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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젤틸레스키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안토니오 루포에게 아르테미시아 젤틸레스키(1649년 8월 7일)

 

 

 

 

아시리아가 베톨리아 지방을 포위하기 전 날, 유대인 과부 유디트는 침략군 사령관 홀로페르네스와 

식사를 하기 위해 최고급 드레스를 입었다. 홀로페르네스는 식사 내내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만취했다.

이때 유디트는 시녀 아르라의 도움을 얻어 재빨리 칼로 그의 목을 벴다. 두 여성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구해냈다는 다소 섬뜩한 증거로 자른 머리를 들고 적의 진영에서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갔다.

 

유디트의 영웅적 행위는 유대 경전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기원전 2~2세기경)에 포함되어 있다.

유대 학자들은 이 내용을 야사 정도로 여겼지만, 다수의 초기 기독교 교회 학자들은 이를 참고해

더 오래전의 텍스트를 연구하고 교훈적인 일화를 제공하는 자료로 사용했다.

 

살아남은 유디트의 전설적인 일화는 반종교 개혁 기간에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21세기에 그녀의 이야기는 성서보다는 아르테미시아 젤틸레스키의 그림을 통해 더 잘 알려져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사아 젠틸레스키(1593~1657년경)

1613~1614년경, 캔버스에 유채, 146.5×105cm, 우피티 미술관, 피렌체

 

 

 

아르테미시아는 17세기 로마 가정에서 자란 여성으로, 그녀 삶의 많은 부분은 성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교류와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마주한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또 다른 여성인 어머니의 역할과 책임을 부과했다.

 

미래의 결혼은 가족의 사회적 지위는 물론 사회에서의 그녀 신분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과는 달아버지의 직업을 통해 남성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로마의 저명한 화가이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을 집에 있는 작업실로

초대하곤 했다. 그는 딸의 잠재력을 일찍 알아챘고 아들들에게 시킨 훈련을 그녀에게도 동일하게 시켰다.

 

그녀는 재능 덕분에 자신감이 쌓였고, 심지어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장기간의

재판을 했던 성폭행이라는 잔인한 경험도 그녀의 야망을 꺽지 못했다.

몇 년 후, 아르테미시아는 예술에서 "여성의 이름은 작품을 볼 때까지

의심을 불러일으다"고 썼다.

 

그녀는 작품이 성별보다는 예술적 역량의 맥락에서 보이도록

여주인공 유디트의 이야기눈을 돌려 첫 번째 걸작을 만들었다.

 

1612년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토스카나 대공비 로렌의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열아홉

살이 된 딸 아르테미시아가 3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으며 그 능력이 "비길 데가 없다"고 전했다.

 

이 기록은 아르테미시아의 경력이 1609년 즈음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훈련을 받은 시기는 더 일찍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아마 도제들이 전통적으로 하던 일들(물감을 섞고, 작업실을 청소하고, 요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스승이 하는 일을 지켜보는 등)을 했으리라고 추정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2~1613년, 켄버스에 유채, 159×125.5cm, 카포디몬테 미술고한, 나폴리

 

아고스티노 타시의 범죄에 대한 법적 조치의 여파 때문에 사람들은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장면을 주제로 선택해 그린 것을 종종 아르테미시아의 개인적인 보복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전문가로서 한 선택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르테미시아는 복수를 향한 욕망을 표현하기보다는, 영웅적인 동기로 적(남성)을 이겨낼 수 있는

여성을 묘사함으로써 모두가 남성이던 당시 원로 예술가들의 유명한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하도록 유도했다.

 

 

 

 

오라치오는 우아하고 자연주의적인 특징으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아르테미시아가 훈련받던 시기의 그는 친구이자 동료이던 카라바조의 극적이고 혁신적인 형식에

영향을 받아 더욱 현실적으로, 감정을 담아 작업했다.

 

오라치오도 카라바조처럼, 전통적인 관행이었던 선행 연구를 다루는 과정 없이

실제 모델을 보고 직접 그림을 그렸다. 아르테미시아는 서명과 날짜가 기입된 그려의 첫 번째 작품

<수산나와 장로돌>(1610)에서 강렬한 표현과 실제 같은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는데, 이를 본 아버지의 동료 몇몇은 오라치오가 그렸을 것이라며 그녀의 서명을 부정했다.

 

아르테미시아의 젊은 시절은 여러 면세서 같은 세대와 환경에 있던 다른 여성들과 비슷했다.

그녀의 세계는 16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명의 남동생을 돌보면서 가사를 하는 데에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할 수 없었고,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는 일은 무례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집에 방문할 때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로 했지만,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동안 견습생, 동료 예술가, 모델 등 가족이 아닌 외부 사람들과 일절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모든 조심스러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1611년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가까운

동료이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다.

 

다음 해 3월 오라치오는 타시가 딸을 성폭행 후 결혼하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처녀성 강탈' 혐의로 고소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증언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재판관의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강한 끈으로 손가락을 묶어 조이는 고문을 견뎌냈다.

 

11월 27일 타시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로마에서 추방당할 것인지 아니면 고된 노동을

할 것인지의 기로에서 추방을 선택했다. 이틀 후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법률 고문인

피에란토니오 디 빈첸초 스티아테시와 결혼했으며ㅕ 1613년 초에 피렌체로 이주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재판 기간 중 혹은 직후, 유디트 주제에 대한 그녀의 첫 번째 해석을 시작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유디트를 주제로 한 작품이 과연 그녀가 겪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영향인지,

여성 영웅주의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카라바조(1571~1610). 1599년경, 켄버스에 유채, 145×195cm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회화관, 로마

 

아르테미시아가 이 그림을 보았는지 여부와 관련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이 작품은 은행가 오타비오 코스타가 소유한 개인 소장품이었다.

참수 장면을 그리기로 한 아르테미시아의 결정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근육질의 홀로페르네스를

묘사한 것은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 대한 그녀의 지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유디트를 강하고 힘있게 묘사한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은 카라바조 그림에 등장하는 깨끗한

옷차림의 여주인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카라바조 작품 속 유디트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  안에서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홀로페르네스를 제압한다.

 

 

 

 

 

예술가가 삶에서 경험한 일들은 당연히 그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왜 이 주제에 집중했는지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맥락들을

탐구해보아야 한다. 유디티 이야기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부티첼리, 안드레아 만테냐, 조르조네,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눈에 띄는 작품들과 함께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고귀함과 용감함, 여성미를
한 인물에 
담아 그려낼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라는 이유에서였다.

 

피렌체에 있는 도나텔로의 장엄한 조각이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칼을 들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웅장한 유티트 금동 조각은 무자비한 침략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나타낸다.

 

이는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 앞의 커다란 시뇨리아 광장에서 공덕을 상징하는 조각으로 설치되었다.

그렇기에 아르테미시아는 로마를 떠나기 전에 이미 유디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1608년에 오라치오는 유디트와 시녀 아브라가 소름끼치는 전리품을 가져가는 모습을 그렸고,

그보다 10년 전에 카라바조는 같은 주제를 살해의 가작 극적인 순간을 담은 장면으로 표현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간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개인 소장품이었으므로) 그의 평판은 들은 바가

있었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광장에 설치되어 있던 도나텔로의 유명한 작품과 동일한 주제를 그리기로

한 선택은 피렌체에서 그녀의 명성을 확립하기 위한 당돌하고 용감한 시도였다.

 

그녀는 선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대담하고 솔직하면서도 섬세한 자신만의 해석을 선보였다.

아르테미시아는 1612년과 1614년 사이에 두 가지 버전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렸다.

아브라는 힘겹게 싸우는 홀로페르네스를 쓰러뜨리고 유디트는 그의 목에 칼을 꽂는다.

그녀의 적나라한 묘사는 비길데 없이 훌륭하다.

 

홀로페르네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거대한 주먹으로 아브라를 밀쳐낸다.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이불은 피에 더럽혀진다.

하지만 유디트는 요동하지 않는다.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를 침착하고 단호하게 그렸으며,

자신의 모든 무게를 실어적이 가진 힘에 대항하는 상황을 표현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크리스토파노 알로리(1577~1621)

1610~1612년, 캔버스에 유채, 139×116cm, 파티 궁전, 피렌체

 

유디트에 대한 알로리의 해석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된 관습적인 주제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의 전기 작가인 필리포 발디누치에 의하면 알로리는 유디트와 시녀 역할에 각각

그의 정부 라 마차피라와 어머니의 초상화를 넣음으로써 화면 속 이야기에 개인적인 서사를 더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부분)

 

칼자루를 단단히 잡은 유디트는 세 인물의 팔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장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의 움켜쥔 오른손과 팔뚝은 계속해서 칼을 아래 방향으로 밀고 있으며, 그녀의 몸 전체에서 힘을 이끌어낸다.

칼, 유디트의 팔뚝, 홀로페르네스의 오른팔 윗부분에 드러난 옷의 형태를 통해 유디트가

효율적으로 힘을 쏟으려 침대에 무릎을 꿇었음을 알 수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와 시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2~1639)

1608년경, 캔버스에 유채, 136×160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오슬로

 

같은 주제를 그린 대부분의 화가는 참수 이후의 장면을 묘사했다.

두 여성은 그들의 대담한 임무를 완수한 후에 적진에서 도망쳐야 했다.

오라치오는 극적인 명암과 간단한 몸짓으로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유디트는 시녀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음으로써

그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도록 했다.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작품은 나폴리의 카포디몬데 미술관과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데,

무엇이 더 먼저 그려졌는지 명확히 기록된 바는 없다, 과거 어느 시점에 나폴리에 소장된 작품의 일부가

잘리면서 구성의 전체적인 범위가 변형되었지만 정밀하게 구조화된 인물 배치에는 변화가 없었다.

두 그림 사이의 유사성을 살펴보면 아르테미시아가 한 작품을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에 많이 쓰이던 작업 방식이었다.

 

1983년, 나폴리 버전을 엑스레이로 분석한 결과 펜티멘티(수정하기 이전의 이미지)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아르테미시아가 캔버스에 작업을 해나가면서 구성을 변경했음을 보여준다.

이 물리적 증거는 그녀가 우피치 버전을 그리기 이전에 나폴리 버전의 구도를

먼저 확정했다는 사실을 가늠하게 한다.

 

구성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그림 사이에서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이는 아르테미시아의 열정은 물론 그려가 그림을 보는 관객에 맞추어 조금씩 다르게

작업하는 능력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두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유디트의 의상인데 어르테미시아는 우피치 버전에서

화려한 파란색 드레스를 금색으로 바꿔 그렸다. 당시 염료가 비쌌던 만큼 두 색상 모두 부를 나타냈으나

피렌체에서는 금색이 더 유행했다. 팔을 걷은 유디트의 소매에 잡힌 주름은 벨벳을 연상시키는 반면

자잘하게 구겨진 금색 의상은 토스카나 귀족이 선호하던 섬세한 실크 브로케이드

직물을 재현했다고 추측된다.

 

우피치 버전에서 유디트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팔찌를 착용하고 있으나 나폴리 버전에서는

팔에 장신구가 없다. 우피치 버전의 화려한 장식은 세련된 피렌체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 이후에

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이던 메디치가에서 이 그림을 오랫동안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르테미시아가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주목을 받기 위해 그렸거나 메디치 가문이

아르메티미시아에게 작품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두 그림의 극적인 운동감은 유디트라는 주제가 가진 영웅주의에 대한 아르테미시아만의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먼저 그려진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을 갖게 한다. 앞선 예술가들은 유디트가 임무를 완수했을 때 그녀의

침착하고 은밀한 모습을 강조하며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을 그리기를 선호했다.

 

특히 카라바조가 묘사한 참수 장면에서의 유디트는 마치 자신의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보인다.

이와 달리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티는 몸을 적극적으로 기울인다. 홀로페르네스의 침대에 무릎을 지렛대처럼

고정한 그녀는 몸 전체의 무게로 상대를 제압한다.

 

곧게 뻗은 팔은 어깨와 등을 앞으로 움직이게 만들며 자세에 힘을 더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인물의 크기와 힘의 차이, 크고 건장한 남성을 여성이 압도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고려해 그림을 그렸다. 우피치 버전에서는 유디트의 위치가 약간 바뀌면서 행동이 더욱 격렬해진다.

 

몸은 강하게 비틀고 오른쪽 어께를 들어 칼을 가진 팔에 힘을 더한다.

손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있어 마치 그의 피부를 파고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폴리 버전에서 그녀의 얼굴은 거의 무표정으로, 힘에 부치는 행위를

사력을 다해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렸으며 집중한 입술은 긴장한 듯 팽팽하다.

우피치 버전은 더욱 고조된 상황을 담고 있어 훨씬 잔인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안 상처에서

피가 솟아나 유디트의 금빛 드레스와 가슴에 튄다.

 

17세기 후반 필리포 발디누치는 이 그림이 주는 효과를 '적지 않은 공포'라는 모순되고 절제된 표현으로

설명했지만, 18세기 즈음 대공비 마리아 루이사가 '끔찍'이라고 언급한 후 그림은

궁전의 어두운 계단으로 옮겨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와 시녀

1623~16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87×142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미시간주

 

아르테미시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주제(홀로페르네스의 천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유디트와 아브라)의

작품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강조했다. 오라치오늬 작품에서와 같이 유디트는 몸짓으로 아르라에게 주의를

주는데, 들어 올린 그녀의 손은 초의 불빛으로 밝게 빛난다. 유디트의 다른 손에선 방어할 준지가 된

칼이 들렸고, 아브라는 잘린 머리를 자루에 넣는 동작을 하고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의 이야기로 돌아가

더욱 일반적인 주제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와 시녀'를 다룬 두 그림을 제작했다.

초기 그림(1614~1615, 우피치 미술관 소장)에서 유디트는 어깨에 칼을 얹었고, 아브라는 잘린 머리가 담긴

바구니를 엉덩이에 댄 채 균형을 잡고 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어두운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후기 그림(1623~1625,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에서 그들은 여전히 홀로페르네스의 천막 안에 있다.

아브라는 자루에 머리를 숨기기 위해 무릎은 꿇었고 유디티는 준비된 칼을 쥐고 왼손을 들어 그대로

있으라고 주의를 준다. 두 작품을 카라바조가 개척한 새로운 사실주의를 아르테미시아가 완전히

숙련된 솜씨로 선보였다는 점과 그녀의 아버지가 구축한 양식(자연스럽게 표현되 인물과 감정이

드러나는 몸짓, 극적인 조명, 감정적 슽오리텔링 등)을 온전히 실천했음을 보여 준다.

 

아르테미시아가 두 번째 그림을 그렸을 때,

그녀는 여성 최초로 명망 있는 아카데미아 텔레 아르티 델 디세뇨에 입학해(1616)

뛰어난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그 후 수십 년 동안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심지어는 런던에서 일하며 범유럽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붓을 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오른손

피에르 뒤몽스티에 2세(1585~1656)

1825년, 종이에 검은색과 빨간색 분필, 22×18cm, 대영 박물관, 런던

 

그림 상단의 프랑스어 명문에는

"로마의 탁월하고 박식한 여인 아르테미시아의 귀중한 손을 본떠, 파리의

피에르 뒤몽스티에가 로마에서 1625년 12월 마지막 날 제작"이라고 적혀 있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 이 그림 뒷면의 또 다른 명문에는 손의 아름다움을 오로라 여신의 것과 비교하며

"경이로움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데에 천 배의 가치가 더 있다"는 내용이 쓰였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가 세상을 떠난 후 명성은 서서히 시들어갔고 수 세기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성 예술가의 삶과 경력을 회복시키고 재평가하려고 노력하면서

20세기에 와서야 되살아났다.

 

'아르테미시아'라는 이름은 그녀의 중요한 회고전 제목에 단독으로 사용될 만큼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에는 젠틸레스키라는 성을 제외하고 종종 이름만으로 불리곤 한다.

그러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녀를 진정한 예술가로 정의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젊은 시절의 걸작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별, 나이 또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제한받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유디트 이야기를 의로운 행동의 본보기 뿐만 아니라 용기와 결의가 있는 여성,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롤모델, 그리고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후원자에게 한 주장에 보답하는 여성 그 이상으로 묘사했다.

 

그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인용: 데보라 N. 맨커프著 / 조아라易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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