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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낯설고 새로운 그림 이야기 2


낯설고 새로운 그림 이야기  2


인용서적 :  천단칭(陳丹靑) 著 『낯선 경험』



발라둥 母子, 1894년


수잔 발라둥Suzanne Valadon, 1865~1938.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봉사, 부희, 서커스 곡예사 등을 전전하다.  드가,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레크 등의 그림 모델를 하던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본 드가가 아주 진지하게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수잔, 재능을 타고났군, 제대로 그림을 그려보게."

미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발라둥은 수많은 누드화를 그렸다.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의 눈으로 본,그것도 화려하고 농밀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발라동이 그린 남성 누드는 여성 누두보다 훌룡합니다. 회화의 역사에서 여성 화가가 남성 나체를 묘사한 경우는 아주 제한적인데,

그중에서도 바라동은 유일하게 남성의 육체 위를 떠도는 여성의 시선을 느끼게 합니다. 남성 화가가그린 여성의 육체는 사랑과 욕망의

 부호이며 그림 속에 모든 여체에 대한 이끌림이 담겨 있는데 반해, 발라동의 시선은종교적 신봉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육체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화가가 사랑을 쏟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유치하기는 해도 더없이 진지한 영웅숭배의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발라동의 시대는

정말로 사람을 홀리는 시대였습니다. 세잔은 고집 센 당나귀, 고흐는 미치광이, 로트레크는 난쟁이, 고갱은 괴인怪人이었습니다. 발라둥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아가씨였죠, 19세기 이전에는 이런 신분의 사람은 화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자유로운 파리는 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던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들꽃들이 제멋대로 가득 피어난 들판과도 같았습니다.





1938년, 발라동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피카소와 앙드레 드랭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명의 순수함이 극에 달한 천재 화가가 있으니, 바로 모리스 워트릴로입니다.

발라동의 배에서 태어났죠. 발라둥이 그린 조그마한 남자아이 그림을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욕조에서 장난을 쳤을 겁니다. 바로 그런 그림입니다.





마르케, <겨울의 노트르담 대성당>, 1908년, 푸시킨 미술관, 모스크바





마르케, <옹플뢰르 항구>, 1911년, 푸시킨 미술관, 모스크바





드랭, <검은 옷의 소녀>,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라동, <자화상>, 1883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좌- 상, 하 발라동의 소묘.    우- 상, 르누아르, <도시의 무도회>, 1883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우- 하, 르누아르, <부자밭의 무도회>, 1883년, 보스턴 미술관. (그림 속의 여자는 둘 다 발라동이다). 





로트레크, <숙취>, 1887~1889년,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 케임브리지





발라동의 소묘





발라동의 소묘





발라동의 소묘





●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둥은 가난한 모델 출신으로 미술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당연히 학위도 없다.

왕희맹은 궁중 화원에서 스승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를 가르친 사람 중에는 황제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송 휘종도

스승에게 그림을 배웠을 것이다. 송 휘종이그림 스승이 누구인지 알려줄 역사학자가 있을까?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누드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초상화





발라동의 유화 작품 중 여성 초상화





발라둥의 유화 작품 중 여성 초상화





앙드레 위터가 그린 나체의 발라동


성별이 바뀌고 붓을 쥔 손이 바뀌니 당장 남성 시선의 여성 누드화로 바뀐다.

워터는 발라동 아들의 친구이자 발라동의 남편이다.





발라동이 그린 나체의 앙드레 워터





● 발라동의 풍경화





발라동의 풍경화





발라동의 정물화





발라동의 정물화





왼쪽부터 발라동, 위트릴로, 앙드레 위터





발라동이 팔레트에 그린 그림












상- 위트릴로, <코탱 골목>, 1910년, 테이트 갤러리, 런던

하- 위트릴로, <테르트르 광장>, 1910년, 테이트 갤러리, 런던





위트릴로, <라 바르의 슈발리에 거리>, 1950년, 개인 소장


1980년대 처음 뉴욕에 갔을 때, 메디슨 가와 57번가의 화랑에서 위트릴로의 그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진열된 그림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몇몇 그림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30년이 흐른 지금, 베이징의 내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트를

사이에 두고 문과문이 마주 보이는 이웃사람이 얼마 전 위트릴로의 그림을 사서 벽에 걸었다고 했다. 그집에 가 보니, 과연 위트릴로의

그림이었다. 사실 이이야기는 위트릴로와는 관이 없다. 중국의 개혁, 그리고 개방과 관련 있는 이야기다.






왼쪽은 관쯔란, 오른쪽은 추티


이제 제가 특히사랑하는 두 명의 중국 여성 화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 명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상하이 여성 관쯔란1903~1986이고

또 한 명은 1930년대 화가 모임 결란사를 이끌었던 팡쉰친의 아내 추티1906~1958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는 원나라 초기 조맹부의 아내인 관도승입니다. 명나라 때는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한림대조 벼슬을 지낸

문징명의 현손녀 문숙이 있고, 청나라 초기에는 난징을 지나가는 운하 친화이 근처의 이름난 기생 마수진과 고미가 역사서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의 류리창 같은 골동품 거리에 가면 천지사방 널려 있는 중국화 화첩에서 그들의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도 여성 예술가가 많이 늘었고 미술대학의 미술사학과에는 여학생이 아주 많은데도 말입니다.






중화민국 시기의 여성 화가들

좌- 장리잉과 그녀의 남편.  중앙- 쑨둬츠  우- 판위량





추티, <창밖>, 1947년





마리나와 울라이


나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올라이가 먼저 손을 뻗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 영상을 보니 마리나가 먼저 손을 뻗었고,

올라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앞으로 몸을 기울여 손을 맞잡았다. 나는 원고를 쓸 때 자료를 잘 참고하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다.

기억은 자료가 아니니 자주 오류가 나온다. 이 작품의 제목은 <마리나 아르라모비치와의 조우>이다.








관쯔라이 사진(1930년대에 촬영)






관쯔란, <자고화>, 1941년





상- 관쯔란, <징공원>, 1942년

하- 관쯔란, <정물>, 1939년








관쯔란, <소녀상>, 1929년





추티, <서호西湖의 평호추월平湖秋月>, 1946년





추티, <커피 주전자와 술잔>, 1931년





추티, <정물>, 1928~1929년 추정






추티, <정물>, 1928~1929년 추정





좌- 잡지 《양우良友》표지에 실린 관쯔란.   우- 만년의 관쯔란







서양(徐楊) 외, <건륭남순도>(부분), 1751년, 국가박물관, 베이징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완벽하게 중국의 이동 시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고사하고 중국에서도 모른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중국의두루마리 그림을 찬미한 다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서양 사람들은중국이 만들어낸 위와 같은 위대한 보는 방법"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무릎을 꿇고 황제를 맞이하는 관원(정태적 풍경), 황제를 마중하러 가는 작은 배(동태적 풍경).

<건륭남순도>의 무수한 '부분도'은 조설근과 톨스토이 식의 섬세함과 화면감으로 가득하다. 공손하고 엄숙한 순간,

산들바람이 강변에 닿고 황제의 시위들이 실산을 움켜쥐고 서 있다. 황제가 앉을 용상도 이미 준비 되었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서양은 건륭제를 다른 사람보다 두 배쯤 크게 그렸다. 궁정화가의 규칙이거나 두루마리 그림이라 필요한 조치인 듯하다.

그림 속 수많은 인물은 1촌(약 3.3cm)을 넘지 않는다. 일반적인 비율로 황제를 그린다면 인파에 휩쓸려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배의 행렬을 둘러싼 사람들은 엄숙하고 물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저기 배치된 인물들은 황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겠지만

당연히 위엄이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건륭남순도> 그림처럼 모든 것이 상세하고 또 당연해 보인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이건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다. 아득히 넓고 성대하기 짝이없다. 선단이 기세를 드높이며 물길을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천천히 움직이는

디프 포커스 촬영 기법을 보는 듯하다. 혹은 정지 화면의 한순간 같기도 하다. 서양은 기억에만 의존해서 <견륭남순도>를 그렸다.

보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사진의 도움은 더욱더 받지 못했다.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며 놀라운 기억력인가!

그가 하나 하나 마음속의 장면을 화폭에 옮길 때그 흥취가 얼마나 높고, 또 얼마나 몰입했을까!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서양이 초점거리가 긴 망원렌즈로 백미터 바깥으 경치를 당겨서 눈에 담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망원렌즈로

 본 것 같은 장면을 그렸다. 동양이든 서양西洋이든 옛 그림에는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듯한 화면을 많이 볼 수 있다.

 화가들이 다들 비행기 조종사 같다.이 그림도 성벽에 의해 잘려진 행렬의 구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양은 이 기록물의 총괄 책임자로 여러 화가를 지휘했다.

전체적인 그림의구도는 그가 결정했을 테고 조수들은 이 화면의 성벽 등 건축물을 그렸으리라.

 당시에는 높은 빌딩도 없었는데, 이런 장면을 보고 그리려면어디에 올라가서 굽어보아야 했을까?

마음속에 건축물의 도면이 탑재되어 있는 것처럼,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한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최근 내가 책상에 앉아 하는 놀이는 컴퓨터로 화면을 분할하는 것이다. 긴 두루마리는 멋진 '부분'들을 품고 있다.

 잘라 꺼내면 바로 수천개의 아름다운 단편들이 된다. 지금 이 부분 역시 그렇다. 마치 문인화 한 폭 같지 않은가.

문인(사실은 관원이지만)의 눈으로 보면 자기 자신을 투시해 넣은 산수 풍경처럼 보이이만,

서양의 시선에서는 청나라 조정의 영토, 태평성대의 한때, 백성들 삶의 터전이다.

그의 국가 의식이나 시민 의식은 소박하고 평범하며 균형 잡혀 있다. 확 트인 화면이 호방해 보인다.

 내가 직접본 강남 지방을 떠올리니 친밀감이 배가된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레핀의 작품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감상적이지만 정확하다. 백년 전 서구의 사진가가 찍은 양쯔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

(조각 같은 옷 한 장을 겨우 걸쳤거나 아예 벌거벗은 사람도 있다.)의 사진을 보면 냉정하고 이성적이기에 더욱 진실하다.

서양의 붓 아래 태어난 조그만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귀엽다 못해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건륭남순도>의 진실함은 어떨까? 서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강변에는 분명 태평성대를 장식하기 위한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지만, 성실한 예술가 답게 사실 그대로 그렸다. 배를 끄는 인부 외에도 가까운 쪽 강변에는 천 장식을 매단

패루牌樓가 서 있고, 그 맞은편 강가에는 악사들이 연주하는 무대가 있다. 그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여인네들도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이 그가 직접 본 그대로라고 믿는다. 이 장면은 틀림없이 그가 믿었던, 그리고 그가 보았던 태평성대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관병, 코끼리, 의전용 수레, 병졸…, 우리 세대는 절대로 이와 같은 장면을 볼 수 없다. 어릴 때 이그림을 봤다면 분명 나자신을

 말 위에 타고있거나 코끼리 옆에 서 있는 사람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청나라 시대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자금성의

관리들이 잔혹한 얼굴로 채찍을 휘두르며 사람을 위협하는데, 실제 청나라 때 그린 그림에는 황실의 행사가 위엄 있기는 해도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있다. <건륭남순도>의 표정은 화면 가득한 즐거움, 경사스러움이다.

만약화가의 마음속에 고통이나 어둠이 있었다면 아무리 애를 써서 즐거움을만들어내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왕휘 외, <강희남순도>, 1689년, 고궁박물원, 베이징

인민, 인민, 중국에는 수많은 백성을 가리키는 "억만인민億萬人民"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희제 시대에 와서야 이 말이 현실이 된다.

선진先秦시대 이래 전쟁 등의 원인으로 중국으 인구는 계속 달라졌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 태평성대가 지속되면서 중국 인구는

 드디어 1억을 넘겼다. 2015년 베이징 자금성에서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전시했다.

수많은 사람이 아침부터 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려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북적이는 인파가 그림 속에도 밖에도 한가득이다.

 우리의 인민. 억만인민이여.





왕휘 외, <강희남순도> 제10권(부분)





카르파초, <리알토 다리 십자가의 기적>, 1496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서양 외, <건륭남순도>(부분)





카르파초, <수도원의 성히에로니무스와 사자>, 1502년, 스쿠올라 디 산 조르조 델리 스키아보니, 베네치아


이 그림은 세계 미술사 도록에서 자주 인용되는 그림이지만

위 그림은 세계 미술사는 고사하고 중국 미술사 전문 서적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벨리니, <성 마르코의 순교>(부분), 1515~1526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이 커다란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다. 러시아 화가 수리코프가 그린 <여귀족 모로조바>와 비스비슷하게 한 인물의 고난과

그것을 둘러싸고구경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구 사람들이 수리코프를

무시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지만 왜 벨리니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걸까?





카르파초, <리알토 다리 십자가의 기적>(부분), 1496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몇백 년 전의 사람들은 거리를 돌아다닐 때 다들 허리에 긴 칼을 차고 온 몸을 수놓은 비단으로 휘감고 있다.

오늘날의 패션모델은 그들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카르파초,<브르타뉴 왕의 궁전에 도착한 영국 외교사절>, 1495~1500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카르파초, <영국 외교사절이 돌아가다>, 1497~1498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중국인은 무릎을 꿇고 몸을 곧게 세워 인사한다. 보기만 해도 피곤하다. 서양 사람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는데 공손하면서도

자존감있어 보인다. 물론 그들의 다리가 더 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국 여성들이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예절도 무척 아름답다.

상반신은 살짝 숙이고 두 손을 허리춤에 모아 쥐어 단정하고 예의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자세와 인사법이 어느 시대에 시작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견륭남순도>에서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무릎을 꿇고 않자 있는데, 장면 자체는 장관이지만 고생

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카르파초가 그린 가장 아름다운 구도가 바로 이그림에서 삼각형을 이루고 선 세 남자다.

1989년에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카르파초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때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도 그의 화집을

 팔지 않았다. 2005년에 다시 갔을 때는 장정 디자인이 아름다운 화집이 두 권이나 출간되어 있었다.






베르톨루치의 영화 <1900> 장면 캡처 4컷

디프 포커스, 롱 앵글 등 다양한 촬영 기법으로 근경과 중경에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다.

내가 1980년대에만 태어났더라도 림이 다 무엇인가. 영화야말로 제일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멈출 수 없다. 영화 장면을 캡처한 것은 영화가 아니다. 회화는 움직일 수 없다.

영화가 옛날 그림 속 장면을 움직이게 만든 이후로 회화의 기능(회화의 매력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은 점점 상실되었다.





펠리니, <8과 2분의 1> 장면 캡처


서로 다른 거리의 경치와 움직이는 정보를 가장 독특하게 처리한 영화일 것이다. 나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의 욕망'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 한 편, 그림 한 점, 이 모든 것은 화가와 감독이 어떻게 관중의 시선을

유도하느냐에 대한 결과물이다. 아무런 증거도 이유도 없지만, 나는 페리니의 영화를 보면서 카르파초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들은 중국의 화가 서양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에 집착한다. 왜 그럴까?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장면이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도 내용이 아니라 본다는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르파초, <약혼자를 만나 성지순례를 위해 출발하다>(부분), 1497~1498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카르파초, <사절단이 떠나다>, 1495~1500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수리코프, <근위병 처형 날 아침>, 1881년, 트레차코프 국립박물간, 모스크바


1980년대에 만들어진 드라마 <표크로 대제>를 찾아 보았다.

 표트로 대제는 자신이 직접 근위병을 참수하면서 나약한 성격의 왕자에게

그 장면을 꼭 지켜 보라고 한다. 왕자는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요지기를 느껴 입을 틀어 막는다.

나도 이장면은 잊고 있었다.





수리코프, <여귀족 모르조바>, 1887년, 트레차코프 국립박물관, 모스크바


서른 살이 넘은 수리코프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 그림을 완성했다.

모르조바는 유배지에 도착한 뒤 토굴에 갇혔다.

억지로 옷도 벗겨져 알몸이었다. 결국 모르조바는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다가 죽을을 맞았다.

한 위병은 그녀에게 사과 반쪽을 주었다는 이유로 처형되기도 했다.





<여귀족 모로조바>(부분)


소년 시절 수없이 이 그림의 사진을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등장인물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2010년 드디어 원작 앞에 섰다. 보고, 보고, 또 보고 … 인물이 가득한 커다란 그림을 보았다. 훑어보고 뜯어보고,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본 다음, 다시 훑어보고 뜯어보고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 봤다. 어디에 시선을 멈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의 모든 부분이 자신에게 주를 집중하라며 다투는 듯 했다. 어떤 그림 감상은 그렇게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동시에 내가 이 그림을 알아간다는 쾌감을 느꼈다. 다음 날 다시 그림을 보러 갔다.

나는 돌연 처음으로 그림을 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제 그 그림을 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 소년이 입은 수놓은 솜옷 을발견했다. 어떻게 이토록 잘 그릴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고 완벽히 몰입해야 이런 기적을 그려낼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기적과도 같은 부분이 내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림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발견했다. 지금 이렇게 조잡한 사진으로 인쇄하고 보니 모호하기만 하다.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소년 시절처럼 인쇄물을 보는경험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리코프, <눈의 성 공격>, 1891년, 러시아 국립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수리코프가 아내를 잃고 그린 첫 작품은 <눈의 성 공격>이다.

 2005년 뉴욕 구겐하임 현대미술관에서 러시아 대전을 열면서 이 그림을 초청한 바 있다.

2010년 동료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서 이 그 림을 모사했는데, 러시아 미술관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즉 매일 날이 밝자마자 미술관에 가서 모사를 하는데, 오전 9시 개관 전에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나는 여명 속에서 화면의 찬란한 색 덩어리를 보았다. 솜옷 하나하나 눈밭의 반사광,

차가운 공기에 발개진 뺨 같은 것을 어떻게 해도 제대로 모사할 수가 없었다.

텅빈 전시실에 있는 우리에게는 한 명 씩 러시아 아주머니가 감시인으로 배정되었다. 내가 화장실에 가면

아주머니도 따라와 문 앞에서 기다리고 내가 볼일을 마치면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함께 다시 그림 앞으로 돌아왔다.






레핀, <술탄에게 답신을 쓰는 자포로제 코사크인들>, 1880~1891년, 러시아 국립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의 전성기 시절의 대작이다. 러시아와 터키는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어렸을 적에 이 그림을 보며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폭소하는 장정들을 보며 따라 웃어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야 오스만제국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시대가 올 때까지 터키와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가 자살하자 그녀의 애인 브론스키가 전장에 나가 순국하겠다고 결정하고 터키 군대와 일전을 벌인다.

중국과 서아시아도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그래서 유명한 당시(唐詩) 가운데 "술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비웃지 말라, 예로부터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이가 몇이나 될까".

 "가련하구나 무정하 옆의 백골, 여전히 봄날 규방의 꿈속 사람일 텐데(진도(陳陶)의 <농서행>)"  같은 전쟁을 다룬 구절이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근대 중국의 학자로 여러 경전을 영어로 번역한구홍밍이 자주 읊조렸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시를 써서 전쟁의 고통을 노래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인지 수리코프처럼 떠들썩하게 웃으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말하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수리코프,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1895년, 러시아 국립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시아에서 우리는 유럽 사람이다."





프라 안젤리코, <동방박사의 경배>, 1440~1445년, 산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습식 벽화가 그려진 산마르코 수도원의 돔형 지붕과 벽 모퉁이


그림이 주문 제작 상품이던 시대이어야 화가가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혹은 평생, 높이도 고르지 않은

 벽면 구석에 매달려 부지런히 그림을그릴 수 있다. 마치 미장이처럼 말이다. 

 또한 그 시대의 종교화가여야 이렇게 고생스럽지만 경건한 일을 진심을 다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다.

오늘날 성공한 예술가들은 다들 자신의 화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스스로를 칭찬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종교화를 볼 때마다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이 세상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한 게 없는데 예술가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종교의식, 도덕의식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다.

그저 프라 안젤리코 등의 벽화를 보면서 스스로 내가 그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있는지 돌이켜보는 것이다.






산마르코 수도원 2층으로 통하는 계단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440~1445년, 산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모퉁이를 돌아 2충을 바라보면 바로 푸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눈에 들어온다.





각각 다른 수도실의 벽화들









상-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440~1445년, 산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하- 프라 안젤리코, <나를 만지지 말라>, 1440~1445년, 산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이 수도실의 쪽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 맨 끝의 수도실이 나온다.

그곳에 그려진 프라 안젤리코의 <동방박사의 경배>, 전에는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프라 안젤리코, <동방박사의 경배>(부분)





프라 안젤리코, <동방박사의 경배>(부분)





산마르코 수도원 1층의 어느 방에 프라 안젤리코의 대형 벽화가 또 있다.

벽화 하단에 나란히 10여 개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당시 유명한 수도사로 추측된다.

 프라 안젤리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초상들 중 한 명이 프라 알젤리코이기를 바란다.






<동방박사의 경배> 그림 아래에 신상 등을 모셔두는 작은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산마르코 수도원 2층의 프라 안젤리코 벽화(부분)


《성경》을 주재로 그림 그리는 화가들에게 묻고 싶다.

눈을 가린 예수와 잘려진 얼굴, 손 등은 어디서 나온 내용일까? 무슨 뜻일까?






르네 ㅁㅏ그리트, <바우키스 풍경>, 1966년, 개인 소장


나는 마리트의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그의 상상력, 관념, 도식은 1980년대의 수많은 아르누보 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는 이탈이아의 3C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5세기의 기독교도가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분할 이미지를 보는 것과

20세기의 문화적 소양이 있는 관람객이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출발하며, 완전히 다른 감상을

남긴다.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현대인이 프라 안젤지코의 도식 처리를 돌이켜 보면서 15세기의 감상을 떠올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석조






















페르가몬 제단의 석조군(부분), 서기전 2세기,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페르가몬 제단의 석조군(부분)





페르가몬 제단의 석조군(부분),





상- 마르셀 뒤샹.   하- 뒤샹이 디자인한《뉴욕 다다》표지


뒤샹은 1887년에 태어났으며, 피카소보다 여섯 살이 어립니다. 뒤샹의 형도 그림을 그렸고, 뒤샹도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초기 유화 작품이 적잖이 소장되어 있는데, 아주 잘 그린 그림들입니다.

1912년, 뒤샹은 입체파 양식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를 그렸는데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뒤샹은 이 일로 깨달음을 얻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1917년, 그는 소변기를 전시하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1919년에는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를 사서 거기 수염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가 뉴욕에서 한 일입니다.

반 세기가 흐른 뒤, 지금 말한 두 '작품'은 뒤샹의 상징이 되지요.2차 세계대전 이후 형형색색의 현대미술이 꽃피웁니다.

다들 나름의 맥락이 있지만, 그 맥락을 파고들면 뒤샹이야말로 선각자요 선생자입니다.









중국은 늘 예외적입니다.

 1912년 뒤샹이 회화아 작별했는데. 1919년에 중국의 유명 현대 화가인 쉬베이홍, 린펑몐이 유럽에 가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옌원량, 류하이쑤도 유학을 갔습니다.

그들은 중국에 돌아와서 서양식 미술대학을 세웠지요.

그러나 서양의 영향은 아주 약해서 끊어질 듯 말 듯한 상태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드디어 중국에도 100년 전 뒤샹이 회화를 포기한 시점의 예술관이 영향을 미칩니다.






1903년의 서태후


모더니즘 예술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래서 모더니즘 예술의 기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습니다.

회화의 입장에서 볼 때 세잔이 사망한 1906년이 모더니즘의 시작일 것입니다.

세잔이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905년은 중국의 서태후가과거 시험을 전면 폐지한다는 칙령을 내린 해입니다.

회화가 아닌 다른 입장에서 볼 때는 뒤샹이 회화를 포기한 그해부터 모더니즘 예술이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지요.






조르주 데 키리코


 

지금은 더 이상 회화의 시대가 아닙니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은 이미 보호받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은 문학으로 향할 때다."


저는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회화는 더 이상 영예롭지 않다. 그러니 지금은 회화를 이야기할 때다.

물론 뒤샹이 회화를 포기한 것을 포함해서." ....


천단칭(陳丹靑) -




Amazing Grace - Giovanni Marr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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