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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치우천황

만몽卍夢 김 산 호

 

오궁五宮

하늘의 오방五方에는 오궁五宮이 있다.

동궁은 창룡蒼龍, 남궁은 주조朱鳥, 서궁은 함지咸池, 북궁은 현무玄武 그리고 중궁은 자궁紫宮이다.

하늘에서 제일 높은 하느님인 태일太一은 자궁이 있는 천극성天極星에 계신다.

천극성은 곧 북극성北極星을 말하는데 해와 달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별이 자리를 옮기며

돌아가는 데 반하여 북극성은 늘 제자리를 지키며 별들 중 가장 밝은빛을 발산하고 있다.

천극성 옆에 있는 세 별은 삼공三公이고, 그 뒤의 네 별 중 끝에 있는

큰 별이 태일의 황후이며, 나머지 세 별은 후궁에 해당한다.

 

그 주위의 열두 별은 12후侯이고 사방의 궁에 28수 성좌들이 한 궁에 7수씩 속해있다.

서궁 즉 함지에 속하는 일곱 개의 성좌 중 삼參이라고 부르는 성좌는 백호白虎라고도 부른다.

 

 

 

 

 

천해天海시대

마고주신으로부터 유인씨로 하늘의 피가 흘렀고 또 유인씨로부터

안파견 한님께 하늘의 정기가 그대로 전수되었으니

그 자손인 우리 민족 모두가 하늘의 피를 이어받은 하늘의 자손인 것이다.

 

안파견安巴堅 한님桓因

 

 

천산天山으로부터 민족 이동을 시작하여 천해天海(바이칼 호수) 일대에 정착하여

세운 우리 민족 최초의 전설적인 국가 한국桓國의 원시조 안파견 한님의 존영.

 

 

(좌) 천부경 원문       (우) 한국 제2세 천황 혁서赫胥 한님

 

 

(좌) 한국 제3세 천황 고시리固是利 한님        (우) 한국 제4세 천황 주우양朱于釀 환님

 

 

대평원을 무아지경으로 내달렸던 우리 기마민족의 바탕은

바로 천해(바이칼) 일대였다.

 

 

한국 제6세 천황 구을리丘乙利 한님

 

 

한국 제7세 천황 지위리智爲利 한님

 

 

 

 

아래 지도는 우리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원조상들이 천산으로부터 천혜로 이동하여

한국을 세워 7세의 한님시대를 거친 후, 커밝한 한웅의 집단들을 중심으로

광명의 신천지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 북만주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신시 배달한국을 세우는 이동경로를 보여준다.

 

 

 

 

한웅桓雄 시대

서자부의 장관 커밝한이 백산흑수지간白山黑水之間에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배달한국을 7세웠다.

'홍익인간'은 지구상의 종교와 철학이 지향하는 최고수준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신시 배달한국의 시조 커밝한 한웅님의 존영이다.

배경에 보이는 세 명의 신하들은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와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

그리고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 등이다.

 

 

신치 혁덕

'신치'는 배달한국의 고대문자를 주관하던 벼슬의 이름이고,

혁덕은 신치의 벼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다.

 

 

(좌) 녹도문          (우) 가림토 문자

산동성 환대시에서 C14 측정결과 약 38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가림토문자가 발굴되었다.

이 가림토문은 지하 6m에서 발굴되었는데, 사슴뿔에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 원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환단고기'에 언급된 가림토 관련 기록의 정확성을 증명하고 있다.

 

 

 

 

배달한국 제3세 천황 우야고 한웅

 

 

배달한국 제4세 천황 모사라 한웅

 

 

배달한국 제5세 천황 태우의 한웅

 

 

 

 

 

화산지역의 신흥 세력인 중원 토인의 나라 수인씨족과 그곳에 머물던 동이족들 사이에

모종의 마찰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천하를 관장하던 태우의 한웅은 그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태호 복희를 파견하여 수인씨의 난을 진압하도록 한다.

 

 

 

복희씨의 하와족 정벌

 

배달한국의 제1차 화하족 정벌군 사령관이 된 황자 태호 복희는 곧 천명을 받들고 군을 인솔하여

지금의 요양을 떠나 요동반도를 타고 내려와서 묘도열도를 건너 청구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지방군들을 징집하여 군을 재편성한 후 낙랑을 경유하여 마침내 화산에 나타나니 반란

을 일으킨 토착세력 수인족과 유소족 족장들이 나란히 나와 사죄하고 같이 살기를 애걸하므로

복희씨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복희는 난을 진압한 후에도 군대를 유지하였으며,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총독이 되어 토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참고로, 이때 등장하는 수인씨나 유소씨는 중화족을 의미하는 한족漢族이 아니다.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의 '이夷'자는 갑골문에 보이는 것처럼 역사의 첫 무대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지만, 한족이라는 이름은 한漢나라 때 처음으로 나온다.

따라서 이 때의 수인씨나 유소씨는 먼 옛날부터 중화지구에 살던 토착민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지 적음에 성공한 복희는

마침내 성씨를 풍성(風姓: 아직은 성씨가 없었음)으로 하고,

족명은 봉씨족鳳氏族으로 하여 청구에 정착할 뜻을 굳혔다.

 

 

 

 

복희의 나라에 관해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복희는 동방의 풍이족으로 중원으로 진출하여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천자가 되었다.

복희는 팔괘八卦와 상형문자를 만들었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인륜을 밝혔다.

복희씨의 뒤를 이어 여와씨와 공공工共氏가 왕통을 이어가다가, 제 15대 무희씨 대에 이르러

신농씨의 강씨姜氏에게 왕권을 빼앗겼다. 그 후 곡부로 도읍을 옮겨 다시 8대를 전하다가

유망楡罔에 이르러 토인을 대표하는 훤원에 의하여 멸망한다.

이 사건이 바로 탁록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좌), 중국 역사책에 소개된 여와의 모습이다. 머리는 여인이고 몸은 뱀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 기독교의 구약성경에는 전지전능한 신을 '여화와 신'으로 호칭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민족의 신칭神稱인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없다.

'하느님'은 지구상 어느 민족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민족 고유의 신칭인 것이다.

 

 

 

(좌), 배달한국 제6세 천황 다의발 한웅             (우), 배달한국 제7세 천황 커련 한웅

 

 

배달한국 제8세 천황 안부련 한웅

 

 

(좌), 배달한국 제9세 천황 양운 환웅               (우), 배달한국 제10세 천황 갈고 한웅

 

 

(좌), 배달한국 제11세 천황 커이밝 한웅       (우), 배달한국 제12세 천황 주무진 한웅

 

 

배달한국 제13세 천황 사와라 한웅

 

 

 

 

신농神濃

배달한국의 식민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적제'에 임명된 신농은

우가牛加로서 농사와 목축을 발전시켜 '농사의 신神으로 추앙되었다.

 

 

 

염제신농炎帝神農

 

열산烈山의 토지를 살펴본 신농은 우가牛加의 장관답게 우선 종자 오곡재배의 영농법을

보급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하여 본국인 배달한국으로부터 씨종자를 수입하게 되는데,

이때의 상황이 놀랍게도 대만에서 발행된 《중국고대신화》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농업의 신인 신농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주위의 땅에는 다만 9개의 우물만 있을 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우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우물이 출렁이면 나머지 우물들도 모두 출렁거렸다. 신농이 백성들을 모아 오곡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 많은 곡식 종자들이 떨어졌다.

신농이 이를 주워 밭을 갈고 심은 결과 백성들이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비록 신화의 형식을 취하여 전해지고 있지만 의도적인 곡필이 난무하는

사마천의 《사기》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진실에 접근해 있다고 판단된다.

 

 

 

신농은 농사법을 알려주어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게 한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고대 중국인들이

'농사의 신'이란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그러나 세월이 변하여 중국인들 사이에 점차 중화의식이

싹트자 사마천 같은 인물은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없애려고 신농을 폄하하기에 이른다.

중국인들은 신농이 동이족의 수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은망덕하게도

신농의 모습을 괴물 형상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중국에서 흔희 서릉西陵이라고 부르는 양잠養蠶의 신神, 적제赤帝 신농의 딸이며

헌원軒轅 황제의 부인인 뉘조가 누에를 기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황제黃帝

중국인의 시조로 추앙되는 헌원은 봉황을 숭상하던 동이족 출신으로

치우천황으로부터 중원의 자치정부 수장격인 황제로 임명되었다.

 

 

 

 

 

 

 

황제 헌원軒轅

 

 

 

아래의 그림은 황제 가문의 상징이었던 누에의 문양이

차츰 용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용의 참모습이 누에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자부紫府 선생은 발귀리 선인의 후손이다.

일찍이 해와 달을 측정하고 오행의 수리를 추고推考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지었다.

뒤에  창기소蒼其蘇가 그 법을 다시 연演하여 오행치수법을 밝혔는데 이것 역시

신시神市의 황부黃部에서 얻어온 것이다.

 

 

판천板泉 대회전大會戰

서한사의 새로운 질퍼개편을 예고한 운명의 대회전이다.

지방 토후들의 작은 충돌로 시작된 사건이 결국 치우천황의 참전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부른다.

 

 

'중국일백제왕도'에 그려진 염제의 모습 배경으로 봉황이 날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신농이 동이족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황의 등극登極

삼사三師, 오가五加의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신시 배달한국의 병권을 맡아

대대로 세습하던 최고의 명문가 출신의 치우장군을 신시 배달한국의

제14대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배달한국의 천도 신시에서 명문귀족인 치우가의 적장자로 태어난 치우는

당시 최고의 스승인 자부 선인의 문하에서 학문과 병법을 쌓은 렐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각 부의 의견이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헌원을 징벌하기 위한 동원령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의 신시神市 배달한국엔 삼경三京이 있었다. 

천황이 계신 천도로서 오늘날의 만주 하얼빈이고, 남경은 지금의 요양 그리고 서경은

치우천황의 출정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천황은 진격과 동시에 본거지를 청구靑丘로 옮겨간다.

 

 

 

 

 

 

 

 

 

 

 

 

배달한국 제 14세 자오지(치우) 한웅 기마도

 

 

우사부는 신시 배달한국의 농업과 산업을 총괄하는 부서다.

백성들ㄹ의 의식衣食 문제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던 제국의

핵심 부서 중의 하나로, 그 수장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누에를 전투모에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술이기述異記》의 기록에 따라 그린 치우천황의 모습.

치우의 형상을 도철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머리 위에 소뿔을 달고

사지에는 다섯가지 병기를 지니고 있다.

 

 

 

대회전大會戰

치우천황의 총동원령에 출동한 군단들이 각각의 군기와 장기를

높이 들고 태산 밑 벌판에 총집결하였다.

 

 

 

 

 

 

 

치우천황의 작전회의

 

 

 

 

 

 

 

치우천황군은 청구(지금의 산동지방)에 상륙하여 반역에 가담했던 아홉제후를 굴복시켜

그 땅을 모두 회수하였고, 곧이어 옹고산에서 무기를 보강 정비한 후

다시 진격하여 12제후를 불과 1년만에 제압하였다.

이렇게 청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진격하여 주변을 평정하고,

공상으로 진격해 마침내 일전을 치루게 되었다.

 

 

공상성 작전도

 

공상도

 

 

공상성 함락

 

공상성은 오늘날의 산동성 태산의 남쪽에 있다.

「산해경」에 "공상지산은 초목이 자라지 않고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이 있다."

오늘날의 날씨와 달랐음을 보여준다.

 

 

 

 

탁록대전涿鹿大戰

오랜 배달한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치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탁록대전은

천재적인 전략가 치우천황의 용병술이 빛나는 대결전이었다.

 

탁록: 중국의 하북성 탁록현의 동남쪽,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다.

지금의 산서 대동부다. 비교적 건조한 지역으로 일년 중 흐린 날씨가 많고

계절풍의 영향으로 바람과 먼지가 많다. 옛날에는 목축에 적합한 지역으로

기마민족이 선호하는 환경이었다.

 

 

 

 

 

 

아래의 '탁록대첩도'는 신시 배달한국의 제14대 한웅 치우천황의 서정군과

헌원 황제가 이끄는 중화 연합군과의 대결전을 그린 역사 전쟁기록화이다.

때마침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에 유황연기를 피워 날리는 전술을 교묘히 펼치면서

중국의 연합군을 철저히 패퇴시킨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승리를 대표하는 전투이다.

 

 

 

 

 

 

 

 

 

 

 

 

 

 

 

호군대를 이용한 공격은 시야가 좋지 않은 숲 속에서 헌원군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는 군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 등을 날뛰게 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킨즌 등의 부수적인 효과를 내어 헌원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도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중국측 기록자들이 치우천황을 '돌을 먹고 안개를 피우며 온갖 맹수를 부리는

괴물로 표현한 것은 바로 호군대나 견군대에게 당한 엄청난 참패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청구국靑丘國

치우천황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탁록과 산동 일대에

'청구국'을 세우고 치우씨가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천황의 연막공격을 받고 있는 헌원군이

지남거에 의존하여 탈출구를 찾고 있다.

 

 

응룡

<산해경>의 「대황북경」에 의하면 "장군 과보는 신농가의 지용을 겸비한 맹장으로 신농군이 헌원과

펀천전쟁에서 참패하자 남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천황군에 합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응룡의 함정에 빠져 피살되었다."고 한다.

산해경에 응룡이 날개 달린 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헌원과 반란에 가담했던 제후들이 예를 갖추기 위해 옥새를 바치고 있다.

 

 

 

 

 

치우천황이 배달한국에 맞선 토족들과 헌원은 동이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효를 바탕으로

전투 때마다 패배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을 해왔다. 전투에서 지면 도망가고 지친 천황군이 추격

을 멈추면 다시 도전해 오는 등 10년간에 걸쳐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헌원군과

토족들도 천황군의 무기와 갑옷, 전술을 본따 발전을 거듭했고 여기에 끊이지 않고 수급이 가능한

인원이 있었으므로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컷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했던 전투에서조차

처참하게 패배하자 결국 배달한국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치우천황은 동이족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토족들을 모두 죽일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들의 수장으로 헌원을 삼아 그들이 원했던 독립은 아니더라도 자치권을 주는 방법으로 민심을

다스리기로 한 것이다. 이 반란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토족의 근간을 이루던 하족과 화산족 등은

하나로 겹집해 현재 중국의 근간을 이루는 한漢족의 원형이 되었다.

 

 

 

 

 

 

 

인용: 김산호 著 <치우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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