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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숙천제아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편찬 한필교(정관헌장靜觀軒藏)                허경진(연세대학교)              김선주(하버드대학교)

 

 

 

 

 

표지에는 '宿踐諸衙圖' 라는 제목 아래 '정관헌장靜觀軒藏'이라는 소장처가 밝혀져 있다.

'정관헌'은 1840년에 서문을 쓴 곳으로, 한필교의 서재 이름인듯하다. 

 

 

 

 

 

 

 

- 서문 -

 

그림은 사물을 본뜬 것이니, 하늘에 덮여 있는 것과 땅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그 오묘함을 그림으로 전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천년의 오랜 세월이나 만리의 먼 곳에 있는 사물까지도(실제 모습과) 방불하게 생각해낼 수 있으니,

그림의 도움이 참으로 크다.

 

나는 정유년(1837)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한가한 날 화공에게 명하여 내가 그 동안 거쳐왔던 관아들을 그리게 했다.

전체 그림을 화첩으로 장정하고, 그림 옆에는 (그 관아가 있는) 방리方里와 내가 맡았던 직책을 썼다. 벼슬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이렇게 하기를 반복했으니, 나중에 고찰하려고 대비한 것이다. 제수받고도 명을 받들지 못한 경우나 벼슬에 나아가고도 관아에

부임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관아의 그림을) 빼놓고 싣지 않았으니,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이 화첩은 붓과

먹으로 희롱한 것에 지나지 않아, 어떤 용도로 쓰기에는 넉넉지 못하지만, 문장門墻이나

간가間架의 크고 밝은 모습이나 청사廳舍 동우棟宇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 한 폭 가운데 다 그려져 있다. 그곳에 가보지 않고도 이 그림이 어느 관청,

어느 관아라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으니, 이런 그림이 아니라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낮은 벼슬로 떠돌아 다녔지만, 세상을 감당하려는 뜻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평성대를 만나 경향京鄕을 두루 거치면서 벼슬에 제수될 때마다 곧 (그 관아의) 그림을 그리고 (앞장에) 이어서 장정하였다.

서울에 100여 관청이 있고 지방에 여러 고을이 있으니 어찌 이 화집에 다 담을 수 있으랴.

그러나 후세인으로 하여금 (지금의 관아가) 옛 제도와 방불한지 고찰하거나 나의 진퇴進退 출처出處를 논하기에는 넉넉할 것이다.

 

아! 그림이란 참으로 도움이 없지 않다. 늘그막에 명예를 이루고 벼슬에서 물러나 각건角巾에 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한가롭게

노닐면서 이 그림을 꺼내 살펴보면 예전에 벼슬하러 돌아다녔던 자취가 역력히 마음에 떠오르고 즐거움과 걱정 속에

출세하거나 밀려났던 기억이 역시 가슴 속에 느껴질 것이다. 애오라지 후세에 전하는 보물이 될 만하다.

 

금상今上 6년 경자(1840) 맹하孟夏에 하석도인霞石道人이 정관헌靜觀軒에서 쓰다.

 

 

 

 

 

 

 

1도 <목릉穆陵>


양주楊州 검암산儉巌山 아래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정유년(1837) 3월 24일에 참봉(종9품)에 제수되었다.

 

목릉과 부속시설들이 그려져 있다. 왕릉이라서 주변에는 꽃나무가 없고 소나무만 울창하다. 목릉 주위에 건원릉을 비롯한 네

왕릉의 홍살문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목릉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그 일대 모두 아홉개의 왕능이 있어서 동구릉東九陵이라고 불리며 사적 제193호이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목릉은

임진왜란 뒤에 열악한 재정상황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조선 왕릉 가운데 목릉의 문무석과 석물이 가장 졸작이라고 평가된다.

 

 

 

 

 

 

 

제2도 <제용감濟用監>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에 있다.

무술년(1838) 12월 24일에 부봉사副奉事(정9품)에 제수되었다. 주고綢庫를 담당하였다.

기해년(1839) 6월 30일에 상서원尙瑞院 부직장副直長(정8품)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날 예빈시禮賓寺 主簿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제용감은 왕실에서 쓰는 각종 직물이나 식품을 진상하고, 국왕이 하사하는 의복, 비단, 포화布貨 등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경복궁 바로 앞에 있었다. 정3품 당상관이 담당하던 관청이어서 당상대청堂上大廳이 있었지만, 다른 관아들과는 달리

고직방庫直房, 공인방貢人房, 역인방役人房, 장방長房이 크고, 음식을 만들기 위한 다모간茶母間, 용저간㫪杵間 등이 있었다.

재용감에는 실무 담당자가 여러 명 있었는데, 자신은 비단창고를 맡았다고 밝혔다. 길다란 창고가 있었으며, 신당神堂 주위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고 있다. 박정혜에 따르면 조선시대 지방관아에는 어김없이 신당이 있었으며,

보통 서리들이 자신들의 결속력과 안녕을 위해 수호신격을 모시는 사당으로 관아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과 함께 이 화첩에 실린 다른 중앙관청의 그림을 통해 중앙관아에도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용감에 있는 동안 청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온 뒤에

상서원 부직장(정8품)에 제수되었다가 예빈시 주부(종6품)으로 승진하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두 관청의 관아도는 그리지 않았다.

 

 

 

 

 

 

 

제3도 <호조戶曹>

 

중부 澄淸坊에 있다.

기해년(1839) 6월 30일에 좌랑佐郞(정6품)에 제수되었다. 

세폐료녹색歲幣料祿色을 담당하고 사축서司畜署도 겸했다. 병자년(1876) 3월 초2일에 참의參議(정3품)에 제수되었다.

 

호조는 조선시대 중앙 관서인 6조 가운데 하나였는데, 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錢糧 · 식화食貨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전국의 재정을 담당했으므로 품관 외에도 계사計士 60명, 서리 60명, 사령 40명이 근무하는 큰 관청이다. 정2품 판서가 담당하는

관청이어서 당상대청 앞에는 연못과 정자도 있었는데, 33세에 좌랑(정6품0으로 부임해서 낭청대청郎廳大廳에 근무했던 호조에

37년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해서 돌아온 그의 감회가 남다르게 깊었을 것이다. 출입문이 두 군데 있었는데, '지부地部'는

호조가 6조 가운데 두 번째 부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탁지度支'는 지출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제4도 <종묘서宗廟署>

 

기해년(1839) 12월 22일에 영令(종5품)으로 제수되었다.
종묘서는 종묘와 왕릉을 관장하는 관청인데, 종묘 앞에 있었다. 종묘의 위치는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위치를 쓰지 않은 듯하다.종묘에는 도제조와 제조가 1명씩 있었지만 모두 재상이 겸직했고 실무자로는 영令이 책임자였다.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덕분에 그는 33세의 나이로 종5품에 승진하여 중앙관서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정문의 위치만 현재 모습과 조금 다르고 정전正殿(국보 제227호)과 영년전永寧殿(보물 제821호)을 중심으로 공신당功臣堂, 칠사당七祀堂,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악공청樂工廳, 망묘루望廟樓 등의 위치가 지금 그대로이다. 전사청 옆의 제정祭井이라든가정전 옆의 연못까지 그리고, 길도 붉은 선으로 표시하여 화공이 세밀하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묘서 영으로 있던 1840년 음력 4월에 그동안 거쳤던 관아들의 그림을 모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를 편집하고서문을 지어 평생의 작업을 본격화 하였다. 그가 서문을 지은 정관헌은 종묘서에 있던 당호가 아니었으니, 아마도 그의 서재 이름이었던 듯하다.

 

 

 

 

 

 

제5도 <영유현永柔縣>

 

평안도 15방坊이다.

서울에서 630리, 순영巡營에서 80리, 병영兵營에서 9리이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50리이고 남쪽에서 북쪽까지 20리이다. 동쪽으로는 순안順安 경계 냉정참冷井站까지 10리,

서쪽으로 큰 바다까지 40리이다. 남쪽으로 순안까지 30리, 북쪽으로 숙천까지 30리이다.

 

경자년(1840) 7월 11일에 현령縣令(종5품)을 제수받고(교지가 아닌) 말로 연락 받았다.

 (8월) 20일에 조정에 사례하고 떠나 8월 25일에 부임하였다.

 

첫 번째 지방관으로 부임해 관아도를 그렸는데, 동헌과 내아 중심의 관아가 북쪽에 있고, 마을이 아래쪽에 있어

일반적인 고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헌 청민당聽民堂 한쪽의 금학루金鶴樓 1간間까지 정확하게 그리고,

객사인 청계관淸溪館 뜰의 이화정 앞의 배나무도

흰 꽃이 가득 덮힌 모습으로 그려 『영유현읍지』에서 밝힌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실감케 해준다.

 

고을이 자리잡으려면 주민들의 식수인 우물이 중요했는데, 대부정大夫井, 괴천槐泉 옆에는 홰나무를 그렸으며,

이화정에는 배나무를 그리고 동헌 둘레 관어정觀漁亭과 연못 주위에는 울긋 불긋 꽂나무를 그렸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버드나무를 그려 나그네들이 길  떠나면서 버들가지를 꺾어 말채찍했다는

이야기를 실감케 한다.

지금은 거의 모든 지방에 었어진 사단社壇과 여단도 그렸는데 사방에 홍살문을 그려 그 모습을 보여준다.

위치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소개된 곳과 같다. 사방의 산에 이름이 밝혀져 있고 ,

순안으로 가는 큰 길까지 그려져 있어, 관아도가 그림지도의 효용성까지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수령으로 근무하던 중 1841년 3월 25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3년 상이 끝나는 1843년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제6도 <사복시司僕寺>

 

중부 수진방에 있다.

계묘년(1843) 5월 16일에 판관判官(종5품)에 제수되었다. 목장(牧場)과 호방군색戶房軍色을 관장하였다.

 

사복시는 수레와 말,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그는 37세에 판관(종5품)으로 부임했다가 49세에 첨정僉正(종4품)으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사이 종3품으로 승진하였지만 재령군수로 나갔다 실수를 하여 징계를 당하고 관직에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다시 관직을 받았을 때는 종4품 벼슬인 첨정에 머물렀던 것이다.

 

사복시는 말과 수레를 관장하는 관청이어서 동고東庫, 서고西庫, 남고南庫 등의 창고가 둘려져 있었으며,

마의청馬醫廳과 마구간까지 있었다.

사복시 책임자인 정正 정36품이 근무하는 열청헌閱淸軒 앞에는 가마까지 그려져 있다.

옆문을 태복서문太僕西門이라고 했는데,

사복시를 태복시太僕寺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마신魔神을 모시는 신당이 후원에 있다.

일년 내내 말똥 냄새가 나고 마부들이 말을 조련하느라고 시끄러워서 문관들은 부임하기를 꺼렸다.

 

 

 

 

 

 

 

제7도 <재령군載寧郡>

 

황해도 19방이다.

서울에서460리, 순영巡營이 있는 해주에서 120리, 병영兵營이 있는 황주에서 90리, 수영水營이 있는 옹진에서

160리 떨어져 있다. 동서가 80리, 남북이 90리, 동쪽으로 평산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봉산 경계까지 20리 떨어져 있다.

 

을사년(1845) 4월 16일에 군수(종4품)에 제수되었다. 정사가 말로 전달되었다.

조정에 사례하고 그날로 떠나 30일에 관아에 나아갔다.

 

관아는 그림 중앙에 장수산長壽山 주봉 아래 그려져 있다. 관아 오른쪽에 향교가 있고 그 반대편 왼쪽에

동그랗게 그린 옥獄을 비롯한 그외 여러 관아 소속 건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옥 뒤쪽 산 등성이 너머에

재령의 옛고을터가 있는데 1519년 큰 전병이 돌아 지금의 읍 소재지로 옮겨왔다고 한다.

다른 고을의 사단(社壇)이나 여단에는 제단만 있고 건물은 없었는데, 재령군 사단에는 건물도

그려져 있어 "사직단은 3칸인데 관아 서북쪽 1리에 있다"는 『재령군지』기록과 일치한다.

읍내 많은 가옥들 사이에 두 개의 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철종실록』 군2, 1년(1850) 3월 18일조에 "(임금이) 황해도 암행어사 신석희申錫禧를 불러보았다. (줄임)

그가 전 재령군수 한필교(줄임)를 죄주어야 한다고 서계書啓했기 때문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제8도 <서흥부瑞興府>

 

황해도 15방이다.

서울에서 340리, 순영 해주에서 180리, 병영 황주에서 110리, 수영 옹진에서 270리 떨어져 있다.

동서가 70리, 남북이 105리이다. 동쪽으로 신계 경계까지 40리, 서쪽으로 봉산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봉산 경계까지 25리, 북쪽으로 상원 경계까지 80리이다.

 

기유년(1849) 5月 초1일 정사政事에서 부사府使(종3품)에 제수되어, 재령 군수에서 승진하여 옮겼다.

조정에 드리는 사례는 드리지 못하고 (재령에서 바로) 부임했으며 18일에 관아에 나아갔다.

 

대부분의 읍성에는 관아와 객사가 북쪽에 나란히 있는데, 서흥부에는 관아만 북쪽에 있고 객사는 남쪽에 있다.

교육기관인 향교가 조용한 고을 찾아 뒷산 쪽에 있는 것은 다른 고을과 같다. 마을 가운데 윗장터와 아랫장터를 그리고,

개천의 다리까지도 그려 백성들의 생활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열댓 종류의 창고가 읍지의 기록대로 다 그려졌다.

영유헌 간아도는 사방의 산과 관아 중심으로 둘려지게 그렸는데, 서흥부 관아도는 남산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다른 화공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서흥부에 부임한 이듬해 3월 18일에 철종이 암행어사 신석희를 불러보고,

그가 "전 재령군수 한필교를 죄 주어야 한다" 고 서계書啓한 사정을 확인하였다.

한필교는 곧바로 파면되어 충청도 문의현에 유배되었다.

 

 

 

 

 

 

 

 

 

 

제9도 <장성부長城府>

 

전라도 15면面이다.

북쪽으로 서울까지 660리, 순영 전주까지 170리, 병영 강진까지 170리, 좌수영 순천까지 290리, 우수영 해남까지 300리이다.

동서가 45리, 남북이 70리이다. 동쪽으로 창평 경계까지 25리, 서쪽으로 영광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광주 경계까지 30리, 북쪽 정읍 경계까지 40리이다.

 

병진년(1856) 2월 17일 정사에 사복시 첨정에서 (장성)부사(종3품)에 제수되었다.

3월 초3일에 조정에 사례하고 길을 떠나 25일에 관아에 이르렀다.

 

서흥부사 중도에 유배를 당했던 그는 1855년 11월 2일에 첨정僉正에 제수되었다가 석 달 만에 다시 府使(종3품)직으로 복귀하였다.

그의 행장에 따르면 삼년간 근무하다 1857년 그만두었다고 한다.

 

장성부는 관아가 서쪽에 있고 객관이 동쪽에 있으며 마을이 남쪽에 있어 일반적인 고을의 구도를 보여준다.

동산서원 옆의 오리정五里亭이 있어 사또들이 이임할 때에 배웅하는 오리정의 실체와 위치를 알게 해준다.

둥근 담으로 둘러싸인 옥獄이 마을 끝 강가에 있어 옥터가 일정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동헌 담 뒤에 책실인 청연당淸燕堂이 있고 좌우에 초가집이 있어, 관아에 드문 초가집 모습도 보여준다.

 그 옆에는 겸가정蒹葭亭이 울긋불긋한 꽃나무들 사이에 세워져 있어 주변 경치와 어울린다.

 

 

 

 

 

 

 

 

 

 

제10도 <선혜청宣惠廳>

 

남부에 있다.

신유년(1861) 11월 초9일에 낭청郎廳(종6품)으로 파견되었다. 균역색均役色을 관장하였다.

임술년(1862) 3월 30일에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에 제수되었다. 부임하지 않았다. 4월 16일에 사직소를 올려 갈렸다.

 

선혜청은 1608년에 이전에 실시된 공납제를 전세로 전환한 대동법을 실시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청이다.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적 실시는 거의 한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선혜청은 17세기 중반부터 호조와 더불어

중요한 재정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18세기 후반 이후 진휼청과 균역청의 임부까지 맡게 되면서

세입과 지출이 호조를 능가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숙천제아도』의 호조와 선혜청 그림에 잘 반영되어 있는듯 하다.

즉 그림으로 보아서는 선혜청의 규모가 호조보다 큰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방별로 영남청, 강원청, 호서청, 호남청 등의 관아가 보이고, 업무별로 균역청均役廳, 계사청計士廳 등의 관아가 보인다.

한필교는 균역색均役色을 담당한 낭청이었으므로 상대청上大廳 뒤에 보이는 균역청에서 근무하였다.

선혜청에는 창고가 많아서 호서청의 창고에는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天, 地, 玄, 黃이라는 번호를 붙였고

강원청의 창고에는 一, 二, 三, 四의 번호를 붙였다.

번잡한 가운데 마구간은 물론, 구역마다 따로 있는 뒷간까지 다 그렸다.

 

한필교는 이 관청에 근무하던 중 1862년 3월 30일에 성주목사로 발탁됐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4월 16일에는 사직서를 올렸으며, 1865년 다음 벼슬에ㅓ 나아가기까지 벼슬을 하지 않은 듯하다.

1862년에는 1월에 단성민란, 그리고 2월 18일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70여차례의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는데, 그 주요 이유는 소위 삼정(전세, 군역, 환곡)과 관련된 것이었다.

실제로 성주에서는 1월초부터 성주수령 이인설이 상경하여 자리를 비웠고, 3월 26일 첫 봉기가 일어났는데

봉기가 일어나기 전 읍민들은 이미 감영에 의송을 보내는 등 소요의 움직임이 있었다. 일단 봉기가 일어나자

읍민들이 부패한 서리들과 사족들을 습격하고 집을 부수는 등의 소요가 계속되었다.

서울에 있던 이인설은 3월 30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바로 한필교를 성주목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민란 중에 고을 수령들이 난민에 잡혀 수난을 당한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필교는 민란이 일어나고 있던 지역인

경상도 성주에 부임하는 것이 꺼려져 부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장에는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소요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무렵 철종은 조정의 신하들과 지방의 학자들에게 삼정을 비롯한 지방의 행정문제의 개혁안을

제출 하도록 하였는데, 한필교도 그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삼정구폐대책三政구弊對策"이 그의 문집에 남아있다.

 

 

 

 

 

 

 

 

 

 

 

제11<종친부親府>

    

북부 관광방觀光坊 벽동碧潼에 있다.

을축년(1865) 8월 초7일에 典簿(정5품)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866년) 11월 24일에 전첨典籤(정4품) 으로 승진하였다.

 

종친부는 종실宗室 제군諸君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업무가 간단해서 관원도 별로 없고 건물도 단순하다.

종친부 건물은 원래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맞은편에 있다가 1981년 종로구 화동 1번지로 옮겼다.

현재 정면 7간, 측면 5간의 중당中堂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사翼舍만 남아 있다. 『서울건축사』에서는

"중당의 좌측에도 건물이 하나 더 있어서 좌우 균형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고,

동시에 이 현존하는 두 개의 건물이 종친부 전체의 배치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그림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의문들이 풀리게 되었다. 중당 좌우로 대칭을 이룬 구조가 아니라는 것과

전체의 배치가 확인되었다. 이 그림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두 건물은 관대청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인 셈이다.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관리하는 선원보각은 따로 담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한가지 의문을 남기는데 규장각이 종친부 안에 있는 점이다.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창덕궁 안에 설치한 기관으로 왕실 도서관이지만, 학술및 정책을 토론하고 입안하는

중요한 연구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정조 사후 그 기능이 축소되어 왕실 도서관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고종 즉위 후 대원군과 고종은 왕권강화의 차원에서 규장각과 종친부의 위상을 높이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규장각의 현판도 1866년 종친부로 옮겼다고 하는데 바로 그 이유로 이 그림에

규장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규장각의 여러 시설은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복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1866년에 고종의 혼례가 있었다.

종친부 관원인 한필교는 가례도감 낭청으로 임명되어 혼례에 참여했다가 3월 23일에 '승진 서용하라'는 상을 받았고,

몇달 후 같은 관청에서 높은 벼슬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제12도 <김포군金浦郡>

 

경기도, 8면이다.

동쪽으로 서울에서 60리, 서쪽으로 큰 바다에서 20리, 북쪽으로 한강에서 5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양천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부평 경계까지 10리, 서북쪽으로 통진 경계까지 10리 떨어져 있다.

정묘년(1867) 3월 초7일 정사에 (종친부) 전첨에서 군수(종4품)에 제수되었다. 24일 조정에 사례하고 떠나 관아에 나아갔다.

 

김포군은 동헌만 크게 그려 한강 하류를 따라 민가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내아나 객사도 간략한 필치로 그렸다. 마구간이나 뒷간은 모두 초가로 그렸다.

다른 그림과 달리 그림이 왼쪽이 동쪽 방향으로 묘사되어 있어 관아의 북쪽에 있는 한강이 그림의 밑부분에

그려져 있으며 물길과 습지로 채워져 있다.

강에는 배도 한 척 떠있고(거꾸로 그려져 있다) 두 개의 섬도 있다. 서울에서 6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그날로 부임하였다.

 

 

 

 

 

 

 

 

 

 

 

 

 

제13도 <신천군信川郡>

 

황해도18방이다.

서울에서 500리, 순영 해주에서 110리, 수영 옹진에서 120리, 병영 황주에서 130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재령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재령 경계까지 40리, 서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50리,

북쪽으로 문화 경계까지 10리이다.

 

정묘년(1867) 9월 26일 김포군수에서 (신천)군수로 바뀌어 제수되었다. 특별한 명이 말로 전달되어 서로 바꿨다.

10월 17일에 조정에 사례하고 떠나 24일에 관아에 나아갔다.

 

『승정원일기』고종 4년(1867) 9월 26일에 "신천군수 서상옥과 김포군수 한필교를 맞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의 기록과 일치한다.

 

신천군 관아 연못에 초정草亭 유하정柳荷亭이 있고, 후원에도 초가로 세운 읍향정揖香亭이 있어 이채롭다.

사단에도 다른 고을과 달리 홍살문 안에 건물이 있다.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는 우물 문정文井과 무정武井이 표시되어 있으며,

돌탑과 돌부처가 그려져 있는 것도 특색이다.

 

그는 종친부 시절 『선원속록璿源續錄』수정에 참여한 공으로 12월 1일에 망아지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지만,

이듬해(1868)에 암행어사 서신보가 그의 비위사실을 발견해 봉고파직封庫罷職 시켰다.

5월 7일에 황해감사 조석여曺錫與가 그 사실을 아뢰면서 신임 군수를 임명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10월 12일에는 의금부에서 "나장羅將을 보내어 한필교를 체포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한필교는 조세 및 환전 문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로 결국 익산으로 유배되고 5년 금고형에 처해졌다.

1870년 3월 18일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제14도 <도총부都總郡>

 

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다.

무인년(1878) 정월 19일에 특별히 부총관副摠管(종2품) 및 호군護軍(정4품)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876) 2월 17일에 조사위장曹司衛將에 제수되고, 3월 초2일에 호조참의(정3품)에 제수되었다.

4월 22일에 돈령부 도정都正으로 옮겨져 제수되었지만 상소하여 갈렸다. 25일에 부호군副護軍(종4품)에 제수되었다.

 

도총부 기록은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 병자년(1876)의 기록이 앞서야 하지만, 실제로 근무하지 않은 벼슬들이다.

1876년 1월 3일 한필교는 70세가 되어서 통정대부로 가자를 받아 마침내 당상관 대열에 올랐으며,

바로 여러 벼슬을 계속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래서 관아도도 그리지 않았다.

부호군에 제수되어 녹봉만 받다가, 2년만에 한직인 도총부 부총관(종2품)에 제수되었다.

호군은 부호군과 마찬가지로 실직이 아니고 녹봉만 받는 산직이다. 『고종실록』15년 정월 19일조에

 "한필교와 서긍보를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한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실제 부임한 벼슬을 위에 쓴 것이다.

 

도총부는 오위五衛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이었는데, 당상대청과 낭청직소, 그리고 사령방과

서리청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관아였다.

그래서 뜰의 뒷간까지 자세히 그렸다. 당상대청에는 층계를 올라가는 누정이 있었는데,

십선루十仙樓라는 편액이 걸렸다.

 

 

 

 

 

 

 

 

 

 

 

 

 

 

 

제15도 <공조工曹>

 

광화문 앞 서쪽 길가 형조 아래에 있다.

무인년(1878) 3월 23일 정사에 참판(종2품)에 제수되었다.

 

당상관 실직 벼슬을 맡고 두 달여만에 다시 승진하여 공조 참판이 되었다.

한필교는 1878년 4月 18일 72세로 사망하였으므로 이 벼슬을 제수받고 불과 한 달도 되지 못하여 죽은 것이다.

그의 아들 한장식이 한필교의 행장에서 언급했듯이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종2품의 벼슬에 오른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으므로,

한필교 당사자도 그 자신의 성공을 영광스레 여겼을 것이다.

 

공조는 실제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와 소속 관청들이 모두 외부에 있었으므로, 당상대청과 낭청대청,

그리고 사령방과 서리청, 창고 12간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었다.

 

 

 

 

 

[서지학으로 본 숙천제아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해제

 

허경진 / 김선주

 

『숙천제아도』는 한필교韓弼敎(1870~78)가 편찬한 화집인데, 이름 그대로 그가 평생 거쳤던 여러 관아의 그림들을 모은

(여러 관아를 그린) 책이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 희귀본 실에 소장되어 있는데, 분류번호는

TK 3490. 884331이다. 마이크로필름으로 열람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과 협정을 맺고

1부를 복사하여, 국내 열람용으로 비치하고 있다. 또한 하버드대학은 국립중앙도서관협조로 2007~2010년에 걸쳐

3,982 종에 달하는 한국관련 소장 희귀본 중에 473종을 디지털화 하여 두 도서관의 웹사이트를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숙천제아도』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을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자는 엔칭도서관을 방문하여

원본을 열람할 수 있지만, 웹사이트를 통해서 일반 열람이 편리하게 되었으며, 원본이 손상도 최소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화첩 가운데 사복시司僕寺 그림이 엔칭도서관 2000년도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으로 선정되어 널리 알려지게도 했다.

 

 

 

편찬자 한필교와 화첩이 제작된 문화적 배경

 

한필교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보경輔卿이고 호는 하석霞石이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이며 조선중기에 우의정을 지낸

 한응인韓應寅(1554~1614)의 후손이다. 한필교가 속한 청주한"씨 방신파응인계方信波應寅系는 조선후기 벌열閥閱가문 중의 하나이다.

벌열은 조선후기 집권세력으로 양반에서 분화된 최상위 계층으로,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세습하는 가문을 말한다.

 

이들은 서울에 거주하며 3세대 걸쳐서 각 세대 6촌 이내에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인을 배출하고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陰敍,

국혼國婚,공신功臣제도 등을 통해서 벌열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차장섭의 연구에 의하면 선조이후 57개 벌열가문이 파악되는데,

조선후기 정국은 벌열,  벌열과 벌열의 역학관계 속에서 시기별로 다양한 권력구조의 양상을 보인다.

 

그에 따라 별열의 성쇠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9세기에 들어서 순조가 즉위한 이후 벌열이 정국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고,

특히 노론老論계 벌열 가운데서도 소수 외척 가문이 정국을 오로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략)

한필교는 그림의 효용성을 알고 있어서 이러한 화첩을 기획했지만,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래서 관아를 옮길 때마다 화공에게 그리게 하였으므로, 그림들은 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화공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은데, 한 두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화공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뒷날 이 그림들을 절첩장折帖裝으로 제본하였다.

관아 하나를 두 면에 그렸는데, 마지막 그림인 <도총부都摠府> 뒤에도 몇 장의 여백이 남아 있다.

한필교 자신으로서는 더 많은 관아도를 남기려 했겠지만, 끝장에 발문도 붙이지 못하고 편찬을 마친

『숙천제아도』는 그에게 미완성의 화첩이기도 하다.

 

(중략)

한필교가 남긴 문헌 중 『수사록』이나 『하석유고』는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숙천제아도』만 멀리 미국까지 건너간 것이다.

한필교와 그의 아들 한장석은 한필교의 장인 홍석주의 문인이기도 하여 홍씨가 장서와 저서들까지 물려받았는데, 한씨 집안의 책들은

한필교의 증손자 한상억에 의해 1934년 10월에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한씨문고韓氏文庫"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데

기증된 도서는 6,500책이 넘는다고 한다.

 

 

 

『숙천제아도』의 가치

 

한필교는 그림의 효용성을 알고 있어서 "(그림을 통해) 천년 전의 모습도 알 수 있고, 만리 먼 곳의 모습도 알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평생 돌아다녔던 관아들을 늘그막에 회상하려는 생각에서 이 그림들을 그리게 한 것인다,

 이 화첩은 후세인 들에게 관아의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현재 중앙 관서 가운데 남아 있는 관아 건물은 종친부와 삼군부 밖에 없는데, 두 관아 모두 옮긴 장소에 일부 건물만 남아 있다.

지방 관아도 동헌이나 객사 일부만 몇 군데 남아 있고, 관아 전체가 남아 있는 읍성은 하나도 없다.

이와같이 관아 건물어 대한  자료가 드문 상황에서, 『숙천제아도』는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소중하게 전하고 있다.

옛 관아를 복원하거나 연구할 때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중략)

첫 번째 지방 관아도인 영유현 그림에서 장소와 건물에 "따라 배나무, 소나무, 홰나무, 버드나무, 꽃나무로 구별해 그린 것을 보면,

한필교 자신이 화공 옆에 앉아서 하나하나 지시하고 감독한 듯하다.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글씨가 일정한 것을 보면,

그림 속의 글씨는 그가 직접 쓴 듯하다.

 

한필교가 평생에 걸쳐 편찬한 『숙천제아도』는 파란만장한 조선시대 관원의 영욕이 얽힌 생애를 보여준다.

전임, 승진, 파직, 유배와 좌천으로 얼룩진 그의 벼슬길을 보면, 그가 젊은 시절에 기획한 이 화첩은 몸으로 기록한 이력서이기도 하다.

늘그막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노닐면서 이 화첩을 보며 옛 기억을 더듬어보겠다고 했지만, 1868년 익산으로 유배된 후 더 이상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화첩을 펼쳐보면서 자신의 벼슬이 당상관에 미치지 못하고 유배와 함께 마감된 것에 대한

회한에 잠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70세가 되었을 때, 벌열가문의 일원으로 또한 그 아들 한장석의 늦은 출세 덕에,

 당상관 품게를 받고 또 당상관의 녹과 벼슬을 받게 되었으니, 그 인생의 마지막 2년 동안

 그가 누린 영예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술사학으로 본 숙천제아도
박정혜(한국학중앙연구원)

- 전략 -
『숙천제아도』의 회화적 특징
『숙천제야도』는 계화로만 이루어진 중앙의 관아도와 산수 배경 속에 자리잡은 지방의 관아도로 나누어진다.후자는 18세기 후반 이후 성행한 군현지도와 비교되며 통상 회화식 지도로 분류되는 형식이다.『숙천제아도』는 단순히 공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되던 회화식 '지도'라고 부르기가 주저될 정도로 회화성이 추구된 작품이다.한필교의 제작 의도나 표현 방식으로 볼 때 감상과 소장의 기능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숙천제아도』는 관아도로서 그 기본 속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즉 그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주기註記가 세세하게 달려 있다는 점이다.그림은 관아의 구조와 고을의 형세만을 보여주지만 주기는 개별 건물의 명칭과 기능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서체는 처음부터 끝까지농묵의 반듯한 해서체이다. 한사람이 글씨라고 생각되는데 한필교가 완성된 그림마다 주기를 덧붙였던 것은 아닐까 한다.
현재 의궤나 관서지의 그림으로 알 수 있는 중앙의 관아 모습은 종묘서, 성균관, 기로소, 종친부, 사직서, 호조, 형조, 의금부, 태상시 등이며계회도를 통해 병조, 승정원, 사헌부, 승문원 등의 관사 일부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숙천제아도』에 그려진 제용감,사복시, 선혜청, 도총부, 공조의 관아 모습은 소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숙천제아도』에 그려진 지방의 관아도에는 산과 하천, 아사와 객사, 공해公廨는 물론 고을의 향교와 서원, 단묘와 누정, 창고와 장시, 도로와 교량, 연못, 샘, 우물까지 자연환경 뿐만아니라 인문지리적 요소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시장이 서는 지역을 장대場垈나 장기場基로주기하였는데 지도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숙천제아도』에는 사단, 여단, 성황단도 빠지지 않고 표기 되는데 이도 군현지도에서19세기에나 나타나는 특징이다. 한편 <재령부>, <서흥부>, <장성부> 등에는 감사나 사신이 오고갈 때 수령이 나가서 영접 및 배웅하는 지점인 오리정을 표시한 점이 재미있다.
19세기의 군현의 사실적인 자연경관과 관아의 상세한 묘사는 주로 대형 병풍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평양, 함흥, 진주, 전주, 통영 같은 몇몇 고을의 군현지도를 중심으로 반복되었다. 영유, 래령, 서흥, 장성, 신천, 김포에 대해서는 『숙천제아도』만큼 자세하게 형상화된 그림은 없다.대부분의 군현지도가 지지地誌의 내용 안에서 묘사되는데 『숙천제아도』는 그 이상으로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회화식 지도의 기능을기본적으로 갖추고 고을의 산천과 명소를 한층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소장자로 하여금 '와유'할 수 있는 실경산수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다.화가는 기본적으로 읍지나 군현지도를 참고자료로 활용했을 테지만 어느 회화식 군현지도보다도 상세하고 회화적으로 고을의 이미지를 한 장의 사진처럼 표출하였다.
한필교의 주문을 받은 화가는 모두 도화서 화원이나 그에 상응하는 기량을 갖춘 직업화가였다고 생각된다. 『숙천제아도』를 지배하는산수화풍은 미점과 피마준, 화보식 수지법을 기반으로 한 19세기 후반의 남종화풍이다. 19세기 전반까지 화원화畵員畵에서 농후했던김홍도 화풍의 영향은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도화서에는특별히 새로운 양식이 창출되던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화원의 개성적인 화풍은 미약하던 시기이다. 더욱이 화원들은 평소 습관적으로 그리던방식으로 기록화의 주문에 응했으며 그러다 보니 기록화에는 화원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기 어려웠다. 개인의 습벽은 산수 표현보다 작은 건물의 지붕, 담장, 문의 묘사에서 더 쉽게 드러나게 된다. 정면 혹은 사선 같은 부감시의 방향 선택, 지붕의 묘법, 기와골을 그리는 방식,담장에 문을 내는 방식, 담장(혹은 행랑)의 모서리의 처리, 지붕 아래 담장(혹은 행랑)이 외반인가 내만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표현 습관에 좌우되는 것 같다. 

 



작가와 제작시기
『숙천제아도』는 40여 년 동안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른 회화 수준과 세부 표현에 대한 꼼꼼함이 한결같이 유지된 점을 높이 살만하다.이는 그림을 주문한 한필교의 철저한 기획과 준비, 그리고 꾸준한 관리와 정성이 수반되었음을 의미한다. 화원에게 의뢰하기 전에 해당 관아와지역에 대해 참고할만한 자료이 준비와 충분한 현지 조사가 선행되었을 것이며 일정한 주문 원칙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통일된형식의 화첩으로 완성될 수 잇었을 것이다.

『숙천제아도』의 서문은 1840년 음력 4월, 다섯 번째 관직인 평안도 영유현 현령으로 부임하기 전에 쓰였다. 맨 마지막으로 일했던 관아인<공조> 뒤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빈 화면이 7장이나 남아 있다. 한필교는 1839년 6월 호조좌랑으로 부임한 뒤에 자신의 관직 이력을그림으로 남길 것을 결심하고 화첩을 만들었던 것 같다. 적어도 처음의 세 장면 <목릉>, <제용감>, <호조>는 한꺼번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데 건물 묘법과 수지법에서 같은 필치가 구사된 점도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비교 그림). <종친부>와 <신천군>에서 제작시기를 추정한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필교는 새로운 관아에 부임하면 곧 그림의 제작을 준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 같다.
『숙천제아도』가 화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한필교는 호조좌랑으로 6개월 봉직한 뒤 1839년 12월 종묘서 영이 되었는데<종묘서>는 앞의 세 그림과는 약간 다른 필치이다. 담장, 행랑의 지붕, 그리고 이것이 꺾이는 모서리 부분의 묘법이 앞의 세 그림과 다르며 건물의 실내 공간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도 미약하다. 따라서 호조의 부임시기가 6개월로 짧음에도 불구하고 <종묘서>를 그릴 때에는화가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부임일자가 2개월 간격인 <도총부>와 <공조>도 같은 시대양식을 보이나 필치가 달라서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림은 <목릉> · <제용감> · <김포군> · <신천군> 처럼 같은 화가의 솜씨로 보이는 것도 있으나 나머지는 각각 필치가 달라서 모두 다른 화가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비교 그림). 각 장면 간의 제작시기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0년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매번 그릴 때마다 다른 화원을 초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적인 화풍도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하면 같은 사람에게 여러 번 부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화첩이 완성되기까지 기간이 길고, 화가가 개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기록화인 관계로 이 『숙천제아도』의 제작에 과연 몇 명의 화원이 참여했을 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 하기 힘들다. 다만 15장의 그림 수준이 우수하고 19세기 후반 중앙화단에서 유행하던 화풍과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방의 읍치를 그린 장면까지도 모두 중앙에서 활동하던 화원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지방 수령으로 봉직할 때에는화가의 초치가 문제가 된다. 한필교가 근무했던 지방은 감영이나 병영이 있던 곳이 아니므로 서울에서 파견된 군관화사를 감영으로부터초대해 그렸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한필교가 서울에 왔을 때 화원을 불러 주문을 맡겼을 가능성이다. 읍지와 군현지도 등을 활용하고 한필교의 조언을 바탕으로 중앙에서 활동하던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숙천제아도』의 의의
- 전략 -
『숙천제아도』의 가장 큰 제작 의의는 19세기 관료들이 사환의 이력을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개인의 기록을 넘어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는데에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중략) 개인과 집안의 역사 기록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사가기록私家記錄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확장, 군현도의기능과 사용자의 확대 등 19세기의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한 결과이다. 관아도나 지도가 행정과 통치를 위해 만들어져서 관청에서 공적으로만사용되는 시기는 지난 것이다. 관리들에게 사적으로 소유된 관아도나 군현도는 기념의 산물이며 와유의 대상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방관으로서의 관직 경험을 부임행렬도赴任行列圖로 과시하고 대형의 회화식 군현도 안에 순력하는 장면을 삽입하는 사례가 19세기에 부쩍 늘어난 것과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더하여 『숙천제아도』가 주목되는 이유는 그림의 회화 수준이 기량이 뛰어난 화원을 매번 동원할 수 있는 안목과 인맥을 가진19세기의 대표적인 경화제족 자제에 의해 시도된 결과이다. 『숙천제아도』는 제작 배경, 주제와 내용, 회화 약식 등 모든 면에서 19세기 회화의 다양한 측면을 말해줄 수 있는 좋은 사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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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제아도』를 나름 꼼꼼히 살피면서 내용 중의 일부를 이 자리에 옮겨 본다.

감히 고백하노니, 책 한 권의 내용에 이리도 깊이 빠져들 줄 애시당초 짐작조차 못했다.

 

특히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옛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여적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된 기쁨너무도 큰 것이었기에 진한 감동이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한 권의 책을 통해,

기록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으니...

 

 

 

 

 

 

Stars on The Sky - Chamras Saewatap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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