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오죽헌 현판

오죽헌烏粥軒 현판懸板

 

 

 

 

오죽헌 현판

권상하(權尙夏, 1641~1721), 79×173cm

 

오죽헌 내부 대청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흑판에 흰 글씨로 쓰여 있다.

두 장의 판재를 세로로 붙여 바탕판을 구성하고 네 면에 국모란당초문이 베풀어진

테두리 목을 붙였다. 좌우 테두리 목은 가로 테두리 모보다 아래로 20cm 정도 내렸는데

모양이 당초무늬와 비슷하다. 현판의 글씨는 문인인 수암 권상하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릉의 읍지 「중수임영지」에 '오죽헌의 벽에 수암 권선생의 현판 글씨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죽헌 현판

37×11.2cm

 

오죽헌은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이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1454년(단종 2)에 등제하여 병조참판까지 지낸 최응현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흰 판의 검은 서체는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최응현의 고택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용인 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상속하였다.

이때부터 이 고택은 안동 권씨 소유가 되었다.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측 4칸 대청마루, 우측 1칸 반은 온돌방, 반 칸은 툇마루로

구성 되었다. 굵직한 댓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배열한 후 네모 기둥을 세웠다.

집은 5량가로 구성된 이익공 집이다. 대청마루는 띠살문의 분합문과 두 짝으로 구성된

널판문을 달았으며, 온돌방은 두 짝 살문과 외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 천정이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익공 건축의 하나로 간주되며,

주심포집에서 익공식 집으로의 변천 과정을 보여 준다.

 

 

 

 

몽룡실 현판

50.3×81.5cm

 

몽룡실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오죽헌에 있는 온돌방이다.

사방으로 개구부가 위치하며 상부 천정에 고미반자를 두었다. 

 

「율곡전서」 권33,  「연보年譜」 상上에는 "12월 정미(26일)에 선생은 강릉부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이해 봄에 모부인이 꿈에 동해에 갔더니, 어떤 신녀神女가 어린 남자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살결이 옥처럼 깨끗하고 신채神彩가 사람의 눈을 쏠리게 하였다. 부인의 품 안에 던져 주었는데

드디어 임신되었다. 선생이 태어나던 전 날 저녘에도 또 꿈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큰 바다에서

침실 쪽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선생이 태어났으므로

소자小子를 현룡見龍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시판詩板

조방언(1469~1537) · 박광영(1463~1537) · 최세절(1479~1535) 지음

37×11.3cm

 

편액에는 5편의 7언 율시가 실려있는데, 강원도관찰사 조방언과 강릉부사 박광영의 시가 각각 한 수씩이며,

승지  최세절의 시가 세 수다. 조방언의 시는 강원도관찰사로 있던 1524년 여름에 지은 것이고,

박광영의 시는 강릉부사로 있던 1525년 가을에 지은 것이다. 최세절의 시 세 수는 1523년 봄에 지은 것이다.

최세절의 본관은 강릉으로 아버지는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이고 조부는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다.

 

 

 

 

 

 

 

율곡선생 생찬生贊

김원행(1702~1772) 지음, 45.4×114cm

 

김원행이 지은 「율곡선생찬」이다. 찬贊이란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는 글로

송頌과 성격이 같아서 제사에 쓰던 송축사와 같이 신명神明에게 고할 때 쓴다.

후대에 오면서 점차 그 성격이 달라져 신명에게 고하는 것은

도외시되고 인물의 덕을 찬미하는 데로 흘렀다.

찬은 한나라 사마상여가 형가의 찬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찬의 종류로는 첫째, 인물이나 문장 그리고 서화 등을 찬미하는 잡찬雜贊,

둘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의 덕을 기리는 애찬哀贊,

셋째, 인물의 잘잘못에 포펌褒貶을 가하여 논평하는 사찬史贊이 있다.

 

김원행은 본관이 안동, 호는 미호渼湖이며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이재의 문인이다.

 

 

 

 

 

 

 

시판

이사온(李思溫) · 유관(柳灌 1484~1545) · 신광한(申光漢 1484~1555) 지음

 

편액에는 네 편의 7언 율시가 실려 있다. 앞의 두 수는 이사온이 지었고, 이 시를 차운하여 감사 유관과

삼척부사 신광한이 지은 시가 각각 한 수씩이다. 이사온은 신사임당의 외조부이자 오죽헌 고택의 주인인

최응현의 사위다. 그는 장인 최응현으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아 집주인이 되었고, 후에 사위 신명화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은 유관은 자가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이다.

벼슬은 좌의에 이르렀는데, 을사사화로 유배되어 가던 중 과천에서 사사되었다.

 

이 시는 그가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마지막 차운시를 지은 신광한은 자가 한지漢之,

호는 기재企齋로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대사성에서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되었다. 이 시는 그가 삼척부사로 좌천

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끝에 오죽헌 주인 이사온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며 시를 짓게 된

까닭을 밝히는 내용을 추기追記하였다. 판각되어 전하는 세 사람의 시는

후세 사람에 의해 '삼인시三人詩'라고 불리며 널리 회자되었다.

 

 

 

 

 

 

 

시판

이숭진李嵩鎭. 49×89.5cm

 

네 편의 7언 율시가 판각되었다. 덕수 이씨 숭진이 삼연 김창흡과

명암 이해조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가 각각 두 편씩 실렸다.

 

 

 

 

 

 

오죽헌 기문記問

김종수(金鐘秀, 1728~1799) 지음. 46.3×126.5cm

 

어제각을 건립한 이듬해인 1789년(정조 13) 가을에 청풍 김종수가 쓴 오죽헌 기문이다.

김종수은 자가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로 벼슬이 이조판서 ·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이 기문은 오죽헌의 중수 사실과 어제각 건립에 관한

내용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오죽헌은 율곡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신명화의 외손인 권씨 소유가 되었다.

1707년(숙종 33)과 1782년(정조 6) 두 차례 중수하였다. 1788년(정조 12) 임금이 《격몽요결》 수고본과

벼루를 보고 책머리에 제어題語를 쓰게 하고, 벼루에 어제어필을 새기게 하였다.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 어제각이다.' 라는 내용이다.

 

 

 

 

 

 

오죽헌 중수기

정호(鄭浩, 1648~1736) 지음. 46.8×136.7cm

 

1715년(숙종 41) 오천烏川 종호가 지은 「오죽헌 중수기」이다.

기문을 지은 정호는 자가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으로 송강 정철의 현손이다.

송시열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던 인물로서 시문과 글씨에 능했으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죽헌은 기묘명현인 신명화의 옛집으로 이곳에서 율곡이 태어났으며 유품인 《격몽요결 》 수고본과

어필이 새겨진 벼루가 보존되어 있다. 집주인 권윤재가 집을 중수하고 삼척부사인 본인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는 내용이다. 기문 뒤에는 '이어 김 처사 자익의 시를 차운하다'라는 제목의 칠언율시가 있다.

 

 

 

 

 

 

 

오죽헌 중수 상량문

민백순(閔百順, 1711~1774) 지음. 38.5×152.7cm

 

1766년(영조 42) 음력 2월에 여흥 민백순이 지은 「오죽헌 중수 상량문」이다.

민백순은 촤의정 민진원의 손자로 청풍부사, 도승지 등을 지낸 인물이다.

'병신년(1536) 12월에 대현大賢이 탄생하였는데 청수한 기품으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성인의 뜻을 품고 일리一理의 근원을 열었다. 오죽헌 주인 권사문은 신씨로부터 집을 물려 받아

선조의 여택餘澤과 유풍을 돈독하게 지켜왔다. 오래된 집을 고칠 때 당실堂室은 옛것에 목재와

기와 낡은 곳을 바꾸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나 자랐으나 자취가 아름답고 어머니와 아들이

남긴 빛이 멀리 가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라는 내용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후에 영겁의 세월 동안 공고히 하여 주시고, 만령萬靈이

함께 도와 이 집 가운데서 빛을 감출 수 있게 하소서. 집에서 전해지는 책을 읽고 그 씨

앗을 뿌려 그 소식이 백세에 이어지게 하시고,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기초가 됨을 알게

되어 비유컨대 입지立志와 입신立身은 가히 이 대나무에서 관감觀感하게 하소서. 우러

르면 앞에 계신 듯하다. 홀연 뒤에 계시니 늘 이 당청堂廳에서 신령을 잘 섬긴다면 한없

는 경사로 징험할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그대로 되지 않겠는가.

 

숭정 기원후 삼병술(1766) 중춘 후학 여흥 민백순이 삼가 지음

상량문이 완성되고 17년 뒤인 임인년(1782)에 비로소 중수되어 이를 걸었다.

 

 

 

시판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지음. 32×48.3cm

 

송병선이 지은 '삼가 연옹淵翁(김창흡)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제목의 칠언율시가 판각되었다.

송병선은 대한제국기의 학자다.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 · 국민 ·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순국 지사이다.

 

 

 

 

 

 

시판

이최중(李最中, 1715~1784) 지음. 36.1×63.8cm)

 

이최중이 지은 '진주眞珠(삼척)로 가는 길에 삼가 연옹淵翁의 시에 차운하여 오죽헌 주인에게 주다.'

라는 제목의 칠언율시를 판각하였다. 이최중은 자가 인부仁夫, 호는 위암韋菴으로 강원도 어사 · 삼척

부사 ·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 1757년(영조 33)에 삼척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 시는

부임하는 길에 오죽헌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판

박일화(朴一和) 지음. 39.6×63cm

 

이 편액에는 응천凝川(밀양) 박일화가 지은 '공경히 몽룡실에 제하다' 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판각이다.

이 시를 지은 박일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오죽헌 중수기

이용(李龍, 1923~2009) 지음. 45.3×96.5cm

 

1962년 11월 6일 강원도지사 이용의 이름으로 계판된 오죽헌 중수기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이 기문에는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의 탄생지인 오죽헌의 중요성, 쇠락해진

오죽헌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지실 중수한 내용, 그리고 1962년부터

율곡제 행사를 시행하게 된 내용 등이 실렸다.

 

 

 

 

오죽헌 중수기

박경원(朴敬遠, 1921~?) 지음. 34×109.6cm 

 

1968년 강원도지사 박경원의 이름으로 계판된 오죽헌 중수기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기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적을 온전히 보존하라는 분부와 하사금을 내린 일,

김형기 강릉시장의 협력으로 오죽헌을 중수하고 권처균 후손의 주택을 손질한 일, 그리고

기념관에 새로 유품 진열장을 설치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시판

정호(鄭浩, 1648~1736)

정희하(鄭羲河, 1681~1747)가 지음. 50.3×51.5cm

 

정중순이 지은 '임영을 지나다 경포를 보러 갔지만 바빠서 올라가서 보지 못하고 멋대로 시 한 수를

읊어 군중신의 안하案下에 삼가 받들어 올린다.'라는 제목의 칠언 절구 한 수와 정희하가 지은 칠언 율시

한 수가 판각되어 있다. 정호와 정희하는 부자간으로, 마지막에 있는 '을미추'라는 간기로 보아

시를 지은 시기는 1715년 가을로 추정된다.

 

 

 

 

 

 

 

 

 

 

 

시판

김진휴(金震休) 지음.  27.5×58.2cm

 

광산光山 김진휴가 지은 '삼가 오죽헌에 걸음하여 판상운板上韻에 차운하다.'라는

제목의 칠언율시가 판각되어 있다. 이 시를 지은 김진휴는 고종 때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으나 자세한 경력은 전하지 않는다.

 

 

 

 

 

 

 

몽룡실 중수기

최병위(崔炳爲) 지음. 36×110.5cm

 

단기 4282년(1949) 8월에 강릉교육회장 고적보존회장 강릉군수 최병위의 이름으로 계판된 몽룡실 중수기이다.

기문은 '몽룡실은 율곡 선생이 태어나신 상서로운 곳으로 공자의 고향 궐리와 주자의 고향 무원과 같은 곳이다.

오죽헌이 중수한 지 40년이 지나 퇴락하게 되었지만 개수하지 못하다가 선생의 이종 후손인 권혁래가 중수할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상급 관청에 알리고 학계와 도 · 군내의 십 수만 사제들의 성금을 거두어 194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만에 옛 모습대로 복구되었다.'라는 내용이다.

 

 

 

 

 

 

시판

박광우(朴光佑, 1405~1545) 지음. 40.5×66cm

 

 

 

 

 

 

 

시판

이구령(李龜齡, 1645~17150 지음. 41.5×65.6cm

 

이 편액에는 이구령이 지은 두 수의 칠언 율시가 판각되어 있다.

이구령의 자는 여범汝範으로 미수 허목의 제자이다. 허목이 송시열을 탄핵하여 왕의 노여움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나자 스승을 돕기도 하였으며,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 실각하자

서울을 떠나 태백산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성균관 전적 · 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두 수의 시는 모두 오죽헌 주인 이사온의 시를 차운한 것이다.

 

 

 

 

 

 

 

시판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지음. 40~59.7cm

 

이 편액에는 이정보가 지은 '삼가 오죽헌에서 종조부 명암공(이정보)의 판상운에

차운하여 권좌랑 성집에게 보내다.'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두 수가 판각되어 있다.

이정보는 대사간 ·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글씨와 한시에 능했으며, 시조의

대가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판

맹지대(孟至大, 1730~?) 지음. 40.6×56cm

 

맹지대가 지은 '공경히 오죽헌으로 제하다.'라는 칠언율시 한 수를 판각하였다.

맹지대는 자가 양여養汝로 1752년(영조 28) 사학유생四學儒生의 소두疎頭로서

송시열 ·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벼슬은 병조참의 · 승지를 거쳐

강릉부사에 이르렀다. 강릉부사로 재임한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어제각을

건립하고 「어제각기」를 지었다.

 

 

 

 

 

 

어제각 현판

조만영(趙萬永, 1776~1846) 글씨. 58×125cm

 

어제각은 1788년(정조 120 6월 왕명에 의해 지금의 문성사 자리에 건립된 전각이다.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정조의 명을 받아

강원도관찰사 김재찬(1746~1527)이 건립하였다. 상량문은 김재찬이 지었고, 기문은 공사를 맏았던

강릉부사 맹지대가 지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시 어제각이 있던 자리가 문성사의 위치로

결정되어 해체되었다가 1987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전각 주위로 돌담을 둘렀고 정문에 초서체로 운한문雲漢門이라 새긴 현판을 걸었다.

어제각 현판의 글씨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조만영이 썼다.

'석애石厓(조만영의 호)와 臣조만영'이라는 낙관이 있다.

 

 

 

 

 

 

어제각 현판

미상. 71×110.6cm

 

어제각 내부에는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 수고본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가 소장되어 있다.

1788년 정조는 율곡이 사용하던 벼루와  《격몽요결》 수고본을 친히 본 후, 벼루의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오죽헌으로 돌려보냈다.

이들을 보관하기 위한 어제각이 왕명으로 지어졌는데, 이런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현판의 세 자 중 '어御'자를 높게 썼다.

 

 

 

 

 

 

 

 

 

 

 

 

어제각 상량문

1788년(정조 12)에 왕명으로 어제각을 건립하였던 강원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지은 「어제각 상량문」 현판이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공자와 주자가 태어난 곳처럼 상서롭다. 성상이 선현의 《격몽요결》과 벼루를 어람하고

존모하는 마음으로 글과 친필을 내렸다. 왕명에 따라 어서御書를 받들 집을 짓고 검은 휘장과 비자나무로 만든

궤안을 두어 규벽(임금의 친필과 인장)이 빛나게 되었다. 마룻대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지은 것은 어진

사람의 덕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을 판각하였다..

 

 

삼가 원하건대 대들보를 올린 뒤에 풍교와 덕화가 쇠하지 않아 천찰天札을 영구

히 보존하소서. 천상의 맑은 기운에 아름다운 창문 열어, 천상의맑은 기운 해 뜨

는 쪽으로 읍하고, 신령스런 곳에 칠보 아첨牙籤 숨겨서 오성五星이 규성圭星으로

모이는 운을 여소서. 강과 산을 빗어 하나의 기운으로 재덕을 겸비한 백성을 모아

태평성세를 이뤄 팔도에 예양禮讓의 교화가 비등하게 하소서.

 

금상今上 12년 6월 일

가선대부 행 원춘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원주목사 규장각 원임직각

신 김재찬이 왕명을 받들어 찬함

 

 

 

어제각기

맹지대 지음. 48.7×112.8cm

 

1788(정조 12) 왕명으로 어제각을 건립할 때 공사의 실무를 맡았던 강릉부사 맹지대가 지은 기문이다.

'정조대왕은 무신년(1788) 봄에 권한위의 보고를 받고 《격몽요결》과 벼루를 가져오도록 하여 친히

살펴보시고, 이를 받들 전각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교지를 받들어

강릉부사와 의논하여 오죽헌 곁에 작은 전각을 지었다. 수개월 후 공사를 마치자 임금이 친필로 

글을 하사하여 어제각에 책과 벼루를 수장하게 되었다. 강릉은 대관령과 바다 사이에 있어 빼어난

기운이 있는 곳인데, 선정이 여기서 태어나 상서롭도 이 청명하고 순수한 기운이 성서로움을

드러내 강릉의 인문人文이 크게 변하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이다.

 

 

 

어제각기

도道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결코 쉬었던 적이 없었다. 그 나타나고 숨는 자취는 때(時)와 관계

 있으니, 오백 년이면 반드시 왕자王子가 나타나서 크게 일으킨 후에야 밝아지게 된다. 생각

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을 갖추셨고 겸하여 내외內外 성명誠明의

 

 

 

 

어제각 복원기

안명필(安明弼) 지음. 42.5×119cm

 

어제각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당시 원래 있던 자리가 문성사의 위치로 결정됨으로써 해체 되었다가

1987년 현재의 위치한 고택 옆에 복원되었는데, 이 사실이 기록된 기문이다. 1987년 6월에 완성되어

강릉시장 안명필의 이름으로 계판되었다.

 

 

 

운한문 현판

미상. 34×66.6cm

 

雲漢은 은하수를 뜻하며 《시경》 대아大雅의 '밝고 밝은 저 은하수여, 빛이 하늘 따라 도는도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쓰였다.

 

 

 

 

오죽헌 사랑채

 

 

 

 

 

 

 

 

 

 

 

 

 

 

인용: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오죽헌 현판>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화 속 성서 코드  (2) 2023.10.08
치우천황  (2) 2023.10.03
전남 광주 현대사  (2) 2023.09.21
미셸 오바마  (4) 2023.09.18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  (3) 202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