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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전남 광주 현대사

전남 · 광주 현대사

 

전라남도 지명은 1896년(고종 33년) 전국이 13도(道)로 개편되면서

이전의 전라도가 남북으로 분리 되었다.

현재의 광주광역시와 제주도가 전라남도 관할에 속했었으나,

광복 이후 1946년 제주군이 도(道)로,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다.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는 일제강점기 광주 학생운동, 해방 이후

여순사건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한 근현대사에서

격동의 공간으로, 항일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구 목포영사관과 구 소록도갱생원 등 식민 지배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역사 현장이 전라남도와 광주에 남아 있다.

 

아래는 전라남도와 광주의 근현대 역사의 아픔과 성장을

살펴볼 수 있는 전라남도와 광주의 사적지 몇 곳의  기록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아카이브 자료집'을 인용한 내용이다.

 

 

 

 

구 목포 영사관

(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되면서 주한일본공사는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인천영사관 직원 3명을 목포로 파견하여 10월 26일 목포 일본영사관을 개설했다.

초기의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에 입주했고, 이후 두 차례 이전을 거쳐 영사관

부지를 확보해 1900년 12월에 완공했다. 관할구역은 전라남북도였으나 1899년

5월 군산항이 개항되고 목포영사관 군산항분관이 설치되자 충청도 남부까지

확장 되었다가, 군산영사관이 설립되면서 전라남도로 축소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개보수 공사를 거쳐,

1014년 2월 목포근대역사관 제1관으로 개관하였다. 목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로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목포근대

역사관 제2관)과 함께 목포의 개항과 근대화, 일제의 침략 수탈을 상징하는 시설이자 교육

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구 목포영사관은 1981년 사적 제289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구 청년회관

(남교소극장)

 

일제강점기 목포청년회가 건립한 목포지역 청년운동과 민족운동의 주 무대였던 곳이다.

1920년 5월 김상섭 · 김택현 · 차남진 등의 주도로 목포청년회가 창립되면서

목포의 청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청년회는 신간회 목포지회 조직을 비롯한 목포지역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창립 당시부터 회관 신축을 준비했고, 1924년에는 죽동 제중병원에 회관건축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약 1만원을 모금하여 그 중 2천원으로 남교동에 회관 부지 100평을 매입했고

나머지는 건축비에 충당해 같은 해 9월에 착공,

이듬해인 1925년 3월 건평 57평의 석조건물을 낙성하였다.

 

건립 이후 청년회관은 목포지역 청년운동은 물론, 노동운동 · 농민운동 등

민족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신간회 목포지회도 1927년 이곳에서 창립되었다.

또한 강연회 · 토론회 · 웅변대회 등 각종 집회도 수시로 열려

이 지역 계몽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공간이다.

 

광복 이후에는 일부 변형되어 임마누엘 목포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2년  9월 등록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남교소극장으로 개관해

각종 문화행사 개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일제강점기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항일운동의 계기가 된,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단의 장소이다.

광주에는 인근인 나주, 영산포, 담양 등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한일 양국의 학생들이 많았

으며, 이들 사이에 자주 충돌이 발생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양측 학생들이

갈등을 빚자 11월 1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역에서 철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해산했다.

 

11월 3일 시내 수기옥정(충장로 4-5가 일대) 우체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격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 수백 명이 광주역 앞에 모여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양국 학생들은 흙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출동한 경찰과 교사 등의 제지로 해산했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이에 합세했다. 이에 학교 당국은 휴교령을 내렸지만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경

 

 

 

 

여순 10·19사건 발발지

 

여수 시내는 여순10·19사건을 주도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주둔했으며 여순사건이 촉발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주민들이 강제 동원되어 건설한 수상비행장 활주로가 있었던 여기에는 1948년 5월

국방경비대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한 제 14연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10월 10일경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의 제주 파병을 계획하였다.

10월 19일 오전 이에 불만을 품은 지창수 상사 등은 제주로의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시내로 진출,

여수를 점령했다. 이들은 10월 20일 순천도 장악했으며, 광주 제4연대 소속 진압군의 일부도

합류하면서 10월 22일에는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6개 군(郡)도 장악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10월 20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10월 27일 이들 지역을 모두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현재 이를 추모하기 위해 매년 10월이면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개최된다.

 

 

 

 

여순사건 70주기 희생자 합동 추념식

 

 

 

 

가마골 빨치산 격전지

 

가마골은 6·25전쟁 중 고립된 인민군 빨치산과 군 · 경이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격전을 벌인 곳이다.

1950년 9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북상하지 못하고 고립된 인민군 패잔병들은

이곳에 집결하여 이른바 '노령지부사령부(사령관 김병억)'를 조직하고 군사학교 · 인민학교 ·

탄약제조창 · 정비소 등을 세우고 저항했다. 가마골을 근거지로 삼은 전북기포 · 카추사 ·

번개 등 3개 병단 600명 규모의 빨치산들은 '남부군'이라고 불렀다.

 

이에 전남경찰연합부대 610명과 쌍치지구 전북경찰연합부대, 전북 제18대대, 순창경찰대 등이

1951년 8월 25일부터 29일 이들을 공격하여 114명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했다.

 

큰 타격을 입은 빨치산들은 이후에도 계속 저항하다가 1955년 3월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곳은 현재도 탄피와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될 정도로

빨치산의 저항이 격렬했던 6·25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빨치산 포로들

 

 

 

 

구 전라남도청

 

1910년부터 2005년까지 전라남도 청사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활동하고 시민군이 계엄군과 맞서 최후까지 항전했던 건물이다.

 

1910년 9월 건립된 본관은 목조 단층건물이었다.

1930년 12월 건축가 김순하의 설계로 연면적 262평의 벽돌조 2층 건물로 본관이

건립되었고, 이어 1932년 5월 연면적 475평의 벽돌조 2층 회의실 건물이 건립되었다.

 

본관과 별관, 회의실 등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본부 역할을 했으며, 회의실 건물 지하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5월 27일 오전 4시 경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시민군은

별관에 집결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사망자 14명, 부상자 160여 명의 큰 희생을 치렀다.

 

2005년 11월 전라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한 후 현재 구 전라남도청의 건물들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본관은 2002년 5월 등록문화재 제16호,

회의실 건물은 1986년 11월 시도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일대가 5·18민중항쟁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대성회

 

 

 

전라남도청 앞으로 몰려든 시민들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한 계엄군

 

 

 

 

공주부대원들의 전라남도청 진입로 봉쇄

 

 

 

 

헬기로 전라남도청의 서류를 옮기는 모습

 

 

 

 

(좌) 전라남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의 모습

(우) 광주시내 재장악을 위해 오는 계엄군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은 1948년 450세대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해 만든 천일염전이다.

설립 당시 백만 입방미터 규모로, 페염된 경기 · 인천지역의 주안 · 남동 · 군자 ·

소래염전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대의 염전이었다.

 

비금도에는 천일염전 기술사 양성소가 세워져 많은 염전기술자를 배출했다.

이들 염전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기술개발조합'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기술자들은 인근 도서 지역의 천일염전, 대성염전, 나무섬염전,

중앙염전이 만들어져 대규모 염전지대(530헥타)가 형성되었다.

 

현재 대동염전의 전체 넓이는 453.134입방미터로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 해주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역주민들이 결성하여 만든 염전이라는 점과

국내 염전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호남비료 나주공장

(현 LG화학 나주공장)

 

농업에 필요한 화학비료를 생산 공급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 건립된 공장이다.

한국정부는 1959년 1월과 5월 각각 서독 기업 및 호남비료와 계약을 체결하고

6월 나주 송월동 19만평 부지에 착공하여 1962년 12월 비료공장을 준공하였다.

 

호남비료 나주공장은 1961년 4월 준공한 충주비료공장에 이은 국내 두 번째

비료공장으로, 1963년 4월 시제품 생산을 시작으로 연간 8만 5천톤의

비료를 생산했으며, 1964년 독일 기술진으로부터 비료공장을 인수하였다.

 

1972년 12월 공포된 한국종합화학주식회사법에  따라 호남비료 나주공장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나주공장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4월부터 17년간 암모니아비료
80만 톤과 요소비료 150만 톤 등을 생산했으나

1980년 3월 비료 생산이 중단되었고, 1982년 5월부터 옥탄올 · 부탄올 등

화학재료를 생산하였다.

 

이후 경영부실로 1984년 3월 럭키주식회사(현 LC화학 나주공장)에 인수되었다.

호남비료 나주공장은 1960-70년대 호남지역에 필요한 비료를 생산 공급했으며,
럭키에 인수된 1980년대 이후에는 국내 굴지의 종합화학 공장으로 발전하여

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남정유 여수공장

(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7년 5월 19일 호남정유주식회사로 설립 등기되어 락희화학주식회사와 미국의 칼텍스

석유회사가 합작투자 하여 세운 회사이다. 1967년 3월 여수공장 제1원유정제시설

(CDU)을 기공하여 1969년 6월 1일에 준공하고 6만 배럴 정제 시설로 탄생했다.

 

1972년에는 제2 원유정제시설(일산 6만 배럴), 1981년에는 제3 원유정제(일산 15만

배럴)을 준공했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는 네 차례에 걸쳐 중질유분해시설을 준공했다.

1986년 9월 한국 측의 단독 경영체제가 되었으며, 1996년 LG칼텍스정유로,

2005년에는 GS칼텍스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정유업계에서 처음으로 2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으며,

1997년 업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휴발유를 수출하기도 했다.

1012년에는 정유업게 최초로 25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처럼 제2차 경제개발과 함께 국가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시기에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로 출범해 석유산업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호남고속도로 장성 JC

 

전라남도 순천시와 충청남도 논산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이다.

도로 건설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에 따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관통하여

농산물의 생산 유통을 원할히 하며, 상대적으로 낙후된 호남지역의 경제발전을 위해 추진되었다.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세 번째로 건설되었으며, 논산천안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고속국도 제25호를 구성하고 있다.

 

총 길이는 194.2km로 238억 2,100만원의 건설비에 연인원 약 516만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1970년 12월 대전-전주, 1973년 11월 전주-순천 등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순천, 곡성, 담양,

광주, 장성, 정읍, 김제, 완주, 익산 등 호남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경유한다.

 

처음에는 2차로였으나 1983년부터 왕복 4차로 공사가 시작되어 1986년 9월 대전-광주,

1989년 11월 담양-순천 등 구간이 확장되었고, 이어 2010년 10월 논산-삼례, 동광주-고서 등 구간이

6-8차로로 확장되었다. 2001년 12월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호남지역과 수도권 및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속도로로서 호남지역의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논산-천안고속도로 연무IC 부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제2제철소

(현 광양 포스코)

 

1987년 광양만에 준공된 국내 두 번째 제철소이자

단일공장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조강생산량을 자랑하는 제철소이다.

 

1960년대 이후 실시된 경제개발계획과 공업화정책에 따라 철강 수요가 급증하면서 포항제철과

현대 등은 제2의 제철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3년 10월 정부는 포항제철을 제2제철소 실수요자로

선정하였고, 1981년 11월 국토 최남단 중앙에 위치한, 해양경영의 요충지인 광양만을 대상지로 확정했다.

 

1985년 10월 광양부지 조성공사가 완료되었고, 1987년 5월 광양1기 설비를 준공했다.

이어 1988년 8월 광양2기 설비를, 1990년 12월 광양3기 설비 등을 준공하였다.

2011년 누적 조강생산량 3억톤, 2012년에 총생산량 5천만 톤을 기록하였다.

 

현재 광양 포스코는 광양시 금호동 700번지의 약 518만 평 부지에 7,200여 명을 고용하면서

연간 조강생산량 1,700만 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공장으로,

포항 포스코와 달리 주로 열연 · 냉연 · 제품을 집중 생산하고 있다.

 

 

 

 

포스코 제2제철소 용광로 쇳물 이동 공장

 

 

 

 

제2제철소와 이순신 대교

 

 

 

 

목포항 일대 전경

 

1897년 10월 개항하여 일본 중국과의 교역 통로였던 전라남도 목포의 항구이다.

일제강점기 목포항은 곡물, 면화, 우피 등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거점이 되었으며,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1940년대에는 남항과 북항으로 분리 확장되어, 인천항 부산항과 함께

조선의 3대 항구로 성장했다. 광복 이후 일본과의 교역이 둔화되고 중국과의 교역이 중단되면서 쇠퇴하였다.

 

현재는 중국 및 동남아지역 진출을 위한 거점항만으로 개발되어 서남권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목포항은 북항부두, 남항부두, 여객부두 등 총 8개의 부두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불공업단지, 영암국가 공업단지

삼호지방공업단지 등의 항만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동북아 국제물류 중심의 항만으로 도약하기 위해

유달동 허사도 해상을 매립하고 1993년부터 목포신항을 개발중에 있다.

 

 

 

 

일제강점기 목포항

 

 

 

 

목포대교 

 

 

 

거문도 등대

 

1905년 4월 12일에 건립된 등대로, 인천 팔미도등대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이자

남해안에서 첫 번째로 건립되었다. 남해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거문도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로도

불렸으며, 고도, 동도, 서도로 이루어져 있다.

 

1885년 4월부터 1887년 2월까지 영국함대가 불법주둔하면서 '해밀턴항'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거문도'라는 명칭으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월산에 세워진 등대는 6'4m 높이의

백색 원통형으로 평균해수면으로부터 등고 69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내부는 2층 구조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외부에는 등롱에 수직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업무가 중단되었다가 1947년 2월 업무를 재개하였고, 2006년 8월 높이33m의

백색 육각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인 등대를 신축하고 기존의 등명기를 옮겨와 설치했다.

 

거문도등대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등대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구 등대는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등대문화유산 제17호로 지정되었다.

 

 

 

 

구 소록도 갱생원

 

일제가 1916년 2월 24일에 설립한 소록도자혜의원의 후신이자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이다.

한센인 수용공간이 부족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일제는 이들을 집단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소록도를 선정하고 29만 9,704평의 부지에 민간인 가옥 10동을 매수하여

100 정원의 소록도 자혜의원을 개원한 것이다.

 

1930-40년대 내과, 외과,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X-선실, 약국 등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1940년대 수용인원은 약 3척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과정에서

단종수술과 강제노역 등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구 소록도갱생원 한센인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관리와 그들의 비참했던 일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이며,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도 크다.

이에 소록도 자혜의원 본관은 2003년 5월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2월에는 등록문화재로 소록도 갱생원 검시실(제66호), 감금실(제67호),

사무본관, 강당(제68호), 만령당(제69호), 식량창고(제70호), 신사(제71호),

등대(제72호), 원장관사(제75호)등이 지정되었다.

 

 

 

 

구 곡성역사

 

전라선 보통역으로 1933년 10월 15일 건립되어 1999년까지 사용한 역사이다.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송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9년 2월 25일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 이전하면서 폐역되었고, 이에 따라

13.2km 구간인 구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도 폐선되었다.

 

구 곡성역사는 역사동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와 주변부지는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중이다. 주변에 기차 조형물과 증기기관차 등으로 조성된

'심청골 철도공원'이 있으며, 증기기관차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사용되기도 했다.

구 곡성역사는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광복 이후인 1946년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문교부로부터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아 광주 서석동, 학동 일대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교사를 건축하였다. 본 건물은 1948년에 설계를 하고 착공했지만 한국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1년 9월에야 완공했다.

 

그와 동시에 전남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비롯한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되면서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전남대의 본부가 북구 용봉동으로 옮겨 가면서 중앙도서관,

의과대학 도서관 등으로, 2012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평면이 'L'자형으로 현관을 포함한 중앙부는 3층 규모이며,

1940-50년대 학교 건축물에 주로 썼던 조적조 벽돌에 슬라브 바닥 구조를 하고 있다.

국립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면서 대학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2018년 5월 등록문화재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고흥군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과학 전문 전시관이다.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1996-2015)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나로우주센터의 건립은 2003년 건설을 시작해 2009년 6월 11일에 준공하였다.  

 

나로우주센터는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최종 조립과 점검, 발사준비와 발사, 비행 상태 데이터,

원격측정, 비행안전관리와 통제, 발사 기술 관련 계측기술 개발, 발사관련 성능시험,

로켓 엔진 개발 시험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2013년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2009년 8월부터

두 번에 걸친 발사에 실패하고 열 번의 연기 끝에 이룬 성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우주과학관은 나로우주센터에 소속된 시설로,

나로우주센터의 기능을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인공위성 전시관, 우주고학 전시관, 로켓전시관,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오웬 기념각

 

광주에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사망한

오웬(Clement C. Owen · 한국명 오기원 또는 오원,1867-1909)과

그의 조부(William L. Owen)를 기념하기 위해 1909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1898년 내한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가 1909년 지방 순회전도 중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미국의 가족과 친지들이 오웬의 희생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조부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자금으로 오웬기념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각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스와인하트가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의 2층 회색 벽돌건물로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이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인근의 남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일중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강당 겸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기독청년회(YMCA)의 집회장소,

남자성경하교의 교사(敎舍)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강연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등

일제강점기 광주지역의계몽운동과 예술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구 보성여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옛 숙박시설이다.

1930년데 벌교는 벌교항과 조선식산은행 벌교지점을 중심으로 무역과 금융이 발달했으며,

광주-고흥과 목포-순천 간 국도가 교차하면서 일본인을 비롯한 외지인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이에따라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고, 1935년 8월 강활암이 일본식 여관인 보성여관을

건립했다. 광복 이후 보성여관은 강하림, 나종모 등에게 인수되었으며, 2008년

문화재청에 매입되어 2012년 숙박시설 및 카폐, 자료실, 소극장, 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개관했다.

 

 

 

 

 

광주극장

 

광주 유지 최선진(1891-1945)이 1935년 10월 1일 광주부 승격일에 맞추어 개관했다.

400평 규모 1·2층에 1,2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연극 공연, 권투시합, 강연회, 독창회, 결혼식 등의 장소로

도 이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전당대회를 비롯한 각종 정치집회도 자주 열렸는데

1948년 10월 1일에는 백범 김구선생이  광주극장에서 열린

'삼균학사' 개소식에 참석 연설하기도 했다.

 

1968년 발생한 화재로 개관 당시의 벽돌조 건물 원형은 소실되었지만,

현재 백색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86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대부분 극장이 복합상영관으로 운영되는 데 반해,

광주극장은 단관 극장 체제를 유지하며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는

예술영화, 독립영화, 제3세계영화 등을 상영하고 있으며 전시회,

음악회, 북페어 등의 문화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1980년 5월 10일 광주 충장로

 

 

 

 

구 장성성당 본당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인 김익진(1906-1971)이 기증한 땅에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으며, 골롬반회의 제라티 초대 주임 신부가 부임하며 장성성당 본당이 설립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우즈 2대 주임 신부가 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김창현 신부가 부임하자 일본 경찰은 교회 순찰을

수시로 하고 성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교회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성당과 자제관에 강제로 들어와 일본 군대의 창고, 청년들의 훈련소,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성당에 부임해 폐허가 된 본당을 재건했다.

 

구 장성성당 본당은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꾀했다.

 

1982년 새로운 성당 건물을 지은 이후

본당 건물은 2012년까지 성모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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