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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불교와 미술





마음속 우주를 깨닫기 위한 끝없는 여정


인도에서 석가모니(기원전 563-기원전 483)에 의해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로 전파되면서 한 국가의 종교가 아닌 동아시아의 신앙체계로 성장 발전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는 석가족釋家族에서 나온 성자聖子라는 의미이며, 그의 성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hartha이다. 그는 인도의 카필라 성 룸비니 동산에서 정반왕과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세에 결혼하여 아들 라후라를 얻었다. 하지만 생로병사와 인생의 덧없음을 고뇌하다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의 고행을 마친 35세 때에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이후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쌍림수 아래에서 열반하기까지 45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설파하였다.


역사적으로 초기에 신앙된 소승小乘불교는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신의 해탈을 위해 수행에 전념하는 개인적 차원의 종교로,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법구경法句經』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였다. 그러나 쿠샨시대 후기인 2세기 후반에 시작된 디승大乘불교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더 중요시하며 함께 성불하자는 입장으로, 교리가 체계적으로 발전하며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 소의경전은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열반경涅槃經』등이며, 여기에 실린 내용은 스케일이 우주적이며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 경전들의 공통점은 마음속에 우주가 자리하고 있으며 우주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부처들의 본령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경지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의 유일한 부처는 석가모니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대승불교가 서역으로부터 신강성新疆省을 거쳐 중국에 유입되었으며, 동진東晋(317-420)의 승려들이 인도를 찾아 구법활동을 전개하면서 중국과 인도의 직접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특히 불교의 전래 시기와 관련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후한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 설'이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 중국인들은 유가적 입장에서 불교를 요임금, 순임금, 주공周公, 공자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오랑캐의 술術로 인식하고 반대하였다. 때문에 통치자가 숭상한 황로사상이나 방솔, 음양오행 등의 일부로 이해하는 격의불교格儀佛敎로 수용 되었다. 이후 남북조시대에 선비족이 불교를 호국이념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체계적인 이론이 여러 경전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7-8세기에 중국에서 한역된 대장경大藏經이 한국, 일본, 티베트 등으로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불교는 송대부터중국의 고유사상인 유교, 도교와 어깨를 나란히하며 중국인의 일상적인 삶은 물론 내세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유교나 도교가 사후세계나 지상 밖의 우주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반면, 불교는 윤회輪廻, 극락極樂, 삼천대천세계 등으로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내세나 우주 등을 명확한 논리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주요 교리는 인생을 고해苦海로 보고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며,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을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세적 특징으로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고 속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출가出家를 권장하였고, 승려가 된 다음에도 끊임없이 수행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이 있으며, 자신의 업業에 따라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는 독특한 설정인 윤회를 기반으로 현세에서 많은 선업善業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항ㅆ다. 이 밖에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살생을 금기시 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과거에 가축이었을 수도 있고 내생에 다시 가축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또는 잡아먹은 동물이 부모님의 변신일 수도 있다는 윤회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출생이라는 고통의 고리를 끊는 것이며, 실천 방법으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제시하였다.


또 다른 주요한 특징으로는 세상 만물이 모두 마음(心)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본 논리체계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 마음은 도교에서 최고의 상태를 나타내는 무극無極, 또는 도道에 해당된다. 즉 보이는 현상은 마음이라는 거울어ㅔ 비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개념이 성립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 선종이 성립하는데 이론적 근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불교는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로 구성되며 이는 각각 부처, 불법, 승려를 가르킨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은 문자로 기록한 대장경이며 경經, 율律, 논論, 소疏로 구성된다. 여기서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은 계율, 높은 고승들의 이론, 소는 고승들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다. 이러한 불교 경전들이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4) 등에 의해 한역되면서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가 깊어졌으며, 수 · 당대에 이르러서는 소의 경전을 근거로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華嚴, 법상法相, 밀교密敎 등의 여러 종파가 성립되면서 순수한 중국 불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동시에 이를 배경으로 다안라의 불교미술은 건축, 공예, 조각, 등에서 최고로 번성하였다. 하지만 몽고족이 지배한 원대에는 라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명대 이후에는 중앙의 통제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종淨土宗이 백성들 사이에서 신앙되었다.


-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는 생략 -


불교는 성립 당시부터 종교적 색채가 강하였고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관련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인 미술품이 적극 활용되었다. 인도의 초기 무불상無佛像시대에도 연꽃이나 불족적 등이 제작되면서 불교미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경전과 불상, 향로 등이 돈황을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유교나 도교도 이로부터 자극을 받아 종교적 차원의 미술품을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불교미술은 매우 광범위하고 다종다양하므로 편의상 몇 가지 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 예배 공간으로서의 사원과 사찰 건축 -

건축은 자연환경이나 재료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감숙성 동환시 명사산


4세기 후반부터 당대까지 1 ,000여 개의 석굴이 마치 벌집처럼 조성되었기 때문에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북위부터 원대까지 수많은 승려들이 머물며 불교 미술을 꽃피웠던 곳이다.





현전하는 492개의 석굴 벽면에는 본생도나 석가모니의 주요 행적들들이 채색으로 그려져 있고,

채색 소조상 2 ,400여 구가 남아 있어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불교미술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1900년 막고굴 제17호 장경동에서 우리나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포함한

불교 관련 문서들과경전, 자수 등 유물 5만여 점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는 중국 문화사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관련문헌만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돈황학'이 성립되기도 하였다.















<수하인물도>와 홍변상

847-907년, 상 높이 94cm, 감숙성 돈황시 막고굴 제17굴


장경동은 원래 당나라 역경승인 홍변洪辨의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사당이었다.

그는 승려이면서도 토번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선종宣宗 (재위 847-859)이 '하서석문도승통지사주승정법률함학교주'에

제수하였을 뿐 아니라 붉은색 옷과 불상 등을 하사했다. 홍변 사망 이후에 제자들이 이를 기념하여 식량을 보관하던 늠실 벽면에

정수병과 자루가 걸린 보리수나무 두 그루를 그리고, 스승의 모습을 소조상으로 만들어 안치하면서 '사당'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운강석굴 제20굴의 외부 전경

5세기 후반, 산서성 대동시


사암 절벽에 200여 기의 크고 작은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446년 북위 태무제의 폐불사건 이후 승려 담요가

황실의 후원을 받아 460년  공사를 시작하여 524년 완공된 제46굴부터 제20굴까지가 대표적인 예로 주목된다.

이곳에는 북위를 건국한 도무제道武帝를 비롯해 명원제明元帝, 테무제, 경목제, 문성제를 기리며 조성한 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의 오대불五大佛이 각각 안치되어 있다. 이를 '담요오굴曇曜五窟'이라 하며 거대한 불교조각들의 엄밀한 배치와

통일성이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493년 수도를 하남성 낙양으로 옮기면서 운강석굴의 불사는 급속히 위축되었으며,

낙양으로 이주한 장인들에 의해 용문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하였다.






용문석굴 봉선사동奉先寺洞

672-675년, 본존 높이 17.14m, 하남성 낙양시


494년 고양동이 가장 먼저 착공된 이후 빈양동, 연화동, 경선사동, 봉선사동 등이 완성된 용문석굴은 현전하는

 최고의 석굴사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4)에 의해 조성된 봉선사동에는

17.14미터의 노사나불盧舍那佛좌상을 중심으로 나한상, 보살상, 역사상 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으며,

인간미가 더해진 당당한 신체 표현과 뛰어난 균형미로 중국 불교조각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

751-774년, 본존상 높이 508.4cm, .토함산


성당盛唐 양식과 한국적 미감이 더해져 조화와 균형의 극치를 이룬 대표적인 예로

이상적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다.





남선사南禪寺 대전大殿

782년 건립, 산서성 오대현


현전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찰 전각이다.

 845년 회창폐불會昌廢佛 때 피해를 입지 않아 성당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례이다.






봉정사鳳停寺 극락전

1200년대 초, 경북 안동






옥천사玉泉寺 배치도

조선 후기, 경남 고성


조선조 숭유억불책으로 사찰이 산지로 옮겨가면서 경사지를 활용한 유기적인 전각 배치 형식으로 바뀌었다.

탑이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회랑도 없어지면서 전각들이 마당을 둘러싸는 중정형 가람으로 공간의 실용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임란 이후 민간신앙을 수용하는 등 통通불교적 성격이 커지며 대웅전 주변이나 팔상전, 관음전, 응진전 등의 보단단 전각을 배치하고

그 뒤로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같은 신중단神衆壇 성격의 전각을 조성하는 현재의 가람배치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사찰 건축에서 불단,

보살단, 신중단으로이루어진 통불교의 삼단 구성을 갖춘 예로는 경남 고성의 옥천사가 대표적이다.






호류지 금당과 오중탑

670년 이후 재건, 나라현


성덕태자가 고구려 승려인 혜자惠慈를 스승으로 모시던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670년 화재 이후 재건된 금당과 오중탑五重塔이

현전하고 있어 가장 오래된 예로 주목된다. 더불어 이러한 사찰 조성에 백제 장인들이 참여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찰 건축에 백제와

고구려 양식이 남아 있어 그런 면면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다이지 대불전

11954년 이후, 나라현


나라시대에는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당나라 문화가 직접 전래되었으며,

금당 앞에 있는 탑이 동서로 배치되는 쌍탑식 가람으로 조성된 야쿠시지와 도다이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헤이안 초기에는 진언종의 성행과 더불어 밀교 건축이 건립되었다. 밀교 건축은 산지가람을 좌우로 질서정연하던 가람 배치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조화를 꽤하였으며, 다보탑 건립과 불전 앞에 예배공간인 예당禮堂을 배치한 것 등이 특징이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승려 조겐에 의해 시로 유입된 남송 건축 양식인 대불양을 비롯해 조망용 누각을 특징으로 하는 선종양, 일본의

전통 건축 양식인 화양, 앞의 양식들이 혼재된 절충양이 공존하였다. 대불양은 간결하여 힘이 넘치는 양식으로 1180년 화재로 소실된

도다이지 대불전을 재건하는 데 사용되면서 대불양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후쿠지 동금당

1415년, 나라현


선종양은 중심축에 불전과 법당이 위치하고 둘려진 회랑 좌우에 고루, 졸루, 조사당 등이 있는 구조였다.

모로마치시대에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세워진 중층 건물인 로쿠온지의 금각, 히가시야마 쇼지의 은각에서 선종양을 확인 할 수 있다.

가마쿠라시대로 접어들며 나라시대에 건립된 사찰 건축이 400년 이상 되면서 일본 전통 양식인 화양으로 재건되었는데, 고후쿠지

3층목탑과 동금당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근세로 갈수록 화양과 함께 대불양, 선종양이 뒤섞인 절충양으로 바뀌어갔다.





- 사리 봉안을 위해 세워진 불탑 -



左, 숭복사崇復寺 9층석탑

466년, 높이 153cm, 대북 국립역사박물관

右, 숭악사崇嶽寺 12각 15층전탑

북위 523년, 높이 39.8m, 하남성 동봉시





左, 자은사 대안탑

701-704년, 높이 64.1cm 섬서성 서안

右, 불궁사 석가탑

1056-1196년, 높이 67.31m, 산서성 응현시





법주사 팔상전

1605-1626년, 높이 22.7m, 충북 보은 속리산





미륵사지석탑

7세기 초반, 높이 14.2m, 전북 익산




 

감은사지 동 · 서 3층석탑

682년, 높이 13.4m, 경북 경주시 양북면




개성 南溪院地 7층석탑

고려 11세기, 높이 10m, 국립중앙박물관






야쿠시지 동탑

730년경, 높이 34.5m, 나라현 나라시




네고로지 대탑

1547년, 높이 48.5m, 와카야마현 이와데시




- 주요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교조각 -



기원보시도祇園布施圖

1세기 말, 편암, 20.3×35.2cm, 간다라 출토,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부처가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예배 존상의 변화를 예고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 장면은 수달 장자가 기타태자에게 구입한 동산 위에 정사를 지어 석가모니에게 기증하였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의 특징에 해당된다.





산존불비상三尊佛碑像

2세기 전기, 사암, 높이 67.3cm, 아히차트라 출토, 인도 유델리 국립박물관


마투라 지역에서 조성된 삼존불비상은 인도인의 얼굴에 오른쪽 어깨만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가

몸에 밀착되어 불신의 건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굽타 양식으로 간다라 양식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左, 금동여래좌상

295년경, 높이 32.9cm, 300년경, 傳 하북성 석가장 출토, 하버드대학 포그미술관

右, 금동보살입상

4세기 초, 높이 32.9cm, 傳 삼서성 함양시 삼원현 출토, 일본 후지이유린칸


간다라와 마투라 불상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모두 전래되었지만 처음에는 공예품의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예로는 후한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요전수, 청자 신정호, 청동불수경 등이 있다. 이는 초기에 불교가 격의불교로 수용되면서

부처를 신선처럼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흥미롭다. 중국에서 단독 불상이 예배용으로 조성된 것은 4세기 초이며

하북성 석가장 출토 금동여래좌상과 섬서성 함원현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전자는 두렷한 이목구비와 콧수염 표현,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파상모, 두 손을 포갠 손바닥이 위로 향하고 있는 선정인,

통견의 법의 등이 간다라 불상과 유사하다. 후자 역시 뚜렷한 이목구비와 파상모, 꽃 문양이 표현된 원형 목걸이,

사자가 표현된 샌들을 신은 것 등은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左, 청자 신정호神亭壺

295년, 높이 47.3cm, 강소성 오현시 사자산 1호묘, 오현시 문물관리위원회

右,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

338년, 높이 39.7cm, 하북성 석가장 부근 출토, 샌프란시스코 박물관


하지만 화북 지역에서 불교가 널리 신앙되면서 불상은 점차

중국식으로 바뀌어갔고, 그러한 예로는 북위에서 338년 조성된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불상을 보면 머리카락이 파상모에서 직모로 바뀌었으며, 콧수염이 사라지고, 배꼽 부위에서 두 손을 겹쳐 손등이 정면에서 보이도록

표현한 선정인은 한나라 도용陶俑에서 그 전통을 찾을 수 있어 간다라 양식에서 벗어나 중국식으로 변화하였음을 알려 준다.






左, 석조삼존불입상

476-483년, 높이 310cm, 운강 제6동 남벽 상단 서감, 산서성 대동시

右, 정광5년명 금동미륵불입상

524년, 높이 75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선비족이 세운 북위(386-534)시대에 불교조각의 중국화가 크게 진전되면서

경전의 다양한 부처나 보살들이 예배 대상으로 제작되었다.

운강석굴 석조삼존불입상의 본전불은 사각형 얼굴에 두꺼운 통견의 법의가 좌우대칭으로 뻗쳐있고,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려

두려움을 물리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으며, 법의 왼쪽 끝자락이 왼손에 걸쳐져 늘어져 있다.

이런 표현은 북위 양식의 특징으로 석굴사원은 물론 소지불所持佛에서도 동일한 양식을 접할 수 있다.

우측의 금동미륵불입상이 그러한 예이며 이처럼 이동 가능한 불상들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삼국시대 불상 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539년, 높이 16.2,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식으로 토착화된 북위 양식이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左, 천보4년명 석조반가사유상

                      553년, 높이 52cm, 상해박물관    

右, 정관13년명 석조아미타불좌상

638년, 높이 81cm, 교토 후지이유린칸       


6세기 중반에는 북위 양식이 변화를 보이는데 얼굴이 둥글어지고 손발의 크기는 작아지며, 전반적으로 각이 줄어들면서

부드러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동위東魏(534-550)이 양식의 특징으로 좌의 적조반가사유상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대좌에 쓰인 조상기造像記에 북제 553년 승려 도상道常이 발원하여 제작된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 적혀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미륵상보다 태자사유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정관 13년명 좌상은 당나라 양식의 시작으 알리는 중요한 기준작이다.






                               



左,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후기, 높이 93.5cm, 국보 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

右, 목조반가사유상

7세기 전반, 높이 123.5cm, 쿄토 고류지


북위와 동위 양식을 적극 수용했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반가사유상이 널리 제작되었음을 위 두 점의 예로 알 수 있다.

국보 제83호는 머리에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三山반가사유상'이라고도 하며 등신대에 가까운 비례로 처리된 불신佛身과

자유스러우면서도 입체적인 옷주름, 정교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등에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일본 고류지 소장의 것과는 금동과 목재라는 재료의 차이만 있을 뿐 형태가 거의 유사하여

두 나라 연구자들로부터크게 주목받기도 하였다. 고류지가 신라에서 건너간 승려 진하승이 창건한 절이라는 사실과

『일본서기』에 623년 신라에서 가져온 상을 고류지에 안치했다는 기록, 목재가 일본의 녹나무가 아니라

신라에서 주로 자라는 적송이라는 점 등이 신라 제작설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석굴암 문수보살과 제석천, 사천왕상


화강암을 다듬어 조성한 후실 중앙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상이 있고, 전실 벽면의 八部神衆 8구를 시작으로

인왕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 3구, 나한 10구를 좌우대칭으로 조각하여 불국토를 재현한 석굴암.

이러한 배치는 석가모니의 설법에 참여했던 보살, 천인상, 제자들의 위계질서에  따른 것이며,

새로운 당나라 양식과 도상을 수용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이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보경사寶慶寺 석조삼존상

701-704년, 높이 109.5cm, 섬서성 서안시 출토, 도쿄국립박물관


7세기 말 8세기 초부터 중국 불교조각이 세속화 경향을 보이며 신성神性보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불상의 법의가 얇아지고 몸에 밀착되어 윤곽선이 그대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잘록한 허리를 약간 비튼 삼곡三曲 자세,

장식성의 증대 등 특징적 표현이 나타난다. 이 삼존상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左, 금동판金銅板 불상

680년경, 높이 27cm, 경북 경주 안압지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右, 야쿠시지 금동약사삼존상

718년경, 본존 높이 317.3cm, 나라현


이와  같은 당나라의 또 다른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되었으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판 불상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여래와 두 보살의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협시보살의 삼곡 자세와

장식성이 커진 머리의 보관寶冠 표현 등은 보경사 석조삼존상과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야쿠시지 금당의 금동약사삼존상 역시 동일한 7세기 말의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左, 금동관음보살좌상

북송, 전체 높이 49.8cm, 절강성 금화시 만불탑 기단부 석실 출토, 북경 중국역사박물관


원형의 신광身光에 둘러싸인 관음보살은 바위에 앉아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쪽 팔을 가볍게 올려놓고 있으며,

왼발은 아래로 내려 바위를 밟고 왼팔은 뒤로 하여 편안하게 몸을 지탱하는 유희좌遊戱座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보타락산補陀落山의 수월관음 신앙이 유행하면서 전형적인 관음보살상이 되었으며, 원만한 얼굴에

불신이 약간 길어지며 평평해진 것에서 북송양식으로의 변화가 감지된다.


中, 목조석가여래입상

985년, 높이 160cm, 교토 세이료지


교토 세이료지의 목조석가여래입상은 전반적으로 불신의 볼륨감은 당나라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가마쿠라시대에 진언율종의 승려 에이손이 석가신앙을 유포시키면서 세이료지의 목조석가여래입상은 모각模刻의 대상이 되었고,

유사한 불상이 60여 구 이상 조성되었다. 다시 말해 북송 양식의 세이료지 목조상이 가마쿠라시대에

일본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세이료지식 석가'라는 새로운 양식이 유행한 것이다.


右, 목조보살입상

1349년, 높이 190.6cm, 미국 넬슨 앳킨스 미술관


원대에는 송대의 당나라 양식을 근간으로 한 전통적인 불상과 함께 황실에서 티베트의 고유 신앙이 가미된 라마교를 신앙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라마교 불상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전자에 해당하는 미국 앳킨스 미술관 소장의 목조보살입상은

1349년제작된 삼존불상의 협시 중 하나이며, 등신대를 훨씬 넘는 크기에ㅓ 당당한 표정과 힘이 넘치는 불신, 유려한 의습 표현,

장식적인 보관등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동적인 활달함과 당당함은 원대의 새로운 미감이 더해진 것이다.







左, 대덕9년명 금동문수보살좌상

1305년, 높이 18cm, 북경 고궁박물원


후자에 속하는 대덕9년명 좌상은 라마교의 전형적인 존상으로 대좌의 밑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고전신高全信 일가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右, 금동관음보살좌상

고려 14-15세기, 높이 15.5cm, 강원도 회양 장연리 발견,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도 고려 후반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에 라마교 불상이 전래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다문천상多聞天像

1345년, 높이 280cm, 북경시 창평현 거용관 운대


원대에는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 다수 조성되었으며, 이때 라마교의 영향으로 표정이나 동작이 과장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일례로 북경에 1368년 처음 조성된 관성의 북쪽 변경으로 통하는 관문인 거용관居庸關은 원대 황실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거용관 운대雲臺는 현재 없어진 원나라 과가탑過街塔의 기단 부분이며, 그 북쪽에는 영명사永明寺가 있었다. 대리석을 쌓아 만든

운대의 표면에 부조된 라마교 조각은 가장 중요한 예 중 하나로, 규모가 크고 내용도 매우 복잡하다. 각종 천신과 호법신이 부조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다라니경陀羅尼經이 한자, 몽고어, 범어 등의 문자로 음각되어 있다. 특히 두 벽의 양쪽 끝에 새겨진 사천왕은

무서운 형상으로 얼굴이 사납고, 과장된 신체는 건장하며 위엄이 넘친다. 이 가운데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상多聞天像을 보면 과장된

얼굴과 신체 표현이 기존의 중국 조각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운대에 부조된 호법신과 천신의 세밀한 묘사뿐만 아니라

동작의 강함과 정지의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룬 것에서 원나라의 뛰어난 조각기술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 불상은 송나라의 전통을 계승한 양식과 원 이후의 티베트 불교 양식,

 앞의 두 가지를 엮은 절충 양식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형상은 단아한 것이 공통적이다.

이러한 양식은 청나라로 이어졌으며 만주족의 미감 차이로 인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Reflection - Dean Evenson & Tom Bara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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