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모나리자

루부르 궁전의 멋진 전시실을 지나 그 묘한 형상 앞에 설 때마다 나는

'그녀는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보다 나이가 더 많다' 고 중얼거린다.

 

오스카 와일드 「예술가로서의 비평가」(1890)

 

 

 

 

조르조 바사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을 기술한 부분을 보면, '예술이 자연을 얼마나 유사하게 모방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 은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여성의 초상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바사리는 인물의 생김새에 내재된 생명력을 명확하게 재현해내는 레오나르도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나리자>는 장밋빛과 진줏빛으로 채색된 섬세한 피부위에 살아 있는 듯한

'촉촉한' 눈, '살갖에서 나온' 듯한 속눈썹과 눈썹, '인간의 것보다 신성해 보이는 기분 좋은 미소'를

가진 초창화였다. 바사리는 자신의 책에서 레오나르도가 모델의 미소를 유지시키기 위해 광대와

음악가를 고용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서술했다. 그림 속 그녀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이며,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살던 시절 조콘도가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는 내용도 덧붙

다. 또한 4년의 작업 끝에 미완성 초상화를 남겼고 현재 프랑스 왕이 소유한 풍텐블로에 있다고 기

록 했다. 그러나 바사리가 밝히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그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

이다. 바사리는 1550년경 「미술가 열전」을 집필했다. 그런데 그보다 35년 전, 레오나르도는 이미

그 그림을 가지고 이탈리아를 떠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일컬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

된 표현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하루에 3만 명의 사람들이 바사리가 할 수 없던 일(상자 같은 액자에

싸여 방탄유리로 덮인 작고 어두운 그림을 보는 일)을 하기 위해 <모나리자>가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

의 전시실 국가관을 방문했다. 약 150년 전 이 그림을 본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오스카 와일드와는 달

리, 오늘날의 관람객들이 <모나리자>를 차분하게 감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림과 최소 4미터 떨어져

있는 군중들이, 자신이 그림을 봤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증명하기 위해 카메라를 높이 들고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감상 경험은 그림을 먼저 본 이들이 이미 만들어놓았다는 점에

서 근본적으로 와일드의 경험과 유사하다.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에서 <모나리자>를 보았을 가장 초기

의 숭배자들부터 짧은 순간일지라도 개인적인 경험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몰려드는 오늘날의 관람

객까지, 이 피렌체 여성의 초상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는 한 그림을

명작으로 만드는 것이 그림 자체가 지닌 우수성인지, 아니면 수 세기에 걸친

찬사와 해석인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전시장에서 직접 보든, 고해상도 이미지로 보든 바사리가 <모나리자>를 새상으로 한 풍부한 묘사를 

온전히 경험하기는 힘들다, 수 세기가 지나면서 그림의 색채가 갈색조로 어두워졌고, 두꺼운 바니시

층이 노랗게 변색되면서 표면에 일어나는 빛의 작용이 둔화되고 섬세한 표현들이 두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형적 ·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연구한 결과, 레오나르도의 매체를 다루는 환상적인 능력을 찬

양했던 바사리의 주장은 더욱 확실해졌고, 그의 기준에 충족되기를 열망한 '모든 훌륭한 장인들'을

절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가 안료를 기름과 섞어 만든(물{프레스코}이나 달걀흰자

{템페라}와 섞지 않고) 비교적 새로운 재료인 유화물감을 사용한 최초의 이탈리아 미술가는 아닐지

모르나,그는 기름의 고유한 특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유화를 그린 작가다.

 

유화물감이 가진 반투명한 속성은 빛이 매체의 층을 통과할 수 있게 했고,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스푸마토'라고 부른 기술을 이용해 아주얇은 색채의 층을 쌓아 올려 대기의 밀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유화물감은 천천히 건조되기 때문에마르지 않은 상태, 즉 변화 가능한 표면을 유지한 채로 매끄러운 그러데이션인

'키아로스코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렇듯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은 3차원의 환영적 표현은,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형상이 가진 실제적인 무게감, 조형성, 현존성을 불러일으킨다.

 

지어는 여러 겹으로 땅을 표현하고 어두운 색채를 사용한 부분에서도 레오나르도의

우수한 관찰력과 묘사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손의 피붓결과 미묘한 홍조,

눈가의 살갖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입이 움직이는 듯한 표현까지,

레오나르도는 주인공과 닮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역시 포착해냈다.

 

 

 

모나리자: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의 초상

레오나드로 다빈치(1452~1519) 1503년경, 포플러에 유채, 77×5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수 년간 초상화의 모델과 그녀의 묘한 미소를 둘러싼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생산되었다.

소문인 즉 모델은 레오나르도의 정부였고, 비밀을 가진 여인이자 좋은 새어머니였다는 것이다.

비록 미소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추측과는 달리 그녀의 정체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사리는 <모나리자>의 모델과 그녀의 남편 이름을 명시하고,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살던 그들의 신원과

생애를 증명하는 문서들을 함께 제시했다. 그림을 의뢰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는 가족 사업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인물로, 피렌체와 그 주변의 부동산을 다수 소유한 비단 상인이었다. 레오나르도와 이 그림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문서로 알려진 자료를 보변 그가 작품을 그린 시기를 알 수 있다. 

 

'1503년 10월'이라 명시된 자필 주석이 달린 문서로, 재무관 아고스티노 마테오 베스푸치가 소유한

1477년 판 「키케로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이 글에서 레오나르도의 재능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

아펠레스의 재능에 비유되는데 그 근거로 '리사 조콘도의 두상'이 언급된다. 리사는 조콘도의 두 번째 아내였고

둘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중 5명은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태어났다.

 

초상화 작업 과정에 대한 연표는 없지만 레오나르도가 밀라노로 이주한 1507년 또는 1508년 사이 어느 시점

까지 이 그림은 그의 작업실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기준에서는 그림이 미완성 상태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 시점에서는 <모나리자>가 미완성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고객에게 주지 않고 다른 물건들과 함께 밀라노(그리고 다음 거주지)로 가져갔다고 알려졌다.

 

'리사 조콘도의 두상'이라 쓰인 시기의 주석에는 레오나르도가 작업 중이던 다른 작품들도 언급되어 있는데,

주석의 저자로 추정되는 베스푸치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음을 암시한다. 1504년 피렌체에 새로 도착한

젊은 예술가 라파엘로 산치오는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 중에는 <모나리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모나리자>와 유사한 헤어스타일과 머리

장식을 하고 비슷한 옷을 입은, 정확히 같은 포즈를 취한 여성을 그린 그림들이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과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등 후기 작품에서 상반신은

왼쪽으로 틀어져 있고 머리는 정면을 향한 반신상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라파엘로가 후기 초상화들을 그릴 때 두 화가는 모두 교황의 후원을 받으며 로마에 있었으나, 레오나르도는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왕궁으로 떠났다. 그는 왕이 제공한 거주지인 루아르 계곡 안쪽

앙부아즈의클로 뤼세 성에서 151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

 

그와 함께 오래 일한 조수 잔 자코모 카프로티 다 오레노('살라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유산 목록(1524)에 '라 조콘다'의 초상화가 있었지만 복제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살라이의 후손들로부터 구입했든, 레오나르도가 왕에게 유산으로 직접 남겼든

<모라니자>는 1530년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이 되었다.

 

바사리의 주장에 의하면 반세기 이상이 지난 1625년, <라 조콩드>로 알려진

'덕이 있는 이탈리아 여성'의 초상화가 풍텐블로에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모나리자(부분)

실존 인물인 리사 게라르디니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초상화가 실제 모습과 많이 닮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빛과 그림자의 표현을 통해 전에 없던 자연스러운 생명력을 재현해냈다.

옆으로 쳐다보는 눈부터 그 유명한 미소를 만들어낸 입술 끝의 힘까지,

부드럽고 매끄러운 붓질로 풍부한 표정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나리자(부분)

갈색조로 변한 화면과 노랗게 변색된 바니시는 레오나르도가 실제로 사용한

생생하고 대조적인 색채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연구에 따르면, 그림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이미 18세기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행히 복원 전문가들은 표면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림을 깨끗이 닦아내는 행위에 반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림에서 레오나르도의 능숙한 물감 처리,

특히 머리 장식 부분의 투명한 층,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러데이션, 배경을 덮은 섬세한 안개를 확인할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대중들에게 공개 되었을 때(1797)

<모나리자>는 왕실 소장품들 중 핵심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거주하던

튈르리 궁전으로 잠시 옮겨진 시기(1800~1804)를 제외하고 <모나리자>는

계속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바사리의 시대부터 문학가들은 단순해 보이는 이 16세기 피렌체 여성 초상화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여하는 여러 서사를 만들어가며 <모나리자>를 묘사했다. 모델이 '미소를 유지하도록' 레오나르도가

공연하는 이들을 고용했다는 바사리의 서술 또한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1625년의 풍텐블로 작품 목록에는 모델의 덕목을 연급하면서 그녀는

"창녀가 아닙니다(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나폴레옹 박물관 도록

(1804~1815, '나폴레옹 박물관'은 나폴레옹 황제 재위 기간에 붙여진 루브르 박물관 이름)의 저자

조셉 라발레는 "이 매혹적인 여성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설명을 넣었는데, 이는 그가 그림 속

여성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나리자>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찬양하는 경향은,

당대의 낭만적 감수성과 이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이미지로 만들려는 욕망에 힘입어

19세기 내내 확대되었다. 테오필 고티에, 샤를 클레망, 샤를 보들레르, 공쿠르 형제 등 저명한 프랑스 작가

들도 그림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 그림 속 모델을 진정한 팜므 파탈을 구현하는

여성적 환영으로 묘사했다. 마치 스핑크스를 묘사하듯이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가들 중 다수가 <모나리자>를 언급할 때 무생물을 지칭하는 단어인

'그것(it)'이 아닌 '그녀(she)'로 표현함으로써 마치 이 작품을 생각하고 느끼며 비밀을 지키는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모나리자>에 얽힌 다양한 미스터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창의적이고 영향력이 큰 것은 윌터 페이터의 글이다.

근즌 1865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수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주제로 일련의 에세이를 썼다.

레오나르도의 생애에 관한 설명은 1867년 「격주 리뷰」에 처음 실렸으며, 그의 에세이집 「르네상스 역사 연구」

(1873)에 수록되었다. 페이터는 "라 조콘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레오나르도의 걸작이며, 그의 사고방식과

작업 방식이 드러나는 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초상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작가가 아닌 모델에 집중된다.

그녀는 영원한 여성의 화신으로 등장하며 "천 년 동안 남자들이 무엇을 욕망하게 되었는지를 표현"하는 존재다.

페이터는 "그녀는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말하며 "이상한 생각과 환상적인 몽상, 절묘한

열정"이 깃든 영혼으로 빚어진 아름다움을 가진, 마치 죽음을 무릅쓴 "뱀파이어"와 같다고 말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페이터의 글을 떠올리지 않고는 <모나리자>를 감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페이터의 대담한 상상력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터가 <모나리자> 초상화에 레오나르도는 생각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가미했는지

누가 다시 신경이나 쓰겠는가?"

 

 

 

 

발코니의 젊은 여인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 1504년 경, 펜과 잉크, 22×1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작업실에서 <모나리자>를 제작하던 시기에

라파엘로가 그것을 보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모델의 포즈는 <모나리자>와 같다. 의상도 비슷하고 머리 장식 또한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 속 모델은 나이가 조금 더 어려 보이며

보다 부드럽고 풍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단순한 복제가 아닌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밀레의 모나리자 드로잉

귀스타브 르 그레이(1820~1884)

1854~1855년, 일부민 실버 프린트, 29×19cm

장 폴 게티 미술관, 켈리포니아주

 

복제된 사진들은 <모나리자>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르 그레이가 이 미미지를 만들 당시에는 그림 원본이 어두워 그것이 가진 특징을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섬세하게 묘사된 드로잉을 촬영했다.

오늘날 우리는 고해상도 이미지를 통해 전시장에서 그림을 직접 접할 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모나리자(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따라서)

루이지 칼라마타(1802~1869)

1857년, 에칭, 56.5×43.5cn

필라델피아 미술관, 펜실베이니아주

 

초기 판화와 에칭은 레오나르도의 예술이 가진 미묘함을 단순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칼라마타는 원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핝 섬세한 그의 드로잉(1825~1827)을 바탕으로,

레오나르도의 정교한 ㅋ컬러 그러대이션을 단색으로 바꾸기 위해 십자형, 선, 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동판을 조각했다.

 

 

 

 

열쇠가 있는 모나리자 

페르낭 제제(1881~1955), 1930년, 켄버스에 유채, 91×72cm

페르낭 레제 국립미술관, 비오

 

한 가게의 창문에서 <모나리자> 엽서를 본 레제는 그 이미지가

자신의 주머니 속 열쇠와 같은 일상적인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살바도르 달리와 마르셀 뒤상은

저렴한 복제품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 그림의 상품화에 주목했다.

 

 

 

 

19세기 말 대중들은 몇몇 엘리트와 문학 애호가들에 의해 형성된 <모나리자>의 환상을 공유했다.

또한 인쇄술과 사진의 발전은 레오나르도의 정교함을 담아낸 고품질의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이 <모나리자>를 알게 되었다. 멋진 작품의 판화 혹은 삽화가 들어간 잡지

와 함께 생산된 인기있는 새로운 엽서는 <모나리자>의 팬층을 넓히고 다양화했다.

 

그리고 많은 이가 여가를 누리게 되면서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의 미술관 방문 횟수가 19세기 마지막

25년간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관광업이 발전해가던 그 무렵에는 파리에

방문할 때 루브르 박물관에 들르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수많은 여행

가이드가 <모나리자> 모델의 미스터리함을 강조하는 언어를 사용해 그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1900년 판 「베데커의 파리와 그 주변」에 따르면, 캔버스의 "어두워진 상태"

조차도 "시인과 작가들이 세대를 거치며 묘사하던 스핑크스 같은 미소"가 가진 매혹적인 힘을

결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이었다.

1911년 8월 21일 이른 아침, 박물관에 유리공으로 임시 고용된 노동자 빈첸초 페루자는 벽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낸 뒤 자신의 작업복 안으로 밀어 넣고 도망갔다. 이후 그림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박물관 측은 건물 전체를 조사했지만, 유일한 단서는 계단 통로에서 발견된 빈

프레임 뿐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이 대중 관람을 제한한 일주일 동안 한 선정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이 사건이 소문나기 시작했는데, 한 미친 사람이 문을 열자 사람들은 벽의 빈 공간에 애도

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몇 달간 허위 단서에 시달리면서 그림을

찾으려는 노력이 잦아들었고 대중의 관심도 사라졌다. 그동안 페루자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에 그림을 보관했는데, 나중에 그는 도난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 아니라 애국심이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동안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잘못

믿은 것이다. 1913년 11월 29일 페루자는 50만 리라에 해당하는 그림을 고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피렌체에

기반을 둔 골동품 상인 알프레도 제리에게 연락했다. 제리는 우피치 미술관의 큐레이트인 조반니 포지를

불러 그림이 진품 임을 알아냈고 경찰에 신고했다. <모나리자>는 12월 19일 로마에서 열린 행사를 통해

프랑스 대사에게 인계되었다. 어느 때보다 더 유명해진 이 그림은 그해 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루브르 박물관의 군중들

<모나리자>를 보고 싶어하는 군중의 존재는 애초에 친밀한 초상화로 그려진 작품의 진가를 온전히

알아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많은 관람자가 전시장에 잠시 서서 휴대전화로 그림을 찍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다. 이로 인해 박물관 직원들은 "<모나리자>는 또 다른 걸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전시실 안을 둘러보세요"라는 표지판을 게시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가 <모나리자>를 훔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림은 점령 상태이던

파리에서 조용히 이동해 프랑스의 다른 여러 장소에 보관되었다. 20년 후 <모나리자>는 미국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부탁으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의 도움하에 1963년 워싱턴 D.C.의 국립

비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잠시 대여했지만 그 이후로는 한번도 루브르 박물관을 떠난 적이 없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퍼센트는 방문 이유로 <모나리자>를 꼽았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싶은 대중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감상 경험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다.

1919년까지 하루 평균 3만 명의 사람들이 전시장에 몰려들었다.

 

미술 평론가 제이슨 파라고는 <모나리자>를 보기 위한 긴 대기줄을 일컬어

'철옹성 같은 뱀'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처럼길고 긴 줄을 서서 전시실에 들어간 사람들은

작품 근처에 1분도 채 있지 못하며 그 시간마저도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 분주히 움직이곤 한다.

 

작품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는 군중의 현실이 실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의 위대한 업적과 그림을 둘러싼 전설적인 이야기들은 굳건히 인기를 지켜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모나리자>는 명화의 개념을 정의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인용: 데보라 N. 맨커프 著 / 조아라 易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중에서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 2023.09.13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0) 2023.09.12
비너스의 탄생  (0) 2023.09.10
약수초등학교 42회 동창모임  (0) 2023.09.03
초교 동창 고희연古稀宴  (0) 202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