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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춘향전 imagine

 

 

이당 김은호 作 <춘향초상> (부분)

 

 

 

 

이당 김은호 作 <미인도> (부분)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은 계계승승하사 금고옥촉은 요순시절이오 의관문물은 우탕의 버금이라.

좌우보필은 주석지신이오 용양호위는 간성지장이라. 조정의 흐르는 덕화 향곡에 퍼졌으니 사해 굳은 기운이 원근에 어려 있다.

충신은 만조하고 효자열녀 가가재라. 미재미재라. 우순풍조하니 함포고복 백성들은 처처에 격앙가라.

이때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 하는 기생이 있으되 삼남의 명기로서 일찍 퇴기하야 성가라 하는 양반을 데리고 세월을 보내되

연장 사순에 당햐야 일점혈육이 없어 이로 한이 되야 장탄수심에 병이 되겠구나. 일일은 크게 깨쳐 옛사람을 생각하고

가군을 청입하야 여짜오대 공순히 하는 말이,

 

"들의시오, 전생에 무슨 은혜 끼쳤던지 이생에 부부되어 창기 행실 다 버리고 예모도 숭상하고 여공도 힘썼건만

무슨 죄가 지중하여 일점혈육 없었으니 육친무족 우리 신세 선영향화 위라 하며 사후감장 어이하리.

명산 대찰에 신공이나 하야 남녀간 낳거드면 평생 한을 풀 것이니 가군의 뜻이 어떠하오."

 

(『열녀춘향수절가』) 1장 앞뒤

 

 

 

각종 사화와 임, 병란으로 온 나라가 피폐해진 가운데, 경제와 문화 창달의 전성기.

이른바 '숙영정' 시대의 서막을 연 조선 19대 숙종이 <춘향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는 호적 정비와 양전量田을 통해 국가 재정을 늘리고, 대동법과 상평통보, 벼농사의 이앙법 장려 등 나름대로 상당

수준의 능력을 펼친 가운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대립을 유발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환국 정치의 중심에 여인들의 복잡한 

이해다툼이 연결되어 있음이 후대 사가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로 작용 하고 있다.

 

노론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궁에 들어온 인현왕후 민씨. 그러나 숙종은 왕후를 폐서인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함에

노론과 소론이 득세하지만 그도 잠시, 새로운 연적 무수리 숙빈최씨의 등장하자 남인을 무고하고

이를 또 숙종이 받아들여 남인이 제거되고 중전 장씨 희빈 강등에다 축출된 인현황후의 복귀가 이어지면서

노론이 다시 득세하기까지의 과정 등.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환국정치판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숙종이 있었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 태어난 영조의 초상화

 

<연잉군초상>, 1714년, 비단에 채색, 77.7×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어진>, 1744년, 비단에 채색, 61.8×110.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불에 탄 연잉군 시절의 초상으로 젊은 영조와 나이 든 영조의 얼굴 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초상화가 얼마나 실물 그대로 그려지는지 잘 알게 해주는 비교 초상이다.

 숙종의 초상도 두 차례에 걸쳐 그려졌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춘향도 아버지가 참판이라고도 하고 혹은 천총이라고도 하는 소위 양반의 서녀라고는 하나, 수모법에 따라 엄연히

천민인 기생의 딸이라는 점에서 장희빈이나 최숙빈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춘향 역시 이어사가 전라어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그 배경에 춘향의 열절이 있었다고 보고한 후에 왕에게서 정렬부인 이라는

작포를 받을 정도로 커다란 신분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춘향이 이도령을 따라 한양에 못가고 남원에 버려진 채 고초를 겪으며 옥중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도 폐비가 된 채

일반 사가에서 뼈저린 고통의 세월을 보낸 인현왕후와 비슷하다. 수청을 거절하고 옥에 갇혀 전전반측하던 춘향이나,

언젠가는 자신을 찾으리라는 희망 속에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인현왕후나 두 여인네의 심사는 서로 비슷하였으리라.

사랑의 버려짐과 극적인 반전을 이뤄내는 춘향의 이야기를 지으면서 또는 읽으면서

숙종의 시대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연상 작용이 아니었을까?

 

춘향전의 또 다른 주인공 이도령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숙종과 비교되는 측면이 있다.

한양으로 떠난 이도령이 춘향을 다시 찾아와 버려진 여자의 세월을 보상해주는 의협남이 된 것처럼,

숙종 또한  법례에 따라 간택된 왕비를 일반 사가녀로 강등 시켰지만 다시 복위시키는 의리남이 되고 있는 것이다.




 

《평생도平生圖제3면 삼일유가三日遊街傳 김홍도, 비단에 채색, 53.9×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탄 급제자 일행이 길잡이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유가하고 있다.급제자 바로 앞에 색동옷으로

치장한 세 명의 재인 광대가 부채를 들고 율동하고 있다. 이들 재인 광대는 줄타기와 땅재주 등 각종 기예를 펼치고

간혹 창(唱)을 부르기도 했다. 그 창 가운데 판소리 혹은 판소리와 비슷한 노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시절이 <춘향전>의 시대적 배경이 된 데에는 여러 야담이나 민담과 같은 민간설화의 형식으로 널리 회자되는 숙종의

민중적 인기와도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숙종의 야간 잠행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가난한

선비의 한을 풀어준다는 내용이다.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폐포파립으로 잠행을 벌인다는 점과도 관통하는

공통된 형식이자 행적이라는 점에서 숙종이 춘향전의 시대적 배경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개연성도 높다.
또 하나, 숙종 시절이 <춘향전>의 시대적 배경이 된 것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은 아니었을지?<춘향전>이나 <춘향가>가 만들어진

때가 실제로 숙종의 치세 기간일 수도 있다. 숙종 재위시 과거 급제자들이 풍악을 잡히고 노는 유가 풍속이 만연해 있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기에 말이다. 그런 놀이 풍속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니 금해달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으나

숙종은 대개 이를 윤허하면서 만 광대놀이를 너무 탐하지는 말라면서 강력하게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광대 중에서 소리에 재능이 있던 이들이 판소리를 부르기 시작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영조 때 창부가 어전에서 판소리 타령을불렀다는 기록을 신임 한다면, 판소리 창은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음이 확실하다.

어전에서 판소리가 불려졌다면 판소리는이미 시정에서는 물론이고 예술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숙종 때에는 창을 잘해서 국창 칭호를 이들도 등장하고, 과거 철에는 이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급제자의

유가 행사에 참여, 소리를 하면서 좌중을 휘어잡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의 시작이 꼭 숙종조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그 이전 시기로도 소급될 수 있다는 얘기다.

<춘향가>의 시간적 배경이 숙종 시대인 것은 판소리와 광대가 그 시절 모종의 관계로 얽혀 있을 개연성이 상당 부분에 걸쳐

존재하고 있음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그래서 <춘향전>에서 숙종 시절을 태평성대 였노라 목이 마르게 찬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사당 무신도 중 <창부대신도>

<창부>, 19세기, 비단에 채색, 53×101cm, 김형재 소장.

광대신(廣大神)인 창부신(倡夫神)이 노래를 부르며 액운을 물리쳐준다는 무가가 창부타령이다.

창부타령의 앞부분에 노정기가 있는데 남원의 광대가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이 서술된다.

 

<춘향전>「열녀춘향수절가」의 경우 은 의외로 월매부터 소개하고 있다. 여주인공인 춘향의 어머니를 내세우는 것이다.

주인공의 어머니 계보를 먼저 말한다는 것은 꽤 혁명적 사고로 우리 고전 가운데 그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상당수 있다.「숙향전」, 「운영전」, 「심청전」등이 그러하다. 유교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는 정면으로 유배되는 일이다.

춘향의 계보에서 또 주목할 점은 아버지 성참판이 그저 월매에 딸려 있는 부수적 인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점혈육이 없어 기자성정祈子精誠(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풍속)을 드리는 것도 월매가 주도하고 있다.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의 부친 쪽 계보를 들추는 바로 그 자리에 퇴기 월매를 내세워 발언권까지 주고 있는 것은 계산된 목적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뒤에 이도령이 소개될 때 이도령의 아버지 이한림의 선정이 치적으로 소개되면서 이도령의 계보가

얘기된다하더라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주인공에 대한 계보적 주도권은 이미 춘향과 월매에게 넘어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열녀춘향수절가」는 이처럼 처음부터 관행으로 내려오는 사회적 이념에 대해 의미 있는 투쟁심을 보이고 있다.

 

계보를 따지는 족보는 한 존재의 시원始原 내지는 기원을 소급해 추적하는 존재론적 물음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자기 최초 모습을 알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계보적 족보가 기원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굿에서 무당이 무가를 부를 때 계보에  따라 신격들을 불러내는 것과 흡사하다. 특히 무가에서 발달한 '노정기' 형식이다.

고전소설의 첫머리에 가문의 족보를 가급적 먼 조상부터 바로 윗 세대까지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도 환각에 가까운 마술을 거는

일이다. 주인공 집안의 문벌 계열을 죽 설명하는 식이지만 거기에 기대어 자기 자신도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춘향전>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핵심은 기생을 대하는 사회 관습의 문제, 사회 제도의 문제이다.

좀 더 영역을 확장하면 여성에 대한 시선의 문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설인 것이다. 처음부터 월매의 계보를 캐는

 <춘향전>의 설정은 춘향이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임을 천명하는 일인 동시에 작품의 핵심 의미가

 여성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첫 장

다가서포(多佳書舖)본, 1916년, 서강대학교 도서관 소장.

서체가 투박하고 강건하다. 날카롭고 직선적인 모양의 글씨가 약간은 자유분방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것은 서민의 발랄한 기운과 닮아 있다.

 

책의 주 대본인 「열녀춘향수절가」는 필사본이 아닌 판각본이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판각본의 서체가 다른 게

우리나라 판각본의 특징으로 서울 지역의 경판본과 전주 지역에서 나온 완판본으로 대별된다.위 완판본 서체는 상당한 변화를 거쳤다.

이 보다 앞서 나온 <별춘향전> 계열의 완판본 서체가 홀림체인 만큼, 완판체는 흘림체로 시작하여 점차 정자체로 변화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열녀춘향수절가」에 이르러 완전 정자체로 완판본 서체의 진화가 여기에 이르러 완결되는 것이다.

「열녀춘향수절가」의 서체는 한자의 해서체에 가깝다.전형적인 횡박종후橫薄縱厚의 형태이다. 단조로운 글자꼴을 탈피,

정형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판 24장본 「홍길동전」첫 장경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세련되고 유려한 경판본 궁체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정한 정제미의 경판 서체는 질박한 민체  스타일의 완판 서체와는 사뭇 다르다.(춘향전 경판본도 이처럼 서체가 흘림체 궁체이지만 다소 단정 · 정미하지 못해 홍길동전 서체로 대신했다).
판각본 서체의 양대산캑인 경판본은 한글 궁체 흘림체를 기반으로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자간의 상하좌우 간격도 일정하다.경판본 문화를 선도한 서울의 중인층의 의식은 전주와는 다소 달랐던 듯. 그들이 활동했던 지정학적 위상에서 비판과 저항을담기 보다는 안정과 균형, 정련과 절제를 지향하는 글자체가 경판본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남원 경처 듣조시오. 동문 밖 나가오면 장림숲 선원사 좋삽고, 서문 밖 나가오면 관왕묘는 천고영웅 엄한위풍 어제오늘 같삽고,남문 밖 나가오면 청천삭출금부용 기벽하야 우뚝 섰으니 기암 둥실 교룡산성 좋사오니 처분대로 가사이다." 도련님 이른 말씀 "이 애, 말로 듣더라도 광한루 오작교가 경개로다 구경가자." (「열녀춘향수절가」4장 뒤, 5잘 앞)
(……) 백백홍홍난만중에 어떠한 일 미인 나오는데 해도 같고 별도 같다. 저와 같은 계집종과 함께 추천을 하려 하고  난초같이푸른 머리 두 귀 눌러 고이 땋고, 금채를 정제하고 나군에 두른 허리 하리땁고 고운 태도 아장거리고 흐늘거려 가만가만 나오더니,장림 숲속에 들어가서 장장채승 그네줄을 휘늘어진 벽도 가지 휘휘칭칭 감아 매고, 섬섬옥수를 번듯 들어서 양 그네줄을 갈라잡고선듯 올라 밀어갈 제, 한 번 굴러 앞이 높고 두 번 굴러 뒤가 높아 앞뒤 점점 높아갈 제, 머리 위의 푸른 잎은 몸을  따라서 흔들흔들,난만도화 높은 가지 소소리쳐 툭툭차니 송이송이 맺힌 꽃이 추풍낙엽 격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치니 풍무취염녹염이라. 낙포선녀구름 타고 옥경으로 향하는 듯, 무산선녀 학을 타고 요지연으로 내리는 듯, 그 얼굴 그 태도는 세상 인물이 아니로다.(「장자백 창본 춘향가」
(……) 추천을 다한 후에 춘흥을 못 이기어 목욕을 하려하고 물가로 내려갈 제, 구름 같은 흐튼 머리 전반 같이 넓게 땋아 오색미금도투락 댕기끈만 물려 맵시있게 들이치고, 섬섬옥수 번듯 들어 나삼 자락 부여잡고 물가로 내려갈 제, 양지쪽 마당 씨암탉 걸음으로대명전 대들보에 명매기 걸음으로 시내 강변에 금자라 같이 행동접못가는 양은 봉래선녀 걸음이냐, 창해에 잉어같이 굼실굼실 내려가서 물가에 접붓 서며 끈을 끌러 치마 벗어 접첨접첨 넌짓 개어 암상에 집어 얹고 고름 끌러 저고리 벗어 벽도지에 접어 들고 끈을 끌러 허리띠 벗어 돌돌 말아 한 편에 놓고 속곳 벗어 암상에 접어 얹고 바람에 옷 날릴까 조약돌도 덤벅 집어 가만히 지질러 놓고, 사면을 살펴보다가 물에 풍덩 뛰어들어 물 한 줌 덤벅 집어 양치질도 하여보며, 물 한 줌 덤벅 집어 도화같은 두 귀밑을 홀랑홀랑 씻어보며, 물 한 줌 덤벅 집어 연적같은 젖퉁이를 왕십리 마누라 풋나물 주무르듯 주물럭주물럭 씻어보며, 물 한 줌 덤벅 집어 옥같은 모가지를 칠팔원에 가지 씻듯 뽀도독뽀도독, 모래 한 줌 덤벅 잡아 양손에 갈라쥐고 아비밥이 많으냐 어미밥이 많으냐, 꽃 한 송이 지끈 꺾어 입에도 덥석 물어보며, 버들잎도 주루룩 훑어 물에도 풍덩 들이치고, 물 그림자 들여다보고 네가 고우냐 내가 곱지 한참 이리 노는 양을 도련님이 보시더니 심사가 산란하여 떨며 방자를 부르니 장자놈 낌새 알고 곱배나 더 떨더라.(「고대본 춘향전」)

 

 

 

 

 

 

 

 

 

<남원관부도南原官府圖>

1752년(영조 28년)에 간행된 『용성지龍城誌』에 실려 있다.

남원읍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소들을 표시했다, 성 안팍 시설물이 다양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규모감이 잘 드러나 있다.

 

춘흥을 주체치 못한 이도령이 방자에게 남원의 경치를 묻는 대목이다.

남원 토박이 방자의 서슴없는 대답에서 옛 관습이 묻어난다. 왕과 궁궐을 중심으로 방위를 말 하는 것이다.

지도상 왼쪽을 우도니 우수영이니 하고, 오른쪽을 좌도니 좌수영이라 말 하고 있는 것이다.

행정 중심부인 관아는 동헌을 중심으로 좌측과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도령이 지금 방자와 경처 얘기를 나누는 곳도

 그 어름에 있는 책방이다.  방자가 아뢰는 남원의 경처들은 동서남북 성문에서 가까운 곳들이다.

 

먼저 동문 밖 선원사가 꼽힌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비보사찰이라고 한다. 객산인 교룡산이 너무 세고

주산인 백공산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지세를 북돋을 목적으로 백공산 줄기에 선원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서문 박 경처는 관왕묘다. 서쪽 끝에 표시된 만복사는 지도상으로 관왕묘 바로 옆이지만 실ㅈ는 서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갈 만한

곳으로 추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의 경처는 오작교다. 마지막으로 북문 밖의 경처로 교룡산성이 추천된다.

 

 

 

 

 

<남원부지도南原府地圖>(부분)

1872년, 채색필사본, 103×83cm,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채색 군현지도에서 걸작으로 손꼽힌다. 남문

광한루와 오작교가 분명하고 동문 밖 선원사 앞 장림숲이 회화식 진경산수화풍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남원관부도>에서는 요천수가 광한루 오작교로 연결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끊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원관부도>에서는 광한루와 오작교가 요천에서 나온 물길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남원부지도>에서는 그것이 끊어져 있다.

처음 광한루를 조성할 때는 요천수를 끌와 띠처럼 흐르게 했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물길이 끊어지고 광한루 앞에 곡지형曲池型

호반으로 남은 것이다. 그것이 여러 변화를 거쳐 우리가 보는 오늘 날의 모습이자 <남원부지도>에 묘사된 것과 다르지 않다.

 

 

 

 

 

<광한루>

 

광한루와 오작교는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다. 봉래, 영주, 방장의 세 삼신섬이 호수에 떠 있고 섬마다 정자가 세워져 있다. 오작교는 한 마디로 이성과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을 위한 성애적 장치들이 풍부한 곳이다. 광한루는 그 이름에서부터 천상 세계의 이미지를 진하게 풍긴다. 천상의 월궁을 광한궁廣寒宮이라고도 하는데, 월궁은 천상과 지상을 통틀어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항아가 사는 곳이다. 월궁 항아는 지상에서 예라는 궁사의 아내였으나 그가 갖고 있던 불사약을 훔쳐 먹고 천상으로 비상한 여인이다. 불사신이 되어 영원한 미모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월궁항아의 천상적이고 성애적인 이미지가 애당초부터 광한루를 감싸고 있다. 광한궁이 바로 천상 세계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이 삼신산은 자연스럽게 천상에 속하게 된다. 삼신산은 불사하는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항아가 사는 월궁과 이웃하고 있다.한마디로 광한루는 불사의 존재들인 선관선녀仙官仙女가 사는 공간인 것이다.

 

 

 

 


<오작교>

선관선녀들이 사는 천상세계에서도 애욕과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했다는 견우직녀 설화.소를 끌어 농사를 짓는

 견우와 베를 짜 옷을 짓는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 칠석날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준 오작교

위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광한루 앞의 큰 연못이 천상계의 은하수를 상징한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작교는 천상적이고 성애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광한루 전체에 화룡점정의 역할을 담당한다. 오작교가 천상 세계의 설화를 가져다

지상에 이식함으로써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오작교 위를 걸으며 애정의 성취나 금슬의 조화를 희구하는 배경인 것이다.연못속의 잉어를 비롯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자태 등은 또 다른 성애의 상징이기도 하다.

 

광한루와 오작교가 지닌 성애 표상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과 관리들이 광한루를 찾은 배경이다. 광한루가 처음 황희 정승 집안 개인의

별서로 출발하였지만 나중에 관아의 정원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성애적 상징들이 더 강화되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광한루를

선택한 것은 방자가 광한루를 특별히 좋다고 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도령 자신이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나이로서 따뜻하 봄날에

한 번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아의 정원으로서 성애적 분위기가 충만한 남쪽의 광한루를 빼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광한루에 대한 소문은 이미 경향 각지에 드높았으니 남원에 온 이도령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방자가 남원 경처를 소개하면서 광한루를 특별히 지목하거나 더 잘 소개한 것도 아님에도 이도령이 지체없이 광한루를 택한 까닭이다.

 

이도령이 광한루에 올라 춘흥에 겨워 짝을 갈구할 제, 오작교 너무 반대편 장림숲에서는 춘향이 등장하여 그네를 탄다.

이것은 이도령의 성애적 태도에 상응하는 여성의 짝 부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네를 내려온 춘향은 장림숲 아래에 있는 요천으로

내려가 목욕을 한다. 이 장면은 이 책의 주대본인 「열녀춘향수절가」가 아닌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 「고대본 춘향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오늘날 춘향가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춘향전 이본들 중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목욕 장면이 아주 희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춘향전의 전통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처음에는 있다가 나중엔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돌발적으로 첨가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더위에 그네를 타고 나서 요천수에 몸을 씻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 전개다. 문제는 춘향이 보여주는 대범 무쌍한 일종의 시위다.

옷을 다 벗고 물에 들어가 양치질도 하고, 귀 밑도 씻고, 젖가슴도 씻고, 모가지도 씻고... 온갖 의태어, 의성어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빛을 발하는 우리 고유어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단오풍정端午風情> 부분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춘향의 이러한 행동거지와 유사함을 보여주는 풍속화가 바로 <단오풍정>이다.

<춘향전>에서는 춘향 혼자 일인다역을 소화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여러 여인네들이 배역을 나누어 맡는다.

당대의 두 재현 예술양식이 세태 풍습을 매개로 하여 접점을 이룬 것이다. <단오풍정>과 <춘향전>이 보이는 표현상의 유사함은

각별하다. 특히 바위틈에 숨어 금남의 공간을 훔쳐보는 두 동자승의 모습은 <춘향전>에서 그네 뛰고 목욕하는 춘향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는 이도령과 방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문학과 회화는 상상력 차원에서 상호간에 교섭한다.

특히나 <춘향전>시대의 대표적 회화 양식인 풍속화는 각별한

 데가 있다. 풍속화가 그림을 그릴 때 당대의 세태소설들이 주는 소설적 상상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없듯이, <춘향전>

작가들도 <단오풍정>과 같은 당대의 풍속화들이 주는 회화적 상상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자 분부 듣고 춘향 부르러 건너간다. 맵시 있는 저 방자, 태도 좋은 저 방자, 서왕모 요지연에 편지 전턴 청조처럼 한출첨배

헐떡거리고 덜렁거려 건너갈 제, 저 방자 치레 보소, 산수털 벙거지 뒤로 번듯 젖혀 쓰고, 외올망건 대모관자 당팔사 당줄 달아

맵시있게 졸라 매고, 제비행전에 육날신 꼭 걸어 들메 신고, 청삼청낭 전대띠 뒤로 비쓱 잡아매고, 어깨를 늘이고 죽통을 빼뜨리고

꼭두 부채질로 흐늘충충 걸어 빈들거리며 건너가 "아나 엣다, 이 애 춘향아." 불러 놓으니 춘향이 깜작 놀라 그네 아래 뚝 떨어지며

"애고 호들갑스럽게 생긴 자식, 너의 선산에 불이 났느냐? 눈깔이 생긴 것이 얼음에 미끄러져 죽은 검은 소 눈깔처럼 생긴 자식,

하마터면 낙상할 뻔 보았다." 방자 기가 막혀, "허어, 다 들어보소, 사서삼경 다 다녀도 졸졸이 문자 처음 듣고 하루 저물도록

길을 가도 소 거꾸로 탄 놈 처음 보고, 암태가 서답 차고, 병풍에 도토리 방귀를 딱 그려 붙였다는 말은 들었으되 십육 세 된

계집아이가 낙태하였다네." "이 자식아, 낙상이라 하였지 낙태라 하더냐?" "이 애가 둘러 붙일 속은 오뉴월 피마 똥구녁이로구나.

그러나 일이 났다." "일이라니? 무슨 일이 났더란 말이냐?" "사또 자제 도련님이 광한루 나오셨다 너 노는 거동을 보시고 급히

불러오라 하였으니 어서 바삐 건너가자." "어따, 그 자식 미친 자식일세, 도련님이 나를 어찌 알아 부른단 말이냐? 네가 도련님

턱 밑에 앉아 춘향이니 난향이니, 기생이니 비생이니, 네 어미니 네 할미니, 종지리새 열씨 까듯 조랑조랑 외어 바치라더냐.

이 개○으로 나서 소젖 먹고 돼지 등에 업히어 자라난 이 두더지 잡년의 자식아." "방자 허허 웃고, "전환 있단 말은 들었으되

욕환전 보는 에미를 하겠다. 이 애, 네가 글공부 한다더니 욕 공부 하였구나."

(『장자백 창본 춘향가』)

 

 

<춘향전>에서 춘향의 욕설은 그 강도가 상당히 세서 많은 춘향전 주석본이나 역주본 책들은 욕의 자리에 '○○○' 또는 '×××'

로 복자 처리를 하고 있다. <춘향전>은 욕설만이 아니라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도 그 수위가 아주 높아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점잖은 국문학자 입장에서 그것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자기 체면 손상 등이 염려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국문학

초창기에 나온 춘향전 책들에서 춘향의 욕이나 성교 장면은 원천적으로 만남이 봉쇄되었다. 요즘 나오는 책들도 그 부분을 생략하거나

다른 장면으로 은근 슬쩍 우회하기 십상이다.

 

춘향의 욕설에 상대방을 비하하는 공격적인 태도가 들어가 있는 점은 분명하다. 동물의 생식기에 비유하는 형태로 동물들과의 복잡한

간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춘향의 욕설은 방자를 처참하게 욕보이는 것처럼 들린다. 허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 욕설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 방자를 대하는 춘향의 친근감이 느껴짐을 볼 수 있다. 동아리 의식이 작용하기에

춘향은 맘 놓고 욕 한 사발을 방자에게 먹인다.

방자에 대한 경계의식이 해제된 상태에서 나올 법한 욕이다.

 

 

 

 

 

 

 

<전모를 쓴 여인>

신윤복, 비단에 채색, 29.7×24.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만약 춘향이 퇴기의 딸로서 관기가 되는 삶을 수용하고 교방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면, 이 그림과 비슷한 차림새이지 않았을까.

나들이에 나선 기녀의 치장과 장신구가 화려하면서도 단아하다. 전모 아래 가리마를 쓰고 짧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가 조화를 이루며

외씨 버선코가 날렵하다. 제발에는 "옛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했으나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씌여 있다.

 

춘향의 욕설에는 춘향의 신분이며 생육 환경 같은 것이 적재되어 있다. 방자도 알고 있듯이 그 지역에서 춘향은 글공부하는 춘향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여공에도 힘쓰고 『소학』『예기』등을 공부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춘향의 입에서 나온 욕설은 의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생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리혀 욕설이 춘향에게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어떤 잡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춘향의 욕이 방자를 향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당시의 세상을 겨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네들의 위선적인 허례허식의 상투어나 빈 강정 같은 허사에 대해 제대로 한 방 먹인 꼴이다. 기생 제도를 포함한 각종 모순과

사회 전반에만연한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한 신랄한 육담으로 역습을 가한 것이라 보는 게 옳다. 욕은 육체를 긍정한다.

그것도 생식기를 포함한 육체의 하부를 긍정함으로써 생명성을 고양하는 측면이 있다.

파괴에만 그치지 않고 생산성을 일부 담당하는 것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을 부르러 가는 방자를 향해 "저 방자 치례 보소"라고 말을 내면서 그의 옷치레를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옷차림과 맵시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흥미가 없으면 불가능한 묘사 방식이다. 맨 처음 언급되는 방자의 옷차림새는

"산수털 벙거지"다주로 무관이나 병사들이 쓰는 전투모를 지칭한다.

산짐승의 털을 검게 염색하여 아교 같은 접착제와 함께 짓이기어 만들었기에 산수털 벙거지라고 하는 것이다.

원래 병사들이 쓰는 것이지만 관아의 하인들도 즐겨 썼다. 방자의 차림새에 나오는 "외올망건 대모관자 당팔사 당줄"은

아주 값비싼 무건들이다. 외올망건은 회가닥으로 짠 아주 품질 좋은 망건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서 금, 은, 대모, 호박, 동물 뼈 등을 사용한다.

대모는 거북 등뼈로 만든 고급품으로 사치를 추구했던 사대부나 부유했던 중인층이 선호했던 물건이다.

당팔사는 중국에서 만든, 여덟 가락으로 꽅 매우 가는 노끈으로 거걸로 만든 당줄을 방자가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고급 장신구를 방자가 착용할 수 없다고 보면, 판소리 사설에서 망건을 얘기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급관리라고 이런 호사장식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조선 후기 사회는 사치 풍조가 꽤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방자라고 해서 호사스런 장신구를 몸에 차지 말란 법은 없다.

 

 

 

 

<월야밀회月夜密會>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이 그림에서 산수털 벙거지를 쓰고 청삼청냥 남전대띠를 한 무관 사내를 발견할 수 있다.

무관의 차림새는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위에 소개한 방자의 복식 묘사보다 훨씬 더 화려한 복식 묘사가 판소리에는 많다.

방자가 저러할진대 이도령은 어떠할 것인가? 너무 장황하니 광한루 행차할 때 이도령의 복식 가운데 주요 어휘만 추려보자.

'궁초댕기' '성천수주 겹저고리' '세백저 상침바지' '극상세목 겹버선' '남갑사 대님' '육초단 겹배자' '밀화단추' '영초단 허리띠'

'모초단 도리낭' '당팔사 갖은 매듭' '육분당혜' 등 당시의 최고 호사품으로만 도배를 했다.

이런 호사장식 취향을 혜원도 모른 척할 리 없다.

 

 

 

 

신윤복 야금모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야금모행夜禁冒行>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진경문화 시대의 호사장식 취향과 화려한 색채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생을 대동한 어떤 양반이 의복을 잘 차려 입고 빨간 옷 별감의 배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당시 별감이 장안 기생들의 영업을 좌우지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길 안내는 어린 사동이 맡고 있다.

이도령의 복식 묘사에 보이는 상당수의 장신구들이 그림 속 남자한테서도 발견된다. 이도령의 복식 묘사에 색채적 표현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거들이 실제 지녔을 색감을 상상해본다면 이 그림처럼 다채색의 화려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판솔와 풍속화 등에서 보이는

옷맵시나 옷색상에 대한 관심의 증폭은 당시의 문화적 취향이 상당히 감각적이고 실생활적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방자 분부 듣고/춘향 부르러 간다/맵시 있는 저 방자/태조 좋은 저 방자/서왕모 요지연에/편지 전턴 청조처럼/

한출첨배 헐떡거리고/덜렁거려/ 건너갈 제/저 방자 치레보소/산수털 벙거지/뒤로 번듯 젖혀 쓰고/

 

우리말은 귀와 눈을 자극하는 언어다. 소리로 형상화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시각화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우리말의 수많은 양식들 가운데서도 판소리의 언어가 그런 능력에서는 으뜸이지 않을까. 판소리는 우리말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보고이며 그 다채로움을 엮어내는 솜씨도 대단하다. 판소리 문학의 음악적 율동은 주된 음수율인 3 · 4조 혹은 4 · 4조에서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수율을 넘어서는 음가의 배열 방식에 더 많이 의존한다.

 

판소리는 또 시각적으로 형상력이 뛰어난 어휘들을 채용하는 경향이 있다. 어휘들에 색채소가 풍부하다.

색채를 직접 지시하는 색채소뿐 아니라 유사 색채어들도 상당히 많이 쓰인다. 유사 색채어는 색채를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만

어휘를 접하면 대상물의 색깔이 바로 연상되는 그런 어휘들이다. 예컨데 '나귀 솔질 솰솰' 하면 나귀가 흔히 갖고 있는 칙칙한 갈색이나

흑색이 연상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모양을 환기하는 형상소라든지 동작을 형상화하는 동작소들도 빈번하게 채용된다.

'나귀'가 색채소를 환기했다면, '솔질'은 형상소이고, '솰솰'은 동작소가 된다.

판소리에 풍부한 비유적 표현들까지 포함한다면 판소리는 회화성이 아주 뛰어난 언어집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의성어, 의태어와 같은 어휘 자질을 확대 활성화 시키고, 언어유희적인 관점을 적절하게 작동시킴으로써

눈과 귀 뿐만 아니라 오감을 두루 자극한다. 사물의 모양이나 소리가 의성어나 의태어와 함께 제시될 때,

그것을 느끼는 양감과 질감을 포함하는 입체감 자체가 달라진다.

 

꼭두 부채질로 흐늘충충 번들거리며 건너가며


제시문은 방자가 거들먹거리면서 걷는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그런 행동거지를 흐늘충충이라고 했다.

흐늘은 몸이 늘어졌음을 의미하고 충충은 발걸음을 급학 서두르는 모양새다. 서로 모순되는 태도를 절묘하게 포착한 의태어다.

여기서 의태어는 방자의 그런 심지 상태를 적확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판소리를 맛깔나게 만드는 언어 자질로서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놀이 정신이 번득이는, 어희적 표현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이는 말을 가지고 맛깔나게 버무려내는 광대의 말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판소리 광대들이 우리말에 대한 감수성과 이해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다.

기발한 비유와 질박한 일상어, 욕설 등이 결합하여 우리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춘향은 방자가 이도령에게 자기 얘기를 한 것을 "종지리새 열씨 까듯 조랑조랑 외어 바치는" 행위로 다그치고,

방자는 춘향이 변명하는 것을 "둘러 붙일 속은 오뉴월 피마 똥구녁(성장한 암말이 궁둥이를 좌우로 내두르는 것처럼 임기응변으로

이리저리 잘 둘러댄다는 뜻)이라고 말장난 하면서 욕한다.

 

 

 

 

소나무에 기댄 노인 오명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소나무에 기댄 노인>

오명현, 18세기, 종이에 담채, 20×27cm, 선문대학교 박물관.

한 선비가 술에 취해 어디서 엎드러졌는지 망건은 찌그러지고 소나무에 수피를 보고 나서 고의 띠를 매고 있다.

판소리가 유머러스한 말 솜씨로 놀이를 할 때, 풍속화는 풍자적 놀이 정신으로 대상을 희화적으로 그려낸다.

 

사서삼경 다 다녀도 쫄쫄이 문자 처음 듣고, 하루 저물도록 길을 가도 소 거꾸로 탄 놈 처음 보고,

암캐가 서답 차고, 병풍에 도토리 방귀를  딱 그려 붙였다는 말은 들었으되 십육세 된 계집아이가 낙태하였다네.

 

방자가 호들갑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라 그네에서 낙상할 뻔 했다는 춘향으리 말을 듣고 방자는 일부러 "낙상'을

"낙태"로 바꿔 말장난으로 물아붙인다. 십육 세 된 계집아이가 낙태 했다는 말은 평생 처음 들어본다는 주지로 말을 하면서 처음 득도

본 얘기를 한 것이다. 사서삼경에는 엄정하고 품위있는 문자만 있지 쫄쫄이 문자 같은 볼품없는 문자는 처음 듣는 것이다. 그것을

사서삼경 공부하는 춘향이라니까 비꼬아서 말한 것이다. 낙태니 방귀니를 들먹거리며 방자한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노라

춘향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말이 안 되는 사례를 동원하는 과장 섞인 언어의 재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비유적인 어휘가 듣는

이로 하여금 함박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러한 말 솜씨는 판소리에 무궁무진하게 발휘되며 시시때때로 행해지는 것이다.

 

 

 

삼문 밖 나서서 협로지간에 월색이 영롱하고 화간 푸른 버들 몇 번이나 꺾였으며 투기 소년 아이들은 야입청루 하였으니

지체 말고 어서 가자. 그렁저렁 당도하니 가련금야 요적한데 가기물색 이 아니냐. 가소롭다 어주사는 도원길을 모르던가.

춘향 문전 당도하니 인적 야심한데 월색은 삼경이라. 어약은 출몰하고 대접같은 금봉어는 님을 보고 반기는 듯,

 월하의두루미는 흥을 겨워  짝 부른다.  (「열녀춘향수절가」18장 뒤, 19장 앞)

 

(······) 대문 중문 다 지내어 후원을 돌아가니 연구한 별초당에 등롱을 밝혔는데 버들가지 늘어져 불빛을 가린 모양 구술발이

갈궁이에 걸린 듯하고, 우편의 벽오동은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져 학의 꿈을 놀래는 듯, 좌편에 섰는 반송 청풍이 건듯 불면

노룡이 굼닐은 듯, 창전에 심은 파초 일란초 봉미장은 속잎이 빼어나고, 수심여주 어린 연꽃 물 밖에 겨우 떠서 옥로를 받쳐있고

대접같은 금붕어는 어변성룡 하랴 하고 때때마다 물결쳐서 출렁텀벙 굼실 놀 때마다 조롱하고, 시로 나는 연잎은 받을 듯이

벌어지고, 금연삼봉 석가산은 층층이 쌓였는데, 계하의 학두루미 사람을 보고 놀래어 두 쭉지를 떡 벌리고 긴 다리로 징검징검

낄룩 뚜루룩 소리하며, 계화 밑에 삽살개 짖는구나. 그중에 반가울사 못 가운데 쌍오리는 손님 모시노라

둥덩실 떠서 기다리는 모양이오 (「열녀춘향수절가」20장 앞뒤)

 

 

(······) 벽상을 둘러보니 온갖 그림 다 붙였다. 어떠한 그림 붙였는고. 부춘산 엄자릉은 간의대부 바다하고 백구로 벗을 삼고

원학으로 이웃 삼아 양구를 떨쳐 입고 추동강 칠리탄에 낚시줄 던진경을 역력히 그려 있고, 진처사 도연명은 평택령을 마다 하고

오류촌 북창하에 국화주를 취케 먹고 백학을 희롱하고 무현금 무릎에 빗겨 놓고 소리없이 깊은 경을 역력히 그려 있고 또 저편

바라보니 남양초당 풍설 중에 한종실 유황숙이 와룡선생 보랴 하고 걸음 좋은 적토마를 뚜덕 꾸벅 몰아 지성으로 가는 경을 역력히

그려 있고, 또 저편을 바라보니 상산사호 네 노인이 바둑판 앞에 놓고 어떠한 노인은 백기를 들고, 또 어떠한 노인은 흑기를 들고,

또 한 노인은 구절죽장에 호로병 매어 에후리쳐 질끈 집고 요마만큼 하여 있고, 또 한 노인은 훈수를 하다가 무렴을 보고 암상에

홀로 앉아 조는 양을 역력히 그려 있고, 또 저편 바라보니 채석강 명월야에 시중천자 이태백은 포도주 취케 먹고 낚싯배 빗겨앉아

지는 달 건지려고 물 밑에 손 넣는 양을 역력히 그려 있고, 백이 숙제 채미경과 만고성인 공자 그림, 오강의 항우 그림,

광충다리 춘화 그림을 역력히 그렸는데.  (「완판 29장본 별춘향전」7장 뒤, 8장 앞)

 

 

 

 

이도령이 춘향의 집에 가는데 좁은 길 위에 달빛이 교교학 비치고 있다. 어찌나 설레고 초조한지 애꿎은 버드나무 가지만

 자꾸 잡아 뜯는다. 아까 광한루에서 잠깐 불러다 본 춘향은 그야말로 천하절색이었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얌전하고 수줍어하는 게 대갓집 규수 같았다. 그런 그녀를 만나러 가는 초행길이 흥분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각까지 기다리느라

정말 죽을 뻔했다. 방자한테 해가 얼마만큼 갔냐고 수십 번도 더 물어본 것 같고, 시간 때우느라 죄다 꺼내어 읽은 사서삼경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버지가 본청에서 퇴근한다는 퇴령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방자 놈은 지금 춘향 집으로 곧장 안내

하지 않고 같은 길로 빙빙 나를 돌리는 것 같다. 수상하다 아까부터 사또 자제가 야밤에 기생집 출입한다는 둥 흰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놈부터 아부 좀 해야 하려나 보다. 내 오늘밤 행사가 이놈한테 달려 있으니 "방자 형님!"하고 매달려 볼까나.

 

 

 

 

신윤복 연소답청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연소답청年少踏靑>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한 무리의 왈짜들과 기생들이 답청 놀이 가는 광경을 그린 것으로,

이도령도 춘향 집에 가면서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유흥 놀이에 대한 기대와 흥분 이상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연소답청>에 보이는 한량들은 향락 문화에 빠진 부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향락 문화는

조선왕조의 특수 사정이 반영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양반 사대부들은 공공연하게 여러 처첩을 두는 행태를 보여왔는데

조선 중기에 이르자 그 서자들의 등용과 처우 문제가 불거지게 되는 것이다. 양반 서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줄 것을 국가에 요구한다. 사대부 서얼 출신 중인 계급들이 부를 축적하지만 청요직에는

오를 수 없었기에 많은 재산을 화려한 유흥 놀이와 향락문화를 즐기며 재산을 탕진하기에 이른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춘향에게 접근하는 것도 춘향이 기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만나고 나서는 처음의 불순한 의도가 사라지지만 둘이 조우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춘향이 기생이라는 방자의 보고를

받으면서다. 조선 후기 기생은 관에 예속된 천인으로 양반 사대부들이 종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당시는 기생의 지위가 많이

추락했을 시기다. 이전의 기생들은 교방이라는 관청에 속해 있었음에도, 탄금 가무로 훈육을 받았기에 양반 사대부들과 어울려

 시조도짓고 한시로 응대할 줄도 아는 예술인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생과의 절묘한 관계를 갖고 싶었던 것이

사대부의 로망이던 시절도 있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어는 한량과 기생인 듯한 여인의 한밤중 만남을 그린 작품으로

옛 선비들은 남아 풍류의 하나로서 기생과 로멘스를 갈망했다. 이도령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 젊은 남자는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그림의 정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매우 애틋한 관계인 듯 보인다. 남자의 호감 짙은 눈빛이나 여자의 쓰개치마 밑에서

 다소곳이 내리깐 눈빛은 서로 애타게 호응한다. 그리 난잡스런 로맨스는 아닌 느낌이다.

그렇다면 <춘향전>에서의 이도령은 어느 경우인가? <연소답청>처럼 호협남아의 호탕한 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월하정인>의 내용일까? 이도령의 경우는 양 쪽을 골고룰 섞어놓은 듯하다. 광한루에서 춘향을 보고 관아에 돌아와

초조한 시간을 보낸 후 춘향 집을 찾아가 첫날밤을 보낼 때까지는 호협남 내지는 탕아로서의 성격이 다분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랑에 대해 성숙해지고 원숙해지는 면모를 드러낸다. 

 

 

 

 

춘향 집 후원을 들어서며 이도령이 맨 처음 마주친 것이 초당이다. 정원에 있는 초당이니까 이는 집의 형태가 아니고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 형태일 터이다. 그 정자에 등롱을 달아 운치있게 꾸며놓았다. 춘향집 정원을 묘사할 때 위와 같은

화조도에서 상상력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좀 산다는 서민들도 문화에서 활짝 개화한 시대를 맞은 것이다.

춘향의 집 후원이 실제로 그와 같았다기보다는 민화적 상상력이 최대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이 그림은 앞의 제시문 내용과 흡사하다. "저편을 바라보니 상산사호 네 노인이 바둑판 앞에 놓고 어떠한 노인은 백기를 들고

또 어떠한 노인은 흑기를 들고, 또 한 노인은 구절죽장에 호로병 매어 에후리쳐 질끈 집고 요마만큼 하여 있고, 또 한 노인은

훈수를 하다가 무렴을 보고 암상에 홀로 앉아 조는 양을 역력히 그려 있고"

 

춘향 방에 들어선 이도령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벽의 그림들이다. 일명 사벽도(四壁圖)라고 하는 이 그림들은

거의 다 고사인물도류다.  그런데 고사인물도가 춘향 방 네 벽에 잔뜩 붙어 있는 가운데 거기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있다.

 바로 춘화春畵다. 현숙한 여염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춘향 방에 생뚱맞은 무슨 춘화란 말인가?

서로 상충하는 내용의 그림이 춘향 방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춘향의 갈등하는 내면의 모습이다.

춘향은 기생이라는 태를 벗고 정숙한 규수가 되기 위한 조정에 있으나, 한편으로는 퇴기의 딸로서 태생적 한계를 절감하고

있디도 한 것이다. 비록 자신의 뜻은 아니지만 외부 환경이 짐 지운 까칠한 시선이다. 춘향의 고뇌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방자가 자신을 막 대했을 때는 반발심이 불타올랐지만, 이도령이 자기 집을 방문해 혼약 얘기를 꺼내자 스스로를

'천기'니 '천첩'이니 낮추어 부르면서 자신이 버림받았을 경우를 가정하여 제안에 선뜻 응하지 못한다.

어머니 월매는 춘향보다 더하다. 천기 소생의 자기 딸이 장래를 보장받지 못할까봐 불망기不忘記를 요구한다.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할지언정 언술적 다짐이라도 받아두자는 심사에서다.

 

 

 

 

 

 

<춘화 보는 두 여인>

이 그림은 춘화 속에 춘화가 들어있는 형식이다. 부분 확대 그림을 보면 남녀가 알몸으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에 실려 있다. 작자 미상, 12.3×27.5cm, 개인 소장.

 

춘향 방에 걸린 이질적인 성격의 그림은 춘향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춘향의 이상은 고사인물도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학식 있고 용기 있고 지조 있는 고결한 삶이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고 지향일 수는 있지만 천자수모법(천한 어미의 신분과 직책을 자식이 따라야 한다는 관습법)의

관습을 종결하겠다는 과감한 결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춘향과 도련님과 마주 앉아 놓았으니 그 일이 어찌 되겠느냐. 사양을 받으면서 삼각산 제일봉 봉학 앉아 춤추는 듯 두 활개를 에구붓이 들고 춘향의 섬섬옥수 바드듯이 검쳐잡고 의복을 공교하게 벗기는데 두 손길  썩 놓더니 춘향 가는 허리를 담쑥 안고, "나상을 벗어라." 춘향이가 처음 일일 뿐 아니라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 몸을 틀제, 이리 곰슬 저리 곰슬 녹수에 홍련화 미풍 만나 굼일는 듯, 도련님 치마 벗겨 젖혀놓고 바지 속곳 벗길 적에 무한히 실난된다. 이리 굼실 저리 굼실동해 청룡이 굽이를 치는 듯, "아리고 놓아요, 좀 놓아요." 에라 안될 말이로다." 실난 중 옷끈 끌러 발가락에 딱 걸고서 껴안고 진득이 누르며 기지개 쓰니 발길 아래 떨어진다. 옷이 홀딱 벗어지니 형산의 백옥덩이 이 위에 더할쏘냐. 옷이 훨씬 벗어지니 도련님 거동을 보려 하고 슬금이 놓으면서, "아차차 손 빠졌다." 춘향이가 침금 속으로 달려든다. 도련님 왈칵 쫒아 드러누워 저고리를 벗겨내어 도련님 옷과 모두 한데다 둘둘 뭉쳐 한편 구석에 던져두고 돌아 안고 마주 누웠으니

그대로 잘 리가 있나. (「열녀 춘향수절가」26장 뒤 27장 앞)

 

(······) 하루 이틀 지나가니 어린 것들이 신맛이 간간 새로워 부끄럼은 차차 멀어지고 그제는 기롱도 하고 우수스운 말도 있어 자연 사랑가가 되었구나. 사랑으로 노는데 똑 이 모양으로 놀던 것이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동정칠백월하초에 무산같이 높은 사랑, 목단무변수여천에 창해같이 깊은 사랑 (······) 명사십리 해당화같이 연연이 고운 사랑, 네가 모두 사랑이로구나. 여봐라 춘향아,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빵긋 웃고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도 보자.? (「열녀춘향수절가」27장 뒤, 28장 앞뒤)

 

(······) "네가 그러면 무엇이냐. 날 홀려 먹는 불여우냐. 네 어머니 너를 낳아 곱도곱게 길러내어 나만 홀려 먹으려고 생겼느냐. 사랑 사랑 사랑이야 내 간간 내 사랑이야. 내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생율 숙율을 먹으려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때모장도 드는 칼로 뚝 떼고 강릉 백청을 두루 부어 은저수 반간지로 붉은 점 한 점을 먹으려느냐. "아니 그것도 내사 싫소." "아니 그거도 내사 싫소." "그러면 무엇을 먹으려느냐." "여보 도련님, 내가 사람 잡아 먹는 것 보았소." " 에라 요것, 안될 말이로다. 어화 둥둥 내 사랑이지. 이 애, 그만 내리려무나 백사만사가 다 품앗이가 있느니라. 내가 너를 없었으니 너도 나를 업어야지." "애고, 도련님은 기운이 없어 못 업겠소." "업는 수가 있느니라. 나를 돋워 업을라 말고 발이 땅에 자운자운하게 뒤로 잦은 듯하게 업어다고." (「열녀춘향수절가」33장 뒤. 34장 앞

 

 

신윤복 청금상련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청금상련淸琴賞蓮>

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이도령과 춘향의 첫날밤 정사 장면은 영락없는 19금 에로 영화다. 별 희한한 놀이와 음담을 나누는 것이 마치 성경험 많은 한량

오입쟁이와 기생 사이의 낯 뜨거운 영화 장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둘다 자라온 환경과 정황으로 볼 때는 이성 경험이 없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도 실제 상황을 보면 이성을 잘 알 뿐 아니라 성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노는 솜씨까지 갖추었다. 나이가 열 여섯이지

풍류방에서 꽤 놀아본 듯 능수능란하게 성적 대처를 잘하는 것이 춘향이다.

 

춘향과 이도령의 첫날밤 농탕질의 배후에는 풍류방 기생 문화에 흠뻑 빠진 왈짜들 내지는 오입쟁이 한량들의 시선이 짙게 깔려 있다.

밖으로 나돈 적이 별로 없어 성적 경험도 없는 양반네 골방 서생의 시선이 아니다. 주로 중인 계층인 풍류방 왈짜들은 돈이 많아서

기생과 악공, 각종 창의 고수들을 불러다 놀기를 즐겼는데, 판소리 광대 또한 빠지지 않는 단골 공연자였다. 판소리 사설 속에 들어 있는

농탕질에 대한 과도한 행위 묘사는 판소리 광대 자신의 시선이라기보다 공연 후원자인 왈짜들의 시선이 더 많이 적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춘향이 보여주는 색기 어린 행위들가 대화들도 그것이 본래의 춘향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풍류방 기생들의 행태를 반영한 측면이

 많은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도령과 춘향은 억울한 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사실성의 함정이다. 춘향전이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사실주의 성향의 소설인 것은 맞지만 주인공들의 역할 모텔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도령과 춘향은 대역으로 출연했을 뿐이고, 원래 대본상으로는 그 장면에 풍류방의 단골손님인

탕남 왈짜와 탕녀 기생이 출연해야 맞는 것이었다.

 

 

 

 

 

 

<운낭자 이십칠세상>

채용신, 종이에 채색, 120.5×62.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운낭자(雲娘子)는 관기로서 관장의 시신을 거두는 등 의리를 보여 의열사에 제향되었다는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특이한 미인도로서 아기의 출산을 여성적 아름다움의 요소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로 시작되는 사랑가.

 

춘향은 죽어 계집 女 자가 되고 이도령은 아들 子 자가 되어 좋고好, 춘향은 죽어 물이 되고 이도령은 죽어 물 위에 뜬 원앙이 되어 좋고,

춘향은 죽어 종로 인경이 되고 이도령은 죽어 인경마치가 되어 좋고, 춘향은 죽어 방아확이 되고 이도령은 죽어 방아고가 되어 좋고,

춘향은 죽어 꽃이 되고 이도령은 죽어 나비가 되어 좋고. 이렇게 그들은 생전의 환희가 사후에도 이어지기를 희구한다.

사후 기약 행위는 <춘향전>의 이야기 기능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결연한 사후 약속에 힘입어 춘향은 변사또의 수청 요구에

저항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극심한 형벌을 받고 옥에 갇히면서도 고통과 죽음이라는 극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사랑가는 긴 사랑가와 자진 사랑가로 구성되어 있다. 긴 사랑가는 상대방의 태를 보고자 하고, 자신들의 사랑을 다른 아름다운 것들에

빗대며, 사후 기약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긴 사랑가는 사설이 길어서가 아니라 장단이 늦은 진양조로 호흡이 길게 이어지는 형식

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진양조의 '진'도 원래 길다는 '긴'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내용과 형식을 보건대, 긴 사랑가는 말과 눈으로

사랑을 나누고 익히는 과정을 노래한다. 반면 자진 사랑가는 몸으로 사랑을 느끼고 익히는 과정을 노래한다. 사랑의 점층법인 것이다.

자닌 사랑가는 긴 사랑가에 비해 사랑의 강도가 훨씬 더하다. 긴 사랑가가 늦은 진양조로 불리면서 호흡도 완만하고 정태적 관조의 정서가

우세했음에 비해 자진 사랑가는 최소한 중중모리 장단 이상의 빠른 장단으로 불리면서 호흡도 빨라지고 감각적 정서도 급하게 흘러간다.

 

사랑가는 언표상으로만 보면 음란하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시대적인 의미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음란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사랑의 환희가 일단 몸에 기억되면 이제 몸은 상황에 따라 저절로 반응하게 된다. 신관 사또의 수청 요구에는 거절로 나타나고,

각종 감언이설과 신체적 위협에는 저항으로 나타나며, 극심한 태장에는 거뜬히 버텨내는 힘으로 나타난다.

춘향의 몸은 기억하고 있다. 이도령과 극도로 나눈 환희의 기억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전 신윤복, 종이에 담채, 27.2×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의 작품으로 전하는 춘화도이다. 계곡물과 무성한 소나무 가지, 활짝 핀 도화꽃이 성애를 상징하는 가운데

흐트러진 남자 신발은 성급한 마음까지 담고 있다. 술을 대령하는 여자 시종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화가는 성행위를 그리지 않고 다 그렸고여자 시종은 보지 않고 다 본 것이다.

 

조선 후기는 각종 지식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시되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성에 관한 지식은 예외였다.

유교 이념에 투철한 조선 사회의 분위기상 성 지식이 박약했은 것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조선조 성 관념은 철저히 은폐되어야만 했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향락 풍조가 일어나고 성에 대한 지식과 담론이 공유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지식의 확산 현상이라고 봐야 할 터이다. 풍속화에서는 춘의도春意圖와 춘화들이 제작되어 일반에 퍼져 나가고

사설 시조와 같은 가창 장르에도 성 의식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판소리와 세태소설의 출현이다.

 

우리네 춘화들은 이웃 나라들의 춘화에 비해 사뭇 점잖다. 이를테면 남녀 신발만 클로즈업해서 보는이로 하여금  구분지을 수 있게하고  

빠져 나가는 식이다. 성적인 접촉을 드러냄 없이 성적 접촉을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천박함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절제랄까?

 <춘향전>은 판소리 중에서도 정 지식을 가장 체계적으로 간직한 작품으로 우리네 성 지직 함양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교사회에서는 음란 교과서라 낙인을 찍고 있지만, 과장하자면 <춘향전>은 성희의 국민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신연하인 현신할 제, "사령 등 현신이요. 이방이요. 감상이요, 수배요." "예 아직 무고합네다." "네 골 관노가 삼남의 제일이라지?"

"예, 부림직하옵네다." "또 네골의 춘향이란 계집이 매우 색이라지?" "예," "잘 이냐?" "무고하옵네다." "남원이 예서 몇 리인고?"

"육백 삼십 리로소이다." 마음이 급한지라, "빨리 치행하라." 신연하인 물러나와, "우리 골에 일이 났다." 이때 신관사또 출행날을

급히 받아 도임차로 내려올 제 위의도 장할씨고. (「열녀춘향수절가」47장 뒤, 48장 앞)

 

(······)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서리 중방 역졸 등을 거나리고 청파 역말 잡아 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내 동작이를

얼픗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에 중화하고 사근내 미륵당이 수원 숙소하고 대황교 떡전거리 진개울 중미 진위읍에 중화하고 칠원

소사 애고다리 성환역에 숙소하고 상유천 하유천 새술막 천안읍에 중화하고 삼거리 도리터 진계 역말 갈아 타고 신구 덕평을 얼른 지내

원터에 숙소하고 팔풍정 화란 광정 모란 공주 금강을 건너 금영에 중화하고 높은 행길 소개 문어미 널티 정천에 숙소하고 뇌성 풋개

사다리 은진 간치당이 황화정 이애미고개 여산읍에 숙소하고. (「열녀춘향수절가」68장 뒤, 69장 앞)

 

(······) 전주에 득달하여 경기전 객사 연명하고 염문에 잠깐 다녀 조분목 썩 내달아 만마관 노구바위 넘어 임실 얼른 지내어 오수 들러

중화하고 즉일 도임할 새 오리정으로 들어갈제, 청도 한 쌍 홍문 한 쌍 주작 남동각 남서각 홍초 남문 한 쌍 청룡 동남각 서남각 남초

한 쌍 현무 북동각 북서각 측초 홍문 한 쌍 군로 열두 쌍 좌우가 요란하다. 행군 취타 풍악소리 성동에 진동하고 삼현육각 권마성은

원근에 낭자하다. 광한루에 보전하야 개복하고 객사에 연명차로 남여 타고 들어갈 새 백성소시에 엄숙하게 보이려고 눈을 별양 궁글

궁글 객사에 연명하고 동헌에 좌기하고 도임상을 잡순 후, "행수 문안이요," 행수 군관 집례 받고 육방관속 현신 받고 사또 분부하되,

"수노 불러 기생 점고하라." 호장이 분부 듣고 기생안책 들어 놓고 호명을 차례로 부르는데 낱낱이 글귀로 부르던 것이었다.

(「열녀춘향수절가」48장 뒤, 49장 앞)

 

 

 

 

 

미인도(신윤복 작) 확대 이미지

 

<미인도>

신윤복, 비단에 채색, 114×45.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전통 미인도 가운데 백미인 신윤복의 미인도이다. 앳된 둥근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 그윽한 눈빛, 작지만 도톰한 입술이

고전 미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이 짧고 소매통이 좁은 연분홍 저고리와, 항아리처럼 부풀어 오른 쪽물 들인 회청색 치마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줍은 듯 몸을 살짝 비틀고 노리개와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대장부를 뇌쇄시킬 만하다.

 

신관사또는 이전부터 자신이 남원부사가 되는 게 꿈이었노라 말한다. 춘향의 소문이 얼마나 자자했던지 그는 남원부사가 되어 춘향의

수청을 받는 것을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춘향은 애당초 기생 구실 마다하고 여염집 처자처럼 수신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경향 간에 

뛰어난 재색으로 이름이 났단 말인가? 그것은 이미 춘향의 이름이 기생직첩에 올라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의 이런저런 사정을 신관사또가 어찌 모두 알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신관사또가 춘향을 그림으로 먼저 본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 풍류문화의 꽃 기생들이 중심에 서면서 유행했던

미인도의 모델로 기녀 춘향이 선택되었는지도 모를 일. 여기서 잠시 상상력을 보태자면 만약 춘향을 그린 미인도가 있었다면

혹여 위 신윤복의 미인도가 아니었을까? 위 그림 속 여자는 기녀로 보아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림 속 여자가 사가녀가

아닐거라는 확신은, 기생들을 그토록 선호했던 선비들도 막상 자신의 아내나 딸이 미인도로 그려지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춘향>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 초상이다. 위 혜원의 미인도와는 사뭇 다르다.

마른 체형에다 갸름한 얼굴선, 작은 아래턱은 현대 미인형에 가깝다. 진하고 두꺼운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

오똑한 코와 꽉 다문 입술에서는 결기가 느껴진다. 기생이 아닌 열녀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남원 광한루 바로 옆 춘향 사당에 걸린 춘향의 초상화로 전형적인 미인도는 아니다. 미인도라면 모사 대상이 실제하고 시대 상황이 반영

되어야 하지만, 춘향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몇 세대 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춘향 사당의 그림을 굳이 분류하자면

초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 마지막 어진화가였던 이당은 이충무공, 논개, 신사임당 등의 초상화를 제작했지만 친일 논란에

서 있기에 여기서는 그림 자체에 국한해서만 얘기하고자 한다.

 

춘향의 그림은 혜원의 미인도와는 사뭇 다르다. 저고리와 치마 등 의상은 우리네 형적인 한복 스타일 그대로다.춘향의 몸매 도한 풍만함과는 거리가 있다. 이 초상이 그려진 것이 20세기 초이니 당대의 미인관이 작용했으리라.적어도 춘향을 기생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반영된 느낌이다. 우리네 민족적 심성이 소설 속 인물의 성격 뿐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성격도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열녀 춘향인 만큼 기생 티가 나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춘향전>에는 한양에서 남원까지 가는 논정이 두 번에 걸쳐 나온다. 신관사또가 부임할 때와 나중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올 때다.이 두 번의 노장기 사설은 어구상 약간의 넘나듦만 제외하면 서로 비슷한 형식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언제라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표현단위를 정형화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전소설이 현대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창작 문법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한양에서 남원까지의 노정은 어림잡아 짧게는 7박8일에서 길게는 9박10일쯤 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조선의 10대로를 들고 있다. 남원에 이르는 <춘향전>의 노정은 여기에서 두 개의 대로로 구성된다. 한양에서 삼례역까지는 남지해남팔대로南至海南八大路를 따라가는 길이고, 전주에서 남원까지는 남지통영별로십대로南至統營別路十大路를 가는 길이다. 남쪽으로 해남에 이르는 길이 김정호가 말한 여덟 번째 길이고, 남쪽으로 통영에 이르는 길이 열 번째 길이다. 조선시대의 삼남대로는 댑무분 현대의 국도가 되었다.


 


신관사또의 여정은 남대문에서 시작된다. 공식 명칭인 숭례문이라 하지 않고 남대문이라는 속칭을 사용한 것은 춘향전 노정기의 성격이 공식적이고 규범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감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지향은 노정기 내내 지속된다. 청파역과 칠패 팔패는 노정으로 보면 순서가 뒤바뀌어야 하지만 노정이 시작되는 남대문에 청파 역말을 대령하여 바로 말에 올라탔가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춘향전 노정기 사설의 지명들은 관의 공식 지명보다는 당시 관습적으로 부르던 지명을 선호하는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름이 더 친근하고 정겹게 다가온다. 지역의 사투리와 특유의 호흡까지도 지명이 담아내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당시 이 노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걸었던 판소리 광대들의 시선과 정서가 이 이름들에 내재되어 있다. 지명들을 쭉 읽어내어 음악적인 율격을 만들어내는 솜씨에서도 광대들의 빛나는 재치를 우리는 감득해낼 수 있는 것이다.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부분)

전 김홍도 외, 종이에 채색, 25.3×63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의 제작에는 김홍도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렬도는 각종 행사도와 함께 두루말이로 제작하여 보관하기도 했지만,

임금에게 자기 고을의 상황을 보고하는 용도로 쓰였다. 안릉현감의 부임 행렬은 장대한 기치부대가 앞장서고 곤뢰사령, 악대, 중군,

아전과 수노, 또 다른 악대와 기생, 내행 등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춘향전에서 묘사된 행렬의 규모나 순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황해도 안릉의 신임 현감 부임 광경을 담은 행렬도이다. 일개 지방 현감의 부임 행차가 이렇게 화려하고 풍성했다는 사실.

신관사또 행렬이 남원에 입성할 때의 광경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모든 춘향전 이본의 공통점이다.

 

 

옥중에 들어가서 옥방 형상 볼작지면 부서진 죽창 틈에 살쏘느니 바람이요 무너진 헌 벽이며 헌 자리 벼룩 빈대 만신을 침노한다.

 

(「열녀춘향수절가」61 앞)

 

 

(······)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님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을 보고지고, 오리정 전별 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부모 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여인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듯이 솟아서 비치고저. 막왕막래 막혔으니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칙에 잠 못 이루니 호접몽을 꿀 수 있나. 손가락에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녹수부용의 연캐는 채련녀와 제롱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들도

낭군 생각 일반이나 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을 못 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것나. 내가 만일에 도련님을 못 보고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섰는 남기 상사목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더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임방울 창 '쑥대머리' 가사)

 

 

(······)  춘향이 깜짝 놀래 깨어보니 꿈이로다. 옥창 앵도화 떨어져 보이고 거울 복판이 깨어져 뵈고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려 보이거늘

"나 죽을 '꿈이로다." 수심 걱정 밤을 샐 제, 기러기 울고가니 일편 서강달의 행안남비 네 아니냐. 밤을 깊어 삼경이요, 궂은 비는 퍼붓는데

도깨비 삑삑 밤새 소리 붓붓 문풍지는 펄렁펄렁, 귀신이 우는데 난장 맞아 죽은 귀신 형장 맞아 죽은 귀신 결령치사 대롱대롱 목 매달아

죽은 귀신 사방에서 우는데 귀곡성이 낭자로다. 방 안이며 추녀 끝이며 마루 아래서도 애고애고 귀신 소리에 잠들 길이 전혀 없다.

춘향이가 처음에는 귀신 소리에 정신이 없이 지내더니 여러 번을 들어놓으니 파겁이 되어 청성 국거리 삼잽이 세악소리로 알고 들으며

"이 몹쓸 귀신들아, 나를 잡아 가려거든 조르지나 말려므나. 엄급급 여율령 사파쉐!" 진언 치고 앉았을  때 옥 밖으로 봉사 하나 지나가되

 

(「열녀춘향수절가」64장 앞,뒤)

 

 

(······) "그 꿈이 장히 좋다. 화락하니 능성실이오, 파경하니 기무성가. 능히 열매가 열어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질 때

소리가없을쏜가. 문상에 현우인하니 만인이 개앙시라.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볼 것이요. 해갈하니 용안견이오,

산봉하니 지택평이라.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요,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곳이라.

좋다. 쌍가마 탈 꿈이로세. 걱정마소."

 

(「열녀춘향수절가」67장 앞,뒤)

 

 

 

 

 

임방울 명창

임방울(1905~1961)이 판소리 애호가였던 벽소 이영민이 써준 한시 편액 옆에 서 있다.

내용인 즉, 소리가 장괘하고 맑아 사람들을 휘어잡고 마치 만학천봉에서 경쇠소리가 쟁그렁 거리는 것 같다고 했다.

 임방울은 특히 여성팬들이 많았으며, 판소리계의 스타가 되어서도 당시 유행하던 창극보다는 정통 판소리창을 고수했던 광대였다.

 

춘향이 옥중에서 부르는 자탄 사설은 '쑥대머리'로 잘 알려진 소리 대목으로 <춘향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춘향의 심리적 정서를 한마디로 압축 요약해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모든 명창들의 주요 레퍼토리였지만, 누가 뭐래도 '쑥대머리'

하면 임방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임방울이 쑥대머리를 위해 태어났는지, 아니면 쑥대머리가 임방울을 위해 태어났든지 둘 중의 하나는

확실하다는 중론이다. 쑥대머리가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사설과 성음의 세계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매혹스러운 성역이 구축되는 예술적 현상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 일제 치하의 혹독한 시절이었음도

쑥대머리의 주가를 올리는 요소로 작용했으리라.

 

쑥대머리 귀신형용 / 적막옥방의 찬 자리에 / 생각 난 것이 님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 한양 낭군을 보고지고.

오리정 전별 후로 /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쑥대머리는 모든 의미적 요소들이 옥방에 갇혀 있는 춘향의 육체적 · 물리적 · 심리적 정황과 관련을 맺고 있다.

쑥대처럼 산발한 춘향의 귀신과 같은 머리는 옥방이라는 환경에서 비롯한다. 환경적 요인은

그 밖에도 '적막함'이라는 옥방의 분위기라든가,

'찬 자리'라는 옥방 공간의 속성, 그리고 나아가 임의 '편지 없음'이라는 사건적 상황과도 관련을 맺는다.

그러고 나서 옥중 춘향의 심리적 상태가 조명되는데, 그 초점은 '임 생각'에 맞춰져 있다.

 

부모 봉양 글공부에 /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여인신혼 금슬우지 /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하아 추월같이 / 번듯이 솟아서 비치고저.

 

참으로 매정한 상황이요 처절한 사랑이다. 계궁으로 도망간 항아처럼 달이 되어 임의 앞에 나타나기를 꿈꾸고 있다.

그것은 임을 보게 됨으로써 그리움의 회포를 푸는 방법이기도 하며, 임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막왕막래 막혔으니 /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 전전반측에 잠 못 이루니 / 호접몽을 꿀 수 있나.

 

옥중이라는 냉엄한 현실이 상기된다. '막왕막래莫往莫來'는 춘향이 처한 물리적 상태이기도 하고 심리적 정황이기도 하다.

헌데 꿈속에서 조차 볼 수 없는 '전전반측'의 상태를 호소하고 있는 안타까움이다.

 

손가락에 피를 내어 /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녹수부용의 연캐는 채련녀와 / 제롱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들도 / 낭군 생각 일반이나 / 날보다는 좋은 팔자.

 

 

혈서와 간장의 썩은 눈물를 동원하겠다는 간절함이 너무도 절절함으로 다가 온다.

 

옥문 밖을 못 나가니 / 뽕을 따고 연캐것나 / 내가 만일에 도련님을 못 보고 /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

무덤 근처 섰는 남기 / 상사목이 될 것이오,/ 무덤 앞에 있는 독은 / 망부석이 될 것이니 / 생전사후 이 원통을 /

 알아 줄 이가 뉘 있더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끝내는 옥중원혼이 될 수 밖에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춘향의 의지적 소망이 표출되는 대목으로,

망부석과 상사목은 결국 임을 기다리는 존재로서 영원한 형상을 부여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 옥중 춘향의 신세타령을 임방울 특유의 계면조와 귀곡성이 동원되어 관객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임방울의 계면조를 그저 슬프게 쥐어짜는 애상조의 가락으로만 보면 오산이다. 임방울의 계면조는 가느다란 애상조의 선율이

시김새가 풍부하게 요동치면서 유장하게만 흘러가는 그런 가락이 아니다. 임방울의 계면조는 오히려 거칠다. 온몸을 쥐어짜서 내지르는

목타루(목을 통과하는 소리의 세기와 결, 음색 등에 대한 통칭)는 피가 밭아가는 듯하게 격렬하다.

그래서 그것은 웅장 호방한 우조의 창법을많이 닮았다.

그런 점에서 임방울 소리를 우조와 대립되는 계면조 일방으로만 해석하면 곤란하다.

 

임방울의 소리는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편의상의 구분 잣대로 평가하기보다는 성음의 색깔과 목구성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 임방울의 다른 대목 소리도 그러하지만 쑥대머리에 보이는 소리의 성격은 충충하면서도 웅숭깊은 여유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의 성음이 목이 약간 쉰 듯한 이른바 수리성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목구성이 좋고 힘찬 소리를 천구성이라 하는데

그러한 천구성에 오랜 수련이 가해져 목이 쉬고 곰삭은 경지에 이른 소리가 바로 수리성이다. 그래서 수리성에는 애련 처절하고

몸부림치듯 쥐어짜는 애원성의 창조도 깃들 수 있고, 통성으로 내질러 뱉어내는 소리나 상청의 격렬한 창조도 깃들 수 있다.

 

상청과 하청, 웅장 호방함과 애련 처절함을 두루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는 성음이 수리성인 것이다.

모든 수리성이 그러하다고 하는 말에잘못이 있다면, 최소한 임방울의 소리에 국한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임방울의 소리에 대해 웅장 호방한 우조의 흐름 속에서 빚어지는 그늘 짙은 계면조의 분위기가 난다고 평가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임방울의 소리에 계면조의 분위기가 나는것은 임방울의 목구성에서 남도의 대표적 소리인

육자배기와 흥타령의 창조인 육자배기목이 가미되어 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육자배기목에는 애원성이 끼어 있어 애연 처절한 한 맺힌 정조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임방울이 구사하는 육자배기목은 소리의 끝이

끈적거리고 흐늘거리는 창법에서 벗어나 소리의 끝을 과감하게 내지르고 끊고 던지고 꺾는 파격적 운용법을 겸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럽고 한스러운 분위기를 이루면서도 시원하고 웅숭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힘찬 정조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임방울의 소리는 대체로 애원성의 성음을 웅장하고 호방한 성음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슬픈 정조가 애련함 속에 갇히지 않고 힘차고 밝게

채색되는 경향을 보여 준자. 슬픈 정조를 내면에서 삭히고 익혀 나가면서 오히려 밝은 삶의 지평을 열러주고 확 트이게 하는 것이다.

쑥대머리가 내용상의 서러움과 한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애연 처절한 가락에만 의존하고, 온몸을 쥐어짜고 몸부림치는 창법으로

슬픔의 정조 속에만 안주했다면, 쑥대머리는 우리 소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매 맞는 여인>

김윤보, 『형정도첩(刑政圖帖)』, 개인 소장.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태형 이하의 경미한 민형사 사건을 처리하고, 그 이상은 각 도의 관찰사에게 올리는 것이 원칙이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여자의 경우에는 옷을 입힌 채로 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태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은 혹독한 어둠의 시간을 보낸다. 춘향이 이렇게 된 것은 신관사또의 수청을 거부해서다

춘향의 입장에서 보면 사또의 수청 요구부터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춘향은 성참판의 서녀로서 아버지 쪽은 양반의 피를 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법도에 의해 춘향도 기생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사실이 월매에겐 천추의 한이 되어

춘향은 여염집 처자 이상의 교양을 쌓게 한다. 그리고 자기 대신 계집종을 천역에 넣고 자신은 속신하는 대비정속 절차까지 마쳤던 것이다.

이로써 형식적으로는 완벽하게 춘향은 기생이 아니다. 그런데도 잡아다가 수청을 들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요식에 기댔지만,

사회적 관행상 춘향은 그저 관에 속한 기생일 뿐을 간과하고 있었다. 물론 이 대목은 소설상의 장치로서 채택된 것이었고 역사적 사실

이상의 리얼리티를 갖는 서사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제의식의 핵심이 여기서 생성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신관은 기생이 수절하면 우리 대부인 마나님께서는 요절을 하겠다고 비아냥댄다. 언어유희로 냉소를 대신한 것이다.

그런데 춘향은 진지하다. 대부인 수절이나 춘향 수절이나 마찬가지 수절이지 수절에도 상하 층차가 있냐고 대거리를 한 것이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한 말은 '열불경이부熱不更二夫'를 자신에게 대입했듯이 '추불사이군忠不事二君'을 신관사또에게 대입하여

 던진 물음이었다. 당신은 행여 나라가 불행해지면 두 임금을 섬기겠느냐는 당돌한 내용이었다. 당연 극악스러운 매질이 이어진다.

지방 수령 방백이 어떻게 권한을 남용하고 오용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관의 횡포가 없을 리 없을진대,

부정에는 침묵하고 낭만적 서사로 일관되게 포장한 것은 기록의 진실 주체가 사대부였으며, 이런 작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산 정약용은 지방 수령 방백들의 이러한 형벌 남용에 대해 『흠흠신서欽欽新書』에 기록하면서 흠휼欽恤사상에 의거하여

재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조가 다산을 불러 형조참의에 임명하고 전국의 모든 형사사건을 재검토하라는 교지를 내림으로써

지어진 것이 바로 『흠흠신서欽欽新書』인 것이다. <춘향전>의 남원부사가 춘향에게 내린 형벌은 정조와 다산이 꿈꾼 정의로운

 나라의 구상에도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작금 형벌의 오남용에 대한 이슈와 세태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춘향전>에서 허봉사는 춘향의 꿈을 역으로 해석한다.

 

꽃이 떨어지는 꿈은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므로 길한 꿈이라고 해석한다.그러나 꿈을 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보기만큼 쉽게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어떤 역설의 묘가 성립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과 반대로 잠잘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흔히 점괘 책으로 잘못 알려진『주역』은 꿈을 반대로 해석하라고 대놓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꿈 해석에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것이 좋은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상반상성相反相成이라고 하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대립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니라 지탱하고 이루어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고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음양사상과 만난다.<춘향전>에서 허보아는 절망에 빠진 옥중의 춘향 꿈에 대해 구원자의 등장과 영광의 도래를 예지하는 기막힌 점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그것은 소설 플롯상 의도에 의해 꿰어맞춘 듯한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옥중 춘향이 수절한다니 그 기개가 가상하여 뭔가 도움이되고 싶은 참이었는데 흉몽을 물어보니 반대로 길몽으로 해석해주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춘향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함이었다.하지만 그 해석이 그렇게 귀신같이 딱 맞아떨어질 줄은 허봉사 꿈에도 몰랐다는 사실.

"그 안에 뉘 있나?" "뉘시오?" "내로세." "나라니 뉘신가?" 어사 들어가며, "이서방일세." "이서방이라니? 옳지, 이풍원 아들 이서방인가?""허허, 장모 망령이로세. 나를 몰라, 나를 몰라." "자네가 뉘기여?" "사위는 백년지객이라 하였으니 어찌 나를 모르는가?" 춘향의 모 반겨하여, "에고 이게 웬일인고. 어디 갔다 이제 와, 풍세대작터니 바람결에 풍겨 온가, 봉은기봉터니 구름 속에 싸여온가? 춘향의 소식 듣고 살리려고와 계신가? 어서어서 들어가세." 손을 잡고 들어가서 촛불 앞에 앉혀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걸인 중의 상걸인이 되었구나. 춘향의 모 기가 막혀, "이게 웬일이오?" "양반이 그릇되메 헝언할 수 없네. 그때 올라가서 벼슬길 끊어지고 탕진 가산하여 부친께서 학장질 가시고 모친은친가로 가시고 다 각기 갈리어서 나는 춘향에게 내려와서 돈 천이나 얻어 갈까 하였더니 와서 보니 양가 이력 말 아닐세." 춘향의 모 이 말듣고 기가 막혀 "무정한 이 사람아, 일차 이별 후로 소식이 없었으니 그런 인사가 있으며, 후기인지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쏘아 놓은 살이되고 엎지러진 물이 되어 수원수구를 할까마는 내 딸 춘향 어쩔라나?" 홧김에 달려들어 코를 물어 뗄라 하니, "내 탓이지 코 탓인가. 장모가나를 몰라보네. 하늘이 무심해도 풍운조화와 뇌성전기는 있나니," 춘향모 기가 차서, "양반이 그릇되메 갈농조차 들었구나." (「열녀춘향수절가」75장 뒤, 76장 앞뒤)


 

 

민화 문자도

<책가문자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35.5×114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문자도는 윤리적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를 그려 8곡병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글자의 그림은 그 글자와 관련된 고사들에

 나오는 사물들로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효'는 효자 고사에 나오는 잉어와 죽순을 가지고 그린다. 사람들은 그림 글자를

통해 고사를 연상하면서 윤리적 덕목을 배우게 되는데, 월매와 같은 서민들은 이러한 대중적 교육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이도령이 춘향 집을 방문하여 춘향과의 백년기약을 말할 때 월매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신세타령부터 한다."칠 세에 소학 읽혀 수신제가 화순심을 나날이 가르치니 근본이 있는고로 만사 달통이요, 인의예지 삼강행실 누가 내 딸이라 하오리까?"춘향의 자질을 선양함과 동시에 그에 대해 자신의 공을 보태는 노회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춘향의 상대로 재상가는 감히 엄두를내지 못하지만 사서인士庶人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피력한다. 이 말은 이도령 당신 같은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그것도 무조건 정실이고 첩실은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있다. 춘향이 이도령과 이별하게 되었을 때 월매는 춘향을 죽이고 초상을 치르고 가라고 발악한다. 그런 이별은 자기도 경험해본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이도령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이도령의 행색은 월매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적 붕괴를 가져다 주고 만다. 기대와 좌절 사이의 절충과도 거리가 한참 먼 그야말로 최악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춘향은 걸인 형상을 보고도 월매와는 달리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자기 반지를 팔아 이도령 옷과별찬을 차려주라고 월매에게 특별히 부탁하기까지 한다. 장모와 사위의 관계가 크게 벌어지지 않고 접착되도록 노력한다. 그 다음날 걸인  이도령이 암행어사임을 확인하게 되면서 월매의 면구스러움도 얼마간 상쇄될 수 있었다.


 

<주사거배酒肆擧盃>신윤복,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술집에서 술잔을 든다는 제목처럼 서울의 왈짜 패거리가 선술집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있다. 빨간 옷의 별감과 오른쪽의 의금부 나장은 현직에 있고 나머지는 돈 많은 한량 친구들이다. 이들은 청치마의 주모와 수작을 부리는 데도 선수였다. 향전에서 월매네 집은 선술집이 아님에도 남원 오입쟁이들이 오가면서'장모, 장모' 부르며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월매가 이도령의 정체를 확인하는 대화는 전체 이야기 속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유형 자체가 전체 이야기를 이루는경우도 많다. 그것이 탐색담이다. 춘향전도 큰 틀에서 보면 탐색담의 측면을 갖는다. 탐색담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에서찾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때 인간은 가장 진지해지고 탐색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그래서 숨어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을 느끼게 마련이다. <춘향전>을 외적 행위에서 보면 춘향과이도령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들은 자신도 탐색하고 있었다. 춘향은 이도령을 향한 열망을 확인하고 이도령은 자유의사로 혼인 상대를 선택했고 나중에는 정의심으로 무장하여 사회악을 척결하고 결연 약속을 지키는 의협남아로 새롭게 탄생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조선성악연구회 소속 명창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소속 명창들이 경성방송국에 출연했을 때의 기념사진이다.

오른쪽부터 김소희, 박녹주,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그리고 고수 한성준 등 당대 쟁쟁한 명창들과 고수가 출연했다.

이때 정정렬이 짠 춘향가를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정렬(1876~1938)은 근대 판소리 5명창 중 하나로 오늘날 불리고 있는 판소리, 특히 현대 춘향가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이다.

요즈음의 판소리는 성음이 상당히 부드럽게 순화된 것이며, 발음에서도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정정렬 이전의 판소리는 성음이 거칠고 투박하며 발음도 거세서 알아 듣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것을 현대식 판소리로 바꾼 공로가

정정렬에게 있다. 판소리의 이러한 변화는 여류 명창들의 득세와도 궤를 같이하며, 창극의 발전과도 연결된다. 정정렬은 특히

<춘향가> 작곡에 특출난 인물이었다. 사실 춘향가를 잘하면 다른 것은 물어볼 것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판소리 역사에서 감칠맛 나는 앵겨 붙는소리로 새롭게 작곡하여 판소리 사설과 음악을 새로 짠 것이다.

정정렬 이전의 고제 판소리, 송만갑 등으로 대변되는 동편제 판소리에 그런 표현들은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정정렬은 그다지 좋은 목을 갖지 못한 인물이다. 목이 궂었기 때문에 목구성에서 방울목을 즐겨 썼다고 한다.

방울처럼 쟁쟁 울리는, 그다지 평가를 못 받는 소리인데도 묘하게도 정정렬의 방울목은 넓고 깊은 항아리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감성 영역을 헤집고 들오오는 매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감칠맛 나고 가슴에 딱 앵기는 소리였다.

 

정정렬은 판소리의 리드미컬한 맛을 결정하는 붙임새에 특히 능한 명창이었다. 변화무쌍하게 사설을 소리의 마디 사이에다가

 능수능란하게 갖다 붙였다. 붙임새와 어울리게 엇박자 장단과 엇청에도 능한 정정렬이었다. 음악을 능청거리게 하는 데는 엇모리나

엇중모리와 같은 엇박자 장단이 적덜한데 그걸 완전무결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명창이 바로 정정렬이었던 것이다. 소리가 휘늘어지고

능청거리면서도 소릿길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장단 속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구사할 수 없는 자질이었다.

느린 장단 보다는 중중머리 이상의 빠른 장단에서 보다 수월하게 소리를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춘향가 중에서도

특히 춘향 집 나오는 대목, 사랑놀음, 이별가, 신연맞이, 몽중가, 박석티, 어사와 장모 상봉, 어사출도 등을 잘 불렀다.

서정적 대목보다는 이처럼 서사적 대목들에 능했다는 평가다.

 

 

이튿날 평명시에 본관사또 대연을 배설할 제, 열읍각관 수령님네 구름같이 모여들 제, 구례 곡성 순창 임실 운봉영장

오수찰방 당상당하 일품이라. 남원부사 주인되어 명기명창 다 모아서 일등 세악대 풍류에 무수는 표불하여 향풍에 흩날리고

가성은 요란하여 반공에 높이 떴다. (「장자백 창본 춘향가)」

 

(······) 어사또 상을 받고 앉아,  "여보 운봉, 본관 곁에 앉은 기생 불러 권주주가 한마디 시켜주오." "여봐라, 저 양반 앞에 가

권주가 하여라." " 저 기생 관장 영을 어기지 못하여 겨우 나오며,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 한다더니 기막힌다. 간밤에 꿈을 꾸니

쪽박을 쓰고 벼락을 맞아 보이더니 아니꼬운 꼴 많이 보것고." 어사또 하신 말씀, "오냐, 꿈은 잘 꾸었다. 내일 나한테 산 벼락 맞을

꿈이로다." 저 기생 술잔 들고 낮은 외면하고 앉아, "잡으시오, 잡으시오, 이 술 한 잔 잡으시면 천만 년이나 빌어먹사오리다."

"네 이년, 나하고 무슨 삼생대천지원수 아니거든 내 대에 빌어먹는 것도 원통한데 죽어 또 생겨 빌어먹고, 또 생겨 빌어먹고 한단 말이냐.

 이 감자 먹여 죽일 년 같으니." 어사또 도복 소매에다 술을 들이부어 뒤적쥐적 하더니 좌반에다 활활 뿌리며, "자, 골고루 빌어먹사이다."

본관이 화를 내어, "운봉은 긴치 않은 걸인을 붙여 좌석을 불안케 하는고." 걸인을 쫒으려고, "자, 우리글 한 수씩 지음 어떠하오?

만일 글 못 짓는 자 있으면 곤장 때려 쫒기로 합세." "그 말씀 잘 났소, " 운봉은 높을 고자, 남원은 기름 고자, 운자 두 자를 내어 놓고

 글을 지으려 할 제, 어사또 하신 말씀, "나도 부모님 덕택으로 추구권이나 읽었으니지필 좀 빌려주오." 운봉이 지필을 내어주니

잠깐 지어 통인 주며, "너의 본관 갖다 드려라." "좌상에 그리하오." "운봉 덕으로 잘 먹고 가오." 슬슬 나간 후에 어사또 글을

내어 놓고 보니 용사에 비등이라. "여보 곡성, 이 글 좀 보오." 그 글에 하였으되,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오,

옥반가효만성고라. 촉루낙시에 민루락이오, 가성고처원성고라." (「장자백 창본 춘향가)」



인용서적 / 김현주 著 『춘향전의 인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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