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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도교와 미술


무위자연을 추구하며 불사不死를 꿈꾸다






유교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지배체제나 일상의 사회구조를 지속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도교는 불사不死를

소망하는 인간의 무의식이나 사후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도교는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토착 종교로,

현실에 회의를 느껴 도피하려 했던 중국 문인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따라서 엄격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시서화를 즐기며 자유를 구가한 문인들에게 정신적 안식처 내지는 귀의처로 기능하며

문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가道家는 도교의 전신처럼 이야기되지만, 원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기원전 369-기워전 289)의 사상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이며

 일종의 통치 철학이었다. 노자는 주나라의 몰락을 예견하고 황실 도서관장을 그만둔 다음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서쪽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를 알아보고 가르침을구하자 '도道' 자와 '덕德' 자로 시작하는 5,000여 자의 글을 써준 것이

바로 도가의 주요 저서인 『도덕경』이며, 다른 명칭은 『노자』라고 한다.  더불의 이러한 일화를 배경으로 성립된

'노자출관老子出棺'은 후대에 성행한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의 주제로 널리 애호되었다.


도가는 전국말기 초나라 지역의 동이족 사이에 퍼져 있던 신선사상과 토착 샤머니즘을 받아들이며 기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죽어도 죽지 않는다거나 신선세계에 다시 태어난다는 논리는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백성들 사이로 확산되며

민간신앙을 대표하는 원시 종교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다시말해 도교는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여기에 도가, 음양오행,

복서卜筮, 참위讖緯, 점성占星 등이 더해지고, 다시 불교의 체제나 조직을 모방하여 교단으로 발전하였지만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면서 수복록壽福祿을 구하는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전한과 후한 사이에 도가는 황노黃老사상과 결합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철학, 즉 도가뿐만 아니라 도술, 방술까지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 도사道士는 도술을 행하는 사람이고 방사方士는 방술을 하는자였으며, 전가가 국가나 정치와 관련한 경세치민經世治民에서

능력을 발휘했다면 후자는 개인적인 종교 차원에서 수련에 전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도교는 교리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기 때문에 사물의 근원은 도道 또는 무극無極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으로 인위적인 조작이나

개입이 배제된 절대의 상태를 가리키며, 『노자』권1에 있는 "도道라 부를 수 있으면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부를 수 있으면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의미하며,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는 내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된 몽접夢蝶으로 유명한데, 이는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一場春夢 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누구나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인至人 또는 진인眞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노자가 그러한 인물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인의 단계를 넘어선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 신격화 하였다.


후한 말 장각張角(?-184)에 의해 성립된 태평도太平道는 종교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가장 이른 예이다.

이는 황제皇帝와 노자를 숭상하는 황로사상을 근간으로 민간신앙을 습합하여 한나라의 폭정에 항거한 단체이다.

 머리에 황색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이들이 일으킨 난을 역사에서는 황건적의 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거의 동시기에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종교적 구원을 내세운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장도릉張道陵(34-156)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이들은 노자를 숭배하여 『노자(도덕경)』를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였다.


육조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몇몇 도사들이 체계적인 종교 조직을 갖추어감과 동시에 경전을 집대성하여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일례로 갈홍葛洪(284-363)은 『포박자抱朴子』에서 사상체계와 연금술에 의한 방술 및 수련법을 제시하였으며,

 남조 출신의 육수정陸修靜(406-477)은 여러 나라를 순례하며 입수한 『상청경上淸經』을 정리하였다.

또한 그는 갈씨 일족과 『영보경靈寶經』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도장道藏'의 분류체계인 '삼동설三洞說'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도홍경陶弘景(456-536)은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집대성하고 '상청파'를 개창하였다.


당대에 이르러 도교는 황실의 적극적인 옹호를 받으며 국교로 신앙 되었는데,

 그 까닭은 본명이 이이李珥인 노자와 당을 건국한 이세민李世民의 성씨가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대 성리학자들도 도교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민중 종교로 급성장하였다.

도교에서 개인 수련을 통한 일상에서의 도덕적 삶의 실천을 중요시한 것이 문인들의 생활태도와 일치하면서 빠르게 대중화된 것이다.

 이 무렵 왕중양王重陽(1113-1170)이 창시한 '전진교全眞敎'가 강력한 교단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유불도 삼교의 근원이 같다는 삼교동원三敎同源의 입장에서 부적에 의한 주술이나 불로불사의 신선설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내외양면의 수행을 강조하였다.


원대에는 몽고족 황실도 도교를 비호하였으며, 명대에는 황실과 밀착된 정일교가 교단을 주도하면서 주요 경전이 집대성되었다.

영종英宗에 의해 편찬된 『만력속도장萬曆續度藏』이 그것이다. 청대에도 황실의 지배 아래 종교적 활력은 잃어갔지만

문인의 내적 수양이나 민중의 도덕의식을 지탱하는 토속종교로 오늘날까지 신앙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교가 전래되었다.

『삼국유사』군20에 624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 당나라로부터 오두미도가 유입되었다거나,

연개소문淵蓋蘇文(603-663)의 요청으로 643년 당나라 도사 숙달叔達 등 8명이 입국하여 사찰에서 『도덕경』을 강했다는 등의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고려시대에는 1110년 북송의 도사 2명이 입국하여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고

제자를 선택하여 서도書道를 가르쳤다. 이후 인종仁宗(재위 1122-1146) 때 성행하면서 천지산천을 비롯해

노인성老人星, 북두성, 태을太乙, 오방산해신군五方山海神君에게 국가 안위를 기원하는 제례, 즉 재초齋醮를 왕실에서 관장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소격서昭格署에서 재초를 주관하였으며, 국왕의 신봉 여부에 따라 성쇠를 반복하다

성리학과 대립하면서 약화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유입된 관우신앙이 민간에서 신앙되며 그 명맥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전국에서 발견되는 청동 거울인 <삼각연신수경三角緣神獸鏡>에 의해 4세기에는 도교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지배층이 방술에 의존했다거나 신선사상의 영향이 확인되지만, 텐무조天武朝(678-686) 이래로

도교의 조직적인 전래 경로가 정치적으로 차단되면서 도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교는 기본적으로 미술과 관련이 매우 적은 편이다.

교리의 근간이되는 노장사상 자체가 일종의 철학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교단이 성립되고종교화의 수순을 밟게 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불교의 조형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차용하기 시작하였다.

외래 종교인 불교가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엄청난 규모의 불교미술을 지켜보면서

상당한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추정된다.


유교와 비교했을 때 도교미술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지만, 예배 공간인 도관道觀이 사찰처럼 건립되었고

육조시대와 당대에 걸쳐불상과 같은 도교 존상尊像들이 제작되어 봉안되었다.

또한 도관의 벽면에는 옥청玉淸에 머무는 원시천존元始天尊을 찾아가는수많은 신들의 행렬을 그린 조원도朝元圖가 주로 그려졌다.

그리고 원대에 이르면 잡극이 성행하면서 친숙해진 기복적祈福的 성격이 강한 신선들이 도관의 벽면을 벗어나

 이동 가능한 수노인壽老人, 유해섬劉海蟾 등도 단독으로 그려지면서, 종교적 목적을 지닌 실용화에서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화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 도가적 이상이 구현된 분묘미술 -


도가와 도교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육조시대의 분묘미술 중에서는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지닌 조형물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도교의 사상적 기반인 도가는 유학과 같은 일종의 통치 철학으로 지배층의 무의식을 지배하였으며,

도교에서는 죽은 자의 시신을 매장한 분묘 공간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는 죽은 뒤에도 영혼은 지속된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배경으로 당시 귀족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사이에서

도가사상이 유학과 동등한 학문으로 인식되었음을 알려준다.대표적인 예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꼽을 수 있다.




죽림칠현도竹林七賢圖 중 혜강嵇康, 완적阮籍, 산도山濤, 왕융王戎

남조 5-6세기, 강소성 남경시 서선교 궁산묘 출토, 남경박물원


화면에서 나무와 편안한 자세의 인물 표현은 고개지의 고졸한 화풍에서 상당히 이탈하였지만,

인물 옆에 이름을 쓰는 방식은 한대의 회화 전통을 따랐다. 이러한 도상은 남제南齊 경황제景皇帝의 修安陵을 비롯해 명황제明皇帝의

흥안릉興安陵, 화황제和皇帝의 공안릉恭安陵에도 남아 있어 황제의 능에서  귀족 무덤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제는 도석인물화에서 선호되며 명 · 청대에 즐겨 그려졌다.






왕자교와 부구공

화상전, 남조 5세기 전번, 19×38cm, 하남성 등주시 학장촌 출토, 하남박물관


왕자교王子喬는 주周 영왕靈王의 태자 진晋이며 생황으로 봉황 소리를 냈는데, 어느 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주변을 노닐던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따라 숭산嵩山에 올라 신선이 되었다. 30년이 지난 7월 7일 구씨산에서 학을 타고 내려와

기다리던 가족과 만났으며, 그 뒤에 하남성 언사에 위치한 숭산 아래 그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왕자교와 부구공이 숭산에서함께 신선이 되기 위해 수행했던 것을 표현한 장면으로 보인다.





- 예배 공간으로서의 도관 -


도교가 종교로 발전하면서 사찰과 같은 예배 공간으로 도관이 건립되었다.

특히 당대唐代에 황실 후원으로, 1,600여 개의 도관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은 황실과 백성의 평안을 빌며 재난을 피하기 위해

사연신에게 지내는 제례인 재초齋醮를 올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송대에는 삼교합일이 강조되며 개인의 불로장생을

위한 신체 단련 중심의 수기적 도교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여진족과의 대치라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남송에서

왕중양은 삼교합일을 근간으로 차분히 하여 마음을 살피는 '내관內觀'과 신체를 단련하는

 '진공眞功' 등의 수행에 힘쓰는 전진교를 롭게 창안하였다.





이선관 二仙觀의 대전

1097년, 산서성 진성시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뒷면의 작은 보개寶蓋가 있는 공간에 소조로 된 선녀를 중심으로

좌우에 시녀가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사찰 건물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조원도朝元圖> 부분

1358년, 산서성 예성현 영락궁 서벽


원나라 황실의 경제적 지원으로 중건된 영락궁永樂宮은 산서성 예성현에 위치한 전진교 도관이다.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 당시의 벽화까지 전하고 있어, 건축사흔 물론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화면은 도교의 기본 개념인 삼청이라는 우주관을 근간으로 292위位에 이르는 제신諸神들이 최고의 신에 해당되는

원시천존을 향해 우에서 대열을 이루며 나아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동관왕묘의 관우상

19세기, 보물 제142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난계로 27길 84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전통을 이어 소격서에서 도교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임란 이후 폐지되었다.

하지만 임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린과 양호 등이 왜병을 물리친 것이 관우 덕분이라며 1598년과 1600년에 각각

남관묘와 동관묘를 조성하면서 관우신앙이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동대문 밖에 위치한

 동관묘만 남아 있지만, 이를 통해 조선 사회에서 신앙된 도교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





관성묘 (關聖廟)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년)에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별장(南固別將) 이신문(李信文)의 발기로 각처 유지들의 헌납성금으로 건립되었다.

묘내(廟內)에는 관우의 소상(塑像)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의 벽화가 걸려있다








-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상 -



명 · 청대에 만들어진 도교 존상은 문인이나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불교의 예배 대상처럼 특정 존상이 제작되었으나 널리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이유로는 도교가 다신교였다는 점과 신들의 계보나 위계질서가 명확하지 않았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신도를 이끈 도사들만이 복작한 신의 계보를 인지하고 백성들은 거의 몰랐던 것도

 특정 존상의 정착이나 지속적인 제작을 어렵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左, 도교감상비 탁본 6세기, 높이 80cm, 시카고 자연사박물관

右, 도교조상비 북위 496년, 높이 135cm, 섬서성 요현 출토, 약왕산박물관



도교감상비道敎龕像碑의 명문에 의하면 풍도馮道와 그 일족이 조성하였다고 하며 형태는 비상碑像에 가깝다.

중앙에 위치한 좌상을 중국 복식을 한 두 인물이 양옆에서 협시하고 있는 모습은 불교의 삼존상을차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조상비道敎彫像碑는 496년 조성된 것으로 불교의 삼존상에서 형식을 빌려와 노자를 신격화 하였다.

저부조의 감실 중앙에 좌상으로 표현한 노자를 양옆의 인물이 모시고 있다. 불교 존상에는 없는 사각형 관을 쓴 것이나

황로군을 조성하였다는 명문 등으로 도교 존상임을 알 수 있다.






左, 노자삼존상  북주 568년, 높이 34.8cm,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남북조시대에 최고의 신으로 추승되었던 노자의 특이한 도상이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상은 도교 신자가 죽은 부모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도복 차림의 노자가 앉을 때 팔을 얹어 몸을 기대는

일종의 팔받침인 은궤隱几를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나, 왼손에 쥔 먼지떨이개 주미, 협시 도사가 든 홀 등은

수 · 당대에 제작된 노사장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다.



右, 천존좌상  당 719년, 높이 305cm, 산서성 운성시 경운궁, 산서성박물관


교지의 발전 과정에서 노자가 신격화한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추상화되면서 우주만물을 창조한 원시천존과

영보천존靈寶天尊이 성립되었고, 원시천존을 중심으로 태상노군과 영보천존이 좌우에서 협시하는 '삼청三淸'의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이는 불교의 '삼신三身'체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장엄용 종교화에서 축수용 감상화로 -



도교가 미술에 미친 독특한 영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회화 분야이다.

기록이나 현전 작품에 의하면 도석화는 예배 공간의 벽면을 장엄하여 신앙심을 자극하는 종교화였다.

그러나 점차 이동이 가능한 화폭에 그려지는 과정에서 명대 초기를 고비로 부귀, 장수, 재복 등 길상의 의미를 지닌

신선도나 선종화禪宗畵의 일부 주제에 감상적 성격이 더해지면서 축수화祝壽畵로 발전하였다.





전傳 무종원武宗元, <朝元仙杖圖>

17세기, 견본수묵, 44.3×580cm, 뉴욕 C.C. Wang 컬렉션


예배 공간인 도관을 장엄하여 신앙심을 유도했던 종교화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여러 신들이

원시촌존을 배알하러 가는 장면을 그린 '조원도'이다. 이 그림은 북송의 도관을 장엄했던 벽화의 밑그림으로,

조원도 성행과 표현 기법의 특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휘顔輝, <하마철괴도>

13세기, 견본채색, 각각 161.5×79.7cm, 교토 지온지知恩寺


원대에는 서민을 상대로 한 잡극이 특히 유행하였으며, 이때 신선들은 인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이끌며

천계로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신선들은 매우 친속한 존재로 인식이 바뀌었고, 예배 공간을 장엄했던 종교화에

불로불사의 길상성이 더해지면서 화면에 단독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원대 도석인물화가 안휘가 그린 <하마철괴도>는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특히 하마는 세 발 달린 두꺼비를 가진 재물신이며, 이철괴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신선으로서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화면에 보이는 두 신선의 얼굴에는 인간의 모습이 투사되어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런 새로운 표현 기법은

 명대 궁정화가들과 절파浙派 화가들로 이어졌다. 반면 신선의 복식은 굵은 필선으로 묘사되었으며, 강렬한 인상의 신선과

어둡게 묘사된 배경은 차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는 예배 공간을 장엄했던 실용적 목적의

종교화가 사적 공간을 장식하는 감상화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현상이라 이해된다.





<팔선과해도>

순양전 벽화, 1358년, 산서성 예성현 영락궁


도석인물화를 대표하는 팔선이 개념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준다. 화면에서는 서왕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종리권을 시작으로

여동빈, 이철괴, 조국구, 장과로, 서선옹, 한상자, 남채화의 팔선이 바다를 건너고 있다. 팔선은 원대에 성해한 잡극에 등장했던

여러 신선들 가운데 백성가 특히 친숙해진 신선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며, 정확한 유래가 알려지지 않은 서선옹이

하선고를 대신하고 있어 현재 사용되는 팔선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상희商喜, <四仙拱壽圖>

1430년대, 견본수묵채색, 98.3×143.8cm, 대북 고궁박물원


파도를 배경으로 왼쪽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파초 잎을 탄 한산寒山과 빗자루를 탄 습득拾得이,

 오른쪽에는 지팡이를 탄 이철괴와 두꺼비를 탄 유해섬이 학을 탄 채 머리 위를 날고 있는 수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안휘의 작품에서 보이던 종전의 엄숙함이나 신비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면을 보면 친숙하면서도 활달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로張路, <수노인>

《잡화도》중에서, 16세기, 금전 수묵담채, 31.4×61cm, 상해박물관


이런 도석인물화는 축수용으로 대중적 수요에 힘입어 다수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 말기에 급성장한 출판업을 배경으로 도교나 선종 관련 인물들의 전기가 실린 서적들에 삽화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윤덕희, <남극노인도>

1739년, 지본수묵, 160.2×69.4cm, 간송미술문화재단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에 축수용 감상화로 도석인물화가 널리 성행하였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된 정치 사회적 체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혼란이나 어려움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신선사상이 만연하였던 것이나, 신선을 주제로 한 소설이나 그림 등을 애호했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김홍도, <군선도>

1776년, 지본담채, 132.8×575.8cm,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가 32세 때 그린 <군선도>(1776)는 한국 도석인물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림에서는 세 무리의 신선들이 서왕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왼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첫 번째 무리는

소를 타고 있는 노자를 필두로 동방삭, 문창제군, 여동빈 등이며, 중앙에는 당나귀를 탄 장과로의 뒤를 한상자와

조국구 등이 따르고 있고 하선고와 선녀, 선동이 맨 앞에서 서왕모의 거처로 무리를 이끌고 있다.

특히 화면의 인물들은 약수弱水 위를 걷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배경으로 처리하여 신선들의 신성이 돋보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





      


左, <여동빈과 유자선> 『삼자도회』인물 11권

右, 김홍도 '여동빈과 유자선' <해상군선도> 8폭 병풍 중 제5폭, 견본채색, 각 150.3×51.5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에는 팔선 중에서도 특히 여동빈도가 가장 많이 그려졌다.

이는 군자의 금욕주의적 삶이 강요되었던 조선의 문인들에게 그의 보검이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잘라내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단곡의 여동빈도가 다수 현전하고 있다. 여동빈이 머리 위에 버드나무 가지가 솟은

유자선과 함께 그려진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는 『삼자도회』인물 11권에서 차용한 도상이다.







작가 미상, <瑤池宴圖>

19세기, 견본채색, 134.2×47.2cm, 경기도 박물관


서왕모의 거처인 곤륜산에 있는 요지의 누대에서 주나라 목왕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는 장면과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결합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군선경수반도회'라고 하며, 대개 청록산수로 그려진 곤륜산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나라의 요지연도가 연회 장면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원래 서왕모는 『산해경』에서 언급한

반인반수로 곤륜산의 한 봉우리를 다스리는 산신으로 신화에 포함되었다. 서왕모는 신화에서 출발하였으나

널리 신앙되며 모든 신선을 관장하는 도교의 신으로 지위가 격상된 것이다.







황공망黃公望 , <부춘산거도> 부분

1350년, 지본수묵, 33×636.9cm, 대북 고궁박물원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도교의 이상은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었으며, 때문에 신선이 사는 선계라는 이상향은 산수화에 적극

투영되기도 하였다. 이상적 산수는 몽고족이 지배한 원대에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몽고족의 탄압을 받은 문인들은 강남에 은거하며

 전진교 도사들과 자주 시서화로 교유하였다. 일례로 황공망이 1350년 완성하여 도사 무용無用에게 준 <부춘산거도>는 산수에

선계의 이미지를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왕몽王蒙이 도사 일장日章에게 그려준 <區區林屋圖> 역시 그런 예에 속한다.


명대 중반 강소성 소주의 도시문화를 배경으로 화려한 정원에서 고동기古銅器를 감상하거나 시서화로 교유한 문인들의 일상은

마치 선계를 현실에 옮겨놓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직업화가 구영仇英(1493년경-1532)이 그린

<선산루관도仙山樓館圖>나 문인화가 육치陸治(1632-1690)가 그린 <방호도方壺圖> 등은 선계의 이미지와 산수화를 결합하여

당시 문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안식처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명 · 청대를 지나며 도교의 종교적인 색채는 희석되어

갔지만 죽음을 두려워한 모든 인간의 본성과 밀착되어 무의식을 지배하며 현재까지 일상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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