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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고 부드럽고 기분 좋은 움직임으로 그곳에 태어난 신성한 얼굴의 소녀.

자유로운 바람을 타고 해안으로 와 조개껍데기 위에 올라 떠다니며, 하늘을 기쁘게 한다.

안젤로 폴리티아노 「마상 시합의 노래 」(1475~1478)

 

 

 

1930년 1월 1일, 런던 벌링턴 하우스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전시회가 열렸다.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기획된 《이탈리아 미술 1200~1900》은 유럽 문화 내에서

여전히 이탈리아가 주도적인 입지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회화, 조각, 장신구를

포함한 국가의 대표적인 보물을 대대적으로 조명하는 행사였다. 일종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이 전시는 이탈리아의 풍부한 예술적 유산을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다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대중에게 홍보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전시를 담당한 수석 큐레이터 에토레 모딜리아니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전시가 열린 장소는

'대영제국의 수도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적합한' 곳에서 전시를 열고자 했던 '그분'이 선택한

공간이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당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이 전시는 3월 22일 페막하기

까지 5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다. 일반 관람객과 평론가 모두를 사로잡은 작품에는

토스카나주 밖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있었다.

 

아마 지난 4세기 반 동안보다도 이 잠깐의 전시 기간에 더 많은 사람이 <비너스의 탄생>을

보았을 것이다. 작품의 실제 제작 연대와 처음에 알려진 제작 연대 사이에 70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제, 양식, 소장 기록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은 보티첼리 활동 경력의 절정에 있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권위 있는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갓 돌아온 보티첼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힘있고 부유한 예술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1480년대 중반에

제작한 작품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식인 집단이 가진 혁신적인 철학을 반영하게 되었다.

 

보티첼리가 당시 작업한 그림들은 제한된 몇몇 관람자를 위해 만들어진, 사적이고 난해한 의미를

담은 것들이었다. <비너스의 탄생>은 19세기 초 일반 관람자에게 공개되었을 때도 여전히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런던에서 처음 전시되면서 비로소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이후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소수 엘리트 관람자의 흥미를 모으는

일에서부터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까지의 놀라운 여정을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이유들이

이 작품을 명화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시인 헤시오도스가 그리스 판테온 신들의 계보를 담은 작품 「신통기(기원전 700년경)에 따르면

폭력이 사랑의 여신을 인간으로 변하게 했다. 크로노스는 어머니를 향한 복수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잘린 생식기를 바다에 던졌는데,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성'이 거품이

이는 파도 속에서 일어났다. 키테라 섬에서 조용히 표류한 그녀는 그곳에서 '연인들'의 미소와 섹스

에서 비롯되는 모든 쾌락을 다스렸다. 아름다운 여인이 파도 속에서 나타나 해안을 향해 이동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헤시오도스의 이 작품은 '비너스 아나디오메네(바다에서 떠오르는 비너스)'

모티프로 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이 이야기는 수 세기에 걸쳐 새롭게 윤색되었다.

 

보티첼리는 당대의 문헌이던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마상 시합의 노래」를 참고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는 폴리치아노가 1475년 피렌체에서 열린 경기에서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우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쓴 작품이다. 줄리아노는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 가문이 된 메디치가를 금융

왕조로 일군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다. 그는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스포츠 기량으로 유명한 동시에

메디치 가문의 한 구성원과 결혼한 아름다운 여성 시모네타 메스푸치에게 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자 인본주의 학자인 폴리티아노는 줄리아노의 형제이자 철학, 예술, 고전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위대한 자'라고 칭송받은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다. 「마상 시합의 노래」는 고전 자료들을 활용

'줄리오'와 '시모네타' 사이의 사랑을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인본주의적 미의 이상으로 표현했다.

 

이 시는 새로 태어난 여신인 '신성한 얼굴의 소녀'가 '하늘을 기쁘게 하면서' 조개껍데기를 타고

해안으로 떠내려간 장면을 나타내는 모티프인 '비너스 아나디오메네'를 우아하게 재구성한 작품이기

도 하다. 또한 보티첼리는 마상 시합 축제에도 그림으로 기여한 바 있다. 그가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받은 첫 의뢰는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상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비록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 그림에는 시모네타의 초상화가 포함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상 시합 후 10년이 지나 그려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그동안 존재하던 신화,

폴리아치노의 이야기, 그리고 화가 자신의 회화적 창조가 결합해 탄생했다. 그림 왼쪽의 인물들은

'자유로운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솟아오른 서품의 신 제피로스는 파도 위를

맴돌고, 요정 클로리스는 그의 옆에 달라붙어 있다. 은백색의 투명한 선으로 표현된 그들의 숨결은

잔물결을 일으키며 공기 중에 장미를 퍼뜨린다.

 

그림 오른쪽에는 수레국화로 장식된 펄럭이는 분홍색 로브를 들고 산들바람을 맞는 인물이 있다.

흰색 드레스는 봄꽃으로 반짝이는데, 녀는 비너스가 새로운 곳에 도착했음을 환영하는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를 나타낸다. 호라이의 도금양(挑金孃) 목걸이허리에 감긴 장미 잎사귀는

그녀가 비너스의 시녀임을 의미한다. 도금양은 오랫동안 사랑의 표상이었으며, 전통적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가 키테라 섬에 도착했을 때 최초의 장미 덤불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오렌지나무 숲은 금방이라도 싹을 틔우려는 모습으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비너스는 사랑과 다산을 상징하며 재생의 계절인 봄이 풍요로움의 계절인 여름으로 가도록 재촉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그림 안에는 여신의 탄생에 관한 상징 하나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왼쪽 하단 모서리에 있는 갈대다. 물에서 솟아오르는 이 갈대는 성기를 뜻한다고 간주되곤 한다.

 

 

비너스의 탄생(부분)

 

위 물결이 이는 듯 구불구불한 선을 활용하는 보티텔리의 기법은 화면 전체에 움직임을 일으킨다.

팽팽한 선은 소용돌이치는 천과 날개로 솟아오른 제피로스의 유연한 아치형 몸을 더욱 강조한다.

보티첼리는 제피로스의 입에서 플러나오는 숨을 가늘고 반짝이는 선으로 표현했다.

 

(아래) 봄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키테라 섬에 도착한 비너스를 맞이한다.

호라이의 옷에 핀 우아한 꽃과 그녀가 든 로브에 그려진 수레국화는 계절의 재생을 이야기 한다.

뒤에 보이는 울창한 숲속 오렌지나무의 가지에는 작은 황금빛 새싹이 반짝인다.

다산의 여신 비너스는 봄이 여름으로 바뀜에 따라 꽃봉오리를 달래 꽃을 피운 것이다.

 

 

 

 

구도의 중심에 위치한 비너스는 거대한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다.

"오른손으로는 머리칼을 움켜쥐고/왼손으로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가슴을 감춘다"고 쓴

폴리치아노의 시를 반영하듯 보이지만 보티첼리가 이 시의 묘사만 참고한 것은 아니다.

보티첼리와 폴리치아노 모두 우아한 아치형 손짓으로 몸을 가리는 모티프인 '베누스 푸티카(정숙한

비너스)'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유명한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

초에 크니도스 신전을 위해 만든 아프로디테(비너스) 숭배상으로부터 유래한 포즈다.

 

오랫동안 잊혔다가 로마 복제품을 통해 알려진 이 작품에서 비너스는 의식을 위한 목욕을 준비하면서

오른손으로 수건을 들고 왼손으로 음부를 가렸다. 보티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두 팔을 사용한 자세는

본래 모티프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바다에서 떠올라 새로운 세상으로 처음 나온 여신의 정숙한

모습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이 변형된 자세의 조각상을 소유했으나 그것을

가지게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조각을 보았든, 아니면 모티프에 대한 설명을 들었든

폴리치아노와 보티첼리는 그 포즈와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세와 비율 양 측면에서 보티첼리는 '베누스 푸티카'의 고전적인 원형을 따랐다.

이 인물은 팔다리가 길고 허리가 위쪽에 있으며 몸이 탄탄하다. 오른쪽 무릎은 약간 구부림으로써

신체 무게가 이동되어 왼쪽 어깨가 낮아지고 왼쪽 엉덩이가 들어 올려지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들어나

도록 고안된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하고 있다. 비너스의 오른손은 가슴을 부분적으로 가렸는데, 숨기는

만큼 드러내는 모호한 손짓을 하고 있다. 보티첼리가 폴리치아노 시에 관한 공감과 더불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미했다는 사실은, 인물이 왼손으로 황금빛 머리카락을 잡아 신체는 덮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고전적인 비너스상은 머리를 묶었지만 보티첼리가 그린 여신의 풍성한 금발 웨이브는

느슨하게 풀려 있으며 그녀를 해안으로 데려간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흩날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가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취향을 반영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금발이 유행했고, 여신의 얼굴 생김새와 머리카락은 보티첼리가 불과 몇 년 전에

그린 2점의 이상적 여인의 초상화에서 묘사한 곱슬곱슬한 금발을 닮았다. 그 초상화들은 1476년

스물두살의 나이로 사망한 미모네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오래전부터 간주되었다.

이는 <비너스의 탄생>이 당대 미의 개녀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과도 관계가 깊은 작품임을 알려주는

근거다. 또한 꽃이 열매가 되는 오렌지나무를 표현한 것에서도 추가적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렌지의 색과 모양이 메디치 가문의 문장紋章에 박힌 공과 비슷하다.

 

메디치가 <비너스의 탄생>을 소유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미술가 열전」

(1550년경) 초판에 나타난다. 보티첼리의 전기 부분에서 바사리는 토스카나 언덕에 있는 메디치 성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며 "비너스의 탄생, 그리고 그녀를 이 땅으로 데려온 '삼미신이 꽃으로 뒤덮인'

사랑의 여신을 그린 또 다른 작품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는 <프리마베라>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1975년에 발견된 1499년 소장품 목록에 따르면 <프리마베라>는 메디치 가문의 도심 궁전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침실 곁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방계傍系에서

태어난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는 열세 살에 고아가 되었고, 위대한 자 로렌초는 그의 후견인을

맡았다. 로렌초는 어린 조카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후원하던 인본주의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는 시인 폴리치아노, 서기관이자 번역가인 조르조 안토니오 베스푸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이 속해 있었다.

 

<프리마베라>는 1482년 7월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한 청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새로 지어진 시스티나 성당 벽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기 위해

로마로 초청한 피렌체 예술가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정도로 그해 보티첼리의 명성은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온뒤로도 메디치 가문을 위해 <프리마베라>를 포함한

다른 여러 신화적 주제의 그림들을그렸으리라고 추즉된다.

 

 

 

(좌) 비너스의 탄생(부분)  (우) 메디치의 비너스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파리안 대리석, 153cm

트리부나,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기단부에 있는 돌고래는 이 비너스상과 신화 속에 나온 비너스의 기원을 연결해준다.

보티첼리가 이 작품을 보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이 조각상에 관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1638년 로마 메디치 빌라의 소장품 목록에 있다), 이 '베누스 푸디카' 모티프는 당시 잘 알려져 있었다.

보티첼리는 여신의 얼굴을 관람객 쪽으로 돌리기 위해 비너스의 자세를 약간 수정하고

느슨하게 풀린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도록 묘사했다.

 

 

 

 

 

 

크기와 주제가 비슷한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는 오랜 기간 한 쌍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비너스의 탄생>은 1499년 소장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언급하기 전까지 그림의 행방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리고 두 그림의 주제가 연속적인 이야기(바닷속

에서 태어나 키테라 섬을 지배하는 비너스)를 다는 듯 보이지만 재료의 차이에서 서로 다른 작품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프리마베라>는 나무판에, <비너스의 탄생>은 리넨 캔버스에 그려졌다. 가볍지만 내구성

이 뛰어난 캔버스의 사용은 비교적 새로운 재작 방식이었는데, 당시에 캔버스는 시골 별장과 같이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장소에서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비너스의 탄생>은 결코 도시 궁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아마도 산속의 가족 휴양지에 놓일 작품으로 의뢰된 듯하다. 명확한 기록이 없기에 의뢰된 작품

에 나타난 비넛스에 대한 묘사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기품있는 비율, 부드러운 우아함,

고요한 매력을 공유하는 두 비너스의 이미진느 단순히 육체적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마음, 영혼, 정신의 미덕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인문주의적 이상을 구현한 하나의 상징과도 같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보티첼리의 명성은 떨어졌고 메디치 가문은 쇠퇴했다. 마지막 남은 상속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1743년 사망하면서 가족의 미술품 켤렉션을 피렌체에 기증했다.

1815년 <비너스의 탄생>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지만 수십 년 동안 주목 받지 못했다.

어쩌면 전시 장소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1862년, 작가 레옹 라그랑주는 "피렌체 사람들이 보티첼리를

복도에 버렸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 무렵, 몇몇 영향력 있는 문학가들이 보티첼리와 그의 우아한

인물 표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55~185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에드몽드 공쿠르와 그의 형제 쥘은

마치 조각상 같은 금발의 비너스가 '발푸르기스의 밤'을 주관하는 파우스트 전설 속 환영 같다며 칭송했다.

월터 페이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 이 그림을 "기이한" 것이라 하면서도

"그리스인의 말보다 더 그리스인의 분위기에 직접적으로 스며들게 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보티첼리의 구도와 인물상은 귀스타브 모로나 에드가 드가 같은 작가들이 따라 그리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복제품의 인기도 높아졌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과의 연관성을 비롯해 인본주의 사상과 관련된

세부적 맥락 없이 이미지만 유포되면서,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한 백인 유럽인의

이상적 아름다움' 이라는 단순하고 매혹적인 상징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벌링턴 하우스에서 열린 전시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탈리아 정부는 파리의 프티 팔레에서 열린

<이탈리아 미술>(1935)과 미국 여러 도시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거장들>(1939~1940)을 포함한 소장품

순회 전시를 선보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각 전시회의 핵심 작품으로 등장했으며 수 세기를

관통하는 아름다움의 본보기로 찬사를 받았다. 그림과 그 안에 담긴 역사는(그리고 아마도 그림의 주제도)

대부분의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생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도의 중심에 서 있는 키 큰 아름다운

금발 여성은 무대나 스크린에 등장하는 여배우 혹은 패션잡지에 나오는 늘씬한 모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쉬웠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아트 투어 문화는 끝났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영화 <007 살인번호>(1962)에서 여배우

우슬라 안드레스가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에서 활보하는 장면처럼 전형적인 유럽의 이상미가 담긴

대중적인 콘텐츠에서부터 비백인, 비서구, 비이분법적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모티프를 차용하고

변용하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보티첼리 착품의 형식은 미술, 영화, 패션 등 여러 영역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현되어왔다.

 

그리고 의도적이든 아니든(찬사, 비판, 패러디 등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러한 되풀이는

보티쳂리가 보여준 전통과 현대의 고풍스러운 융합의 효과를 증폭시키며

영원한 진리라는 탈을 쓴 동시대적 사고를 자극한다.

 

 

 

 

 

프리마베라

1480년경, 나무판에 템페라, 207×319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키테라를 통치하는 비너스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주홍색 망토를 든 모습으로 가운데에 자리한다.

화면의 오른쪽에서는 제피로스의 따뜻한 숨결이 클로리스를 봄의 여신 플로라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왼쪽에서는 메르크리우스가 지팡이로 위협적인 구름을 몰아내고, 삼미신은 춤을 추며, 비너스 위에는

큐피트가 떠 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 서로 연결되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은 캔버스가 아닌 나무판에 그려져 두 작품이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적 여인의 초상(시모네타 베스푸치)

1475~1480년경, 포플러에 템페라, 82×54cm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금발에 단정한 외모를 가진 미모네타 베스푸치(1453~1476)는 15세기 문예부흥기의 피렌체에서

사람들이 가장 찬미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보티첼리는 미모네타의 짧은 생애에 단 한 번

그녀를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은 1475년에 열린 경기에서 우승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수여된 상패 제작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초상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담고자 한

여러 초상화와 <비너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형상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

 

 

 

비너스의 부활 (월터 크레인(1845~1915)

1877년, 캔버스에 유채와 템페라, 138.5×184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19세기 후반 보티첼리의 명성이 서서히 되살아나면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에

'비너스 아나디오메네' 포티프가 자주 등장했다. 월터 크레인은 오랜 신혼여행 기간(1871~1872)에

피렌체를 방문했고 <비너스의 탄생>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그린 비너스 그림에는

보티첼리의 영향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일부(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2)

앤디 워홀(1928~1987)

1984년, 리넨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122×182cm)

앤디 워홀 미술관, 펜실베이니아주

 

 

마치 현대의 유명 인사를 알아보는 것처럼, 낮익은 이목구비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이 여인이

보티첼리의 작품 속 여신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앤디 워홀은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과 단순화된 형태로 비너스 이미지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20세기 후반의 보티첼리 이미지가 가진 상징적인 힘을 강조한다.

 

 

 

 

1992년 6월 2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힐튼 헤드 아일랜드

리네커 데이크스트라(1959년생)

1992~1996년, 크로모제닉 스린트, 167×140cm

시카고 미술관, 일리노이주

 

리네커 데이크스트라는 1990년대에 미국과 서유럽, 동유럽의 여러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청소년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사진 시리즈는 단순한 배경에 한 명의 인물을 정면으로

담아낸 고전적인 초상화들과 형식적으로 유사하다. 데이크스트라는 미묘한 몸짓이나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비슷해 보이는 초상 사이에서 각각의 개성적인 면모를 엿보게 한다. 이 시리즈

는 과도기에 있는 이들을 기록한다. 그녀의 사진은 항상 하나의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 있다.

몇몇 사진들은 보티첼리의 비너스 자세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나, 이 포즈는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취한 것이다.

 

 

 

 

비너스 드레스, 1995년 봄/여름 컬렉션

티에리 뮈글러(19*48~2022)

 

보티첼리가 그린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여성 이미지는 엘사 스키아파렐리부터 알렉산더 맥퀸까지

많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다. 1995년의 뮈글러만큼 노골적으로 비너스를 떠올리게 하는

드레스를 디자인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안쪽이 분홍색 새턴으로 된 조개껍데기가 엉덩이

주위로 열리는 검은색 벨벳의 피시테일 스커트와 거기에서 솟아오른 투명한 코르셋 바디

수트로 구성된 의상이었다. 그로부터 25년 후, 가수 카디 비는 바로 그 드레스를

'2019 그래미 어워드'의 레드카펫 위에서 부활시켰다.

 

 

 

 

 

인용서적 : 데보라 N, 맨커프 著 / 조아라 易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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