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생맥生脈>, 1950년
전통 문인화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변모를 거쳐 1950년대에 사의적 추상에 이르렀던 고암 이응노(1904~89).
동양미학에서 '사의寫意'는 사실적 묘사에 치우친 '형사形似'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정신성을 중시한다.
자연과 물아일체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동양화는 일찍부터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북종화보다
사의적 정신성을 중시하는 남종화를 높게 평가해 왔다.
일찍이 자신이 익힌 서예와 문인화의 정신이 서양의 추상미술과 유사성이 있음을 깨달은 고암은 문인화의 현대화를 통해
서양과 대결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은 즉흥적 본능과 행위성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유사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모두 자신의 신명난 흥취를 즉흥적인 행위를 통해 그렸기 때문에 비슷한 결과에 도달했다.
이응노, <구성(밥풀 조각)>, 1967년, 옥중 작품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을 모아 작업을 했다.
교회에서 준 전도지에 드로잉을 하고, 교도소에서 주는 밥을 신문지와 반죽하여 조형물을 만들었다. 또 먹다 남은 밥풀로
나무 도시락의 조각들을 떼어 내어 베니어판 위에 붙이고, 마당에서 주운 못으로 알루미늄의 세면도구나
식기에다가 구멍을 내면서 교도소에서만 3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위 작품은 식물의 이미지와 인간의 형상을 융합한 것으로 자연과 인간이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생명력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분단의 아픔과 혈육마저 갈라놓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간접적으로 담겨 있다.
이러한 잠재태의 형상이 이후 자연 쪽으로 기울면 문자 추상이 되었다가 인간 쪽으로 기울면 군상이 되었다.
내가 빌려 표현하는 자연 대상과의 융화는 나의 생명인 예술의 반려자다.
(이응노, 신세계미술관 개인전 서문)
이응노, <문자추상>, 1979년
1969년 출소한 후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 <문자추상>으로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문자의 요소인 획과 점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구성되며 유형으로 변하는 동양철학의 이념을 작품 안에 구현한 것이다.
동양의 한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문자의 근원이 자연 사물의 형태를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추상적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질 때 '
무형이 유형'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며, 그것이 바로 내가 구상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응노, 신세계미술관 개인전 서문)
동양철학에서는 우주의 본체를 무극無極 이라 한다.
무극 안의 태극太極이 음양 운동으로 만물이 생성되고, 태극 안에 있는 황극皇極이 만물의 조화와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우주의 생명 작용이라 할 수 있는 무극, 태극, 황극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유형이 곧 무형"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응노, <군무>, 1985년
1970년대 이응노의 주도적 양식이었던 문자추상은 80년대 들어 <군무> 시리즈로 변모한다.
그것은 1980년의 '5.18 광주민주화운도'과 무관하지 않다. 평생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조국을 등지고 살아야 했는 그는
누구보다도 평화 통일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 자유를 동경했다.
그는 먹으로 춤을 추는 듯한 사람들의 격렬한 옴짓을 표현하면서 문자추상에서 다소 절제되었던 신명의 에너지를 다시 복원시켰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을 절규하는 듯한 춤 동작을 통해 현실에서 억압된 자신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해금되었고, 한국에서 잊혀 가던 그의 존재는 다시 활발히 조명되기 시작했다.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역사적인 《이응노 회고전》이 열리게 되지만 그 감격을 이기지 못했는지 안타깝게도 개막식을 앞두고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개막식 날 전시장에 분향소가 차려지면서 고암의 한 많은 삶을 추모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박생광, <무녀>, 1981년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1904~85)은 70대 후반 나이에 한국 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화업을 정리할 나이에 전혀 예상치 못한 신작으로 미술계를 뒤흔들고,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 까지 감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열정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생전 불교계의 거물 청담스님과는 둘도 없는 고향 친구로서 서로 의기투합하여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성격의 박생광의 작품세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불교보다 나라굿으로 유명한 만신 김금화와의 만남.
만신 김금화의 굿
박생광은 어떤 특정 종교의 형식을 따르는 것보다 약을 물리치고 평안을 기원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신앙을 종교성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샤머니즘의 색채와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그대로 나의 종교인 것 같다.
(『박생광, 그 민족예술의 재조명』)
이러한 깨달음 이후 그의 작품은 우아하고 유약한 일본 채색화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김금화를 모델로 한 <무녀>는 춤사위와 굿판의 이미지들로 화면 전체를 채우면서 목판화 같은 투박하고 거친 선으로
대담하게 평면을 채웠다. 여기에 영혼을 자극하는 오방색의 강렬한 울림과
우연적인 얼룩 효과가 더해져 굿판의 신명나는 에너지를 형상화 했다.
좌), 가츠시카 호쿠사이, <춤추는 기녀>, 19세기 전후
우), 우타가와구니요시, <지옥의 기녀>, 1840년대
선이 곱고 나약한 전형적인 일본화 스타일이다.
이러한 박생광 특유의 화풍은 비슷한 소재를 그린 일본화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실적이고 화려한 중국의 북종화풍을 계승한 일본인들은 색채를 좋아하여 채색화를 발탈시켰다. 그리서 한국에서도 채색을
사용하면 무조건 일본화의 아류로 보았고, 이것은 한국에서 채색화가 침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1981년
무속과 단청, 불교의 탱화 등에서 착안한 그의 색채는 인상주의의 광학적 색채가 아니라 영혼의 울림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통한다. 색채와 영혼의 관계를 탐구한 칸딘스키는 서양작가로는 드믈게 신명이 있는 작가다.
그의 증조모가 몽골의 공주였고, 아버지가 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시베리아의 소도시, 키아크타 출신이라 그런지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은 샤머니즘적인 신명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조형과 정신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지적인 노력으로 인해 즉흥적인 신명이 사라지고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변해버렸다.
박생광의 <토함산 해돋이>는 불교 도상들과 토함산 풍경이 평면적으로 펼쳐진 작품이다.
그는 형상이 지닌 종교적 상징성을 활용하여 추상의 공허함으로 빠지지 않는 동시에 삽화처럼 되지 않게 하고자
추상적 이미지를 가미하여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완성했다. 토함산은 하늘의 구름이나 산속의 동물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물결치는 듯한 선율과 오방색의 강렬한 대비 속에 평면적으로 용해되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Ⅱ를 위한 스케치>, 1909~10년
박생광, <혜초 스님>, 1983년
1982년 그는 신라의 승려 혜초가 기록한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이는 대승불교의 한 분파인 밀교에 대한 관심에서였는데, 밀교는 승려 중심의 소승불교와 달리 진언을 염송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와 강일치하여 현생에서의 성불을 목표로 하는 민중적인 성격의 불교다. 인도의 불교와
한국의 무속신앙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서민들의 선하고 소박한 신앙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고,
종교의 교파를 초월한 신명의 생명력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자 했다.
인도에 다녀온 후에 그린 <혜초 스님>은 왼쪽에 혜초 스님과 그가 지은 시가 쓰여 있고,
화면 전체에 하얀 코끼리와 불교적 도상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물결치는 듯한 주홍빛 선이다. 그는 명상적인 불교의 주제를 그리면서도 선명한 주홍색 드로잉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신명의 파동을 형상화 하였다. 무속을 그리든 불교적 주제를 그리든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교리의 내용이 아니라 신명의 힘이다.
그는 주제의 서사성과 회화적 추상성을 공존시키며 눈과 영혼을 넘나드는 다층적 세계를 형상화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1980년대에 서양에서 유행한 신표현주의의 회화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의미의 지향성이 해체된
서양의 포스트모던적 혼성모방과 달리 박생광의 회화는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역경을 승화시키려는 주술적 열망이 담겨 있다.
박생광, <명성황후>, 1984년
박생광도 말년에는 민족의 역사적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역사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민족의 아픔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나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다루면서 그는 억울하게 죽어간 혼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고자 했다. 박생광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민족의 아픔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박생광, <전봉준>, 1985년
박생광의 최후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전봉준>은 너비 5m의 대작으로, 팔순을 넘긴 노인이 그린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더구나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후두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노년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위축되기는커녕, 그는 "남은 생명의 등불을 초연한 자연으로서 전신傳神의 경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며"며 오히려 대작에 도전했다.
1894년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서구의 프랑스대혁명에 버금가는 한국의 반봉건운동이자
근대적 민주화의 초석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전봉준>은 전주성 전투 장면을 그린 것이다. 흰 옷을 입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농민군 가운데 전봉준이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 오른쪽에는 놀란 표정으로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박생광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주변 곳곳에는 대포로 공격하는 관군과 해상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살해되는 농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적인 역사화가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굿과 같은 것이다.
노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고 신명을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 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 예술은 그 민족 전통 위에 있다.
(1985. 7. 10일, 작고 일주일 전에 화첩에 쓴 글)
1985년 <전봉준>을 제작하고 얼마 후 그는 영원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특별전 《르 살롱-85》에 초대작가로 선정되면서 그가 견주어보고 싶어 했던
샤갈과의 만남이 주선되었으나 공교롭게도 3월에 샤갈이 먼저 작고하고, 박생광은 7월에 작고 함으로써
이 둘의 만남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미루어졌다.
이중섭, <흰 소>, 1954년경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19*16~56)은 살아 생전에 작가로서 빛을 보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오늘날 박수근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치열한 예술혼과 작품에 담긴 미의식이 시간이 지나서도 큰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남 평원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된 이중섭.
모두 들 알다시피 오산학교는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사업가 이승흔이 사재를 털어 건립한 학교이다.
그가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가담했다가 투옥되자 조만식이 그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고,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유영모, 함석헌 등이 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중섭, 문학수, 김소월, 백석, 김억 등이
오산하교 출신 예술가들이며, 이중섭은 여기에서 예일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미술교사 임용련을 만나 화가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1937년 임용련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일인들 앞에서도 서슴없이 「애국가」와
애창곡「소나무야」를 부를 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좌), 조르주 루오, <곡예사>, 1913년
우), 조르주 루오, <기리스도의 얼굴>, 1937년
일본에서 도쿄제국미술학교를 거쳐 보다 자유로운 문화학원으로 욺긴 그는
그곳에서 조르주 루오의 야수주의 화풍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의 작품은 검은 윤곽선으로 인간의 깊은 감정을 표현한 루오의 작품과 닮아 있어서 동방의 루오로 불리기도 했다.
이중섭과 루오는 모두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의 깊은 정신성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통하는 데가 많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오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한 주제를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표현했다.
이중섭, <흰 소>, 1954년경
검은 윤곽선과 야수적인 붓질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루오의 화풍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의 작품에 흐르는 정서는 루오처럼 무거운 침묵이 아니라 역동적인 신명의 에너지다,
힘찬 붓질로 달려가는 소 한 마리를 간결하게 포착한 이중섭의 <흰 소>는 서예의 비백飛白 기법처럼 붓의 필세가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 빠른 속도로 그어지는 일필의 대담한 붓질ㅇ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굴복하지 않으려는 그의 힘찬
기개가 느껴진다. 이것은 어려서 습득한 서예적 필력과 고구려 벽화에서 영향 받은 신명의 정서가 결합되어 나온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은 양식적으로 서양의 야수주의나 표현주의에 비견되지만, 그 미학적 뿌리는 고구려 벽화다.
이중섭, <황소>, 195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