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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

프리다 칼로

 

나는 내 얼굴에서 눈썹과 눈을 좋아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 프리다 칼로 -

 

 

 

 

 

1930년대 후반, 멕시코 전역을 여행하던 미국 화가 에디슨 버뱅크는 유명한 벽화 작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기 위해 멕시코시티 외곽에 있는 코요아칸 마을에 잠시 들렀다.

그는 그곳에서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프리다 칼로를 만나길 고대했다.

 

감정이 충만한 자기 고백적인 그녀의 작품은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로의 작품에 자화상이 많았기에 버뱅크는 그녀를 만났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그들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안주인을 보고 깜짝놀랐다.

 

단단하게 땋은 검은 머리 위에 보라색 부겐빌레아 꽃왕관을 쓰고 화려한 테우아나를 입은

그녀는 "반짝반짝, 앳되고 생기 발랄해" 보였다. 버뱅크는 그의 회고록에서 "아름답고 매력적

이고 활기차다"와 같은 평범한 칭찬의 단어들은 그녀에게 "너무 진부하다"고 일축했다.

 

칼로는 타고난 아름다움과 "자기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버뱅크는

그녀를 묘사하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오, 지옥!) 숨이 막힐 정도였다."

 

프리다 칼로는 자화상이 가진 힘을 잘 이해한 작가였다.

세상에 알려진 그녀의 작품 중 3분의 1 이상에 작가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한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산산이 부서졌던 경험을 종종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노골적으로 성인을

연상하게 만드는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칼로는 전통적인 도상학 대신 사적 상징들로 구성된

레퍼토리를 그림에 담았다. 다시 말해, 미술사 속에 존재해온 오랜 도상의 자리를

자신의 다문화적 유산과 그림처럼 세심하게 기획한 겉모습으로 대체했다.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

프리다 칼로(1907~1954)

1940년, 캔버스에 유채, 61.5×47cm

해리 랜섬 센터, 텍사스주

 

 

 

 

칼로의 활동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이자 버뱅크가 방문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제작된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은 그녀가 독특한 이미지들과 수행적인

자기표현으로 어떻게 화면에 의미 부여를 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작품은 50점이 넘는 칼로의 자화상 가운데 하나로,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자화상을 자신의 대표적인 주제로 만들고,

그것을 결국 명화가 되게 했는지 알려준다.

 

프리다 칼로의 어린 시절은 신체적 고통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멈춰버렸다.

1914년, 여섯 살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몇 달 동안 침대에서 지냈고,

오른쪽 다리와 발은 그 기능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1925년에는 끔찍한 버스 사고로 그녀의 학창 시절을 사라지게 했다.

칼로는 또다시 침대에 갇혔는데, 이번에는 철근이 부러진 뼈와 몸을 관통하면서 생긴

척추 및 골반 손상을 치료하기 위해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다.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칼로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어머니는 회복 기간에

칼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침대에 거울을 설치했다. 칼로는 멕시코시티의

명문 학교인 국립 예비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는데, 2,000명의 학생 중

35명뿐인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다.

 

칼로의 부모는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예술적인 가정환경에서 그녀를 키웠다.

특일 출신 유대인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사진작가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은 토착민과 스페인 혼혈인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사고 이전에 칼로는 건축 현장을 촬영하러 가는 아버지와 종종 동행했으며, 

암실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기도 했다. 사고와 장기간의 회복기로 활동 반경이 제한된

그녀는 심각한 만성 통증에 시달렸고, 남은 생애 동안 뻣뻣한 코르셋을 착용하고

척추의 아박을 완화하기 위한 수많은 수술 과정을 견뎌냈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년, 캔버스에 유채, 79×58.5cm

개인 소장, 멕시코시티 아르빌 갤러리 제공

 

 

 

 

1926년에 그려진, 현존하는 첫 번째 자화상에서 칼로는 반신상으로 등장한다.

양식화된 파도를 배경으로 우아한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당대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표현했으며,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깔끔하게 타고, 계란형 얼굴에 대칭적인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스타일인 시뇽을 했다.

 

중간에서 거의 이어질 것 같은 인상적인 형태의 눈썹과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가 더해진 

매력적인 그녀의 눈길은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외면하듯

당돌하고 자신감 있는 내면을 드러낸다. 

 

칼로는 자신의 이미지를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시절 내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빛어 넘긴 헤어스타일에 아버지의 정장을 입고 가족사진에

등장 하기도 했을 정도로 칼로는 카메라 앞에서 항상 수줍음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결혼사진

빅토르 레예스

1929년 8월 19일, 손으로 칠한 투명 수채 물감과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12.5cm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칼로와 리베라는 1929년 8월 21일 결혼했다.

이 부부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좌익 정치, 행동 예술, 멕시코적 정체성

등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태우안테펜의 의상을 칼로가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결혼식 복장에 멕시코 전통 숄인 레보소와 아즈텍의 상징이 새겨진 여러 줄의

옥 목걸이가 포함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목걸이는 리베라가 선물한 것이다.

 

 

 

 

 

칼로의 독특한 패션은 디에고 리베라에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지만,

남아 있는 몇몇 사진에서그녀의 어머니가 전통 의상을 차려 입은 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영향도 있던 듯하다.

 

칼로는 1922년 국립학교에 입학한 해에 리베라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이미 저명한 예술가였고멕시코 벽화 운동의 선도적인 주역이었다.

그녀는 학교 대강당에서 그가 의뢰받은 작업을 하는모습을 지켜봤다.

둘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지만 6년이 지나서야 연인 관게가 되었고,

1929년 8월 21일 결혼했다.

 

결혼식에서 그녀는 현대적인 스타일과 전통 액서서리가 어우러진 의상을 선보였다.

 주름 장식과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여러 개의 줄로 이루어진 아즈텍 옥 목걸이

(리베라의 선물)와 레보소(숄)를 한 것이다. 그해 그녀는 멕시코 남부 서해안에

위치한 테우안테펙 지역 여성의 전통 의상을 기반으로 한 '우이필'과 '에나과'를

공식적으로 자신 고유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우이필'은 자수나 레이스로 장식된, 전체적인 모양이 사각 형태로 떨어지는

면 블라우스를,'에나과'는 자수가 놓인 띠나 턱 주름 장식이 밑단을 감싼,

넓은 허리띠가 있는 길고 넉넉한 치마를 말한다.

 

이러한 의상은 칼로의 멕시카니다드(멕시코인의 정체성) 감각을 표현하는 동시에,

치료를 위해 착용하는 코르셋과 사고로 변형된 다리를 보다 수월하게 감춰주었다.

 

 

 

 

 

 

프리다 칼로

니콜라스 머레이(1892~1965)

1939년, 키브로 인화, 43×3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주

 

헝가리 태생의 이 자진작가는 1911년 미국에서 칼로를 만났다.

칼로와 머레이의 관계는 칼로가 1938년 혼자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 시기에 시작되었고,

그녀가 이혼한 후 리베라와 재혼한 이듬해까지 지속되었다. 머레이는 자신의 가족을

제외하고 칼로의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으며,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구입한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을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

 

 

 

 

 

1930년 칼로는 리베라의 국제적인 경력을 위해 미국에 함께 3년 동안 머물면서

그녀만의 테우아나를 입었는데, 당시 그녀는 자신의 패션이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에 대해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외국인들이 저를 정말 좋아하고, 제가 가져온 모든 드레스와 레보소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요. 내가 포르를 취해주기를 모든 화가가 바라고 있어요."

 

미국에 머무는 동안 칼로는 에드워드 웨스턴과 이모젠 커닝햄을 비롯한

여러 사진작가 앞에서 포즈를 취했지만, 화가의 모델이 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칼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의 매력적인 동반자(즉, '전통 의상'을 입은 '디에고의

아름다운 젊은 아내')로 묘사하는 언론 보도를 무시한 채 스스로의 신체적 · 정서적

경험과 관련된 퉁명스럽고 잔인한 이야기를 종종 그리며 작품에 집중했다.

  

그녀는 작품 속 중심인물로서 독특한 외모를 무기와 방패로 사용했으며, 세 종류의

자화상(전설 혹은 우화 속 인물처럼 등장하는 형식, 의상이 전체적으로 강조되도록

있거나 앉아 있는 전신을 담은 형식, 머리부터 어깨까지 반신상이

화면을 채우는 형식)을 발전시켜나갔다.

 

 칼로의 자화상은 성인 한 명이 화면을 채우는 전통적인 레타블로(성화)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1930년대 내내, 칼로는 동일한 구성에 미묘한 변화를 가미하며

반복적으로 작업했다. 그녀는 다양한 우이필과 장신구로 꾸미고 평범하거나

나뭇잎이 무성한 배경 속에 등장했다.

 

머리 모양은 엄격하게 가운데 가르마를 탔던 젊은 시절의 스타일에서,

머리카락을 리본과 함께 땋아 올리거나 꽃을 얹은 형태로 진화하면서 더욱 정교해

졌다. 화면 속 그녀는 머리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고 있는데, 가끔 정확하게

정면을 응시하기도 한다. 이따금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각각에서 보이는 표정과

거침 없는 시선은 비범한 아름다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결핍과 함께

그녀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두 명의 프리다

1939년, 캔버스에 유채, 172×172cm

멕시코시티 국립미술관, 멕시코시티

 

심장을 연결하는 동맥으로 이어진 서로의 손을 잡은 칼로의 '프리다들'은 그녀의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이 지닌 이중성을 나타낸다. 유럽인 자아를 가진 프리다는 예전에 유행한 서구 의상을 입었고

외과용 집게를 이용해 동맥의 출혈을 멎게 하려 한다. 테우안테펙의 우이필과 에나과를 입은

멕시코인으로서의 자아는 작은 리베라의 초상화를 들었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년, 하드보드에 유채, 76×61cm

자크와 나타샤 겔만 부부의 20세기 멕시코 미술 컬렉션, 베르겔 재단

 

 

 

 

1940년, 칼로는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을 그렸을 때 비로소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 데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2년 전 뉴욕의 줄리앙 레비 갤러리

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칼로는 상당한 매출을 기록했으며, 중요한 작업들을 의뢰받기도

했다. 또한 1938년에는 피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그녀의 자화상인 <프레임>(1937~1938)

구입 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멕시코 에술가의 작품을 구입한 첫 사례다.

 

그녀는 뉴욕과 파리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프랑스판 「보그」에 실릴 사진 촬영을 했다.

칼로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선구자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한 전시에 출품되었으며, 의상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마담 리베라 드레스'를 런칭하는 데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녀 개인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인 시기이기도 했다. 

결혼 초기부터 칼로와 리베라는 서로의 불륜을 수용했으며 1939년까지 가까운 집에서

따로 살았다. 그들은 그해 11월 6일에 이혼했고, 이듬해 12월에 재혼했다.

 

칼로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지만 점점 마음이 식어갔고,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지자 1930년 그녀를 치료한 미국 의사 레오 엘로서 박사에게

진찰받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그녀는 의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가시 목걸이 모티프를 사용했다. 그림에서 그녀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선물받은

손 모양의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다.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에는 환희와 비극이 모두 들어 있다.

칼로는 관람자를 마주보고 캔버스 밖을 대담하게 응시한다.

왼쪽 어깨 위에 그려진 검은 고양이의 반짝이는 눈은 그녀의 시선을 더욱 강조한다.

 

칼로는 서로 연결된 양쪽 눈썹, 벌어진 콧구멍, 닫힌 입술 위의 수염 등으로 강렬한

호(弧) 형태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내 자신의 특징을 표현했다. 오른쪽 어깨에 앉은 거미

원숭이는 그녀가 키우던 동물 가운데 하나로, 화면에서는 그녀의 목을 감싸고  찌르는

가시나무 가지를 가지고 놀고 있다.

 

상처 난 목에서 피가 흐르는 표현은 수난 기간 중 예수의 머리에 눌린 가시 면류관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기독교 순교의 핵심적 상징이다. 가시나무 가지의 상징과는

대조적으로, 목걸이에 묶인 벌새는 다양한 문화적 의미로 해석된다.

 

빠른 날개짓 때문에;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는 신화에 근거해 서구 전통에서는 벌새를

덧없는 감정, 무상함 등과 연관 지어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벌새는 전쟁과 태양의

대군주인 불멸의 아즈텍 신 우이칠로프츠틀리의 상징이기도 했고,. 죽은 전사의 영혼을

나타낸다는 믿음도 전해져 내려온다. 칼로의 머리 위를 맴도는 나비는 유럽 문화에서 삶의

한시성을,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는정신을 뜻해 이중적이고 상충되는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이렇듯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에서 칼로는 다양한 문화적 모티프를 활용해

순교자이자 전사, 연약하면서도 회복력이 강한 개인이라는 전혀 다른 두 정체성을 보여주며,

고통을 유발하는 장신구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착용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프리다 칼로로 분장한 여성들

 

멕시코와 몇몇 지역은 칼로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따라 하는 축제를 통해 그녀를 기린다.

그녀의 110번 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017년 7월 댈러스 미술관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축제에는 다양한 연령대, 성별, 문화적 유산을 가진 1,000여 명의 사람들이 화려한 칼로의

의상을 입고 모였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이 참가자들도 

칼로의 화관과 일자 눈썹을 하고 축제를 즐겼다.

 

 

 

 

1938년 미국 「보그」에 실린 글에서 버트럼 울프는

"칼로 자신도 그녀의 예술품 중 하나이며, 그녀의 그림처럼 그 자신도 본능적이면서도 훌륭하게

기획된 작품으로 보인다"고 언급한 바 있다. 평생 칼로는 작품과 마찬가지로 외모 역시

끊임없이 엄격한 평가의 주제로 삼았다. 자신의 머리가 너무 작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내 몸의 어떤 부분도 완벽하지 않ㅎ다"고 말했으며, 다리 중 하나는 너무 "가늘고" 하나는

"너무 뚱뚱하다"고 했다. 또한 얼굴에서 눈썹과 눈만을 좋아했으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게다가 "나는 콧수염이 있고 대체로 다른 성별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칼로의 말년에 절친한 친구였던 올가 캄푸스는 칼로가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도

그녀가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으며, "방문객이 있든 없든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많고 화려한 옷이 자기표현력 강한

그녀의 매력을 보여주듯이 화장대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세심한 큐레이션을 보여준다.

 

칼로는 새카만 레브론 연필로 눈에 띄는 눈썹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검은 딸리까 분말로 눈썹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립스틱 색은 코티의

에브리띵스 로지였으며, 아끼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종종 종이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마무리하곤 했다.

 

 

 

 

 

 

세 명의 프리다: 작업실에서의 프리다 칼로<두 명의 프리다>와 함께

프리츠 헨렌(1909~1993)

1943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1991년 인쇄)

라고 아트 앤드 옥션 센터

 

손님을 맞거나, 작업실에서 일하거나 공공장소에 가거나, 침대에서 쉴 때도 칼로는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머리카락을 리본과 함께 땋아 올렸으며 화장을 했다.

그녀는 때때로 우의필을 바지와 맞춰 입기도 했다.

이 사진은 코르셋으로 등을 받치고 몸통을 중심으로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은

프리다 특유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업실 벽에 걸린

<두 명의 프리다>와 동일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칼로의 얼굴은 우리에게 놀라울 만큼 친숙하다.

그녀ㅓ의 전기 작가인 헤이든 헤레라가 '국제적 컬트 인물'로 묘사할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칼로만의 이야기와 흉내 낼 수 없는

외모는 영화, 소설, 발레, 오페라 등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그녀는 어린이 동화책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소녀들이 스스로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는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영감을 주는 각종 인형과 장난감의

모델이기도 하다. 칼로의 독특한 이미지는 페미니즘의 상징이며 오랜 유럽적 관습을

상대로 승리한 고유의 아름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리다 칼로 닮은꼴 대회'는 멕시코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이 대회는 피상적인 가장무도회가 아니라 참여자들에게

경험을 통해  힘을 실어주는 축제다.

 

프리다 칼로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멕시코 예술 박물관이 후원한 2007년 '프리다 파시네이션' 축제의 젊은 우승자는,

칼로처럼 분장한 시간은 강인한성격을 가진 여성이 되는 경험이 주는

즐거움과 멕시코 예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제공했다"며

축제가 매우 유익했다고 언급했다.

 

칼로의 자화상은 정체성 탐구, 삶의 증거, 인정 욕구, 자기 몰두에의 허영,

멈추지 않는 자기 성찰 등 많은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대한 점은,

오래전부터 역사 속에 존재해온 자화상이라는 미술의 한 주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끝내 개성 있는 명화로 탄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인용: 데보라 N. 맨커프 著 / 조아라 易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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