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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경인탐매 (庚寅探梅) ~2~

        경인탐매(庚寅探梅) ~2~

 

             ♥ 노사매(蘆沙梅) : 전남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257  

                ♥ 마령야매(馬嶺野梅) : 전남 장성군 남면 마령리

 

                ☞  2010. 3. 19 (금)

 

 고산서원(高山書院) - 전라남도 기념물 제53호 -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선생이

고종 15년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였다.

1924년,  선생을 기리는 후학들이 발기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노사를 비롯,

 조성가, 이치선, 김록휴,조의곤, 정재규, 기우만, 김석구, 정의립을 배향했다고 한다..

 

 

노사매(蘆沙梅)

 

수령은 약 100년 쯤으로 추정한다는데

생육 환경이 그리 썩 좋지 못해서인지 큰 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가 버렸다.

당연히 수형의 아름다움이나, 고매가 지니는 기품과는 거리가 멀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강학 공간에 선 매화라는 상징성에 촛점을 맞추고 감상하는 수 밖에.

 

 

 

- 노사 기정진 -

 

이학(理學)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三政)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公卿)·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

 

 

 

(개화가 더 진행된모습)

 

 

 

노사梅와 나란히 선 위성류나무

 

  양귀비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위성류나무. 중국의 옛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버드나무처럼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며 한 해에 두번씩이나 꽃을 피우는 게 특징.

노사가 경상도 일원을 여행하면서 사용했던 지팡이를 땅에 꼽아놓았더니

뿌리가 내려 자라게 되었다는 애기가 전한다.

 

 

듬성 듬성 피어날 때의 모습이 훨씬 더 기품있어 보인다

 

 

 외삼문을 비롯, 강당, 거경재(동재), 집의재(서재)등의 강학공간과

내삼문과 사당인 고산사가 제향공간을 이루고,

장판각엔 목판과 문집이 보관되어 있다고.

 

 

 

임술의책(壬戌擬策)

 

 


 

 

 

 장성 남면에 조성된 차밭을 바라보며....

 

 

장성 남면에서 만난 '마령 야매(野梅)'

 

 

 

 

 

 

 

 

 

 

 

 

 


 

 

 

 

"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

 

 

어느 해, 청나라 사신이 조정에 와서 "용단호장'"龍短虎長)이라는 글귀를 내놓고

대구(對句)를 요구했던 모양.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

 

사리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지라, 조정 대신 모두가 진땀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었다고.

이 때  장성의  노사 선생께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해석 하시길,

 

해(日)를 뜻 하는 것으로서

 진 辰 (龍) 방향에서 해가 뜨는 겨울은 짧고,

인 寅 (虎) 방향에서 해가 뜨는 여름은 길다는 뜻이다.라고 풀이 한 다음,

 

"화원서방(畵圓書方)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네모난다"

라는 대구(對句)를 제시 했다고 한다.

 

이에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 들 까지 경탄을 금치 못 했다고 한다.

이  때 생겨난 말이 바로 "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

 

어릴적 '천연두'를 앓아 한 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노사 기정진.

장성의 외눈박이 '노사' 선생께서  간신히 조선 조정의 체면을 세웠다는 말씀이다.

 

흥미로운 얘기 하나.

장성 땅에 가면 기(奇), 변(邊) 양金(광산, 울산) 이 네개의 성 받이 말고는

크게 숨도 쉬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행주 기(奇) 씨가 맨 앞에 나온다면 더 물어 무엇햐랴...

시쳇말로 가장 파워가 쎄다는 말씀인데,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터.

 

기정진의 가문이 장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에 기인한다.

화를 피해 남녘으로 내려온 기씨 가문.

그 후손 중에서 고봉 기대승이 나왔고, 노사 기정진도 나오게 된 것이다.

 

바로 기대승은 기진의 아들이며,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이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비롯한 호남사림과 교유하면서 당대 성리학의 대가로 성장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벌인 ‘사칠논변(退高四七論辯)’은

성리학적 원칙론과 철학적 심화를 가져와 한국 성리학의 지평을 한층 심화시켰고,

신유학의 금자탑까지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기고봉의 학문은 한국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기여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순절한 고경명․최경회의 절의와

훗날 노사 기정진의 애민사상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번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이에 연연하지 않은 재야파의 대표적 인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의 유리론(唯理論)을 확립함으로써

18세기 이후 주기․주리론의 극단적 철학전개를 극복하고,

유리론으로 합쳐지는데 큰 역할을 하여 근세 성리학의 6대가로 칭송되는 것이다. 

 

서원 주차장 건너편엔  노사의 "임술의책"(壬戌擬策)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비록 조정에까지 올리진 않았으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노사 기정진의 진정성이 읽혀진다.

 

군포(軍布)․환곡(還穀)의 폐지와 함께

서원 유생의 해독을 과감히 없애야 한다는 전면 개혁론에 이어 

조정의 잘못 등등을 과감히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 기정진이 외쳤던 "위정척사운동"

 노사의 척사론은 그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정세 속에서

열강의 침입을 막는 보다 근본적인 방책으로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의지는 끝내 의병전쟁의 일선에 나서는 것으로 보다 구체화 된다. 

혼신의 힘을 댜해 꺼져가는 나라의 마지막을 지탱하려 동분서주 했던 노사. 

그러나 고종이 내린 회유문(懷柔文)을 받고 대성방곡, 끝내는 의병을 해산하게 되는 것이다.

 

기정진의 손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까지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받아

호남  항일의병(抗日義兵)의 선봉에 서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노사와 송사를 거친 항일정신은  기삼연(奇參衍)에게 까지 이어지게 된다.

 

71세로 생을 마감한 송사 기우만. 그가 남긴  시 한 수.

 

 

"수중(手中)에는 촌철(寸鐵)도 없지마는,

 가슴속엔 만갑(萬甲)이 있다.

강물 소리를 들을 땐

철벅거리며 바다 건너 일본을 치러 가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산에 올라 울창한 소나무를 대하고 보면 군사(軍士)처럼 여겨져

오랑캐 쫓아내는 기상(氣像)을 상상한다.”

 

  

평상시는 서원의 대문을  굳게 닫아  잡인(?)의 출입을 제한 하고

겨우 봄 가을로 제사나 지내는 식의 박제된 서원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살아 숨쉬는 '현재진행형 서원'은 정녕 가당찮은 꿈 일 수 밖에 없단 말인가...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서원을 찿아왔다가 투덜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형편이요 지경이다 보니,

 노사매(蘆沙梅)) 원래의 몸통과 가지는 모조리 잘려나가 버리고  

 

마치 한 말의 국운 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채 서원 한 쪽 귀퉁이나 지키고 서 있을 수 밖에...

 

 

격변기에 태어나 경천동지의 생을 살다간 노사 기정진 선생.

그가 부르짖었던 애민애족의 사상과 빛나는 항일혼을  노사매((蘆沙梅))를 통해느껴 보려 했으나

굳게 잠긴 고산서원의 문은 끝내 요지부동 이었다.

 

 

 

 

<"남도문화이야기" 고산서원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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