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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경인탐매 (庚寅探梅) ~3~

       경인탐매(庚寅探梅)  ~3~

            - 雲林山房 4대 梅 -

           일지매(一枝梅)  ● 산방매(山房梅) ● 운림매(雲林梅)   ● 사당매(祠堂梅) 

                    <남도석성 - 배중손 사당 - 상만리 오층석탑 - 전 왕온묘>

                ▶  2010. 3. 22 (월)

 

남도 석성 앞에 놓인 쌍운교, (문화재자료 제215호)

 

• 1930년대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을 사용하여 축조한 쌍무지개 형식의 아름다운 다리.

 

 

 

남도 석성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종4품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조도해협과 신안 하의도 해역 등을 관할하였다.

성의 길이는 610m, 높이 5.1m로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 안에 관아와 내야 그리고 객사가 복원되어 있다.

 

 

 

답답할 정도로 성 내부를 가득 메운 민가

 

 

  

배중손(仲孫)사당

 

일제 강점기 이전 부터 임회면 굴포리 에서는 매년 정우러 보름날, 농악놀이와 함께

배중손, 삼별초군, 고산 윤선도의 제를 모시는 전통이 있어왔다 한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당이 허물어진 것을 방치해오다,

굴포리 출신 동양화가 백포 곽남배가  주민 성금과 자신의 사비를 들여

현 위치에 사당과 신당비를 세웠다고 한다.

 

 

 

 

- 1999년 배씨 대종회에서 종친 성금을 모아

 배종손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여 진도군에 기증하였다고.-

 

1270년(원종 11) 5월 15일 임유무의 무인정권이 정변에 의하여 붕괴되고

 5월 23일 개경에의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반몽 집단은 크게 동요하였다.

개경정부는 이들을 회유하는 한편 5월 29일 삼별초를 혁파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6월 1일 배중손은 삼별초를 움직여 왕족 승화후 온(溫)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아울러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 이신손(李信孫)을 좌, 우 승선(承宣)에 임명함으로써

몽고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배격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배중손은 삼별초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라도 서남해안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하고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임하면서 반몽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제주도를 그 배후 기지로 확보하는 한편 진도와 남해 연안이 갖는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과의 반몽고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4월 고려·몽고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됨으로써

삼별초 정권은 붕괴하였는데 이때 배중손은 많은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삼별초 반몽세력의 일부는 제주도로 탈출하여 1273년(원종 14)까지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다.

 

진도의 배중손이 몽고군 공격군 사령관 아해(阿海)에게 진도에 오도록 초청하면서

몽고에 복속하겠다는 제안을 한 점을 들어 그가 몽고와 타협하려 하였다거나,

진도 공함시 배중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배중손이 1271년 4월 이전에 이미 숙청된 상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신빙하기는 어렵다.

 

- 자료 인용 -

 

 

 

 

진도상만리오층석탑(珍島上萬里五層石塔)

(전남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675 )

 

상만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서 있는 탑으로 현재는 이 곳에 구암사라는 새 절이 들어서 있다.

형태는 2층 기단에 5층 탑신을 올린 형태다.

전체적으로 볼때 통일신라 때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조각 기법이 거의 형식적으로 변하고

지붕돌 받침의 수가 일정하지 않은 점과 1974년에 새로이 절을 지으면서 정지작업을 하던 중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된 것등으로 미루어  고려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고.

 

 

 

 

 

 구암사 극락보전 앞에 피어난 서향의 짙은 향기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111호)

 

 

 

 수령 약 600년, 둘레 5m,  높이 25m, 가지의 폭 8m.

 

 

 

구암사와 여귀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선 비자나무

 

 

 

전 왕온의 묘(傳王溫의墓)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산45)

 

몽고군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새로 개발한 화포를 삼별초군과 싸울 때 사용했는데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리게 되며,

들이 궁궐로 사용하던 용장사 큰 가람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패주하던 왕온(王溫)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왕무덤재를 올라 갈 때 말을 거꾸로 탄 채

말꼬리를 붙잡고 달렸다는 얘기가 있다.

어쩌면 낙마하여 꼬리를 붙잡고 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왕무덤에서 붙잡힌 왕온과 그의 아들 항의 목을 치자는 주장과

목숨을 살려 데려가자는 주장이 맞섰지만

결국 이들 부자(父子)는 적장의 칼에 목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자주(自主)를 위해 항거하던 삼별초 정신과

몽고의 속국이 되어 자주항거집단을 토벌하러 나선 고려 개경 정부의 조카들이

진도의 이름없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몽골 장수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만다.

외세의 압력에 따라 조카가 백부를 죽이고 사촌 형제의 목을 치는 고려 왕실의 비극이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을 남겨놓았다.

왕무덤재는 물론 왕온의 무덤이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고,

 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패주하던 삼별초가 돈지에서 둘로 나뉘어 김통정(金通精)은 금갑 방면으로,

배중손(裵仲孫)은 임회 방면으로 도망쳤다.

금갑에서 배를 탄 김통정, 유존섭은 제주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2년 남짓 항몽전을 펴다가 섬멸되었다.

이때 함께 도망치던 여인들은 붙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거두자고 마음 먹고

만길재 밑 우황천에 몸을 던져 자결의 길을 택했다.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다.

 

- 자료 인용 -

 

 

 

 

  

허소치의 운림산방

 

 

 

 초의와 김추사 그리고  허소치를 이어주는 운림산방 일지매

 

 

여러 곡절을 거쳐 운림산방으로 되 돌아온 일지매

 

 

 껑충하게 자란 일지매, 잔뜩 흐린 날씨,

 몇 송이 터지긴 했는데 광각 가지고는 도저히...

 

 

 하여 300밀리를 꺼내 땡겨 봤지만 

거의 저녁같이 잔뜩 어두운 날씨에다 빗방울까지 떨어지는 지경인지라 신통찮긴 매한가지.

 

 

하는 수 없이 들이대 본 연못가의  무더기 백매

 

 

 

무더기 백매 아래서

 

 

 산방매(山房梅)

몇 송이 피어난 바로 앞의 운림산방  백매와, 뒷편의 무더기 백매 중

 화기(火氣)를 다스린다는 해태상이 감상하고 있는 매화는 과연 무엇..?

 

 

 

 운림산방에서 자라는 매화 중 가장 큰 운림고매(雲林古梅)

 

 

 세개의 굵은 가지를 뻗어 올려 단아한 꽃을 피워내는 운림 고매(雲林古梅)

문기(文氣)가 철철 넘쳐 흐르는 느낌이다.

 

 

 

 허소치의 사당 곁을 지키는 사당고매(祠堂古梅)

 

 

 심부는 텅 비었으되, 세월의 흐름따라  기품은 더 해만 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오리지널 조선매의 특징.

 

 

 

 

 

 


 

 

 

 

 

무엇이 명매(名梅)이고 무엇이 고매(古梅)란 말인가...

 

객관적인 기준 보담,

저마다의 느낌과  취향이 어우러진 주관적 판단이어야 할테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또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그런 요소들을 깨달아 가는 것이 매탐(梅探)의 묘미요, 탐매(探梅)의 자세.

.

관절 부러지는 애마의 비명소리 조차 무시한채 달려간 곳은 보배로운 섬 진도.

울돌목에 놓인 쌍둥이 대교를 건너 올라선 녹진 전망대.

아침 해는 커녕, 예견컨데 정오를 못 넘기고 비라도 쏟아질 태세.

 

오늘의 천기를 결론 부터 중계하자면,

종일토록  어두운 날씨와 씨름했다고나 할까... 

 도대체 낮과 저녁의 경계를 단 한 번도 실감하지 못 할 만큼 우중충한 하루였다.

시쳇말로 사진 찍는데 '꽝' 이었다는 말씀.

 

허지만, 어디 매화가 탐매꾼의 사정을 봐 줘가며 개화를 조절 해 준다던가...

이런 저런 이유로 꾸물대다간, 매향이의  향주머니는 후딱 졸라매어지고 말터.

진도, 그 중에서도 가장 아랫녘에 위치한 남도석성으로 달려내려간다.

 

석성 아래 피어난 분홍 진달래가

 머나먼 거리를 달려온 탐매객을 향해 제일 먼저 미소를 지어준다.

진달래의 미소가 너무 요염(?)해서 였을까?

허소치의 무덤을 찾는 다는 걸 그만 깜빡해버렸고 '남진미술관'도 지나쳐 버렸다.

 

여귀산 들머리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비자나무'를 지나 당도한 '구암사 오층석탑'.

요모저모 뜯어보고 있는데 예쁜(?) 비구니 스님께서 '한라봉'을 두 개씩이나 쥐어 주신다.

 

"애고~~ 고마우셔라".

불전함에 지전 한 장도 넣을 줄 모르는 가엾은 중생에게...

"나무관세음미녀스님타부~~~울~~~"

 

 

'왕온의 묘'를 내려와 당도한 '운림산방

먼저 '일지매'에게로 달려 간다.

날도 어두운데다 위로 높다랗게 뻗어 올라간 나무라서 꽃 찾기도 어렵다.

자세히 살피니 한 켠에서 이제 막 개화가 시작된 단계다.

다른 해 같았으면 백퍼센트 피어났을 텐데, 올핸 확실히 날씨가 추웠던 모양.

 

 

평소 '일지매' 하나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여타의 고매들을 다소 홀대한 감이 있었다.

해서 이번엔 모든 고매 하나 하나에 모두 이름을 붙여가며 애정을 쏟기로 한다.

 

 

초의와, 추사, 소치 세 사람의 어우러짐과 역사의 부침까지를 소유한

 '일지매'(一枝梅)는 물론이요,

운림산방 건물 앞, 연못가에 서 있는 매화에게는 '산방매'(山房梅),

 '운림산방'에서 가장 굵은 둥치의 매화에겐 '운림매'(雲林梅),

허소치의 사당 옆을 지키는 고매에겐 '사당매'(祠糖梅),

이를 모두 이름하여 "雲林山房 4대 梅"로 명명한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가며 탐매객 행세를 하다보니

그제서야 운림산방의 모든 고매에게 다소나마 미안함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허소치(許小癡)는 화취(畫趣)가 지두(指頭)의 한 경지로 전전하여 들어가니

심히 기특하고 반가운 일이며

진작 그 농묵(弄墨)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이 사람의 화품은 요즘 세상에 드문 것이니 모쪼록 많이 구해 두는 게 어떠한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추사만한 총체적 지식인이 또 있었을까...

그 천하의 김정희가 오진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허소치를 칭송하는 대목인 것이다.

 

 

 오늘 남녘 멀리 진도 땅으로 달려갔던 까닭은...

 

 

일지매를 비롯한 운림산방의 4대 명매 감상을 통해 .

소치가 희롱했다는 농묵(弄墨)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근접하여 느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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