행궁은 평상시에는 해당 지역의 ..
조선 왕실의 현판 4 별궁 현판 조선 시대에는 정궁에 해당하는 궁궐 뿐 아니라 도성 곳곳에 왕실 가족들의 생활이나 의례와 관련한 별궁이 있었다. 별궁은 궁궐 밖에 독립된 건물로 존재했는데 왕자나 공주가 궁궐을 나와 살던 집인 궁을 포함하여, 왕이 돌아가신 후 후궁들이 기거하던 궁이나 방이 있다. 별궁은 재산을 관리하고 물품을 조달하는 내탕內帑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이곳에 살던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용도 가 전환되기도 했다.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혼례를 치르고 궁궐 밖의 별궁에서 생활하였는데, 본래 왕위 계승 자는 아니었으나 특별한 연유로 왕이 된 왕자의 옛 집을 잠저潛邸라고 칭했다. 그 밖에도 왕실 혼레와 관련 한 의식을 안국동별궁과 같은 궁궐 밖의 공간에서 치르기도 했다. 비록 지..
조선 왕실의 현판 3-2 영회원 永懷園 영회원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빈嬪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50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 한양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급서急逝하였고, 1646년(인조 24) 에 민회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폐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나 소현세자 묘에 합장되지 못하고, 친정인 강씨 집안의 산에 일반 사묘로 장사를 지냈다. 이후 1718년(숙종 44) 세자빈에 복위되면서 묘가 새롭게 조성되어 민회묘로 추승되었고, 1870년(고종 7)에는 세자빈의 묘를 원으로 격상하면서 영회원이 되었다. 현재 서오릉 능역 안에..
조선 왕실의 현판 3 -1 능원묘 현판 陵園墓 懸板 조선 왕릉은 조선 시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였던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게 되는 영혼의 안식처로 생전에 기거했던 궁궐에 버금가는 명당에 조성하였다. 왕릉의 위치 선정 뿐만 아니라 건설과 의례의 전반적인 과정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에 규정된 예법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을 선례로 삼아 능침과 재실 및 정자각 등의 부속 시설, 설물의 규모를 정하였다.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왕릉에 참배하여 유교적 의례를 거행하고 선왕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왕의 능행陵行은 왕권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는 공식적인 행사이자 궁궐 밖에 있는 백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이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영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