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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이 우의적 이미지는 게르니카뿐 아니라 스페인,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현대의 골고다.

즉 인간의 온화함과 믿음이 폭탄으로 파괴된 데에서 오는 고통을 상징한다.

 

하버트 리드(1938년 10월)

 

 

 

 

 

 

파블로 피카소는 파리에 도착한 첫해부터 전통적으로 예술이 가진 필수 요소들을 연구하는 데

탐닉했다. 소위 청색시대(1901~1904)와 장미시대(1904~1906)로 불리는 시기의 그는

제한된 색채와 팽팽한 선이 가진 조형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의 작품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1905~19060는 모델을 얼마나 흡사하게 재현했는지를 넘어

인물의 존재감에 더 주목하게 만들었으며,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선보인 급진적인 파편화는

이제껏 보지 못한 구상회화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큐비즘(1907~1914)을 통해 피카소는 공간의 차원, 평면과 부피, 환영 및 지각에 대한 고정관념

제를 제기하면서 재현에 집중돈 예술의 개념과 기술에 도전했다. 또한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태로 물체를 표현하는 것 역시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조형 형식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예술적 관습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전통을 시험하면서 재현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보다 변형하는 데 오히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카소의 미학적 특징은 전쟁으로 생겨난 가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

<게르니카>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1881~1973)

1937년, 캔버스에 유채, 349.5×777.5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박물관, 마드리드

 

 

 

 

스페인 내란(1936~1939)이 고조되던 시기, 바스크 지역에 일어난

잔인한 폭격을 다룬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가장 기념비적인 공공 예술이다.

 

소도시 게르니카에 공격이 있기 몇 달 전, 피카소는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될 대규모 벽화 의뢰를 수락했으나

적절한 주제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주제를 결정한 직후,

그는 불과 6주 만에 거대한 그림을 완성했다.

 

전시관이 공개되었을 때 일부 비평가들은 <게르니카>의 폭발적인 구성이 과도하게

위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에는 명확성이 부족해 보였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적 표현은

최근에 일어난 폭격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피카소의 의도를 오히려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은피카소의 목표에 끔찍한 사건을 추모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인식했다.

 

피카소는 관람자로 하여금 기존의 전통적 서사와 비유가 지닌

평온하고 지적인 영역 너머의 세계를 보고 느끼도록 함으로써

<게르니카>를 보편적인 명화로 만들었다.

 

1931년, 스페인 유권자들은 부르봉 왕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좌익 후보자들을 집권시켰다.

다라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스페이니 제2공화국의 수립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즉각적인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불과 몇 년 후, 포퓰리즘 운동이 일어났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공화당 정부를 향한 도발은

결국 1936년 7월 군대의 지원과 함께 내란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코는 유럽에서 떠오르는 파시스트 국가들의 지원을 확보했으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정예 사단인 콘도르 군단은 빌바오 근처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집중 폭격과 약탈 작전을 시행했다.

공격 3시간만에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인구의 약 3분의 1이 죽거나 다쳤다.

 

민간인을 목표로 한 이 공격(전략적 이득보다는 위협을 주기 위한)에 대한 언론 도는

20세기 전쟁이 가져온 끔찍한 현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피카소는 1904년부터 파리에 살았지만 조국과 강한 유대관계를 유지했고, 스페인 국민으로서의

정체정에 자부심을 가졌다. 스페인에서 분쟁이 가속화되자 그는 공개적으로 공화당을 지지

했으며 스페인 원조 기금에 아낌없는 기부를 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했다.

 

1936년 9월 피카소는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의 명예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상임 정부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듬해 1월, 그는 4개월 뒤 파리에서 열린 예정인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 입구를 장식할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피카소의 경력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의 작품이었으며, 국가관을 상징하는

주요한 작품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했지만 작업에 거의 진전이 없었다.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

1937년, 에칭 · 슈가리프트 · 애퀘틴트, 38.5×57cm(종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주

 

피카소의 에칭 모음집(각각 9개의 장면을 담은 2장의 판화)은 프랑코를 죽음과 파괴의 괴물로

묘사한다. 그는 1937년 초에 이 시리즈를 시작했고 <게르니카>를 완성할 즈음에 끝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에칭(동판화) 모음집을 작업중이었는데,

이 에칭은 국가를 망신시킨 포퓰리즘 지도자를 잔혹하고 어릿광대 같은 인물로 조롱하는 내용을 담

고 있었다. 1937년 1월 8일 그는 공화당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14점의 에칭(완성된 모음집은

에칭 18점과 산문시로 구성되었다)을 제작하고 엽서에 이 이미지들을 인쇄했다.

 

정치적 성향이 이토록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파고 소식을 듣기 전까지 벽화

주제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언론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대의명분이 '국민에 반하고, '자유에 반하

는 것'이라 비난하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오늘날 <게르니카>라고 이름 붙여진 자신의 벽화에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가라앉게 한 군사 카스트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노타우로마키

1935년, 에칭과 조각, 49.5×69.5cm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주

 

황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르스는 야수적인 힘을 나타낸다.

고통(타락한 여인, 비명지르는 말)과 평화(창가에 비둘기와 함께 있는 여인들)를 암시하는 인물들의

존재는 섯사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대신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관람자는 사다리 위의

남자처럼 수동적으로, 당혹스럽게 이 장면을 관찰하게 한다.

 

 

 

 

 

주제를 정하자마자 피카소는 열정적으로 작업 속도를 높였다.

5월 1일 자의 초기 스케치를 보면, 미술사에 등장해온 전통적인 이미지들과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진 모티프들을 결합해 화면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소는 남성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스페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부상당한 말의 이미지는 스페인의 대표 스포츠인 투우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고통과 희생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머니와 아이는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피카소의 도상학적 개념을 전통적인 주제와 연결해주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탐구가 더 수수께끼 같은 방향으로 전환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930년대는 피카소가 관습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맥락에 따른 해석을 거부하는

이미지를 실험하기 위해 작업실로 잠시 잠적한 시기였다.

 

예를 들어, 판화 <미노타우로마키>(1935)에서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꽃을 든 어린 소녀,

부상당한 말, 사다리를 오르는 남자 등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는 인물들이 제시되지만

이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파악되기보다는 익숙한 이미지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충돌해 오히려 혼란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즉, 형상들은 관람자가 인식할 수는 있지만 주제적 측면에서 통일된 맥락이

생겨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8×347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프랑스의 도시 점령에 맞서 마드리드 시민들이 봉기했을 때, 그들의 노력은 잔인하게 짓밟혔다.

다음 날 마드리드의 저항군은 총살형에 직면했다. 고야는 현실의 잔혹함을 전통적인 순교 장면

으로 치환해 묘사했다. 화폭 중앙의 인물은 운명을 받아들인 듯 서 있고, 그를 밝게 비추는

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의 참화: 똑같음(3판)

프란시스코 고야

1810년(1863년 출판),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25×34.5cm(종이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주

 

피카소는 고야가 1810년에서 1812년 사이에 만든 82점의 에칭에 감탄했다.

이 작품들은 게르니카의 굽히지 않는 강직한 면모를 드러내지만, 장면이 작게 만들어져

공포스러운 느낌은 다소 완화되었다.  한 남자가 도끼를 휘둘러 군인의 목을 배려는

장면을 담았으며 제목인 '똑같음'은 전쟁, 보복, 죽음의 무분별한 순환을 고발한다.

 

 

 

 

 

5월 9일에 그려진 연필 드로잉은 <게르니카>를 위한 피카소의 전체적인 구성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틀 만에 거대한 캔버스에 예비 스케치를 옮겨 그렸다. 5월 11일부터 피카소의 파트너

도라 마르는 그의 작업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 사진은 형상의 크기, 배치, 위치가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동적인 제스처, 고통스러운 표정, 강한 폭격으로 던져져 몸부림치는 듯한 혼산스러운 상황

표현은 이미지가 지닌 감정적인 힘을 더욱 고조시킨다. 미술 사학자 티머시 제임스 클라크가

"놀라운 집중력이 낳은 위업"이라고 묘사한 이 벽화 작품을 피카소는 6월 초에 완성했다.

색채를 검은색, 흰색, 회색만 사용한 이유는 폭격이 주는 공포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상실, 공포 등 희생자가 겪은 경험을 관람자로 하여금 견디도록 하기 위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서구 문화에서 전쟁으의 주제는 고대 지중해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랜 시간 동안

등장한 중무장한 군대, 용감한 영웅, 맹렬한 전투, 종종 신의 개입으로 적군이 패배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볼 수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용맹함을 향한 찬양은 표현

되었지만 전쟁의 참상은 잘 보이지 않게 그려진 작품들이 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작품 <전쟁의 공포>(1637년경)에서

(마르스를 제지하려는 비너스를 포함한)고전 신화로부터 모티프를 가져와

"평화로운 때에 세워진 모든 것"이 "무력에 의해 망가졌다"고 묘사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사비니의 여인들>(1799)에서 3년 전 로마인들에게 납치된

사비니 여인들이 군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하고자

아이들과 함께 전쟁터로 들어가는 로마의 건국 전설을 담아냈다. 

 

19세기까지 미술가들은 당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마치 신화나 전설을 다루듯이 그려냈다.

프란시크코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한 지 불과 6년 후에 , <1808년 5월 3일>

(1814)을 그렸으며, 외젠 들라크루아는 오스만제국이 그리스인들을 공격해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하고 남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든 지 2년이 지난 시점에

<키오스섬의 학살>(1824)을 그렸다.

 

두 그림 모두 피해자들의 절망적인 상황과 정복자의 무자비한 잔인함에 관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끝맺음이 있는

서사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게르니카>에 등장하는 폭력은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피카소는 순간적인 파괴와 죽음의 혼돈으로 일상이 망가지는 상황을 그렸다.

신화나 전설, 오랜 역사 속 사건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이 담겼기에 관람자는

그림 속 상황과 자신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한다.

 

 

 

 

 

 

게르니카(부분)

 

인류에게 빛을 주는 고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부터 지친 여행자들을 환영하는 미국 자유의 여신상

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에서 횃불을 든 모습은 깨달음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게르니카>에서는

그 의도가 명확하지 않다. 횃불을 든 사람은 어둠 속에 나타난 희미한 희망을 상징할까.

아니면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참혹한 진실을 밝혀 보여주려는 것일까?

 

 

 

 

 

게르니카(부분)

 

피카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희생자의 공포를 느끼게 하고자 콧구멍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혀를 내밀고 있는 말처럼 비명과 긴장의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또한 전체적인 구성을 하나의

방 안에 담음으로써 공포 효과를 고조한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졌지만 천장은 남아 있으며,

천장에 달린 전구의 빛은 통곡하는 여인들과 산산조각 난 시체들 사이에 관람자를 가두어버린다.

 

 

 

 

 

 

 

 

1937년 만국 박람회는 스페인관의 오픈 준비를 마치기 한 달여 전에 이미 개막했다.

루이스 라카사와 호세 루이스 서트가 디자인한 유선형의 우아한 건물은 박람회의 주제인

현대 생활의 예술과 기술을 한데 구현한 듯했다.

 

알렉산더 칼더의 <수은 분수>와 호세 레나우의 웅장한 포토몽타주 등 수많은

모더니스트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모더지즘 이상으로

이 전시는 당시 위협받던 공화당 국가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곳에에 있던 어떤 작업도 <게르니카>만큼 그 역할을 해내지는 못했다.

 

입구 한 가운데에 걸린 <게르니카>를 본 관람객들은 최근에 일어난 폭력의 야만적인

행위에 즉시 직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이미지는

칭찬보다 비판을 더 많이 받았는데 난해한 도상보다는 원색적인 표현 때문이었다.

 

피캇소의 작품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의 예로, 저명한 미술 평론가 앤서니 블런트는

<게르니카>를 가리켜 "고도로 전문화된 제품"이며, 개인적인 표현에 깊이 뿌리를 둔

"결론적으로 공공의 이슈에 적용되는 작품이 아니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대중의 마음은 언론 보도에 의해 좌우되므로 만약 벽화가 진정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그 메시지를 명확하고 확실한 용어로 다시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오직 소수의 비평가만이 <게르니카>가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징의 충돌이 모여 우의적인 효과를 만들어낸 작품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허버트 리드가 말했듯이,

이 벽화는 "인간의 온화함과 믿음이 폭탄으로 파괴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한 번의 끔찍한 사건을 초월해 게르니카뿐 아니라 스페인,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의미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스페인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 기획자들은 파시스트의 극도로 보수적이고 고립주의적인 시각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럽 모더니즘과의 문화적 관계를 드러내려 했다. 루이스 라카사와 호세 루이스 서트가 디자

인한 건물에는 호세 레나우, 호안 미로, 알렉산더 칼더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스페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게르니카>는 1층 입구에 자리했는데, 성취감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스페인관에

들어ㅏ선 관람자들은 최근 스페인에 일어난 끔찍한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피카소는 스페인의 위험한 상황에 따른 인식을 재고하고자 유럽과

북미 전역의 도시에 <게르니카>가 전시되도록 준비했다. 또한 그는 저항군의

재정 확보를 위해 포스터와 엽서에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1939년 4월 포퓰리스트 세력이  결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프랑코

장군을 '지도자(사실상 독재자)'로 앉힌 후, 피카소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가지

벽화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페인이 공개적으로 추축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게르니카>는 안전한 보관을 위해 북미에 남겨져 주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으며,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한 후에도 작품은 그곳에 남았다.

 

피카소는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게르니카>의 운명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는 널리 알려졌고 존중받았다.

 

프랑코 정부는 그림을 입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75년 장군이 사망하고 그의 독재가 입헌군주제로 대체된 후에야

그림의 반환 절차가 시작되었다.

 

피카소의 소원대로 이 그림은 1981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보내져,

미술관 별관인 카손 델 부엔 레티로에 설치되었다.

이후 1992년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으로 옮겨져 현재 위치에

자리잡았으며, 더 이상 외부 전시를 위해 대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는 말,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비된 황소,

횃불을 내민 거대한 인물 등의 불편한 이미지들은 집회용 현수막, 거리예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새로운 반전 도상학을 만들어냈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실 외부에 전시된

테피스트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많은 작품에서 보여줬듯 피카소는 전통을 거부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예술적 관습을 변형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보는 이들의 지식이나

문화적 관련성이 아닌 마음과 영혼에 호소하는 우의적 상징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명화를 탄생시켰다.

 

 

 

인용: 데보라 N. 맨커프 著 / 조아라 易 <화가들의 마스트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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