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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낯설고 새로운 그림 이야기 1


 낯설고 새로운 그림 이야기  1


인용서적 :  천단칭(陳丹靑) 著 『낯선 경험』


송나라 소년 화가 왕희맹王希孟, 르네상스 하가 부팔마코(Buffalmacco), 네네치아의 장인 카르파초(Carpaccio),

무희 출신의 여성 화가 발라동(Valadon), 중화민국 시기의 여성 화가들,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궁정 화가, 서양(徐楊),

 인상파 화가 바지유(Bazille) 등,  미술사에서 잘 언급하지 않는 천재들과, 혹은 고흐(Gogh)의 습작 작품처럼

잘 알려진 화가의 덜 중요한 작품 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의 발문은 북송 말기의 재상이자 서예가였던 채경(蔡京)이 썼다. 16년간 재상으로 할동 시 

정치에 관심이 없는 황제 휘종(徽宗)을 대신해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휘종(徽宗)의 사치를 조장하는 등, 나라 재정을

궁핍하게한 인물로 다음 황제인 흠종(欽宗) 시절, 나라를 어지럽힌 여섯 명의 간신 중 하나로 지목되어 실각하였다.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두루마리, 1113년, 고궁박물원, 베이징


유화를 그리는 '비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천리강산도>는 중국 산수화의 역사에서 의외의 사건이자 고립된 문헌입니다.

이 그림을 의외의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두루마리 산수화 가군데 이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립된 문헌이라고 표현하는것은 <천리강산도> 하나뿐인 까닭입니다. 그림을 그린 왕희맹은 스물세 살에 요절했습니다.

그런 탓인지, 이후의 역사에서 중국화의 걸작에대해 많은 문인들이 비평을 하고 심지어 한 작품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한 책도 있는데,

누구나 감탄하는 <천리강산도>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 세세하게 해설한 전문적인 문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이 그림은 고독한 거인처럼 홀로 역사 위에 서 있습니다. <천리강산도>는 앞선 시대인 수, 당, 오대의 산수화가 하나로 귀결된

결과물이며 뒤따르는 원, 명, 청 세 왕조의 문인산수화의 백과사전 식으로 이어집니다. 두루마리 끝부분에 쓰여 있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정화政和 3년1113년 윤사월 초하루에 하사하니 희맹의 나이 열여덟이다. 일찍이 화원의 학생으로 들어와 황궁의 문서고에서 일했다.

몇 차례 그림을 올렸으나 미치지 못했다. 임금께서 가르칠 만하다고 여기고 희맹에게 직접 그림 기법을 전수하셨다.

반년이 지나지 않아 이 그림을 바치니 임금께서 기뻐하시며 관직을 하사하셨다.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천리강산도>의 서로 다른 부분도들을 배치할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뛰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유리벽 너머로 진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보고 또 보았다.

이것이 고국의 강산인가? 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강산이다!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왕희맹 <천리강산도>(부분)


'하늘의 뜻'이라는 것은 확실히 있는 듯하다. 왕희맹과 그의 열여덟 살은 오로지 하늘의 뜻이었다.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천리강산도'와 '앙희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부팔마코, <지옥>(부분), 1366~1341년, 캄포산토, 피사


아쉽게도 도록으로만 이 뛰어난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부분도는 두 손바닥을 붙인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 그림을 실제 사람의 크기로 상상해보라, 저렇게 수많은 사람이 한쪽을 바라보며 모여 있는 모습을,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고촐리, 납골당의 벽화 부분, 캄포산토, 피사





부팔마코, <죽음의 승리)(부분), 1355년, 캄포산토, 피사


에스파냐의 중세 성당에서 거대한 벽화를 본 적이 있다. 12세기(중국의 원 왕조)에 그려진 것이었다. 그림 전체에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10여 개의 커다란 관과 몇몇 귀신들이 그려 있다. 그림의 구도는 입체파와 비슷했다. 가로로 그은 직선이 교차하며 배열되어 있고

 성당의 10여 미터나 되는 벽면을 관통한다. 멋진 그림이었다. 부팔마코가 그린 세 개의 관은 형식이나 기법에서 중세의 것에 가깝다.

당시 투시법이 발달 하기 전이라 화면의 기세가 오히려 더욱 강렬해졌고, 그림의 효과도 더욱 힘이 있다.





부말마코, <죽음의 승리>(부분)





부팔마코, <죽음의 승리>(부분)


부말마코가 그린 시체 더미 오른쪽으로 이런 장면이 보인다. 어쩌면 100년 후 보티첼리가 그릴 아름다운 그림 <봄>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향기로운 풀과 천사, 나무, 아름다운 여자 들이 조화를 이룬다. 300~400년이 지나면 마네와 모네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린다.

여기서도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의 쾌락과 예지를 엿볼 수 있다.





부팔마코, <지옥>(부분)





부팔마코, <지옥>(부분)





부팔마코, <지옥>(부분)





부팔마코, <지옥>(부분)


중국과 서양의 회화는 확실히 다른 점이 많다. 그런데 상상해낸 지옥의 모습은 상당히 비슷하다. 불꽃, 괴수, 독사와 전갈이 있다.

그림 오른쪽에 있는 뱀들을 보라! 내가 저장성 우전에 있는 무신 미술관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날씨가 무척 좋아 외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파랗고 무늬가 아름다운 뱀이 숙소 앞 대리석 바닥을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뱀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자 마치 수줍음을 타듯이 몸을 돌리더니 애교 있는 몸짓으로 기둥 사이 틈새로 쑥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1945년 5월 8일, 런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





                                                          장자오허 자화상

만년의 장자오허                                                                    장자오허, <아빠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합니다>, 1945년

배경의 그림이 마침 피카소의 <게르니카> 출력본이다.





장자오허, <유민도>(부분), 1943년, 중국미술관, 베이징


21세기로 접어든 뒷, 나는 중국미술관의 소장 작품전에서 다시 <유민도>를 볼 수 있었다.

그 전에 본 것은 1978년, 나와 중앙미술학원의 동기생 몇 명이서 인민미술출판사의 복도에서 훼손된 상태의 <유민도>를 목격한 것이었다.

실제로 보니 훨씬 놀랍고 대단했다. 중앙미술학원의 중국화과 루천 교수가 역사박물간 창고 구석에서 거의 20년간 방치되어 있던 <유민도>를

찾아냈다. 사람에게 운명이 있듯 그림 또한 운명이 있다. 피점령 지역의 유랑민들이 고난을 겼었고 성실한 사람인 장자오허도 고난을 겼었으며

<유민도> 역시 그랬다. 10년의 재난을 이겨낸 뒤에 다시 어둑어둑한 복도에 걸려 온갖 풍상을 겪은 이 그림은 고난의 전당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1978년은 장자오허 선생이 아직 세상에 계실 때였는데, 그를 만날 수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 허리를 굽혔을 것이다.





장자오허, <친한 벗이 가락을 알아주다>, 1938년





장자오허, <아버지가 금(琴)을 뜯는데 어찌하겠는가?>, 1939





장자오허 <아이를 팔다>, 1939년





장자오허 <떠도는 아이>, 1939년


지난 100년간 중국의 인물화에는 이러한 실력과 재능, 경지가 없었다. 나는 현대 중국 인물화의 전반적인 퇴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보도 없었고 향상도 없었다. 2014년 연말, 나는 일부러 장자오허 선생의 탄생 110주년 기념 회고전을 관람하지 않고 지나갔다.

요즘 천아먼 동쪽에 있는 중국 국가박물관에 한번 들어가려면 번잡한 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110주년 전시

에서 장자오허 선생의 유화 초상화가 공개되었는데,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그림을 보았다. 아주 잘 그렸고, 정말이지 장자오허 다웠다.





장자오허, <유민도>(부분)





장자오허, <유민도>(부분)





장자오허, <유민도>(부분)





고흐, <해변의 어부>, 1883년,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열세 살의 고흐, 1866년




독일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가 찍은 화가(좌-1928년)와 판매원(우-1924~1930년)






고흐(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와 그의 친구, 1886년


<부분>의 감독인 셰멍천이 위의 사진을 찾아냈다. 의자에 반대로 앉아 앞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뒷모습이 바로 고흐라고 한다.

세상에 고흐의 뒷모습이라니! 마치 그가 아직 살아서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아래 사진은 고흐의 화실이다. 고흐가 죽은 뒤 화실에

들어가 이 사진을 찍은 듯하다. 한 미국인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고흐는 자살한 것이 아니다.(어디에서 읽은 내용인지 잊었지만)

고흐가 총에 맞은 것은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한 짓이며, 다른 원인 때문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보르헤스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전설에 눈이 멀었으며, 고흐의 죽음에는 아마도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샛길로 빠진 것 같다.

고흐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음모가 있을까? 자살설은 '전설'을 만들고자 생긴다. 인간에게는 전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전설은 고흐의 품성과 재능이며여전히 그의 그림 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아즈 강변 고흐의 방





고흐, <땅 파는 사람>, 1881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담배 피우는 노인>, 1883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바느질하는 여인>, 1881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담배 피우는 남자>, 1882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렘브란트와 고흐는 역사상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일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 회화사에서 소묘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화가 중

첫손에 곱히는 이가 바로 렘브란트다. 나는 그의 소묘를 그의 유화보다 좋아한다. 그리고 고흐의 소묘가 유일하게, 또한 놀랍게도 렘브란트의

소묘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지 3년 사이에 그린 소묘가 그렇다. 누구나 자신의 유치했던 청소년 시기를 벗어

나려고 애쓰지 않는가. 하가라면 누구나 막 습작을 시작한 시기를 잊고 싶어 할 것이다. 파리에 간 이후의 고흐의 소묘, 특히 만년필로 그린

소묘는 독창적이고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더는 초기 습작품과 같은 정성스러움, 마음 깊이 빠져 있는 듯한 매력은 보이지 않는다.





고흐, <커피 가는 여인>, 1882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앉아 있는 여인>, 1882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길가의 가지 친 버드나무>, 1881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도르드레흐트 근처의 풍차>, 1881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고흐, <길가의 여인>, 1882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를로


이런 소묘를 보면 그저 감탄스어울 뿐이다. 감탄이 지나면 시간을 두고 다시 본다. 그러면 또 감탄한다. 고흐 생전의 이야기를 읽으면

또 다른 종류의 감탄을 한다. 인상파 화가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새로 나타난

 후배의 존재다.1886년 인상파의 마지막 단체 전시는 그들이 헤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들 한다. 인상파 기존 구성원들은

새로 온 고갱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이 같이 걸리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고갱이 퇴출되었다. 그들은 막 파리에 온 네덜란드 멍청이 고흐도

싫어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관련 서적을 읽어봐도 다들 이 대목에 이르면 다른 일로 화제를 돌린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업계의 후배를 견제하고 이방인을 배척하며, 새로 등장한 사람들은 미워하는 경우를 나 역시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 심리와

행동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중국의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모네와 르누아르와 같은 재능이 있는지,

또 '미움 받는 사람들'은  또 고흐와 같은 기인(奇人)인지가 문제일 것이다.





상 - 고흐, <쟁기질하는 남자>, 1883년, 크륄러 뮐러 미술관, 오터롤로

하 - 고흐, <당나귀와 수레>, 1881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르담





고흐, <모자를 쓰고 나막신을 신은 소년>, 1881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상- 고흐, <물총새>, 1884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하- 고흐, <겨울 정원>, 1884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좌- 고흐, <흰 모자를 쓴 시엔(Slen), 1882~1883,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우- 고흐, <여인의 얼굴>, 1882~1883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뒤에 나오는 그림 가운데 스랑스 화가 장 플데리크 바지유가 자신의 화실을 그린 것이 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라 가난한 모네와르누아르를 그의 화실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그는 분할 지급하는 방식으로 르누아르의 그림을 사기도 했다. 1883년 마네가 죽었을 때인상파 친구들은

경악하고 애통해 했는데, 그후로 점차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마네의 죽음 이전에 인상파 사람들이

 다 같이 슬픔에 잠긴 사건이 한 번 더 있었는데, 그게 바로 1870년 바지유의 죽음이었다.





상- 1900년의 오르세 기차역,  하- 오르세 미술관.





상- 라파에로, <여자 선지자들>, 1514년, 사낱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 로마

하- 둔황 막고굴





오르세 미술관





바지유, <바지유의 화실>(부분), 187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바지유, <비스콘티 가의 화실>, 1867년, 버지니아 미술관, 리치몬드




바지유, <푸르스텐베르그 가의 화실>, 1865년~1866년,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바지유, <마을 풍경>, 1868년,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바지유, <분홍색 드레스>, 1864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바지유, <여름 풍경>, 1869년,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 케임브리지





바지유, <투망을 든 어부>, 1868년, 제3세계를 위한 자우 재단, 취리히





바지유, <바지유의 화실>, 187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림 속 인물은 왼쪽부터 르누아르, 소설가 에밀 졸라, 마네, 모네, 바지유 그리고 음악가 에ㅐ드몽 메트르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여성의 등을 그릴 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그려져야 그리기를 멈춘다."

그 아들인 장 르누아르는 1930년대의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거장 트뤼포 감독은 매년 그가 만든 영화

<게임의 규칙>을 감상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장 르누아르는 아버지에 대한 감동적인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생전에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숨을 멈추었는지 확인한 다음 관에 넣으라고 거듭 당부했다."

루누아르는 평생 살아 있는 채로관에 넣어져 못이 박힐까봐 무척 두려워했다.






라파엘로, <볼세나의 미사>, 1512년, 바티칸 미술관





라파엘로, <파르나소스 산>, 1510~1511년, 바티칸 미술관





●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

좌- <프라가의 펠리페 4세>, 1644년, 프릭 컬렉션 뉴욕

우- <무장을 갖추고 사자獅子와 함께한 펠리페 4세>, 1653년, 프라도 국립미술관, 마드리드





<말을 탄 펠리페 4세>, 1635년, 프라도 국립미술관, 마드리드





렘브란트,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속칭 <야간 순찰>(부분, 1642년, 암스케르담 국립미술관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부분), 1459~1462년,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피렌체


위 그림에서 앞줄 한가운데, 아래 그림에서 오른쪽부터 사람이 화가 고촐리다.

네 손가락을 치켜세운 모습은 400플로린이라는 거금을 받았다는 뜻이다.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6~1807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원 제목은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단의 대관식에서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모습'이다.





앵그르, <장 프랑수아 길리베르의 초상>, 1804~1805년, 앵그르 미술관, 몽토방





앵그르, <무아테시에 부인의 초상을 위한 습작>, 1856년, 앵그르 미술관, 몽토방





나는 고흐의 그림이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알고 있다. 그것을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몇몇 지인과 둘러앉아 수다에 흥이

올랐을 때 나눌 만한 이야기고, 이런 자리에서 장황하게 떠들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여러분이 보기 바랄 뿐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림으로 그릴 것도 없고, 그림을 잘 그렸다면 언어란 쓸데없는 것이 된다.






상- 세잔, <물병이 있는 정물>, 1893년, 테이트 갤러리, 런던

하-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4년, 바이렐러 갤러리, 바젤


캔버스에 흰 면을 남겨둔 채 붓을 멈춘 폴 세잔. 이런 행동은 유럽 미술사에서도, 인상파라는 작은 역사에서도 최초였다.

세잔이 캔버스를 다 칠하지 않아도 그림이 완성된다고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아닐 터이다.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백을 잔뜩

남겨두는 수묵화가 있었지만, 내가 아는한 세잔은 중국화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1930년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와 항저우

미술전문학교 등에서 활동한 중국의 서양화가 류하이쑤, 린평몐 및 그의 제자들(무신 선생님도 이에 포함된다)은 입을 모아 자신들이

세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를 사랑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아름다운 오해다. 세잔이 생전에 받았던 오해와는 또 다른 종류의 오해다.





마네,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1872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1871년, 카미유 코로

이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해 바지유가 전사했다. 4년 후 코로도 세상을 떠났다.





상- 코로, <나르니 다리>(실외 사생), 1826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하- 코로, <나르니 다리>(화실에서 완성), 1827년, 태나다 국립미술관, 오타와




상- 터너, <우편선의 도착>, 1826년, 프릭 켤렉션, 뉴욕

하- 터너, <디에피 항구>, 1826년, 프릭 컬렉션 뉴욕





모네, <인상, 해돋이>(부분), 1872년, 마르르모탕 모네 미술관, 파리





피사로, <퐁투아즈의 에르미타주>, 1867년,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피사로, <퐁투아즈의 잘레 언덕>, 1867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피사로, <에르미타주의 코트 데 뵈프>, 1877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세잔, <숲 속 풍경>, 1900~1902년,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리헨(스위스)





세잔, <가르단 마을>, 1885~1886년, 부루클린 미술관, 뉴욕




좌- 세잔, <팔레트를 든 자화상>, 1890년,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리헨

우- 피카소, <팔레트를 든 자화상>, 1906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좌- 피카소, <가면을 든 피에로>, 1918년, 개인 소장

우- 세잔, <피에로와 어릿광대>, 1888년, 푸시킨 미술관, 모스크바





왕희지, <상란첩喪亂帖>, 4세기, 산노마루 쇼조칸 박물관, 도쿄


"서예와 회화는 근원이 같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논할 때 중국화 이론이나 서예 이론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왕희지의 글씨를 보고 회화가 생각난 적도 없고, 왕희맹의 그림을 보고 서예가 생각난 적도 없다.

물론 이것은수많은 서화가들이 비웃을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번 편에서 서양 미술을 통해 중국 미술을 떠올리고,

중국 회화를 거쳐 서예에 생각이이르렀다. 내가 한 말을 그렇듯하게 합리화해서 설명알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한 '말'은  또 무엇인가? 어쨌든 이번에는 정말로 서예가 생각났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피카소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









루시언 프로이드, <잠든 보험 수당 관리인>, 1995년, 개인 소장





화실에 있는 루시언 프로이트




고흐, <막벨라 동굴>, 1877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시인 밀라르메                                                                만년의 드가






상- 조맹부, <작산과 화산의 가을 풍경>, 1295년, 고궁박물원, 타이베이

하- 전선, <양귀비가 말에 오르다>, 13세기, 프리어 미 술관, 워싱턴 D.C


황공망, <부춘산에 거하다>(부분), 1347년경, 고궁박물원, 타이베이







 Andre Ga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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