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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유교와 미술

- 공자와 제자들의 고사 -


중국을 대표하는 전통 사상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유체계 중 하나이다. 이는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도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함께 오랜 시간 상호본완적 관계를 지속하며 중국인의 일상은 물론 의식의 깊은 곳을 지배했던 일종의 윤리의시기기도 하다. 유교는 춘추시대에 노魯나라 출신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전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활동으로 다양한 학파가 존립하던 시기를 거쳐, 맹자孟子(기원전 372-기원전 289)에 이르러 단일 학파로 발전하였다. 이때 각국의 군주들이 영토를 확장하여 천하를 통일하려 했던 정치적 논리가 크게 작용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던 한나라는 인仁을 바탕으로 한 충효忠孝를 강조했으며, 통치자는 스스로절제하고 학문을 통한 수양과 연마를 거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태평성대의 실현은 최고 목표로 하였다.


1970년대 초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가시화되며 다시 유교가 부각되었는데, 이는 유교적 자본주의로 '아시아적 가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연하면 유교의 충효사상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으로, 유교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는 현실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유교이 특징과 연관이 있다. 반면 중국의 민족 종교인 도교는 감성적이면서도 직관적인 경향이 있어 유교와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 흥미롭다. 이와 관련하여 유교적 특성은 중국 한족의 원류가 된 화하족華夏族의 성향에서 기인되었고, 도교는 동이족東夷族의 특성으로 설명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이족이 집권했던 상대商代는 신비주의적이고 주술적이었지만, 화하족이 주대周代를 이끌면서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36년 유교가 국교로 공식 인정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의 유교를 원시유교라고 한다.그리고 한대부터 당대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詁學, 송대부터 원대까지의 유학은 고증학考證學으로 명칭이 달라지면서 학문적 접근 방법론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는 유교가 왕조마다 시대적 특징과 한계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대부터 국교가 된 유교가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근원적인 사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공자는 여러 제후국을 찾아다니며 예를 실행하고 인으로 사람을 섬겨야만 잃어버린 사회질서가 회복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통道統은 제자인 증자曾子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손자인 子思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근간으로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했던 덕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맹자 이후 유교에 도교와 불교가 습합되면서 유가사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크게 위축되었다. 아울러 진지황제가 법치를 주장했던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기원전 233)의 제자 이사李斯(?-기원전

283)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가法家를 제외한 모든 유교 서적들을 불태우고 관련 학자들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키면서 유교는 강제적으로 일시 단절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대에 이르러 활발한 경전 복구사업을 통해 주요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과 사서 등이 편찬되면서 체계적인 학문으로 재정비되었다. 따라서 한대의 유학은 '경전 복구'와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학문'으로 당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이것이 훈고학訓告學으로 특히 오경을 중시하였다. 이는 송대 성리학에서 사서를 중요시했던 것과는 차별화된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전들은 대개 고대 중국의 자연현상이나 사회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제왕帝王의 정치, 고대 가요, 가정생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역사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유교정치가 미술에 영향을 미쳐 충효를 비롯해 지조나 절개 등에 관한 고사들이 화상전이나 벽화, 공예품 등에 표현되어 백성의 교화에 적극 활용되었다. 또한 공자를 추승하게 되면서 그의 초상이나 주요 행적을 소재로 한 그림이 황실 후원으로 제작되어 통치 이념으로서 유교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전한前漢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다.

그는 노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다. 그의 유가 사상은 당대에 정치적 이념으로 채택되지 못하였으나,

3,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68세 무렵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육경六經 편찬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73세에 사망하였다. 한대에 이르러 공자의 위상을 공식적으로 드높인 인물은 무제에게 유교를 국교로 건의했던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79- 기원전 104)이며, 그는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추대하여 유교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전한의 평제平帝가 서기 1년에 공자에게'褒成宣尼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제후로 승격시켰으며, 739년에는 당 현종玄宗이 '문선왕文宣王'이라 시호하면서 제자들까지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송대에 이르러 진종眞宗이 공자에게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많은 황제들로부터 적극 비호를 받았다.이는 황제들이 유교를 자신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학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덕분에 공자의 지위는 날로 높아져 산동성에 위치한 그의 사당은 문묘文廟라 불리며 유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공자문례노담孔子問禮老痰

무영사 전실 뒷벽 동쪽 부분, 후한 167년, 산동성 무씨사보관소


 『장자莊子』에서 공자가 노자와 만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장자莊子에서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道를 물었다고 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각각의 인물 옆에 이름을 새겨 넣어 누구인지 식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당대唐代까지 유교사상이 반영된 미술은 상대적으로 회화 분야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한대와 육조시대 미술에서 유교적인 표현이 비교적 성행하였다. 유교적 주제의 미술품은 백성에게 치세이념을 전달하고,

일를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위정자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따라서 유교적 이념을 표현한

미술품의 일부는 동시에 정치적 성향을 지닌 독특한 미술 장르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러한 미술은 유교의 깊이 있는 철학적 내용보다는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쉬운 주제들, 예컨데 효자, 충신, 열녀, 또는 공자와 제자들의 기념비적인 행적 등을 묘사하여

유교의 충효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커다란 목표였다. 또한 앞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될 후손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정치세계의 권모술수를 다룬 일화들이 미술 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




공자의 제자들

무영사 전실 뒷벽 상단 부분, 후한 167년, 184×140cm,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보관소


한대 화상석을 보면 전실 뒷벽의 첫 번째 단에 공자의 제자들이 일렬로 서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는 한나라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유학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평면적이지만

중간 부분에 "자로子路"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인물은 머리에 새가 앉아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회顔回, 자공子貢 다음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새가 앉은 듯한 표현은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유학자의 옷을

입기 이전에 모자에 쓰고 다녔던 수탉의 꼬리로 만든 모자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좌, 자로子路    

우, 마원馬遠, <공자상孔子像> 남송, 견본채색, 27.7×23.2cm, 북경 고궁박물원

무배경에 공수拱手를 한 채 서 있는 공자를 간결하게 묘사하였지만 학자로서의 근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김진여, <자로문진도子路問津圖>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중에서, 1700년, 견본채색, 31.7×60.1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 전래된 원대 궁정화가 왕진붕(1280-1329)이 그린 《공자성적도》를 조선 후기 화원화가 김진여가

 비단 바탕에 임모한 작품 10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자로문진도子路問津圖>는

기원전 491년(노라라 애공 4) 공자가 제나라로 돌아갈 때 나루터 위치를 잠시 잊어버려 자로로 하여금

밭을 가는 장저醬菹와 걸익㘶溺에게 알아보도록 했던 일화를 그린 것이다.





- 효자에 관한 고사 -


유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질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출발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효자孝子는 일찍부터 칭송되며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주제로도 적극 활용되었다.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효자의의

숫자가 많아졌으며, 원대에 이르러 곽거경이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편찬하면서 효자를 24가지 유형으로 규범화 하기도 하였다.




효자들

무량사 서벽 두 번째 단, 후한 151년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보관소


효자 관련 그림의 가장 이른 예로는 후한대에 조성된 산동성 무량사 화상석의 서벽에서 두 번때 단을 꼽을 수 있으며,

 동벽 두 번째 단도 효자 이야기로 세워져 있다. 것은 효자 증자曾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 어머니가 베틀 앞에 앉아 무릎 꿇은 남자를 뒤돌아보고 있는데,

 이는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에 있는 '증모투저曾母投杼'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上左, 증모투저曾母投杼.   上右, 민손실추閔損失捶

下左, 노래자오친老萊子娛親,   下右, 정란립목위부丁蘭立木爲父 


이러한 이야기는 인물 표현만으로 충분히 전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상단과 하단에 각각

"증자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신의 세계에"까지알려져 신들도 감동하였고 후세에 널리 알려져 모범이 되었다." 와

참언讒言이 세 번에 이르자 증자 어머니도 베틀의 북을 내어던졌다."라는 문장을 새겨 넣어 부연설명을 하였다.





채화칠협彩畵漆篋

후한 2-3세기, 높이 21.3cm, 평양시 용연면 남정리 116호묘(채협총) 출토, 조선력사박물관


이것은 부장용품을 담았던 작은 대나무 상자로 몸체 윗부분 네 면에 앉은 모습의 남녀 30명이 그려져 있고, 네 곳의 모퉁이 각각에는

 서 있는 인물이 1명씩 총 8명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후한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윤리적 행동을 극단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유표했던 효자들의 이미지이며 각각의 인물 어깨 부분에 효손孝孫, 효부孝婦, 皇帝, 미녀美女 등이라 적여 있다.





효자도

북위 6세기, 높이 62×234cm, 하남성 낙양 북망산 출토, 미국 넬슨 앳킨스 미술관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면 빈번한 왕조 교체로 한대의 통치이념이 크게 위축되면서 혼란이 극대화되었다. 이때 '충군忠君'을 강조하는

군위신강이 흔들리면서 신하가 주군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사회적으로 효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남북조시대에 효자를 제재로 한 미술품이 특히 성행했던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 석관의 좌우 옆면에는 3명씩 모두 6명의 효자도가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효손 원곡原穀

효자도(부분), 북위 8세기





효자 위尉

효자도(부분), 북위 6세기, 62×234cm, 하남성 낙양 북망산 출토, 미국 넬슨 앳킨스 미술관





- 충신에 관한 고사 -


유교와 관련하여 효자 다음으로 미술에 많이 보이는 것은 충신이며, 이는 충효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근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산동성 무량사의 화상석 서벽에서 두 번째 단은 효자에 관한 것이고, 바로 아래 세 번째 단은

 임금과 신하 간의 충절과 신의에 대한 주제로 구성되었다. 이는 효와 충의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시사해준다.




형가자신왕荊軻刺秦王

무량사 서벽(부분)


사마천의 『사기』 군86 「자객열전」에 실려 있는 것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자객이 된 형가荊軻(?-기원전 227)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예양豫讓

무량사 동벽 세 번째 단, 후한 151년, 가사현 무씨보관소


화면 사이에 "예양이 살신으로 지백에게 보답하려 하였다."와 "趙襄子"라는 구절이 있다.








조맹부, <이양도>

원대, 14세기, 지본수묵, 26.2×48.4cm, 미국 프리어 갤러리


전한의 명신名臣 소무蘇武(기원전 1401-기원전 80)에 관한 이야기다.

윤필로 그려진 살진 양과 갈필로 그려진 산양은 각각 벼절한 이릉과 절개를 지킨 소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소무목양蘇武牧羊'의 고사는 청 말 상해에서 그림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또한 근대 한국화단에도 조석진 등이 그린 작품이 전한다.





- 절부와 현부에 관한 고사 -


부부나 특정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지킨 여성들이 미술의 주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산동성 무량사의 뒷벽(남벽) 첫 번째 단은 당시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강요되었던 원칙을 지켜낸 절부節婦들로 채워져 있다.

비록 현대적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지만, 이를 지켜낸 의부義父나 현부賢婦의 일화가 많았다는 사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가 가부장적이었음을 방증한다.





절부에 관한 고사들

무량사 뒷벽(남벽) 첫 번째 단, 후한 15년, 산동성 가상현 무씨보관소





上, 양고행거왕빙梁高行拒王聘

유향劉向(기원전 77-기원전 6)이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에 수록된 양梁나라 고행高行에 관한 일화가 표현되어 있다.

고행은 미망인이었지만 빼어난 미모로 귀족들로부터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채 자식과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이때 양나라 왕마저 사자를 보내 입궁을 명하자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의 코를 베어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下,양절고자梁節姑姉 (무량사 동벽 첫 번째 단, 후한 151년,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보관소)

양나라 절고자節姑姊, 전처의 아들을 구한 제나라 계모, 경사京師 절녀節女 이야기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傳 고개지, <여사잠도女史箴圖>부분

6세기 후반, 견본채색, 24.8×348.2cm, 영국박물관


서진西晉의 장화張華(232-300)가 서술한 『여서잠女史箴』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이 책은 서진 초 혜제惠帝의 부인인 가후賈后가 전권을 휘두르며 불의한 일을 자행하자 이를 경계하고

여성에게 요구되는 봉건적 부덕婦德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열녀전도列女傳圖>

북위, 목판칠화, 81.5×40.5cm,산서성 대동석가채大同石家寨 사마금룡司馬金龍 묘 출토, 대동사박물관.


정치적으로 북조와 남조가 단절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남방의 한족문화가 북방까지 전파되었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네 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상단에는 순임금이 아버지 고수와 계모, 동생 상의 핍박을 받았지만 황제가 되고 요임금의 두 딸을

맞이하였다는 고사가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에는 주周나라에서 여성의 윤리 덕목을 잘 지켜 왕실 번영에 기여한 세 명의 여성,

즉 주태강, 문왕 어머리 주태임, 문왕 왕비 주태사가 묘사되어 있다. 세 번째 단은 동주시대 노사씨의 어머니인 노사춘강을

그린 것이며 네 번째 단은 <여사잠도>의 첫 번째 장면과 동일한 주제로 반첩여의 열부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여성들을 묘사한 표현 기법이며, 이는 고개지의 인물화풍과 매우 유사하여

그 영향력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려준다.





- 정치적 사건에 관한 일화 -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정치적 성격을 지닌 주제들도 미술에서 다루어졌으며, '공보성왕周公輔成王'은

유교사회에서 지향한 모범적인 신하의 모습으로 한대 화상석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주공이 13세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필하며 천자의 직권을 대신 행하였지만,

7년이 흘러 나라가 안정되고 성왕이 성인이 되자 통치권을 넘겨주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신하의 상으로,

후한 송산소석사의 서벽 두 번째 단에 주공과 성왕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주공보성왕周公輔成王

후한, 송산소석사宋山小石祠 서벽, 산동성 석각예술박물관


화면에서 일산日傘을 쓰고 있는 어린 왕자가 성왕이고,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무엇인가를 전하는 인물이 주공이다.





이도살삼사

화상석, 후한 말, 산동성 석각예술박물관


두 개의 복숭아로 세 명의 장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정치적 권모술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도살삼사

기원전 1세기, 하남성 낙양시 소구 61호묘 전실, 낙양 고묘박물관





홍문연鴻門燕

기원전 1세기, 하남성 낙양시 소구 61호묘 후실, 낙양 고묘박물관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가 멸망한 후 패권을 다투던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208년 함양 함락을 눈앞에 두었을 때 홍문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모임이다. 항우의 책사 범증은 유방을 죽여야만 항우가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홍문 잔치에서 유방을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항우의 부하 항장이 춤을 추며 유방을 시해하려 했으나, 유방의 부하 장량이 춤을 추며

 이를 몸으로 저지하였다. 이어 번쾌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고 탈출한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항우와 유방




장량과 항장





효자, 충신, 열녀 등 유교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고대 국가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진나라 이후 두 번째 통일국가의 역사, 문화적 기틀을 마련한 한나라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삼강오륜을 현실에서 실천했던 효자, 충신, 열녀를 만인의 본보기로서 천하에 널리 알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가적 필요성으로 한대 화상석을 비롯한 위진남북조시대 분묘미술에서 효자, 충신, 열려 등의 주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교사회의 모범적 인간상에 해당하는 효자, 충신, 열녀 등은

동아시아 문화권의역사적 전개와 궤를 같이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 Jim Bri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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