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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성리학과 미술


와 기로 설명한

우주의 원리와 인간 본성



성리학性理學은 우주 원리나 인간 본성의 구조 등을 이理외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한 철학체계이다.

이는 당나라 후기의 유학자 한유韓愈(758-824)가 현실만을 다룬 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불교나 도교처럼 사후세계나 우주 원리 등을다룬 형이상학적 논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송대의 주돈이周敦頤(1017-1073)와 정호程顥(1032-1085) ·  정이程頤(1033-1107) 형제를 거쳐 주희朱熹(1130-1200)에 의해

집대성 되었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며, 훈고학이라 통칭된 당대까지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적 사유체계라는 의미에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성리학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는 송학宋學, 도학道學, 이학理學, 정주학程朱學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학은 중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대표적 사상인 유교儒敎를 지탱하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학자들이 지향하는 목표나 방법론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당나라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告學,

송대는 성리학, 명대는 성리학과 양명학陽明學, 청대는 고증학考證學이라 정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문은 공자와 맹자에 의해 완성된 유가儒家사상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넓은 범주에서

유학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불어 이들 학문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의 선진先秦 유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국가체계나 사회질서의 안정 도모에 최고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삼강오륜을 사회적 실천 덕목으로 일상에서 강조하였다. 이때 삼강은 군신 · 부자 · 부부 사이를 각각 충忠 · 효孝 · 열烈을

 기준으로 하여 주종관계로 정의한 것이면, 오륜은 부자 · 군신 · 부부 · 장유 · 붕우의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덕德에 토대를 둔 친親 · 의義 · 별別 · 서序 · 신信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이러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현실적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불교나 도교의 개념을 빌려와 성리性理나 이기理氣의 관계로 우주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였다.

북송의 주돈이는 도교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태극도太極圖로 설명하면서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주요 이론은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이치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이학理學이라고 하였다.

동시기에 할동한 육구연陸九淵(1139-1193)은 이와 달리 마음(心)을 강조한 심학心學으 발전시키면서 신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특히 주희의 업적은 후대에 높이 평가되면서 공자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주자朱子'라고 존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성리학은 위학僞學이라 박해를 받았으며, 원대에 이르러 관학官學이 되고 주희가 새롭게 해석한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어 명대 문인들의 주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상과 문예창작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작가 미상 <안향초상>

1318년, 견본채색, 37×29cm, 경북 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시기는 성립 직후인 고려 인종 연간(재위 1122-1146)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를 방문한 안향安珦(1243-1306)이 공자에 비견되는 주희를 존숭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사한 것과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지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찬문에 의하면 흥주수興州守 최림崔林이 한 폭 더 모사하여 향교에 봉안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말부터 주희가 『논어』, 『맹자』,『중용』,『대학』,을 정리한 『사서집주』에서 과거시험 문제가 출제되면서

 성리학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조선 건국과 더불어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성리학은 백성을 통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치인지학治人之學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사림 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점차 수기지학修己之學으로 바뀌어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본성, 즉 사단칠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극론이 주로 논의되며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단과 칠정의 발생 과정을 이기론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시하는 영남학파와 '기'를 중시하는

기호학파로 나뉘어 커다란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의 수양 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인 '理'를 중시하였고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실천 철학에서는 현실 개혁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氣'를 강조하였다.

특히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왕도정치의 시작을 기자箕子로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식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림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면서 일상에서 도학道學의 실천을 통한 자율적인 향촌사회

운영과가족 질서의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향촌자치적 성격을 지닌 서원이 건립되고, 주희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그의 행적을 따라 자신의 은거지에 정사精舍를 짓고 구곡九曲을 직접 경영하며

조선식 구곡도九曲圖를 제작하는 문화가 널리 성행하는 기반이 되었다.





- 북송의 대관산수화, 이理 개념의 시각적 표현 -



전傳 이성李成, <처만소사도晴巒蕭寺圖>

960년경, 견본수묵, 111.4×56cm, 미국 넬슨 앳킨스 미술관


북송의 사대부는 세습 귀족이 아니라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새로운 문인관료로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송을 건국한 조광윤趙匡胤(927-976)이 기존 귀족사회에서 벗어나 문인관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사대부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은

북송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등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유학으로 무장한 북송의 사대부들은 자연에 은거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최상의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욕망이 가득한 인간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며, 자연과의 일체를 체험하는

수기적修己的 생활태도를 지향하였다. 때문에 일상에서는 감정이 적절하게 통제된 이성적인 상태의 지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특히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심을 멸해야 한다는 이학적 논리는 성리학자, 즉 사대부들이 자연경관이 삐어난 곳에서

학문 연마나 수양을 통해 도덕성을 지닌 군자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기재로 작동하였다.


더불어 예술 창작에 있어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자연 공간인 산과 물 등으로 우주의 근원적인 이치인 천리 또는 도道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적 논리가 반영된 결과물이 바로 북송의 대관산수화大觀山水畵이며,

화면에서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좌우에 객산客山을 배치한 모습은 봉건사회의 도덕적 규율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대관산수화가 당대까지 성행했던 채색화를 제치고 수묵화로 그려진 것 역시

군자의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했던 성리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주봉主峯과 그 주변에 늘어선 군봉群峯이 각각 천자와 신하를 나타낸 것이라면, 그 사이로 여러 경물과

인간이 짜임새 있는 구도로 균형을 이룬 방대한 구조는 '송'이라는 새로운 통일 제국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李成은 강남 산수화의 엷은 안개와 담묵법, 강북 산수화의 고산高山 구도법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중국 역사상 역동적인

위업을 이룩한 북송의 국가적 이미지를 산수화로 그려내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북송 화단에서 대관식 수묵산수화가 청록산수화

를 제치고 주류로 급부상한 것은 성리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사대부의 자연관이나 미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주돈이의 「애련설」, 군자의 표상 -


주돈이가 사대부의 삶을 연꽃에 투사하여 읊은 「애련설」은 성리학의 확산을 배경으로 후대에 널리 파급되며

차운시의 제재가 되거나 정원의 연지蓮池 조성을 유행시켰고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원래 연꽃은 인도가 본산지로, 불교에서 극락왕생을

나타내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종교적 함의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애련설」을 기점으로 연꽃은 도덕적인 군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면서 성리학 확산을 배경으로 시서화는 물론 정원문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연꽃은 사군자四君子와 함께

군자를 표상하는 화훼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이나 뭍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의 꽃 가운데 정말 사랑할 만한 것이 대단히 많다.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홀로 국화를 사랑했고, 당대唐代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 속에서

자랐지만 그에 물들지 않고, 맑고 잔잔한 물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연꽃은 줄기가 비었어도 겉은 곧으며 넝쿨도 없고

가지도 없다. 게다가 향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히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적당하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은일隱逸을 상징하는 꽃이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연명 이후에 또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연꽃 사랑함을 나와 함께할 이 누구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당 많을 것이다.


이 글은 구법당舊法黨과 신법당新法黨의 대립으로 정쟁이 극심했던 시기에 성리학자 주돈이가 부귀를 탐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세태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뜻을 지닌 군자의 모습을 연꽃에 의탁하여 지은 것이다. 따라서 연꽃은 부귀영화에 부합하지 않는 군자,

즉 주돈이 자신을 의인화 한 것으로 자기적 초상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대한 풍자도 겸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꽃에 담긴 도덕적 군자를 표상하는 성리학적 개념이 약화되면서,

단순히 '화중군자花中君子'라는 언어적 의미만 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석도石濤, <애련도愛蓮圖>

청 초기, 지본수묵담채, 46×77.8cm, 중국 광주미술관


연꽃이 최절정기를 지나 시들어가고 있는 상태이며, 왼쪽 상단에 「애련설」이 적혀 있다.

이는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 땅에서 군자다운 삶을 지속할 수 없었던 한족 문인들의 현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가 청을 거부하며 출가하였기에 종교적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전국을 주유하며 문인들과 서화로 교유하는 데 전념했던 정황으로

 보아 도덕성을 지닌 군자의 모습을 그려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기에 출가했다가 환속한 이후에도 반청反淸 의지를

피력했던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이 간결한 형태의 연꽃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에도 성리학적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임백년任伯年, <애련도>

1873년, 지본채색, 103×54cm, 상해 공예품진출구공사


한화정책의 일환으로 청 황제는 유명한 한족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일화를 궁정화가들로 하여금 그리도록 하였는데

주돈이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애련설」을 소재로 한 애련도 역시 그러한 맥락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꽃을 그린 화훼도가 아니라 문인이 연꽃을 감상하고 있는 산수인물화 형식으로 그려진 것이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청 말기 상해를 중심으로활동한 직업화가 임백년(1840-1896)이 그린 <애련도>에서도 지속되고 있어

인물을 통해 군자의 이미지를 직접 전달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선, <염게상련도濂溪賞蓮圖>

1747년경, 견본담채, 30.3×20.3cm, 개인 소장


「애련설」을 산수인물화 형식으로 그린 예이며, 제목은 호가 '염계'였던 주돈이가 초당에 앉아 

연지에 핀 연꽃을 감상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세황, <향원익청도香遠益淸圖>

18세기, 지본채색, 115.5×52.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애련설」은 화훼화로도 그려졌는데, 표암이 공필진채工筆眞彩로 그린 향원익청도>는 그런 예에 해당한다.

제목이 '향원익청'은 향기가 멀어질수록 더 맑아진다는 의미로 주돈이의 「애련설」에 제시된 시구이다.

한 여름의 연꽃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염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할부로 할 수는 없다'

고 하셨다. 나 역시 '연꽃 그림은 멀리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겠다. 표암" 이라는 제문이 적혀 있다.






방희용, <화지군자도花之君子圖>

19세기, 지본담채, 23.2×32.3cm, 간송미술문화재단


후대로 갈수록 연꽃은 군자의 꽃이라는 언어적 의미만이 강조도는 양상을 보인다.

19세기 여항화가 방희용方羲鏞(1805-?)이 그린 <화지군자도>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주돈이의 「애련설」은 성리학적 인식을 근간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그러므로 북송 이후 문인화가에 의해

그려진 연꽃 그림은 종교적 접근보다는 성리학적 군자를 표상하는 시각적 이미지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다.





- 조선시대 서원, 성리학적 이념이 구현된 공간 -


자연경관이 삐어난 곳에 위치한 조선시대 서원은 성리학과 조선의 문화가 결합되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향촌 자치기구로서 성리학적 지배질서와 확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서원 건립 역시 주자가

강서성 성자현星子縣에 부임하면서 다시 중건했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과 무이산에 은거하여

1183년에 건립한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남계서원 배치도, 『남계서원지藍溪書院誌』권2

1935년, 30×19.7cm, 경남 함양군


남계서원은 서원의 초기 건축 구조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특정한 기준이 없던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마주하도록 하고, 그 바로 뒤에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은

앞쪽의 낮은 곳에 배치하였으며, 정여창의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은 뒤쪽 높은 곳에 조성하여 두 개의 독립적인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이런 구조는 이후 건립된 서원에서 그대로 따라하면서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인격 수양을

위한 강학보다 선현 제향을 중시하게 된 서원에서는 강당을 맨 앞쪽에 두고, 다음에 동재와 서재, 안쪽 끝에 사당이 위치하는

구조로 건립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서원 건축을 경사가 진 구릉에 조성하면서 제향 공간을 강학 공간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는 특유의 위게성은 성리학의 위게질서를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며 단아한 목조건물과 주변의 산, 나무, 돌 등이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원은 자연 속에서 학문 연마나 정신 수양을 통해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했던

성리학적 자연관과 가치관이 적용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남계서원 사당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이 전래되어 한국적 문화전통과 결합되면서 건립된 서원 건축 구조는


 성리학적 가치관이나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건축사는 물론 사상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 구지면


현전하는 서원들 가운데 빼어난 주변 경관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예로는 도동서원을 꼽을 수 있다.

원래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68년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으나

임란으로 전소되었다. 1605년 정구鄭逑(1543-1620)가 낙동강을 바라보는 현재 위치에 동북향으로 중건하였으며

1607년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수직과 수평의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는 뛰어난 균제미를 보여주는데, 이는 성리학의

주요한 행동 준거가 되는 중용中庸, 즉 '치우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상태'를 서원 구조에 적용한 것이라 해석된다.





- 주희의 「무이도가」와 조선식 구곡도 -


무이산에 은거하던 주희의 나이 54세 되던 1184년, 자신을 찾은 친구들과 배를 타고 아홉굽이 계류에 펼쳐진 풍광을 돌아보고

「무이도가」10수를 지었다. 서수序首와 아홉 계곡의 실경을 묘사한 9수로 이루어졌으며, 주자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학 작품으로 차운시가 다수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座, <흑유금채무이산도다완黑釉金彩武夷山圖多碗>

남송, 5×10.5×3.3c,. 복건성 우림정박물관


무이산을 화제로 화제로 한 그림은 북송대에도 그려졌으며, 복건성 우림정遇林亭 도요지에서 출토된

<흑유금채무이산도다완>은 남송대부터 주자와 관련된 그림이 그려졌다고 하는 방증이다. 다완의 구연부 테두리에는

「무이도가」1곡이 적혀 있고, 안쪽에는 관련 그림이 그려져 있다.



右, 방종의方從儀, <무이방도도武夷放棹圖>

1359년, 지본수묵, 74.4×27.8cm, 북경 고궁박물원


원대에 그려진 무이산도로 현전하는 유일한 예가 <무이방도도>이다.

화면 계류 오른쪽에 위치한 산봉우리는 마치 폭발할 것 같이 에너기가 넘치는 반면, 작게 그려진 배 안의 인물들은 비교적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면 왼편의 "1년 전주공 周公과 무이산에서 난초 캐고 구곡을 주유했던 사실을 기념해 거연巨然의

필으로 그렸다."는 제시를 통해 단순히 무이산과 관련한 개인적 기억을 시의적詩意的으로 그려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서표연徐表然 편찬, <무이구곡전도>

『무이지략武夷志略』중에서, 1619년


현전하는 중국 지방지 가운데 14세기 후반 충중유衷仲孺가 편찬한 『무이산지』에는 <무이구곡전도>만 실려 있고,

명대에 서표현이 편찬한 『무이지략』(1619)가 청대에 동천공董天工이 편찬한『무이산지』(1751) 에는

<전도全圖>와<구곡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 지방지는 조선에 유입되어

무이구곡도 제작에 직간접적으로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길李成吉, <무이구곡도> 부분

1592년, 견본담채, 33.5×398.5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서는16세기 이후 사림 계열에 의해 성리학 연구가 보다 심화되면서 무이구곡도가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무이구곡도는 주희의 강학 할동과 자연관 등이 집약된 관념산수화로 성리학을 배경으로 유행한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미상, <무이구곡지도>

1577년 이후, 지본담채, 123×73cm, 경북 안동 운장각 의성김씨 학봉종택


학봉종택 소장의 이 작품은 세로로 된 축軸 화면에 그려진 것으로 이황의 제자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1577년

연행사 일행으로 북경에 갔다 가져온 작품을 임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 하단에서 시작된 1곡이 가로로 누운 'S'자

형태의 계류를 따라 왼쪽 상단에서 9곡으로 끝나는 구도는 무이산 그림이 포함된 중국 지방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짓거나 무이구곡도를 그리고 소장하는 등의 행위는 퇴계 이황과 그의 학풍을 따랐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퇴계 학파는 무이구곡도를 주자의 성리학적 이상이 구현된 상징으로 인식한 것이다.


반면 이이李珥 계열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무이정사나 「무이도가」를 동경하는 단계를 넘어서 조선식 구곡을 경영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은거지에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문화는

중국에서는 없었던 일로, 주자에 대한 각별한 흠모와 존경을 나타낸다. 또한 조선식 구곡도의 전개는

이이를 기점으로 성리학이 조선화 되었던 맥락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이혁金履赫, <담총도潭摠圖>

《고산구곡시화도高山九曲詩畵圖》12폭 병풍 중에서, 1803년, 견본수묵담채,

137.4×562cm, 국보 제237호, 동방화랑 소장


이이가 주자를 흠모하여 황해도 고산군 석담石潭에 경영했던 구곡을 그린 것으로 1571년 이곳을 은거지로 낙점하였으나

실제로는 1576년부터 머물기 시작하였다. 1578년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조세걸, <농수정籠水亭>

《곡운구곡도》중에서, 1682년, 견본채색, 37.5×54cm, 국립중앙박물관


곡운구곡도는 김주승이 강원도 화천군 곡운谷雲에 1675년 농수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경관이 빼어난 계류를 따라 경영한

구곡을 그린 것이다. 그는 1675년 동생 김수항金壽恒(1729-1789)과 송시열의 유배를 계기로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김수증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 출신으로 <고산구곡도>를 소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1682년 자신의 구곡에 평양 출신 화가

조세걸을 초대하여 현장을 직접 돌아보게 한 다음 《곡운구곡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10년이 지난 1692년 김수증은 아들, 조카들과 함께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지은 「곡운구곡가」아 조세걸의 그림을 엮어 시화첩을 만들었다. 이 그림은 조세걸이 실제 현장을

돌아본 다음 그렸기 때문에 진경산수화의 유행에 앞서 실경을 그린 이른 예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군신응權信應, <금사담>

《화양구곡도》중에서, 1758년경, 지본수묵, 37.5×31.5cm, 충북대학교박물관


본디 화양동에 은거를 시작한 인물은 송시열이며 그는 효종을 잃은 슬픔을 간직한 채 금사담金沙潭 근처에

암서재巖栖齋를 짓고 독서와 저술에만 전념하였을 뿐 구곡은 경영하지 않았다. 송시열 사후 그의 제자 권상하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을 건립하고 구곡을 경영하여 스승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려 하였다.

송우암의 제자들이 화양동을 존주대의尊周大義와 소중화주의 사상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성역화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었을 것이다.







금사담과 암서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구곡도는 현재까지 권신응(1728-1787)의 《화양구곡도》와 이형부李馨溥(1791-?)가 그린 개인 소장본 2점이 확인되고 있다.

권신응은 조부 권섭의 권유로 1756년 《화양구곡도》를 그렸는데, 이를 본 권섭은 "골짜기를 나가지 않아도 절로 구곡의 기절함을

이루었다." 라고 하였지만, 무이구곡도에 대해서는 허황되고 과장된 그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권신응이 실제 경관을

사실적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현재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신응이 1758년경 다시 그린《화양구곡도》 가

충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1756년에 그린 작품 역시 실경산수화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형부李馨溥, <금사담>

《화양구곡도》중에서, 1809년, 지본수묵담채, 38×25.5cm, 개인소장


수평으로 포착한 경물을 직선과 담채의 문인화풍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이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특정 지역에 구곡을 경영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조선식 구곡도의 성행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조선식 구곡도는 특정 지역의 실제 경관을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실경산수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무이구곡도는 주자의 무이산 강학 활동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심신 수양을 깊이 이해하려는 순수한 의미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점차 학문적 계보를 구분하는 상징물로 의미가 바뀌면서 특정 학파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을 하였다.


북송이라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대관식 수묵산수화가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주돈이의 「애련설」을 통해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연꽃에 도덕성을 지닌 군자의 표상이라는 새로운 상징성이 부여

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은 성리학적 이념이 구현된 특수한 공간으로 성리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무이구곡도가 다수 제작되었다. 나아가 주자의 「무이도가」를

조선의 현실 공간에 실천하면서 조선식 구곡 경영과 구곡도 제작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특정 학자의 학문적 계보를

잇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며 학파 내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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