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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황금 옷을 입은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도난당한 예술의 역사는 도둑맞은 삶의 역사와 같다

조피 필리와  게오르크 가우구슈(2007)

 

 

 

 

 

1941년, 빈에 위치한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는

한 웅장한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우울한 눈, 창백한 안색, 풍성한 올림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였는데,

빈 화파 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풍성한 장식으로 빛을 뿜어내는 이 그림을 본 한 평론가는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가 "반짝이는 금박으로 덮여 있다"고 서술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클림트는 아르누보 디자인의 화려함, 아방가르드 미술의 추상

패턴 등 여러 시대와 나라의 예술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빈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후원을 받곤 했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부유한 그들은

자유주의적 견해와 사업가 정신을 가졌으며 예술에 다방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 속 모델은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존경받는 구성원이었지만, 작품이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소장되었을 때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에 속해 있었다.

 

독일 정부는 고귀한 그림과 그들의 숙청 대상인 국민 사이의 관련성을 제거하기 위해

모델의 이름을 없앤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대중에 공개했다.

 

"도난당한 예술의 역사는 도둑맞은 삶의 역사와 같다"는 표현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황금 옷을 입은 여인)>만큼

잘 설명해주는 그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과 예술에 대한 관대한 지원이 계층의 상향 이동과 문화적 자본을

의미하던 시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세기 전환기의 빈이라는 도시

정체성에 이상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클림트는 현대적이고 예술적인 시각을 이전 시대의 고급스러운

소재들을 활용해 발전시켰고, 여성 모델들의 매력적인 모습과 정제된 배경,

즉 황금시대를 의미하는 황금빛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우아한 외모와 세련된 살롱만큼이나 지적 호기심과 박애주의로

존경받던 인물인 아델레 블로흐마우어는 그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나치 정권은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의

소유물을 취하고 그들이 성취한 흔적은 지워내는 아리아인화를 시행했다.

그 결과 그녀의 가족과 공동체는 지위와 재산, 생명을 잃었다.

 

그 어떤 그림도 누군가의 파괴된 삶과 공동체의 고의적인 폐단을

대체할 만한 가치를 가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 의뢰된 순간부터 몰수된 과정, 가족에게 다시 돌아가기

까지의 전체적인 여정은, 클림트의 빛나는 초상화가 세기의 명화가 됨으로써

아델레가 지녔던 본래의 역할을 결과적으로 회복시켜주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황금 옷을 입은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1903~109607년, 캔버스에 유채, 은박 · 금박, 138×138cm

노아에 갤러리, 뉴욕주

 

 

 

 

1899년 아델레 바우어와 페르디난트 블로흐가 결혼하면서 양 가문이 가진 재산 사이의 유대

관계가 강화되었다. 아델레 아버지의 가문은 오랫동안 금융업에 종사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금융 기관 중 하나인 바이너 방크페어라인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족은 설탕 무역과 제조 산업이 확대되면서 성공 가도를 걷게 된 기업가 집안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1년 전, 아델레의 여동생 테레제는 페르디난트의 형제 구스타프와 결혼했으며

1915년 바우어의 마지막 후손이 남성 상속인 없이 사망했을 때 이 두 부부는 블로흐바우어라는

연결된 이름을 사용했다. 아델레는 상냥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인물로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상류층 부르주아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 확장되었다.

 

그녀는 저명한 지식인과 문화계 인물들을 정기적으로 집에 초대해 환대하는 모임을 열기도 했다.

페;르디난트는 예술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비더마이어의 거장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발트뮐러의 작품은 물론 오귀스트 로댕과 조르주 민을 포함한 모더니스트의 조각 작품,

방대한 18세기 빈 도자기 컬렉션등 중요하고 다양한 작품을 수집했다.

 

그는 구트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좋아했으며 빈의 현대미술 작품 또한 수집했고,

1903년에는 아델레의 초상화를 클림트가 그리도록 주선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사진

1910년경,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빈

 

당시 여성 대부분의 사회적 지위와 마찬가지로, 아델레 또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독서를 매우 좋아했으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 중에는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부인 아마 베르펠,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사회주의자 율리우스 탄들레르와 같은 진보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회주의 사업을 지지했고, 어린이 자선단체와 성인 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

기원전 547년경, 모자이크, 산비탈레 성당, 라벤나

 

1903년 라벤나를 방문했을 때 클림트는 산비탈레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에 감탄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대리석, 자개, 금으로 제작된 유리 조각들의 깊이와 광택을 떠올리며

그의 '황금기' 그림에 이 화려한 미학적 특징을 반영했다.

 

 

 

 

 

금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는 빈 쿤스트게베르베슐레(오늘날의 빈 응용미술대학)에서

건축 미술을 공부하고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1888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수여하는 황금 공로 훈장을 받는 등 일찍이

인정받았지만, 1897년에 성공이 보장된 길을 뒤로 하고 빈 분리파를 창설했다.

 

전시하는 단체와 예술가 협회로서의 빈 분리파는 통일된 회화적 양식보다는

원칙을 중요시했다. 드들은 국제적 유대를 추구하고 국립 아카데미 쇼비니즘을 거부했으며,

순수예술과 장식예술이 원할하게 협력ㄷ할 수 있다고 믿었다.

 

클림트는 강한 형상 작업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받은 독특한 장식 스타일을 개발했다.

또한 아르누보 장식의 현대적 혁신과 주제에 관한 이해하기 어려운(때로는 에로틱하게 묘사된)

상징주의적 접근법을 자신의 그림에 적용했다.

 

20세기 초 클림트가 아낌없이 사용한 금박으로 인해 해당 시기는 '황금기(약1901~1908년)'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공공 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작품 의뢰를 받으면서

동시에 초상화 작업도 진행했다.

 

그의 화려한 미학은 여성 모델들에게 특히 어울리는 듯했으며, 클림트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빈의 부유한 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저명한 여성들을 많이 그렸다.

 

 

 

 

 

 

정면을 향해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관자놀이에 받치고 있는

아델레 브로흐바우어

1903년, 종이에 검은색 분필, 45×32cm

누이에 갤러리 뉴욕주

 

1903년에 그려진 100점 이상의 스케치는 클림트가 그린 아델레의 포즈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녀의 옷에 점점 더 가볍고 섬세한 터치를 사용했으며, 얼굴은 강하고 자심감 있는 획으로
특징을 포착했다. 클림트는 다소 긴장된 움직임을 암시하듯 가느다란 선으로 그녀의 손을 표현했다.

스케치에서 인물을 받쳐주던 안락의자는 완성된 그림 안에서 장식적인 배경 안에 녹아들었다.

 

 

 

 

아델레는 1903년 8월 22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상화를 언급했다.

아델레와 페르디난트, 테레제와 구스타프는 자매의 부모에게 이 그림을 기념일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클림트는 너무 바빠서 기한 내에 작업을 완성하기 어려웠다

 

이에 페르난트는 자신이 나서서 클림트에게 직접 작업을 의뢰하기로 결심했다.

아델레는 "부모님이 인내심을 가지셔야 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 편지와 준비 스케치 외에, 그림의 진행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03년 후반에 클림트는 아델레가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모습을 100점 이상 스케치 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안락의자에 앉은 포즈를 요청했고, 헤어스타일은

그녀 특유의 올림머리인 시뇽으로 정했다.

 

그녀는 모든 스케치에서 동일한 가운을 입고 있는데, 이는 각 스케치에 등장하는

어깨끈, 헐렁한 소매, 장식적인 요크(어깨나 허리 쪽에 덧대는 천 - 역자 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하이웨이스트 치마를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904년 초 클림트는 의상을 강조한 스케치를 30여 점 더 제작했다.

그러나 1907년 만하임에서 열린 국제미술전시회에서 완성된 초상화를 선보일 때가지의

이 작품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황금 옷을 입은 여인) (부분)

 

금색 가운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다. 금속으로 놓인 자수, 비즈, 아플리케로 무겁게 장식된

작품 속 의상은 스케치에서 보인 가느다란 선과 대조적으로, 빛나는 갑피처럼 앋레레의 몸을 감싸

고 있다. 아델레는 아이아몬드와 진주로 장식된 여러 줄의 목걸이를 했다.

페르디난트는 조카 마리아가 결혼할 때 이 목걸이를 주었지만 나치에게 빼앗겼다.

 

 

 

 

아델레의 사진은 클림트가 얼마나 탁월하게 그녀의 모습을 잘 묘사했는지 보여준다.

도자기 같은 창백한 피부와 검은색 머리칼, 짙은 갈색 눈, 선명하게 강조된 진홍색 입술의 대조는

신비스러운 상징주의적 분위기를 더하고, 이는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더욱 배가된다.

 

그녀는 마치 몽상에 빠진 듯하며, 달콤씁쓸한 기억들로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우울해 보인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독특한 자세를 하고 초조한 듯 서로 맞물려 있다. 아델레는 스케치 속 가운과

유사한 스타일의, 장식적인 선들이 있는 금색 가운을 멋지게 입었다.

 

또한 그녀는 왼팔에 금색과 은색 팔찌를 착용했고 목에는 고급스러운 보석들로 장식된, 매우

세련된 '목에 꼭 맞는 목걸이'를 했다. 그림에는 안락의자도 있는데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만

표현 되었으며 아델레는 의자에 앉지 않고 그 앞에 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표면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종교적 이미지부터 왕실 초상화, 일본 병풍, 동방 정교회의 상징, 이집트 무덤

에서 발견되는 귀중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관성과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1903년에 이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클림트는 베네치아와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산비탈레 성당의 빛나는 비잔틴 모자이크를 보게 되었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의뢰해 제작된 것으로, 테오도라 황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호화로운 재료(대리석, 자개, 금과 접합된 유리 테세라)가 그를 매료시켰다.

 

이 경험으로 그는 캔버스에 금박을 입히기 시작했으며, 겹겹이 쌓아 올린 금박과 은박,

보석처럼 밝은 안료인 진사 빨강과 코발트블루로 그림의 표면을 화려하게 채웠다.

 

이 작품이 만하임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미술 평론가 루드비히 헤베시는 클림트의

이러한 기법을 말모자이크라고 묘사하면서 그의 초상화는 보는 사람에게

"보석을 탐색할" 기회를 주는, "눈을 위한 향연"이라고 극찬했다.

 

 

 

 

 

 

좌) 아델레 브로흐바우어의 초상 1(황금 옷을 입은 여인) (부분)

이 의상의 패턴은 다양한 영향을 반영한다. 주된 것은 이집트 미술로, 특히 신의 눈 모티프,

코발트와 흑단으로 표현된 직사각형, 여러 크기로 반복되는 삼각형 등이다.

클림트는 상징적 기능보다는 시각적 풍부함을 위해 옷을 황금색으로 표현했으며, 역사적

의미보다는 고대의 호화로운 시각 문화와 연결되길 원했다.

 

 

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황금 옷을 입은 여인) (부분)

격자무늬의 사각형 띠로 시작되는 벽의 다도와 같은 부분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클림트 특유의 호화로운 색채를 고려할 때 녹청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아델레의 볼륨감 있는 가운의 곡선을 돋보이게 하고 물감의 질감에 입체감을 더한다.

클림트는 마치 금세공인처럼 표면 작업을 했는데, 옷 끝자락에 아델레의 이니셜인

'A'와 'B'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새겨두었다.

 

 

 

 

 

만하임 전시회에서의 데뷔 이후 클림트는 1908년 빈에 새로운 문을 연 쿤스트샤우에서

이 초상화를 다시 선보였는데, 모든 비평가가 헤베시만큼 그를 극찬하지는 않았다.

 

테오 차셰는 「바이너 엑스트라블라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 초상화는 "블로흐보다 황동에 더 가깝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후원자는 매우 만족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1912년에 다델레의 두 번째

초상화를 의뢰했고, 후에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인 4점의 풍경화와 가족의 친구

아말리 주커칸들의 초상화 또한 손에 넣게 되었다.

 

1919년 가족이 엘리자베스 스트리트에 있는 넓은 맨션으로 이사했을 때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클림트의 방'이라는 특별한 살롱을 집 안에 만들었다.

아델는 그 그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1923년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할 때 페르디나트가

사망하면 자신의 초상화 2점을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기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아델레는 뇌수막염(혹은 뇌염)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어린이 자선 단체인 킨더프로인데에 많은 기부금을 냈으며, 불우한 성인을 위한

학교인 폴크스하임 오타크링에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특별한

살롱 안에 초상화를 보관했으며 공간의 이름을 '기억의 방'으로 바꿨다.

 

1938년 3월 초 페르디난트는 빈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직후, 독일 제국은 독일어권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확장주의 전략인 '안슐루스'의

일부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합병 후에는 유대인의 사업체와 재산, 소유물을 박탈하는

조직적인 약탈이 이어졌다.

 

독일 행정관이 수행하고 이에 공모한 오스트리아 공무원들의 지원으로 실행된

소위 '아리아인화' 전략을 통해 나치 정권과 고위 관리들을 부유하게 하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모든 흔적을 말소하려 했다.

 

페르디난트가 자리를 비운 4월 27일, 그는 10년간 탈세했다는 혐의와 함께 다른 허위

주장들로 기소되었고 이 조작된 부채로 결국 블로흐바우어 가족은 재산을 박탈당했다. 이듬해

여러 박물관 큐레이터와 기념물 사무소 대표를 포함한 예술 전문가 그룹은 블로흐바우어 가족의

미술 소장품을 감정 평가했으며, 바우어와 페르디난트의 귀중한 소유물을 몰수했다.

 

말트뮐러를 비롯한 독일 주요 거장들의 작품은 나치의 고위 관리들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중 최고 작품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할 총통미술관 건립을 위해 총통 법령으로

선정되었는데 총통미술관은 히틀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린츠에 지어질 예정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오스트리아 국보로 지정되어 해외 반출이 금지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 변호사이자 나치 이데올로기의 오랜 지지자였던 에리히 퓌러가 바우어 가족의

벌률 고문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 작품과 관련된 매각을 진행했다. 그중 도자기 컬렉션은

경매에서 여러 경로로 팔려나갔고, 중개인 역할을 한 퓌러를 통해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는

이 황금 초상화와 클림트의 풍경화 1점을 소장하게 되었다.

 

1941년 스위스로 망명한 페르디난트가 친구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보낸 편지 중

"그들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마도 난 가여운 내 아내의 그림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쓴 부분을 보면, 그가 주저하면서도 그림을 되찾고자 한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는 클림트의 그림을 오스트리아 작가가 모더니즘 미술에

공헌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했고, 1942년 아델레의 두 번째 초상화를 입수해 이듬해

클림트의 작품 활동 전반을 보여주는 회고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빛나는 주요 출품작이자 예술가의 황금기를 나타내는 훌륭한 예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은 금빛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초상화라는 의미로, 공식

카달로그에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의 초상 2

1912년 캔버스의 유채, 190×120cm, 개인 소장

 

블로흐바우어 부부가 의뢰한 두 번째 초상화는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장식적이지만 더욱

자연주의적이다. 이 작품에서 아델레는 우아한 앙상블을 입었으며, 창백하고 독특한 그녀의 얼굴이

강조되도록 넓은 챙과 깃털 장식이 있는 모자를 썼다. 화려한 벽지의 꽃무늬 카펫은 의상의 패턴과

톤을 함께한다. 이러한 연결은 모든 예술의 조화로운 융합에 대한 빈 분리파의 믿음을 상기시킨다.

 

 

 

 

 

펜르난트는 독일 제국의 패배를 볼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지만,

그의 소유물이 반환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블로흐바우어 가문의 생존자들은

그 후 50년 동안 자신들의 재산과 그림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오스트리아 배상법은 과거 기밀문서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했는데,

마지막으로 살아 있던 가족 구성원(아텔레와 페르디난트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이 법에 착안해 벨베데레에 있는 그림을 좇기 시작했다.

 

변호사 에릭 랜돌 쇤베르크와 함께  이 일을 진행한 알트만은, 오스트리아 언론인 후베르투스

체르닌의 연구를 활용해 그림 인수 당시 페르디난트가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벨베데레가 숙모의 뜻을  잘못 해석해  모와 삼촌의 그림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허락한 미국 대법원의

결정이 가져온 일련의 청원 과정과 막대한 법원 비용 등을 버텨내는 데

알트만은  거의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궁극적으로 알트만과 그녀의 변호사는 사건을 중재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고,

2006년 1월 3명의 오스트리아 판사로 구성된 재판에서

그녀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사과나무 1

1912년경,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개인 소장

 

맑고 밝은 안료를 톡톡 두드려 그린 클림트의 풍경화는 그의 황금기에 등장한 말모자이크 기법을

반영한다. 전경에는 분홍색과 보라색 야생화가 융단처럼 깔려 있고, 나무 위의 빨간 사과와 다채로운

색조의 잎들이 햇빛을 받아 색유리처럼 반짝인다. 이 그림은 페르디난트의 소장품이 압수된 직후,

의심스러운 상황 속에서 황금 초상화와 함께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소장되었다.

 

 

 

 

알트만이 그림을 손에 넣었을 때 그 모델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널리 인정을 받았지만,

그림이 많은 사랑을 얻고 영향력이 커져도 제목은 여전히 <황금 옷을 입은 여인>으로 알려졌다.

 

알트만의 노력과 끈기는 그림이 정당한 소유자에게 되돌아가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한 여성의 이미지가 가진 진정한 정체성을 다시금 이 금빛 초상화와 연결시켜주었다.

 

역사상 가장 전략적이었던 대량 학살도, 오스트리아 문화 발전에 본질적으로 공헌한

공동체의  주요 인물이던 이 여성의 존재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엇던 것이다.

 

초상화를 손에 넣고 6개월 후, 알트만은 로널드 로더에게 1억 3,500만 달러(당시 이전의

모든 기록을 경신한 가격)에 작품을 판매했고 로더는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에 양도했다.

 

로더와 제르주 사바르스키가 설립한 이 갤러리는 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온

20세기 초반의 혁신적인 예술과 디자인을 세심하게 선별한 컬렉션을 소장한 곳이다.

 

이로써 아델레의 황금 초상화는 본래의 문화적 맥락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보는 이들에게 명화를 만드는 데 금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 시킨다.

 

 

 

인용: 데보라 N, 맨커프 著 / 조아라 易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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